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 도망갈 자신이 있거든.
파앗!
일레븐의 몸이 나노 안드로이드 로봇 형태로 흩어졌다.
이형포가 배리어에 막힌 직후다.
처음부터 최강의 형태를 유지한 것, 일레븐의 판단은 정확했다.
실버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눈에서 레이저를 뿜었다.
콰우우!
흥분된 에너지 플랜트가 여전히 콸콸 힘을 준다.
파아앗!
앞을 파리 떼처럼 막는 걸 보고 실버는 양손 등 위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쿠우우우!
푸른 칼날이 더 크게 솟는다.
슁!
앞으로 엑스자로 교차하고 긋는다.
앞쪽으로 빠르게 스며드는 일레븐의 일부가 그에 맞고 터졌다.
파바방!
실버는 일레븐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았다.
이들을 만든 건 골드다.
그리고 골드가 할 수 있다면 실버도 할 수 있었다.
위잉!
레이저를 뿜던 눈이 은은한 빛을 뿌렸다.
파각!
일레븐의 일부가 다시 달려든다.
‘나노 안드로이드의 전투 형태는 적의 몸을 파고드는 것.’
레이저도, 강력한 에너지 블레이드도 없지만, 적을 죽이는 데 가장 합리적인 수단을 갖췄다.
대인도, 대량 살상도, 가능한 안드로이드.
그게 일레븐과 투엘븐이었다.
다시 세 걸음.
실버가 뒤로 물러났다.
적이 쇄도하는 만큼 딱 필요한 정도만 거리를 벌린다.
흥분한 에너지 플랜트와 다르게 생각을 담당하는 제어장치는 차갑게 식었다.
실버는 적을 파악했고, 가장 합리적인 전투를 펼치고 싶었다.
‘나는 최초의 안드로이드.’
기능과 출력은 적이 더 강할 수도 있다.
대인 전투에 최적화된 안드로이드도 아니다.
세주의 선물로 전만큼이나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실버가 상대보다 강한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유리한 건?’
보는 것과 아는 것.
실버는 최초의 안드로이드, 적어도 이들보다 배는 경험이 많았다.
실버는 봤고, 파악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라이플을 꺼냈다.
프로비던스가 만든 몸이다.
당연히 인벤토리 능력도 갖춘 형태다.
쾅!
라이플에 담긴 광탄을 바닥으로 쏜다.
푸왁!
충격으로 모래가 위로 뻗었다.
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적의 가장 큰 장점은 무수히 많은 눈.’
시각장치가 탁월하다.
거기에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나노 안드로이드 형태이기에 일거에 태울 수 없으면 에너지를 소모해서 무수히 재생한다.
일시에 소거하고, 피해는 입지 않는다.
골드도 아니고, 그가 낳은 자식에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형태는 방사, 타입은 화염.’
가진 것을 활용하는 건, 실버의 특기다.
모래 밑으로 숨었다.
적의 시각장치에 사각을 만들어야 했다.
위잉!
일레븐이 기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로 물러나고 바닥에 광탄을 쏟아낸다.
쾅! 쾅!
모래가 더 높게 솟으며, 파도처럼 주변을 덮쳤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둬놓고 태우면 되지만, 강력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안드로이드 기체다.
태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불가능에 가깝지, 아예 불가능은 아니다.
모래로 시야를 가리고 양손 등에 솟은 에너지 블레이드를 거둔다.
세주는 실버를 놀게 두지 않았다.
“너 인간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며?”
[맞습니다]
“그럼 너도 구르면 더 나아지겠네?”
실버는 그때 이상한 감각을 체득했다.
나중에야 그 감각이 뭔지 알았다.
불길함이란 거였다.
그 이후, 세주는 실버를 굴렸다.
그렇게 배운 기술 중 하나다.
‘응축.’
전신에 에너지를 모은다.
끼이이잉.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 이명이 내부에서부터 울렸다.
그리고 실버는 기다렸다.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 때까지.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라이플 광탄을 소모했다.
커버링 기술까지 배웠지만, 그런 재주는 배제한 정직한 탄이다.
쾅!
다시 한 발.
땅에 꽂힌 탄 덕에 모래가 다시 시야를 어지럽힌다.
나노 로봇이 한순간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는 전방위를 감싼다.
쏴아아아아.
소나기 같았다.
순간 전신에 내리꽂히는 빗줄기같이 쇄도한다.
실버는 기다렸던 순간이고.
일레븐으로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10%만 남기면 충분.’
계산은 끝났다.
실버는 에너지 플랜트의 출력을 순간 여덟 배로 올렸다.
동시에 전신으로 에너지를 광자로 변환해 뿜었다.
뻐어어엉!
커다란 애드벌룬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실버의 전신에서 푸른색이 엉킨 밝은 빛이 터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 부근, 에너지 플랜트에서부터다.
어지간하면 쓰지 말라고 봉인했던 기능 중 하나였다.
안드로이드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기동한다.
공급은 내장된 소형 플랜트에서, 출력은 에너지 블레이드, 광학무기 등 다양한 ‘무기’를 이용한다.
하지만 지금 실버가 한 짓은 달랐다.
에너지의 성질만 변환시키고, 순수한 폭발을 유도했다.
파지지지직.
전신에 전류가 흐른다.
90%.
가진 에너지 대부분을 터트렸다.
쿵.
갑자기 줄어든 출력량 덕분에 실버는 왼쪽 무릎을 꿇었다.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남은 에너지 잔량이 형편없다.
