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그 시각 그녀들은..
* * *
‘우와…’
시종들의 손에 의해서 나의 눈 앞에 놓여지는 화려한 병장기들.
그것을 살펴보면서 내 입가에는 자동으로 진한 감탄이 서린 미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희귀 금속으로 제작되었으며 각종 고위 마법들이 걸려 있는 흑색의 갑주.
곳곳에 보석이 박혀 있으며, 근사하면서도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그것에선 마치 하나의 정교한 예술작품과 같은 기품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흑색 갑주와 세트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대검.
검은 도신을 지니고 있으며, 이 순간도 강렬한 보라 빛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오고 있는 그것은, 그 무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부터가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이 방어구와 무기.
이를 보면서 난 그 동안 구질구길한 장비만 들고 여기까지 온 설움이 싹 씻겨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마왕이 내려준 내 무구란 말이지? 과연.. 용사 시절에 들고 다녔던 중고품 무기들하고는 느낌부터가 달라.’
원작에선 사실상 몬스터를 처 죽이면서 나온 무기들로 무장을 해야만 했던 용사.
물론 이는 게임 상에서 흔히 말하는 드롭아이템으로 무장을 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그 무기들을 사용해 온 입장에선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용사의 기본 스펙이 워낙 출중했기에 망정이지, 군데 군데 이가 나가거나 깨진 자국이 남아 있는 검과 갑옷을 입고 전투를 치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불안 불안한 느낌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있어서, 연재 마왕이 선물해준 이 최강의 마족 무구들은 말 그대로 중고차를 차고 다니던 사람에게 새 차를..
그것도 최신식 외제차를 뽑아준 것 같은 기쁨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투자를 해주었으니 이제 확실하게 보답을 해야겠지. 두고 보라고 마왕님, 반드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보이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말 그대로 귀중품을 만지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무기들 살펴보는 나.
그 순간, 문득 나의 머릿속에는 한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가벼운 궁금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투자라… 그러고 보니. 그 쌍년들.. 여행을 하는 내내 투자받은 자금으로 아주 떡칠을 하고 다녔지? 용사는 돈 아껴야 한다면서 중고 무기로 때우고 다녔는데 그 년들은 쓸 거 다 쓰고 낭비 할 거 다 낭비하면서 그 짐꾼놈 비위나 맞추는데 정신이 없었잖아.’
마왕을 처치하기 위해 받는 투자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아 왔던 용사파티.
원작의 순진해 빠진 용사는 얼마를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 중 대부분은 자금 관리를 맡고 있던 신관 에일라의 손에 의해 그대로 토라레와 그녀들의 목구멍 속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돈을 꾸는 과정에서 꾸준히 마왕의 이름을 판 것은 덤이고 말이다.
‘원작에선 마왕을 죽인 공로로 빚을 탕감 받고 마왕성에 있던 재물까지 빼앗으면서 오히려 큰 부자가 되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실패해 버리고 말았으니..’
거기까지 생각함과 동시에 나의 입가에 그려지기 시작한 미소.
이어서 나의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그 쌍년들이 겪게 될 고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거..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궁금해지는데? 할 수만 있다면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그대로 천천히 내 앞에 놓여 있던 검은 대검을 집어 들어 보았다.
그 엄청난 크기와 별개로 나에게 있어선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그것.
그것을 손에 쥔 순간 느껴지는 살짝 짜릿한 감각을 통해, 난 이 무기가 나와 공명하고 있으며 사용자의 힘을 증폭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할 무기를 손에 쥔 채.
난 그대로 천천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일단은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고. 적어도 내 손으로 직접 네놈들을 쓸어버리기 전까지는..’
비록 주 목표는 아닐지언 정, 이 순간 난 복수의 쾌감이라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빚을 졌으면 당연히 그 몇 배로 갚아주는 것이 원칙.
