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 조력
몇 년 전, 며칠 밤을 새우며 논문을 쓰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사방이 전부 폭격지대다.
단지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터져 오르는 게 다를 뿐.
“나기주 부대원을 모아!”
인준이 외쳤다.
벌써 여러 번, 사람들을 구했다.
그 와중에 모인 이들이다.
나기주가 붙어 한 축을 이끈다.
그가 이끄는 무리는 꽤 크다.
미쳐버린 콴의 자폭 테러는 언제 끝날지 몰랐다.
‘여섯 무리.’
인준이 나눈 무리의 숫자다.
적의 반항은 거세지만, 아직 죽은 이의 숫자는 적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문제는.
‘끝이 안 나.’
“어흥!”
폭발에 아랑곳하지 않는 치용의 기합이다.
그가 달리며 거대한 푸른 블레이드를 지면과 수평으로 그었다.
콰가가가가각!
적어도 수십의 콴이 폭발할 틈도 없이 베여 죽는다.
녹색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그래도 무리다.’
인준은 이 와중에 냉정을 찾았다.
“기동 가능한 사이클롭스, 주변 아군을 데리고 부상한다!”
더 싸우는 건 무리다.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남은 사람은 어쩔까?
어쩔 수 없다.
‘차라리 화력을 집중해서 소거를?’
이런 고민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 머리를 굴릴 사람이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리다. 대머리.”
머리털이 난 지 언젠데, 아직도 대머리라고 부르는지.
김치용의 목소리가 통신 장비를 통해 들어왔다.
“여기서 전부 죽일 순 없다. 곰.”
“트레에!”
다시 저 멀리, 대규모의 콴이 달려든다.
끝이 안 난다.
이대로라면 전부 죽을 뿐이다.
그러니, 도망갈 수 있는 인원은 살려야 한다.
물론 최대한 살릴 거다.
인준은 정리된 방향을 향해, 커다란 폭죽을 쏘아 올렸다.
섬광탄의 일종이다.
투웅!
연기를 뿜으며 보랏빛 하늘을 난 탄이 공중에서 폭발한다.
파-앙!
“전부 빛이 난 쪽으로 퇴각!”
외치고 인준은 대규모 콴을 향해 날았다.
동시에 치용에게 말했다.
“남아 있는 거 정리하고 와.”
“나랑 바꿔!”
치용이 반항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곰.”
대규모 콴에게 달려드는 건 죽는다는 소리다.
치용을 죽일 순 없다.
스스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동료더러 죽으라고 할 순 없다.
그건 그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한다.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 웅변가는 쓰레기일 뿐이고.
한 번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한 자 또한 쓰레기다.
인준은 치용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을 자리에 그를 몰아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현재 전황을 파악한 건 자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막는다.’
세주에게 받고, 스스로 단련한 힘과 기술들.
그거라면 시간벌기는 된다.
여왕을 부르짖는 저 미친 외계 괴물들을 멈추게는 못 해도.
‘늦출 수는 있다.’
콰가가각!
이미 전신 근육이 욱신거릴 정도로 싸웠다.
“저 새끼가!”
통신을 통해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지고, 무서운 속도로 인준의 곁에 누군가 선다.
치용이다.
“내가 한다고 했지!”
‘미친 새끼.’
“죽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인준은 치용을 설득하거나 말리는 걸 포기했다.
말 한다고 들은 인종이 아니다.
세지 않아도 물결처럼 달려드는 보랏빛 안개의 향연은 지금보다 배는 어려운 싸움을 예상케 했다.
인준은 확신했다.
‘여기서 죽는다.’
둥!
그 와중에 다른 이가 하나 더 붙는다.
은빛의 동체를 뽐내는 안드로이드다.
[대장에게 받은 명령은 부대원의 보호, 제가 막습니다]
실버다.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많다.
아니, 미친 기계라고 해야 하나.
인준은 무시했다.
어차피 온 놈들이다.
가라고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아깝다.
“나기주, 넌 안 돼. 아군을 이끌어서 빠져.”
대신 미리 말한다.
통신기를 통해 나기주에게 통보했다.
나기주만 한 힘을 갖춘 초인도 흔치 않다.
적어도 빠져나갈 힘은 있어야 한다.
두두둥!
위쪽 함선의 화력이 달려드는 콴에게 떨어진다.
“트레이!”
[여왕의 가호!]
