〈 34화 〉 돌아가신 용사님을 위하여!
* * *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사님…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런 짓을… 그 숭고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런 개만도 못한 짓거리를…”
공허하기 그지 없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이미 이 자리에는 없는 용사를 향해 사과와 후회의 말을 뱉는 아멜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에서 닿지도 않는 사과와 후회의 말을, 그것도 죽은 사람에게 뱉는 것은 그녀가 생각해도 뻔뻔하면서도 역겹기 그지 없는 짓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남는 것이라고는 그저 마약과 같은 쾌락에 사로잡혀 모든 이의 기대를 배신한 결과, 스스로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비참한 자신과, 공허하기 그지 없는 회한의 감정만이 있을 뿐.
그렇게,
너무나도 뒤늦은 후회속에서.
아멜다가 뻔뻔하면서도 가증스럽지만,
그럼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
갑작스럽게 열리기 시작한 문.
이에 아멜다는 다시금 그녀를 고문하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리기 시작했다.
이미 끝없이 이어질 인두질로 인해 그녀의 가슴은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으며,
등쪽에는 가혹한 채찍질의 결과 무수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무릎쪽은 깨진 유리 조각을 바닥에 깔고 바위로 짓눌려진 결과 상처투성이의 넝마가 되어 있었으며.
왼손의 관절 마디는 처참하게 뒤틀리고 끊어져 정상적인 손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입 안에 있던 이빨 몇 개는 생으로 뽑혀나간 상황.
그나마 아직 그녀를 성적으로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아멜다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이 될 지도 모르지. 그...그래. 어찌 되었든 상관 없잖아? 차라리 그쪽이 덜 아플 지도 모르고...애초에 나 같은 쓰레기 따위 길가의 창녀처럼 굴려진다 해도. 더 이상 치욕을 느낄 자격조차 없는 녀석이니까…’
그렇게 진한 체념 속에서 다가올 비참한 미래를 떠올리기 시작하는 아멜다.
그런데.
“…어?”
다음 순간, 거칠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살짝 열린 문 너머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마녀들이 착용하는 장갑 같은 것을 끼고 있는 그 손은, 그대로 아멜다의 앞에 무언가를 던져 놓은 뒤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아멜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물건.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함과 동시에, 아멜다의 눈에는 놀라움의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열쇠?’
모양으로 봐선 그녀에게 채워져 있는 마력 억제 수갑을 풀 수 있을 것 같은 열쇠
이에 아멜다는 혹시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대로 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찰칵!
“!”
그대로 가볍게 풀려버린 아멜다의 수갑.
이에 아멜다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 그녀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직후 곧바로 회복 마법을 사용해 엉망이 되어 있던 몸 상태를 불완전하게 나마 원래대로 돌리기 시작하는 아멜다.
걷기는커녕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웠던 몸을 고쳐나가면서, 그녀는 우선 의심이라는 감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도 함정일까? 누군가가 나를 탈출 시키는 척 하다가 다시 붙잡으려는…’
이미 한 번 함정에 걸려 도망치려다 붙잡혀 왔던 몸인 만큼 자동적으로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의문.
그러나.
이내 아멜다는 그런 생각과 별개로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선택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설령 함정이라 해도 일단은 움직여 보는 거야. 어차피 죽은 목숨… 일단 어떻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쳐보자. 그리고… 그리고 만약에 탈출에 성공한다면 반드시 용사님의 숭고한 의지를 이 세상에…’
그렇게,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것을 잡아 보고 말겠다는 각오와, 그 사람의 명예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며,
아멜다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을 이끌고 그대로 조심스럽게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미리 정리해 둔 듯 기절해 있는 경비들을 지나쳐 그대로 밖으로 나온 아멜다.
시간도 마침 이전과는 달리 어둠을 이용할 수 있는 밤.
이에 아멜다는 최대한 그림자 속에 은밀히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전과는 달리 함정은 아닌 듯 딱히 누군가 추적해 오거나 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은 상황.
그 사실에 안도의 감정을 느끼며, 아멜다는 엘프 특유의 민첩성을 살려 행동을 이어나갔다.
비록 도중에 적잖은 위험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들킬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멜다는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신의 뜻을 이어받은 정의의 사도였던 용사의 이름을 부르며 초조한 기분을 바로잡고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대로 몇 번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끝에.
아멜다는 마침내 성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해냈다! 내가… 내가 해냈어! 아아… 용사님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선 지옥과도 같았던 그곳 에서의 탈출을 이루어낸 아멜다.
그렇게 격렬한 기쁨과 함께 감옥에 있는 줄곧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용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아멜다는 그대로 숲으로 몸을 던진 뒤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거지꼴로 감옥을 나섰으나
이 순간, 다시 성기사의 예복을 차려 입은 아멜다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수 많은 이들 에게.
