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205. 김보슬
주먹을 휘두르고 박치기를 했다.
어릴 때는 무던히도 싸웠다.
훙!
에너지를 쓸 수 없어도 세주의 몸은 단련된 강철과도 같았다.
제압하자.
그런 생각과 동시에 몸도 움직였다.
실버가 분전한다고 해도 저 가르간 복제품에 얼마나 버틸지 모른다.
지금 최선은 이 장막을 걷는 것.
고로 이 새끼를 잡는 거다.
턱을 당기고 주먹을 내지른다.
보슬은 웃는 얼굴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휘두른 주먹이 놈의 안면을 강타하려는 순간.
오산임을 알았다.
휘릭.
몸이 허공을 돌고.
쿵!
등부터 떨어진다.
“시파.”
“맨손 박투는 내가 자신 있어 하는 일 중 첫 번째다.”
“장막을 거둬, 승부를 보자.”
“내가 왜 ”
“날 죽이면 그만이지. 왜 저쪽을 건드리는데 ”
꽈르르릉.
다시금 천둥이 친다.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아흐, 짜릿해.”
놈이 야릇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빛이 번쩍이며 보이는 표정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반대로 보슬이 보는 세주의 얼굴은 달랐다.
간절한 바람을 담은 표정.
늪에 빠진 채, 빠져나오기 위한 발버둥.
그런 모습이다.
보슬의 눈에 비친 현재의 세주는.
고요한 호수를 떠올리자.
흥분해서 놈을 상대할 순 없다.
다시금 마음을 잡은 세주는 천천히 주먹을 들고 상대를 가늠했다.
제대로 된 무술은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프로비던스의 초인 프로젝트를 받으며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는 배웠다.
투두둑!
보슬도 가드를 올려 주먹을 막는다.
둘의 주먹이 곧 허공을 격하고 서로의 가드 위를 때렸다.
“시간 낭비야.”
보슬이 말했다.
몇 번 부딪쳐보니 그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다.
놈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여전히 잘 싸웠다.
세주는 짧은 시간 내에 놈을 제압할 수 없음을 알았다.
***
실버는 팔이 잘린 직후, 인준을 잡아 던졌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남은 적군은 몰려왔고, 장왕이 그와 맞서 싸웠다.
유진과 치용, 안나도 위험하고.
유일하게 팽만이 그 뒤에 있었다.
실버는 팽의 품으로 인준을 날리고 몸을 돌리며 팔꿈치에서 에너지 블레이드를 꺼냈다.
안드로이드여서 좋은 점 중 하나다.
슈앙!
날카로운 칼날이 가르간의 옷깃을 스친다.
동시에 떨어진 팔뚝을 걷어찼다.
쩡!
가르간이 빛의 칼을 휘둘러 팔뚝을 잘랐다.
쏴아아아.
내리는 빗줄기 덕에 그가 쥔 블레이드의 빛이 휘어져 보인다.
‘살 수 있을까 ’
실버는 계산했다.
지금 가르간의 능력과 자신이 가진 힘의 차이.
눈에 보이는 건, 2급.
하지만 전투 경험치가 다르다.
실버는 배워 익힌 것이고, 가르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몸에 익은 것이다.
‘싸우면 진다.’
단순명료한 일이다.
가르간은 말없이 칼을 겨눴다.
그 사이에도 실버의 연산장치는 수십의 상황을 그렸다.
그 사이, 과거의 기억이 책갈피처럼 끼어든다.
[안드로이드도 살아도 됩니까 그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왜 싸우냐는 물음에 실버는 답했다.
아그작.
“우리나라 과자는 질소가 반이야. 시바, 기술이 변했는데 왜 이건 안 변하냐 ”
과자를 씹으며 말하는 대장이 있었다.
반세주, 인류의 영웅.
그리고 자신을 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살고 싶으면 사는 거지. 이유가 왜 필요해.”
그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살고 싶다.’
실버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었고, 저녁에 지는 노을이 보고 싶었다.
바다와 오로라, 빙하와 사막.
모든 걸 경험하고 싶었고, 많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전투가 아닌, 생산적인 일들.
친구를 사귀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듣고도 싶었다.
이 모든 것.
‘감정.’
이게 감정이라 불리는 거다.
단순히 정의할 순 없지만, 실버는 느꼈고.
동시에 결정했다.
자신을 구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버티십시오. 팽]
동시에 실버는 땅을 박찼다.
가르간이 칼을 세워 방어했지만, 그가 뛴 쪽은 반대쪽이었다.