통역기와 귀를 통해 전혀 다른 언어가 귀를 찌른다.
성대가 찢어질 만큼 한목소리로 외치는 콴의 무리 위.
보랏빛 안개가 뭉쳐, 방패를 만든다.
꽈과과광!
폭음이 대기를 울린다.
놈들의 배리어는 너끈히 함선의 포격을 막았다.
배리어의 보랏빛을 그대로 만든 채, 놈들이 달려든다.
“오냐, 다 죽여주마.”
치용이 이를 갈고 놈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인준도 손에 쥔 기관총 총구를 앞으로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통.
배리어 위쪽.
축구공만 한 구슬이 후두둑 콴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저건 또 뭐야?”
아군의 비밀병기일까?
아니다.
아군의 함선은 전부 등 뒤.
그리고 저 구슬이 떨어진 건, 콴의 머리 위다.
보랏빛 노을 위로 시선을 두자, 노을 뚫고 둥근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뜨기 시작하는 해처럼, 천천히 강하하는 것.
[함선 포착]
실버가 일부를 보고, 전체 모습을 그리고 말한다.
[…인류 최강의 방패, ‘노아’입니다]
실버가 말한다.
노아?
인준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다.
실버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에 댔다.
[안드로이드는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헛소리야.”
때마침 달려드는 콴의 머리 위, 구슬이 펑펑하고 터진다.
파지지직.
스파크가 튀고, 위에서 빛무리가 같은 게 흩날린다.
“물러나는 게 좋을 거다.”
통신이었다.
다른 주파수였지만, 뜻은 명확히 들렸다.
“누구야?”
인준이 말했지만, 답은 없었다.
아니, 답을 들을 틈이 없었다.
구슬이 터지자, 콴 놈들의 달리는 속도가 준다.
주는 정도가 아니다.
[여왕이시여!]
트레이! 트레이!
사방에서 들리는 외침이다.
이제까지, 필살의 각오를 머금은 그 외침에 절망과 절규가 깃든다.
그리고 그 위로 두두두둥!
이형포가 다발로 뿌려졌다.
퍼버버버버벙!
폭발과 함께 육편이 탄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콴의 팔다리조차 없다.
강렬한 화력이 적을 태우고 분쇄한다.
인준 일행이 뒤로 물러난다.
“저 새끼들이 새치기를 해버리네.”
치용의 김빠진 목소리가 들린다.
질문은 아니었지만, 실버는 그 목소리에 답했다.
[외계 인류입니다]
인준도 그제야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마침 통신도 들어왔다.
“나 벤이다.”
팽의 아버지이자, 심해의 쉘터 용궁의 전사.
“도우러 왔다.”
그의 목소리였다.
*
팍!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간다.
추진기를 계속 쓰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어차피 내달리는 것도 비슷한 속력을 낼 수 있는 셋이다.
세주의 뒤를 유진과 장왕이 따랐다.
세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미쳐버린 콴, 적에 비해 열세인 규모.
상황을 거듭 분석하던 세주는 짜증을 냈다.
‘야!’
-왜?
‘너 일 안 하냐?’
분석과 상황파악은 프로비던스의 몫이다.
-하는데?
이 새끼가.
‘지금 최선의 행동 지침은?’
-도주?
가장 합리적인 결정일지도 모른다.
미친 콴의 무리에 뛰어들어가자고 하는 것보다는 정상일지도.
‘내가 원하는 것에 근거해서 말해.’
-이제희.
프로비던스의 짧은 조언이다.
세주도 머리가 번뜩였다.
안 그래도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상황에서 세주가 할 수 있는 최선.
지금 전장으로 뛰면 늦는다.
‘찾아.’
-맵.
짧은 명령에 짧은 대답이다.
맵에 하얗게 빛나는 점 두 개다.
이제희를 찾아서 지금 생각하는 걸 한다고 해도.
-전멸은 면해도 극심한 피해는 감수해야 해.
마음이라도 읽은 듯, 프로비던스가 말한다.
맵을 본 세주가 90도로 방향을 튼다.
파가각!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자, 드리프트라도 한 듯, 모래와 자갈이 튀었다.
파밧.
세주의 움직임을 보고 유진은 두 걸음 더 나가서 바로 뒤를 쫓고.
장왕은 비틀거리며 방향을 바꾼다.
바꾸며 장왕이 입을 연다.
“대장님?”
대답할 시간은 없다.
“쉿.”
