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 붕괴
김보슬은 불사를 얻었고, 불노도 얻었다.
불노불사.
그는 완벽한 평등과 정치 이념도 구현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한 뒤.
그는 자신이 인간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 궁금했다.
처음, 자신의 무력을 상징할 클론을 만들었다.
“네 이름은 김산이다.”
그다음, 사이킥 에너지에 특화된 클론도 만들었다.
그 외에도 많은 걸 만들었다.
복제, 새로운 육체.
자식.
자신은 신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난 신인가 ”
그렇다.
그게 바로 전지전능 아닌가.
그는 스파이 프로그램으로 전 은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소수민족의 반란을 제압한 순간, 그 종족의 족장이 말했다.
은하의 현자라 불리는 자였다.
“당신은 신이 아니오.”
“그럼 난 뭔데 ”
“오만한 인간이지.”
우득.
손가락을 꺾었다.
“날 아무리 고문한다 해도 당신은 인간일 뿐이오.”
부러진 손가락을 부여잡고 그가 말했다.
“전지전능이 바로 신의 조건이 아니냐 ”
“당신은 정말로 전능하오 ”
“그렇다.”
“그럼 20년 후에 무슨 일이 나는지 말해보지 그러시오 ”
은하의 현자는 말했다.
시간은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돌아온 보슬은 고민했다.
‘시간.’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인간이었다.
그럼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연구팀을 꾸렸다.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는 어떤 결과도 가질 수 없었다.
시간이란 보이지 않았고, 되돌릴 수 없었다.
그에 관련된 수많은 소설과 만화는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던 중, 뫼비우스의 띠라는 블랙홀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었다.
그저 가끔 덤비는 인간 중 하나를 던져 넣는 짐승의 우리 정도로 사용했을 뿐.
맨 처음 이상한 점을 느낀 건 들어갔던 놈이 살아왔을 때였다.
“뭘 봤지 ”
호기심에 묻자.
“그저 끊어지는 않는 길을 봤습니다.”
영원한 삶.
계속되는 반복.
이제까지 누구도 건들지 못한, 시간에 관여하는 현상.
“이거구나.”
보슬은 기뻤다.
진짜 신이 될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신이 관여한 것은 분명했다.
이것은 시간을 건드리는 물건이니까.
수 없는 연구와 실험 끝에, 이 요악한 물건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한다는 걸 알았고.
한 번에 단 한 명의 인간을, 시간을 반복하게 해준다는 것도 알았다.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했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내가 신이 되거나, 만날 수 있겠지.’
보슬은 자신의 일부를 통해 새로운 클론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김산이나 존과는 차원이 다른 동일성을 띤 클론.
하지만 클론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렇다고 직접 들어갈 순 없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반세주란 9은하의 인간이었다.
뫼비우스의 띠가 받아들인 인간이자, 자신과 유전학적으로 흡사한 인간.
그가 성장하길 기다린다.
저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겪고 기억하기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사이 다른 이의 기억과 경험을 흡수하는 연구를 끝낸다.
자신과 합쳐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리미트리스 급.
그리고 자아가 너무 강하면 무리.
그의 정신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가 소중히 아끼는 것들을 같이 아껴준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수 없는 기다림 끝에, 이제야 보슬은 만족한 상황을 만들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부르고, 반세주를 씹어 삼킨 뒤.
저 미친 블랙홀 안을 누비리라.
그 안에 숨긴, 신의 조각을 씹어 삼키리라.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보슬은 세주를 봤다.
“슬프냐 ”
“아무도 안 죽여.”
“희생이란 진보 앞에 당연한 것을.”
퉁.
세주는 보슬의 모습을 놓쳤다.
‘모드 온, 김치용!’
아낄 것도 없다.
커버링을 광체로 그리고 각각의 특징을 담은 모드를 발동한다.
김치용 모드는 육박전 전용이다.
육감을 발동하고, 동체시력이 강해진다.
특수 제작한 그립을 쥐자 검은 칼날이 솟는다.
그제야 간신히 모습이 보인다.
훙!
세주의 몸놀림도 달라졌다.
칼날을 휘둘러 보슬의 칼끝을 후려친다.
쩌-엉!
굉음이 울렸다.