보랏빛 장막,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조차 가로막는 곳.
과거의 안드로이드에게는 한 가지 장치가 필수였다.
장기수면장치 또는 휴면장치라 불리는 거다.
가진 에너지를 전부 흩어내고 잠드는 행위.
자살이다.
주인을 잃고, 기능이 뒤처지는 안드로이드를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알아서 무덤에 가서, 알아서 죽는다.
그게 인간이 만든 안드로이드다.
가진 에너지를 흩어버리는 것.
그 장치를 조금만 손보면 다르게도 쓸 수 있다.
자폭장치다.
가진 에너지를 일시에 터뜨리는 것이다.
장막을 살핀 실버는 그 안에 EMP 입자가 떠다니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장막의 방어력도.
자신의 현재 능력은 7급, 자폭하며 터트릴 수 있는 에너지는 4급.
‘충분하다.’
여전히 살고 싶지만, 실버는 살 수 없었다.
현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 반세주를 저기에서 꺼내오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
친구를 사귀고 싶었고, 그 친구가 된 이들.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하지 마!”
장막에 붙었을 때다.
얼굴이 팅팅 부은 세주가 말했다.
눈치가 빠르다.
[고마웠습니다]
짧은 한마디를 던진다.
그 뒤에서 가르간이 달려드니, 긴 얘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푹!
칼날이 등에 꽂힌다.
이왕 하는 자폭, 한 놈 데리고 죽고 싶다.
[같이 가자. 변태의 놀잇감이 된 친구야]
콴도 바이탄도 모두 저 김보슬이란 인간의 장난에 태어난 존재라면.
태어나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다만, 아이는 낳는 게 끝이 아니라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을 뿐이다.
팅.
꾸우우우욱!
그립을 쥔 가르간의 손을 잡는다.
동시에 실버의 몸이 부푼다.
꾸드드득!
“트레에에!”
가르간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질렀다.
실버는 웃었다.
미소를 지을 얼굴은 없지만, 그는 웃었다.
살고 싶지만, 죽어도 좋은 순간이다.
그가 진정 바라는 안드로이드가 아닌, 한 존재로서의 삶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행위였다.
꽈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내리던 비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보랏빛 장막이 깨지고, 그 안에서 세주의 몸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보슬도 마찬가지로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대장!]
멀리서 그걸 본 팽이 외쳤다.
반쯤 정신을 잃었던 인준도 간신히 눈을 떠 앞을 봤다.
“걱정하지 마라 안 죽어.”
고작 이 정도에 죽을 리 없다.
그는 팽을 안심하게 두고 몸을 일으켰다.
장왕이 고전 중이다.
놀고 있을 틈은 여전히 없었다.
***
유진은 전황파악이 특기였다.
전장에서 다친 이, 곧 죽을 이들을 파악해서 치료하는 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그는 치용의 상태를 확인했고, 세주가 갇힌 것도 알았다.
사지가 묶인 채, 유진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여유 있네 ”
비에 젖은 금발 곱슬머리의 남자다.
존, 2사단장이란 직위였다.
무형의 압력이 팔다리를 억누른다.
“난 자비롭다. 죽기 전에 할 말은 ”
“비에 맞은 요크셔테리아 같아.”
“…미친놈이군.”
존은 리미트리스 급 사이키커다.
그는 생각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인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앞을 향했다.
무형의 압력이 심장을 누른다.
유진은 이대로 몇 초만 더 있으면 죽는다는 걸 알았다.
“합!”
그는 기합을 지르며 양팔에 묶인 힘을 뿌리쳤다.
“바보 같은 짓.”
존이 그걸 보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 같은 짓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번 업이었고, 지금은 다르다.
우직.
근육이 부푼다.
유진은 에너지를 유용하게 쓰는 밸런스 형, 대신 한 방이 부족했다.
여전히 일격의 힘은 치용이 위였다.
그래서 택한 길이다.
에너지가 뿜어진다.
허공으로 뿜어지던 에너지는 짙은 그림자 같다.
허공에 퍼지려는 것도 잠시 스물스물 퍼지던 것이 도로 몸으로 깃든다.
근육이 불쑥 커진다.
이전에 비해 1.5배는 커진 몸.
벌크업이라 이름 붙인 기술이다.
뿌직!
무형의 족쇄가 깨진다.
“넌 화난 불독 같다.”
그걸 본 존이 말했다.
“졸라 세게 물어주마.”
꽝!
유진이 달려들었다.
으득!
농담이 아니었다.