엘프 교국의 대주교들과 최고위 성기사들 그리고 교황의 앞에서...
그녀가 경험했던 사건의 모든 전말을 여과 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뒤틀린 사고가 만들어낸 뒤틀린 ‘진실’ 또한 함께 말이다.
“그렇게… 저희들은 실패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생각과 능력과 뜻을 다해 마왕을 물리쳐야 한다는 용사님의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저버린 결과… 저희 용사파티는 신께서 용사님을 통해 내려주셨던 절호의 기회를.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역시 무언가 수상하다 했더니, 이런 내막이 있었단 말인가?”
“결국은 저 제국 인간들의 추악한 이기심이 모든 것을…”
아멜다의 말에 크게 동요하며 한 마디씩 경악과 분노의 말을 내뱉기 시작하는 교국의 높으신 분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그들을 향해서 아멜다는 단호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허나 이는 비단 인간만을 욕할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용사님의 뜻을 곡해하고 죄를 저지른 죄인… 훗날 때가오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를 것이며, 그때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저를 단죄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신의 뜻을 받들고 계신 교국의 여러분들께간곡히 청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다시금 끌어모은 아멜다.
이어서 그녀는…
그대로 신앙심마저 느껴질 법한 목소리로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부디이처럼 대륙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용사님의 명예를 지켜주십시오! 자신의 권력을 위해 그분의 고귀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저 사악한 팔콘 제국에게 정당한 응징을 내려 주십시오! 신의 뜻에 따라! 고결하고도 고결한 정의 화신, 엘런 세이비어 용사님의 이름으로!”
현재 용사파티의 일을 구실로 교국을 비난하고 있는 황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아멜다의 선언.
이에그곳에 있던 이들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고 있는 그녀를 향해 열렬한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다.
회의장 안을 가득 메우는 박수 소리와 결의가 담긴 항전의 외침.
아멜다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탁의 어긋남'으로 인해 혼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정의’라는 굳건한 명분 속에서.,
이제는 '죽음'을 통해 정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용사의 이름을 앞세우며 다시금 강렬한 의욕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멜다는 그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줄곧 용서를 구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지켜봐 주십시오 용사님. 반드시 당신의 숭고한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말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부디. 저 세상에서 이루어질 저의 사죄를...’
*
아멜다의 진심 어린 참회의 연설과 함깨 이루어진 ‘진실’의 폭로.
이를 토대로 하여,
엘프 교국에서는 이번 용사 파티의 패배 사건에 대한 성명문을 정식으로 공표하였다.
이번 사태는 신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닌, 전적으로 용사를 돕기는커녕 그의 발목을 잡은 용사파티의 구성원들의 잘못이라는 내용을 주된 골자로 하고 있는 성명문.
그 안에는 지금 즉시 신이 내린 신탁을 엉망으로 만든 전 용사파티의 여전사이자 제국의 대신관인 에일린, 그리고 그녀를 사주한 제국 출신 짐꾼 토라레의 목을 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아울러 이러한 진실을 은폐하고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 한 황제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내용 또한 함께 들어 있었다.
본래라면 이 일에 가담한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한 비판도 넣어야겠지만, 당장 이번 일에 그들까지 끼워 넣을 경우 교국 입장에선 답이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만큼 일단은 ‘주적’에 집중하기로 내부적으로 협의를 하였다.
이처럼 본래라면 ‘신탁의 실패’ 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아멜다의 증언이라는 방어책을 기반으로 하여 대대적인 역공에 나선 엘프 교국.
그러나…
이에 대해서 팔콘 제국 측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엘프 교국과 교황을 더욱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엘프 교국의 주장은 단순히 거짓된 신의 사자인 교황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며, 동시에 대륙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용사파티의 전사들과 목숨 바쳐 이들을 구해낸 짐꾼 토라레를 모독한 것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제국 입장에선 에일린은 그렇다 처도 사실상 주범으로 지목한 토라레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애초에 싸움을 걸 명분으로 일을 벌인 입장인 만큼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상황.
그나마 이에 대해서 마도국과 수인국은 일단 사태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유지하였으나, 그들의 이러한 중립적인 태도도 마왕국의 멸망을 목표로 이루어졌던 종족 연합 내부에 커다란 균열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끝내 제국과 교국 국경 사이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로 까지 번지게 된 이번 사태.
비록 작지만 또렷하기 그지 없는 두 국가 간의 대립의 불씨는 그대로 양국의 전면적으로 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국의 국경에서 발생한 이러한 소요 사태는 그들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곧바로' 확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기회에 서로 끝장을 보자는 각오를 하고 있던 양국의 수뇌부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 한 급보.
그것은…
연합군의 주요 병참기지였던 롭에서 발생한 엄청난 손실.
그리고, 그 직후에 시작된 마왕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대한 소식으로 인해서였다.
검은 갑주를 착용한...
'마왕'의 출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