그가 노린 건 인준의 목이었다.
가벼운 화상을 입은 인준은 목을 감싸 쥐었다.
“젠장.”
세주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어떠냐 저 위의 것, 반갑지 않나 ”
반갑기는.
욕이라도 한 마디 해줄 찰나.
텅.
다시 놈이 달린다.
‘이 새끼가.’
-말 걸어놓고 친다. 어디서 많이 본 수법인데, 형을 상대한다고 생각해.
이 미친 기계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냐.
하지만 덕분에 여유를 좀 찾았다.
막을 수 있다.
다시 놈의 모습을 쫓아 달린다.
시간을 접어서 그 위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카가가가각!
불똥이 튄다.
젖은 땅 위로 빛의 파편이 퍼졌다.
“트레!”
놀란 팽이 비명을 질렀다.
모습이 사라진 둘이 나타난 곳, 팽의 머리 위다.
블레이드가 부딪치고 떨어지는 것도 순간이었다.
칼날을 긁어서 떨쳐 낸 세주가 입을 연다.
“나랑 놀자, 이 변태 새끼야.”
보슬은 말 대신 발을 놀렸다.
세주는 몇 번이고 그의 공격을 막았다.
문제라면, 막는 걸 제외하고 다른 걸 할 수 없다는 것뿐.
“이거 참.”
네 차례 놈의 칼날을 막은 순간이다.
그가 입을 열고, 속도가 빨라졌다.
노린 것은, 세주의 허벅지다.
푹!
“윽!”
“이제 못 막겠지 ”
“빌어먹을 새끼!”
재생의 성역이 발동 중이다.
하지만 어떤 상처도 단숨에 낫게 할 순 없다.
‘진통제!’
대신 고통을 참을 순 있다.
근육과 신경이 잘렸지만, 뼈는 멀쩡하다.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보슬은 배로 빨라졌다.
그가 없어진다.
모드 김치용은 전신의 신체 능력을 배로 끌어올려 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놈을 잡을 수 없었다.
-너무 빨라.
‘알아. 방법 좀 궁리해라.’
놈은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움직이게 ”
서걱!
이번에는 다른 쪽 허벅지다.
“으악!”
비명이 절로 터졌다.
놈의 칼날은 배리어 따위로 막을 수 없었다.
“구경해.”
그립을 회수하고, 세주는 모드를 에임 마스터로 바꿨다.
벼락을 꺼내 들고 놈을 쫓았다.
‘트레이싱.’
자동으로 적을 추적하는 거다.
-내 시스템상으로 놈의 속도를 계산할 수 없어.
자동 추적도 프로비던스의 능력 중 일부다.
쫓을 것도 없었다.
놈은 팽의 뒤에 서 있었다.
슥.
눈은 세주에게 향한 채로.
팽의 어깨에 칼을 꽂는다.
“트레에에에!”
팽이 비명을 질렀다.
“기분이 어때 ”
“빌어먹을 자식, 관둬라.”
벼락의 방아쇠를 당겼다.
‘내 다리 움직일 수 있어 ’
-안 돼. 진통제고 뭐고, 두 번째 공격에 뼈가 잘렸어.
빌어먹을!
압축 애비탄이 날아간다.
꽝!
하지만 놈의 보랏빛 장막을 뚫지 못했다.
보슬은 말없이 팽의 전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저 미친 새끼가!”
치용이 그걸 보고 달려들었다.
“가지 마!”
세주가 외쳤다.
유진도 어느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은신이다.
치용의 등에 날개가 펴지고, 양손에 붉고 푸른 칼날이 앞으로 뻗어 나간다.
보슬은 한 손으로 팽의 다른 쪽 어깨를 찌르고.
다른 손으로는 노란빛을 뿜어 치용의 칼을 막았다.
그 타이밍에 유진이 그의 뒤에서 두 배나 커진 채로 나타났다.
벌크업 상태의 유진은 서슴없이 손톱 형태의 블레이드를 그었다.
-멍청이들!
프로비던스가 욕을 지껄였다.
“안 돼!”
펑!
유진의 얼굴 쪽에서 폭음이 터졌다.
허공에 어느새 노란 빛이 떠다니며 보슬의 주변을 배회했다.