유진이 장왕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달리면서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묘기다.
세주는 달리면서 눈을 빛냈다.
맵에 보이는 이무영과 이제희 쪽.
보랏빛 점이 모인다.
-콴이야. 잘못하면 늦겠는데.
에너지 손실을 염두에 둘 때가 아니었다.
그대로 추진기며,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던 찰나다.
맵 위로 푸른 점이 나타난다.
아군은 현재 흰 점.
적은 보라.
파랑은.
-뉴 페이스네.
메카니모스? 바이탄?
하지만 푸른 점이 나타나자마자 보랏빛 점이 줄어든다.
‘아군?’
팟!
저 앞쪽, 빛이 번쩍인다.
레이저 포의 빛과는 다른 번쩍임이다.
세주는 땅을 박차는 발에 힘을 더 줬다.
더 빨리, 저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군이라면 다행이다.
지금은 갓난아기 손이라도 빌려야 될 판이다.
퉁.
한걸음에 몇 미터를 달리며 그대로 질주한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세주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비틀 쉽 오십 기가량과 함선 다섯 척.
그 밑,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는 콴의 육편 쪼가리들.
“여어.”
동공이 두 개인 인간이다.
“니들이 왜 여기?”
벤의 직속 부하이자, 론이라는 이름의 전사는 피식 웃었다.
[한 손 거들러 왔습니다]
뒷이야기는 나중이다.
세주는 이제희를 찾았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자, 무영이 앞을 막는다.
안 잡아먹는다. 작작 막아라.
“비켜.”
“용무는?”
일일이 말로 설명할 시간도 없다.
훅.
손날로 그대로 목을 내려친다.
피할 것도 계산하고, 단단한 육체 강도도 계산한 일격이다.
보통 성인이라면 목이 잘릴지도 모르지만.
발해 팀 3대장이라면.
그걸 외계 인간이 가까스로 막았다.
[지금 이 인간은 EMP를 맞은 상탭니다]
노블 에너지가 하나도 없다는 소리.
-아까 그 빛, 어쩐지 재수 없어 보이더라니. EMP를 쏘고 그 위로 광선포를 날린 거네.
보지도 않고 프로비던스가 상황을 맞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란 거다.
세주는 무영을 가볍게 밀쳤다.
“컥!”
실 끊어진 연처럼 무영이 날아갔다.
턱.
유진이 그걸 받는다.
세주는 제희를 보고 물었다.
“전의 생산 플랜트 어디 있냐?”
콴은 여왕이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이곳의 여왕은 페이크다.
이들은 여왕의 아이라지만.
사실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일 거다.
비효율적인 성교와 임신이 아닌, 플랜트를 이용한 탄생.
제희의 능력은 친절하게 딱딱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본 기억에는 다른 정보도 있을 거고.
생산 플랜트에 대한 정보도 있을 게 뻔하다.
퀸즈 네스트는 강력한 재밍 시스템이 발동하고 있어, 프로비던스도 찾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세주 반경 몇 미터를 훑는 게 전부.
그리고 현 상황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
적의 지원군을 끊는 거다.
그 방법 중 가장 최선은 여전히 생산 플랜트를 부수는 거고.
“빨리!”
세주가 다그쳤다.
“…네?”
-이럴 시간 없어.
프로비던스가 말한다.
그 사이, 론이라는 외계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도 그걸 찾다가 이 둘을 발견한 겁니다. 빨리 안 하면 저쪽 전장에 아무리 우리 쪽 함선이 참여했다고 해도 전멸일 겁니다]
다 아는 걸 길게도 설명한다.
세주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브로.’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제희의 이마를 쿡 하고 눌렀다.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다.
아니라면, 여자의 그것도 말처럼 큰 처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싶진 않았다.
‘모드 온 링크.’
파직.
가벼운 스파크와 함께다.
“으으윽.”
다행이다.
EMP를 맞은 이제희는 반항할 힘 따윈 없었다.
덕분에 프로비던스가 만든 나노봇이 그대로 그녀의 뇌를 침투했다.
얻어야 할 건, 조금 전에 얻은 기억.
파바바밧.
짧은 몇 분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찾았어.
“전 함선, 방향 전환.”
세주가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동시에 달리며 말을 이었다.
“내 꽁무니 따라와!”
파바박.
그가 달렸고, 유진과 장왕이 다시 따른다.
그리고 그 뒤를 외계인의 함대가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