이를 위해서라도... 난 가능한 그 쌍놈들이 빚에 치어서 뒤져 버리거나 내가 손을 댈 부분조차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몰락하지 않기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그 쌍년들을 꼬셔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데 성공해주신 짐꾼 놈에 대해선 더더욱..
'다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 테니까.'
*
“헉… 헉… 헉…”
“여.. 여기까지 왔으면.. 일단 안심.. 이야.”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 앉는 여성들.
에일린과 아멜다, 그리고 슈드와 테라..
불과 수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왕을 처치하겠다 호언장담하면서 마왕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던 용사파티의 전사들.
그러나 이순간, 그녀들의 마음 속에는 방금 전의 호기를 깨끗이 사라진 채 오직 짙은 공포심만이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다.
“그 엘런이 그렇게 허망하게 당해버리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우리 네 사람을 합친 것만큼이나 강한 사람이 엘런인데.. 그렇다면 마왕의 힘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소리지요?”
“모르긴 몰라도.. 우리들과 엘런의 힘을 전부 합쳐야 간신히 승산을 볼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마왕.. 무섭다..”
그렇게 한 동안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마 무시 했던 마왕의 위용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는 네 사람.
그리고 잠시 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던 공포심을 간신히 누그러뜨린 그들은, 이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저.. 저기 말이야.. 그러면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본래라면 엘런이 마왕을 죽이고 나면 그 공적을 모조리 토라레님과 우리들이 가로체기로 되어 있었잖아.”
“네.. 그랬지요, 그래도 나름 완벽하다고 여겼던 계획이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실패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용사가 생각보다 약했던 거랑 마왕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던 게 문제였을 뿐.”
“그럴 지도? 하지만 어쨌든 우린 완전 실패.”
“…”
“큭..”
짧은 문장으로 정곡을 찔러 버리는 수인전사 테라.
그녀의 말대로, 현재 용사 파티의 상황을 평가하자면 완전한 실패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할 수 있었다.
최강의 전력이었던 용사 엘런은 마왕에게 당해 쓰러졌으며, 나머지 파티원들은 그런 용사를 버려둔 채 도망쳐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엘런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며,
최강의 존재였던 용사를 잃은 그들이 다시 마왕을 처치하러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가 되어 버리고 만 마왕 퇴치.
하지만, 그렇게 불가능한 현실은 인정한다 해도 그들은 이대로 얌전히 모험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용사파티로서 마왕을 처치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채 여기까지 온 그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종족 연합군과 각 도시로부터 받은 지원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며, 심지어 그 중에는 적잖은 액수의 빚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마왕만 처치하게 되면 다 갚을 수 있다는 명목 아래 생각 없이 신나게 끌어다 썼던 빚.
그것은 당연히 승리하리라 여겼던 마왕과의 일전이 있기 전까진 그들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으나..
마왕토벌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그 ‘빚’이라는 녀석은 비로소 냉정한 현실로서 그들의 앞에 그 모습을 또렷하게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엘런 말을 들어서 적당히 아끼면서 생활할 껄..’
‘실수였습니다.. 제 딴에는 토라레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투자를 한 것뿐이라 생각 했는데..’
‘아니 잠시만…이거, 좀 심각하게 위험한 거 아니야? 솔직히 마왕만 죽이면 싹 갚을 수 있다 생각해서 용사 녀석 충고를 무시해왔었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리면..’
‘토라레님 돈 너무 막 쓰심. 우리도 돈 너무 막 썼음..’
말 그대로, 세계를 구하기 위한 용사파티에서 하루아침에 악성 채무자가 되어버린 그녀들.
그렇게 비로소 자신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네 명의 여전사들은 그대로 짙은 불안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이.. 일단은, 토라레 님께 가서 의논을 해보자. 분명 무언가 좋을 수가 있을 거야.”
“그게 좋겠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것밖에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실질적인 그들의 ‘주인님’ 이자, 용사를 처치할 계략을 마련해준 장본인
그 사람이라면 이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네 사람은 일단 토라레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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