“부유형 지뢰다. 너무 가까이 붙으면 터져.”
“으으윽.”
유진이 얼굴을 감싸 쥐고 물러났다.
그 곱던 얼굴의 반이 보기 흉할 정도로 뭉그러졌다.
치용은 그 틈에도 칼날을 내리쳤지만, 무소용이었다.
보슬은 그 순간에도 세주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넌 탈락.”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서걱.
[대…….]
팽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평생 알 수 없다.
그녀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붉은 피가 비에 젖은 땅을 다시 적셨다.
“다음.”
보슬이 움직인다.
인준의 앞이다.
“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치용이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등에 단 날개에서 뻗어 나간 에너지 파장이 대기를 울렸다.
그가 휘두르는 두 개의 칼날은 세주라도 전력을 다해야 막을 법했다.
하지만 보슬은 한 손으로 가볍게 쳐냈다.
통.
강렬한 일격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인준의 앞에 선 그가 칼을 들었다.
서걱.
같다.
어깨를 베고, 팔을 자른다.
눈은 세주에게.
한 손으로는 치용을 막고, 달려드는 유진에게는 지뢰가 있다.
사출무기는 놈의 보랏빛 배리어를 뚫을 수 없었다.
애비탄을 날리고, 무슨 짓을 해도 불가능했다.
유도, 압축 등 가진 모든 기술이 무용했다.
꽝. 꽝. 꽝!
인준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대신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도 탈락.”
보슬의 입이 열린 순간, 인준은 말했다.
“이 새끼 죽여 버려.”
서걱.
인준의 목이 날아간다.
그 사이 다리가 어느 정도 돌아왔다.
“가지 마. 가면 죽어.”
뒤에서 안나가 세주를 잡았다.
“하, 시바 안 되겠네. 형님. 제가 또 숨겨둔 힘을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먼저 지구에 가 계십쇼.”
치용이 세주의 앞을 막는다.
인준이 죽었다.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도망치자.
“저도, 숨겨둔 한 가닥 있는데.”
“오냐. 형님 나중에 지구에서 만나는 거 어떠쇼 ”
왜냐
왜 자신을 살리려 하는 거냐
안나가 그의 옷깃을 잡아끈다.
“너 밖에 없어. 나중에 저 새끼를 죽일 수 있는 놈.”
‘확률을 계산해. 현재 상황 승률.’
-제로.
‘근 십 년 내로 내가 저놈을 죽일 확률.’
-…….
‘말해.’
-제로.
예상했다.
보슬은 진짜 괴물이었다.
“네가 정해 봐라. 하나는 살려주고 둘은 죽이겠다.”
평온하고 평이한 어조다.
“널 죽이고 다 살아 돌아갈 거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굳세고 강하다. 아직도 꺾이지 않았구나.”
보슬이 다시 칼을 놀렸다.
“멍청이.”
안나가 배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서걱.
그녀의 목이 하늘을 난다.
이 미친 여자야.
돌아가면 결혼하자며.
“형님, 그냥 좀 가라고!”
치용이 그의 앞을 막는다.
푹!
등 뒤로 노란빛이 삐죽하고 솟더니 구멍이 뚫린다.
“쿨럭!”
피를 토하며 그가 드러눕는다.
“끝이 정말 안 좋네요.”
유진이 중얼거린다.
그는 눈이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보슬이 묻는다.
“둘 중 하나는 살릴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세주의 표정을 살핀다.
이 빌어먹을 새끼.
변태 같은 새끼.
대체 바라는 게 뭐란 말이냐.
“둘 다 죽여.”
“정말 ”
“그리고 나도 죽여.”
눈이 죽는다.
마음이 죽는다.
다 지키고자 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그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지 뭐.”
퍽!
유진의 머리가 터지고.
치용은 앞으로 고꾸라진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슬을 노려봤다.
“개자식, 시파 새끼, 벼락 맞아 죽을 새끼.”
“난 벼락 맞아도 안 죽는다. 반세주, 반항할 힘은 있나 ”
다리는 돌아왔다.
하지만 싸운다면 이길 수 있나
마음이 이미 졌다.
“없구나.”
그제야 보슬이 미소를 보였다.
그가 원하는 상태였으니까.
마음이 죽고, 몸은 멀쩡한 지금.