유진은 진짜 물어뜯었다.
맨 처음 이 능력을 보고 세주는 비스트라고 이름 붙였다.
그걸 바꾼 건 자신이다.
꾹꾹 눌러 둔 본능을 끄집어낸다.
안에 숨겨 둔 짐승을 꺼낸다.
이성을 잃으면 최악이다.
“퉤!”
물어뜯은 건, 허벅지다.
비릿한 맛은 입을 벌려 달리며 비로 씻어냈다.
촤아악!
손끝으로 에너지가 튀어나와 적을 가른다.
“미친! 넌 짐승이냐!”
김산의 능력도 짐승을 닮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존은 몸을 비틀어 피하며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우지지직!
작은 쉽이라면 우그러뜨리는 압력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죽어라.”
빛이 스며든 눈동자가 흐릿하게 그를 본다.
스걱! 쩍!
가르고 찌른다.
두 번의 공격만으로 존은 배가 뚫렸다는 걸 알았다.
에너지를 전신에 두른 괴수다.
존은 마지막 순간 최선을 다했다.
푸카아아악!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대로 몸이 반으로 갈린다.
‘군주님.’
존의 눈에 보랏빛 장막이 부서진 게 보인다.
그리고 머리 위.
폭풍우를 몰아 온 구름 너머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유진은 에너지를 거뒀다.
적은 죽였다.
뒤를 돌아보자 장왕이 아직도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실버의 자폭하는 것도 봤다.
몸이 삐걱댄다.
그래도 싸워야 할 때였다.
***
“내 계산이 다 틀렸네.”
“걱정 마라. 나도 틀렸으니까.”
장막에 튕겨 나간 보슬의 말을 누군가 받는다.
바닥에 주저앉은 보슬이 고개를 들었다.
전신에 검은빛을 두른 반세주가 보였다.
세주는 유진이 적을 죽이는 걸 봤다.
같은 타이밍에 치용이 김산을 터뜨려 죽이는 장면도.
“실버, 이 멍청한 안드로이드.”
그는 고개를 젓고 보슬을 향해 다가갔다.
“너 하나 남았다.”
죽여야 할 건 셋.
그중 둘은 죽였다.
“이긴 것 같아 ”
“이길 참이다.”
-형.
프로비던스가 재기동을 하고 어깨로 날아와 붙는다.
적을 죽인 유진이 옆으로 다가온다.
치용 또한 등 뒤 커다란 날개를 달고 온다.
안나가 전신에 황금빛을 두른 채 온다.
“이제 와서 1:1로 싸우자고 할 건 아니지 ”
“응. 안 해.”
보슬은 피식 웃고는 답하고는 위를 가리켰다.
“준비된 게 왔거든.”
쿠르르릉.
먹구름 너머다.
그보다 짙은 어둠이다.
검게 채색된 원이 보였다.
세주는 기억하지 못 하는 구멍이다.
-뫼비우스의 띠.
프로비던스가 읊조린다.
“배우는 다 모였고, 소품도 다 모였다.”
보슬이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이제 필요한 건 하나뿐이지.”
“뭔데 ”
“괴로움과 울부짖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순간이다.
보슬의 모습이 사라졌다.
“피해!”
세주가 외쳤다.
그의 동체시력에도 잡히지 않는다.
빛이 번쩍인다.
본능적으로 전신에 배리어를 가동했다.
-형이 아냐!
그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파.”
안나였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모드 온 재생의 성역.’
-가동.
훙.
그를 중심으로 빛이 퍼진다.
그들의 뒤 오른손에 피 칠갑을 한 보슬이 입을 연다.
“김산도, 존도 다 장난감일 뿐이다. 그들을 해치운 걸로 이긴 줄 알았나 ”
김보슬, 진짜 괴물의 본모습이었다.
그는 웃지 않았고, 물끄러미 그들을 볼 뿐이었다.
“반세주, 반세주, 먹을 순간이구나.”
안나의 전신에 어린 황금빛이 흐려진다.
“노블 에너지의 중심을 부쉈다.”
국어책 읽듯 말하는 보슬이다.
“이 새끼.”
“형님.”
치용이 세주의 앞을 막는다.
유진이 그 옆을 지킨다.
퉁.
그리고 가벼운 소음.
펑!
이어지는 폭음이다.
인준이었다.
반대편에서 유탄 발사기를 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통하겠지 ”
“말이라고 하냐 ”
치용이 핀잔을 줬다.
보랏빛 배리어를 두른 보슬은 좀 전까지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말없이 손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