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용사는 아가야! 아가는 돌봐줘야돼!
* * *
자신의 품 속에 안긴 채 충성을 맹세하는 용사.
솔직히 넘어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어설픈 유혹’에 한번에 함락당하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마왕은 그녀가 잠시 잊고 있었던 중대한 사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랬었지.. 용사여.. 그대의 마음 속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었지..’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용사.
그러나,
용사의 이러한 찬란한 공적 뒤쪽에는.
동료들에게.. 그리고 나라에게 버림 받고 갈기 갈기 찢어져 있는 한 남자의 마음이 감추어져 있을 뿐이었다.
복수를 위해 머리를 숙이는 치욕을 감내하고,
한때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동족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해하고.
그리고.. 자신을 버렸던 동료가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을 보며 허탈하게 미소 지어 보였던 용사.
이처럼 불행으로 접철되어 처참하게 난도질 당해있던 그의 마음은..
벨제뷰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 서있는 것 조차 힘들 정도로 빈틈투성이인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용사에게 있어서, 마왕이 날린 일격은 제아무리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할 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사막에서 헤매던 인간에는 해골바가지 안의 썩은 물 조차도 성수처럼 여겨질 수 밖에 없는 법일 터.. 짐이 그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구나..’
그렇게 자신의 무미 건조하기 그지 없는 ‘유혹’이 먹혀 든 이유에 대해서 타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마왕.
그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마왕은 자동적으로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듯 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비록 국익을 위해서 지금의 상황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의 개인적인 감정에서는..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용사에 대한 죄책감이 한층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이 남자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텐데.. 짐은 국익에만 신경을 쓴 채 잠시 그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구나..’
그렇게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듯 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는 마왕.
그러나..
이내 마왕의 마음 속에선,
자신의 이런 양심의 가책과 연관되어..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국익’과 관련하여.
한가지 명확한 각오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짐이 잘 하면 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용사를 움직이는 것도.
그런 용사에게 응당 알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도,
결국, 이 모든 것은 다 그녀의 손에 달려 있는 일이라고 마왕은 결론을 내렸다.
‘이 나라를 위해 용사를 적게 적소에 활용하고, 그렇게 공을 세워 돌아온 용사를.. 지금처럼 짐이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 주면 되는 것이다.’
결국, 용사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유는 자신이 헌신한 자들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헌신에 마땅한 보답과 위로를 해 줌으로서.
이를 통해서 용사라는 존재가..
다시금 누군가를 믿고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를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최선이라 여겨지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마왕은 이 순간 도 자신의 품 속에 안긴 채 가볍게 몸을 떨고 있는 용사를 보며 다짐했다.
‘용사여.. 누구보다 강인하면서 한없이 연약한 그대여.. 이제부터 짐이 그대를 돌봐주겠노라.그대의 불멸의 충성에 어울리는 영원한 행복을.. 짐의 손으로..'
*
“그렇게 되었다. 결국 용사는 짐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였고 짐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신의 부족한 계획을 이처럼 훌륭하게 완성시켜 주어 참으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옥좌에 앉은 채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마왕.
이에 대해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벨제뷰티는 짙은 안도와 감사의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비록 이것만으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마왕이 보증한 영원한 충성의 맹세라면 벨제뷰티도 어느 정도는 신용을 지닐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의 속마음을 확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으로 용사가 대놓고 허튼 짓을 벌일 명분은 대부분 차단 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지.’
벨제뷰티의 마음 속 깊숙이 박혀 있는 용사라는 놈의 새끼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의 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은 앞으로 함께 힘을 합쳐 국운을 건 전투를..
그리고 상황이 허락된다면 그보다 더 높은 것을 노려봐야 하는 ‘동맹’인 만큼 지나친 의심의 날을 세우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뭐.. 나중에 내 손으로 절단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지금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하는 중대한 일이 있는 이 상황에서 언제까지 가능성만 지니고 있는 일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일단 용사에 대한 일은 매듭을 짓기로 결정한 벨제뷰티를 향해서.
마왕은 차분함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제는 이쯤 이야기 하기로 하고. 그럼 이제 슬슬 벨제뷰티 자네가 짐을 찾아온 이유를 듣고 싶다. 어디 말 해보도록.”
“예 폐하. 그리 하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황급히 알현을 요청한 만큼, 마왕 역시 벨제뷰티가 단순히 용사의 일을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왕의 요청에 대해서.
벨제뷰티는 평소와 같이 이 나라의 재상으로서 진지함이 담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군주의 앞에 그녀가 가져온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보였다.
이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의 손을 통해 서신을 전달 받은 뒤 그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하는 마왕.
그 직후..
마왕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심상치 않은 표정이 깃들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향해서 벨제뷰티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막 도착한 정보입니다. 종족 연합의 맹주이자 인간들의 국가인 팔콘 제국에서 일이 터졌다는 보고 입니다.”
벨제뷰티의 부연설명을 들으며 차가운 얼굴로 꼼꼼히 내용을 살피는 마왕.
그리고 잠시 후.
마왕은 내용 파악이 끝난 서신을 내려놓은 뒤,
그대로 차가움이 감도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로선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네, 그렇습니다 폐하. 안 그래도 용사의 활약 덕에 저들은 보급이 끊겨 곤란에 처해 있는 상황. 이런 때에 이와 같은 문제까지 터진 이상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마왕의 말에 대답하는 벨제뷰티.
그렇게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통한 확인까지 끝낸 직후, 마왕은 그대로 옥좌에서 일어나 벨제뷰티를 향해 명령했다.
“지금 즉시 모든 친위대와 군단장들, 그리고 용사에게 집결 명령을 내리도록 하라. 이 기회에 확실하게, 이 전쟁의 끝을 보고야 말 것이다.”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마왕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움직이는 벨제뷰티.
그녀의 이런 뒷모습을 보면서, 마왕의 입가에는 그대로 차가운 미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왔도다.. 지난 세월 동안 짐의 백성들이 흘려온 피와 눈물의 대가를 받아낼 때가..’
그렇게, 지금까지 쌓아 왔던 원한과 분노의 감정을 불태우며 마왕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앞에 도달한 서신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담겨 있던 주저함이라는 감정을 거두어 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신의 내용.
그것은 이 순간,
팔콘 제국 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 사태에 대한..
그 동안 줄곧 제국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분쟁의 씨앗’이 어떠한 일을 계기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
*
모든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약 수 주 전.
용사와 엘리사가 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발생하였다.
빚의 절반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테라를 팔아 넘긴 뒤 본국으로 돌아온 전 용사파티의 일행.
그러나, 이것으로 일단 급한 빚 독촉을 해결했다 해서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빚과 관련된 것은 어디까지나 과도하게 당겨 쓴 경비에 대한 부분 뿐.
토라레와 그의 여자의 앞에는..
임무를 실패하고 꼴사납게 달아났다는 ‘원죄’ 에 대한 처벌이 아직 남아 있었다.
“토… 토라레님?”
“다들 침착해,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만 말하면 된다.”
패배하고 돌아온 그들은 연행하기 위해 출동한 병사들.
그들을 보면서 토라레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이에 에일린과 아멜다, 그리고 슈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일단 서로 간에 눈빛을 교환하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말은 확실히 맞춰 두었어.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고.’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짓을 해도..’
‘문제는 없다. 그저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될 뿐.’
그렇게 긴장에 사로잡힌 마음을 최대한 안정 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그들은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얌전히 왕성으로 끌려갔다.
머릿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용사의 시체를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을 생각을 한 가득 담은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