그의 기억과 경험을 먹기 위한 순간.
-형, 마지막 잠금장치가 있어. 풀까
‘뭔데 ’
프로비던스는 마지막 봉인을 풀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기억.
그 대신 단점이 있다.
이게 바로 보슬이 원하는 바일 테니.
복수를 위한, 기억을 해제하는 순간.
저 빌어먹을 변태 새끼의 뜻대로 된다.
그 반증으로 놈은 아직도 기다렸다.
세주가 변하기를.
-형의 예전 삶의 기억.
‘그걸 풀면 달라져.’
달라진다.
많이.
-승산은 30%.
죽음 마음의 불길이 인다.
죽더라도, 할 수 있는 걸 한다.
그래야 먼저 간 저 셋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풀어.’
퍽!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3자의 시선으로 보던 것과는 다른 기억의 물결.
코피가 터지고, 눈에 핏발이 선다.
무수히 많은 삶, 그걸 정리할 순 없었다.
세주는 모든 분류를 뒤로 미뤘다.
자신이 망가지고 뒤틀어져도 좋다.
지금 원하는 건, 이전 수많은 삶 중 자신보다 강했던 삶.
“기억을 깨웠구나.”
보슬의 만면에 미소가 어린다.
고작 몇 초, 세주가 눈을 들었다.
검게 죽은 눈이다.
기억을 잃기 전 반세주는 죽고 싶어 발악하던 이였으니까.
“그래. 이 씹쌔야.”
대답과 동시다.
콰우우우우!
전신에서 검은빛이 터진다.
“넌 실수한 거야. 김보슬.”
“내가 ”
보슬은 그를 비웃었다.
자신의 배리어는 어떤 탄환도 막으며.
노란빛의 칼날은 무엇이든 뚫는다.
전지전능이라 믿고, 신이라 믿게 한 무기다.
“그래. 좆나게 큰 실수.”
꽝!
폭음이 터진다.
세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힘썼다.
과거의 기억에 휩쓸리면 진다.
현재의 반세주에 과거의 경험을 덧붙여야 한다.
배운 첫 번째.
에너지 폭발.
오닉스 에너지가 배로 불어난다.
전신에서 검은빛이 터진다.
커버링 기예 광체로 바꾸자, 전신에 검은 기운이 어린다.
보슬도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커버링 기예의 끝은 엔젤이었다.
깃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한 노란 빛이 어린 네 장의 날개.
“와라.”
즐거운 그의 얼굴을 본, 세주는 두 번째로 배운 걸 꺼냈다.
소실.
커버링 기예 중 하나다.
그저 부딪친 에너지를 없애는 단순한 행위.
꽝꽝!
폭음이 터지고 둘의 손이 허공을 오간다.
깨지는 바닥, 주변 풍광이 변할 정도다.
‘브로.’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프로비던스를 부른다.
그에게는 마지막 수가 하나 더 있었다.
가진 능력을 순간 배가 되게 해주는 모드.
‘모드 온 프로비던스.’
흉몽 모드에서 더 올라간, 레전드 모드.
위이이이잉!
어드바이저라 불리는 프로비던스의 전신이 해체 돼, 세주의 몸을 감싼다.
“음 ”
보슬이 당황한 눈을 했다.
“어이, 그러면 어드바이저 부서져.”
“시파, 네 알 바 아니잖아.”
꽝!
다시 울리는 폭음이다.
펑!
보슬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격을 막았다.
이걸로 승률 50%다.
쩌저적!
땅이 갈라질 만큼 격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세주는 안색이 죽어갔다.
소모전이다.
그 끝은 당연히 적의 승리였다.
계기가 필요했다.
적의 시선을 끌.
‘한 방이면 되는데.’
과거의 생 중 배운 것 세 번째, 커버링 기예 중 하나다.
가진 에너지 전부를 폭발시키는 것.
하지만 틈이 없었다.
“소모전, 그럼 내 승리. 계산 나오지 않아 괜한 짓은 관두지 ”
득의양양한 얼굴이다.
미친 새끼.
“인간은 본래 포기를 몰라. 씹쌔야.”
“입이 걸어.”
“3일 밤낮 욕만 해주고 싶다.”
다시 싸우려는 찰나다.
턱!
누군가 보슬의 발목을 잡는다.
피 칠갑을 한 시신이다.
“어흥, 저승사자시다.”
얼굴이 문드러져 알아볼 수도 없었다.
치용이었다.
놀라운 생명력으로 그는 둘이 싸우는 동안 기어왔다.
전신이 녹아내리고, 부서지며 그는 보슬의 발목을 잡았다.
세주는 말 대신 움직였다.
전신에 에너지를 모아서 보슬에게 다가갔다.
꽈광!
부유형 지뢰가 터진다.
세주는 배리어로 상쇄했다.
손에 모은 검은 구슬, 자폭이다.
“고맙다. 치용.”
이걸로 끝이다.
“미쳤나 그럼 너도 죽어 ”
“알아, 이 개새캬.”
꽈-아아아아앙!
전에 없는 강렬한 폭음이었다.
행성 자체가 뒤흔들렸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가 크게 퍼지지 않았다.
보슬이었다.
보슬은 마지막 배리어를 겹겹이 쳤다.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모든 에너지를 배리어에 모은다면 그는 살 수 있었다.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자폭이라니.
죽고 싶지 않아 맨 처음 파고든 것이 불로불사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조준 사격, 준비된 사수 쏩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9은하의 인간이었다.
장왕.
그가 살아 있었다.
“쏘지 마라! 내 너에게 죽지 않는 몸과 영원한 시간을 주리라!”
급히 보슬이 외쳤다.
장왕은 세주에게 배운 대로 답했다.
“조까.”
땅!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보잘것없다 할 수 있는 광탄 한 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절대 막을 수 없는 사신의 낫이었다.
퍽!
보슬의 머리가 터졌다.
꽝!
그가 죽은 순간, 폭발의 여파가 행성을 덮쳤다.
***
15일 뒤.
“정말 다 죽었나 ”
“네.”
호필은 캡슐 휠체어에 탄 장왕에게 물었다.
한쪽 안구 소실, 사지 전부를 잃은 부하다.
“반세주도 ”
“네.”
“확실해 ”
“확실합니다.”
푸른 행성에 남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모든 군사력이 보슬에게 집중된 곳이고 통일도 하였으니.
호필은 세주가 싸웠던 장소로 갔다.
남은 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에게 부관이 말했다.
“사령관 님. 복귀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가자.”
그렇게 떠나려던 그의 발에 뭔가 툭, 하고 걸렸다.
은빛 구체다.
지지직.
동시에 머릿속에 노이즈가 들린다.
‘음 ’
이상한 느낌에 구체를 쥐어서 들었다.
-날 저기에 던져.
한마디 말이 들려 소스라치게 놀란 호필이다.
-날 저기에 던져,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 반세주도 살리고, 다른 이들도 살릴 거야.
‘넌 뭔데 ’
-프로비던스.
‘응 ’
-반세주가 내 형이야.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다.
그들의 머리 위, 검은 구멍이 혀라도 내밀 것처럼 자리 잡고 있다.
-저기에.
‘반세주는 죽었어 ’
-살아 돌아올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는 아니지.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살아 돌아온다니.
“저기 ”
위를 가리켰다.
“사령관 님 ”
-힘껏 던져. 인력이 있으니 알아서 들어갈 거야.
“야, 너 고등학교 때 야구선수라고 했지 ”
부관을 불렀다.
몸 쓰는 건 자신 없는 호필이다.
“네. 맞습니다.”
부관이 자신을 미친놈 보듯 본다.
자신도 반쯤 미친 것 같으니, 뭐라 따질 수 없었다.
“이리 와.”
그리고 손에 그 은빛 구슬을 쥐여줬다.
“저기 넣으면 휴가 9박 10일.”
“나중에 딴말하기 없깁니다.”
“내 사령관 지위를 걸고 말한다.”
부관이 와인드업을 했다.
신중하게 구멍을 노리고 구체를 던졌다.
쌔애애액!
훙하고 금세 사라지는 구체다.
“됐습니까 ”
“쩝, 가자.”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만 모른다.
이게 무슨 일을 부를지.
***
프로비던스는 만들어졌을 때, 두 개의 의무가 있었다.
주인의 보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멈추는 것.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어드바이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의무를 충실히 해야 했다.
이 빌어먹을 블랙홀에 묶인 이들을 풀어내야 했으니까.
***
이상한 기억이다.
아니, 이상한 꿈이다.
세주는 일어나자마자 밥을 챙겨 먹고 회사에 나갔다.
“반세주 대리님 일찍 오셨네요 ”
“아, 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요.”
엊그제 이사했는데 그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귀신 들린 집 아냐 ’
꿈치고는 대하역사소설 만큼이나 길었다.
‘재입대라니, 그런 꿈을 이렇게 스펙타클하게 꾼 사람은 나밖에 없을 지도.’
하루 업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다.
105호.
1층 오피스텔 옆 어떤 꼬마가 쪼그려 앉아 있다.
바로 옆 편의점 테이블을 놔두고 왜 저렇게 앉아 있는지.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오지랖이 발동했다.
“안녕 ”
아이가 고개를 들어 한 번 그를 본다.
“어른이 인사를 하면 반응이 있어야지.”
“그냥 갈 길 가세요.”
…참 신박한 애새끼로다.
“누구 기다려 ”
“엄마요.”
“왜 기다리는데 ”
“안 와서요.”
딱 봐도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자신과 스무 살이 넘게 차이 난다.
이런 아이와 싸우면 동네 망신이다.
‘가자, 가.’
“오냐.”
“배고픈데.”
무시하자.
“돈도 없네.”
이 새끼가 갈 길 가라며.
“이름 ”
“요.”
이름 한 번 겁나게 특이하다.
“삼각 김밥 컵라면 ”
“햄버거.”
“김밥 먹어. 한국인은 밥심이야.”
“왜 물어봤어요 ”
“그냥.”
“제멋대로네.”
툴툴거리는 놈을 두고, 김밥 몇 개와 음료수를 사다 줬다.
“어머니 뭐하시는데 ”
“공장 다녀요.”
“몇 살 ”
“열둘이요.”
근데 꼭 어디서 본 것 같이 생긴 놈이다.
“너 나 아냐 ”
대뜸 묻자.
“아저씨는 저 알아요 ”
“형.”
“…설마요.”
“형 맞아. 결혼 안 한 남자는 다 형이지. 형이 싫다면, 브로라고 해도 좋다. 형이 좀 개방적인 성격이거든.”
“그런 것 같네요. 브로.”
이 자식.
서슴없이 호칭을 바꾼다.
“그래. 브로. 형 105호 산다. 심심하면 놀러 와.”
“여자친구 없을 때 갈게요.”
“눈치 굿 브로.”
세주의 여자친구, 안나 휴이츠다.
집착이 심하지만 예쁘니까 뭐든 괜찮다.
105호의 도어락을 열고 들어온 세주는 침대에 앉았다.
“시바, 기계도 환생을 하는구나.”
그는 기억했다.
지난 삶을.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가 끝난 것도 알았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프로비던스가 말해줬으니까.
-형, 난 저기 안에 들어가서 저걸 끝낼 거야. 그럼 형은 살 수 있어.
무슨 헛소리야.
입을 열 힘이 없었다.
-형이 기억을 가진 채 돌아갈지 아닐지는 몰라. 하지만 죽게 두진 않을 게.
무슨 개소리야.
여전히 입을 열 힘이 없었다.
-또 봐.
그게 끝.
“우와. 저 새끼 너무 프로비던스랑 판박이잖아.”
***
편의점 테이블 앞, 아이는 미소를 보였다.
“잘살고 있네.”
어제 이사 와서 오늘 얼굴을 봤다.
프로비던스의 기억을 가진 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 먹었으면 가지 ”
편의점 주인, 강은빛이 나와 소년에게 말한다.
“네네. 그러죠.”
안드로이드, 기계.
전부 이 안에 있었다.
각진 턱과 이름만 들어도 프로비던스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이번 생에는 적당히 까불어야겠지.”
전과는 다르다.
육체가 있다.
까불면 맞을 거다. 그럼 아플 거고.
“비도야 ”
“엄마!”
엄마를 본 판비도는 밝게 웃었다.
지난 생만큼 소중한 십이 년의 삶도 있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세주에게 비아냥대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