저 멀리 달려오는 기계병을 상대하는 것도 힘든 수준이다.
회복하기 위해 적어도 48시간은 필요하다.
대신 몸을 혹사한 대가는 만족스러웠다.
작은 형태, 나노 로봇이 되어 그를 덮치던 일레븐은 흔적도 없었다.
끼이잉.
모래 먼지가 낀 관절에서 듣기 거북한 소음이 흘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상대 기계병이 몰려드는 걸 본, 실버가 양손에 라이플을 들었다.
에너지가 없다 해도, 그에게는 무기와 훈련받은 기술이 있었다.
인간, 반세주는 안드로이드라고 봐주는 게 조금도 없었다.
농축된 경험은 그를 훌륭한 일당백의 전사로 바꿨기에.
두두두둥!
그는 원거리에서 적을 발견하자마자 광탄 세례를 쏟아 부었다.
불리할 때는 선수 필승이다.
*
세주는 적을 보고 물러나는 대신 위로 뛰었다.
콰우우!
아머에 달린 분사기가 푸른 불꽃을 뿜었다.
-나노 사이즈 안드로이드네.
실버의 연산장치가 아무리 훌륭해도 프로비던스의 밑이다.
세주는 적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건 프로비던스가 할 일이다.
-일거에 태우는 게 좋지만, 놈들의 내구도를 따졌을 때, 에너지 낭비지.
‘아아.’
그거면 정보는 충분하다.
쾅!
벼락이 다시 광탄을 토했다.
적의 일부가 소멸한다.
하지만 큰 피해는 아니다.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
부서진 몸을 수복하는 시간이 1초도 채 안 걸린다.
추정 에너지 2,700만, 넘치는 에너지로 놈은 고속 재생했다.
“으흠.”
밑에서부터 위로 솟는 검은 그을음이다.
세주는 몸을 비틀며 발을 땅과 수평으로 들었다.
콰아아!
순간 속도가 높아지며, 적의 공격을 회피했다.
틈이 있었지만, 세주는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을 안 한 정도가 아니라, 벼락을 회수했다.
그의 손에 있던 라이플이 사라진다.
적이 무서운 속도로 세주를 쫓았다.
-어쩌게?
프로비던스가 물었다.
뒤를 힐끔 본 세주가 속으로 읊조렸다.
‘무기 변환, 연사.’
대답 대신이다.
고속 재생이라지만, 어쨌든 파괴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부수면 그만이었다.
퀴이이이잉!
데저트 이글 모양의 권총 두 정이다.
세주는 손에 잡힌 무기에 혈관이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다.
실제로 연결된 건, 혈관이 아니라 노블 패스다.
푸른 선이 손끝에서 뻗어 나가 총구 끝에 도달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틈에 적의 검은 손길이 바로 등 뒤까지 쫓아왔다.
“손 씻고 와. 새끼야.”
세주의 몸이 동그랗게 말리면서 공중에서 반전했다.
그리고 그의 양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 쪽이 땅으로, 다리를 하늘로 세운 거꾸로 선 자세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둥!
고속연사포.
세주가 이름 붙인 형태 중 하나였다.
무기에 에너지를 몽땅 박아 넣으며 추가한 형태다.
제 몫을 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에너지는 질량, 무게가 없다.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총에 반동이 없었다.
하지만 세주는 양팔이 덜덜 떨렸다.
고속연사, 눈앞에 빛의 소나기를 내린다.
하물며 탄 하나하나가 세주의 커버링 기술을 머금은 탄환이다.
세주는 사방이 고요해지는 걸 느꼈다.
켠 모드는 에임.
붉은 점을 눈앞에 두고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마흔 발은 마구잡이로 쏴도 적중했다.
하지만 그 이후, 현저히 줄은 적의 숫자 덕에 조준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십 발을 더 쐈다.
적의 숫자가 확연하게 준다.
까만 그을음이 바닥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세주는 모래가 흩어지며 생기는 먼지 한 가닥까지 눈에 보였다.
사라아아아아악.
모래가 흩날리는 걸 보며 세주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오버 클럭 모드 까지는 아니지만, 임의로 ‘집중’상태로 들어선 상태다.
들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봤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래와 저 멀리 다가오는 기계병.
그리고 뒤로 물러나는 실버까지.
주변 모든 상황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퍽.
또 코피가 터졌다.
혈관이 터져 흐른 피가 차갑다.
그게 밑으로 흐른다.
그 감각에 세주는 깜빡 잊었던 걸 깨달았다.
‘총 쏘는 중이었지.’
그는 다시 눈을 돌렸다.
주변에 뒀던 집중력이 다시 적을 찾는데 돌아왔다.
눈을 밑으로 돌렸다.
지금 세주는 모래 사이에 숨은 작은 점 하나까지도 찾을 수 있었다.
두두둥!
양손에 고속연사포는 여전히 불꽃을 뿜고 있었다.
파괴되고, 부서지고, 흩어진다.
결국, 도주를 택한 투엘븐이지만.
세주의 총알은 용서를 몰랐고, 주저가 없었다.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부순다.
적이 말 한마디 할 틈도 없었다.
퍼-엉! 퍼-엉!
집중 상태를 푼 순간, 소리가 뒤늦게 찾아와 귀를 때렸다.
동시에 그제야 입술 위로 피가 고인다.
흐른 코피가 바닥에 뚝 떨어졌다.
까맣게 타고 부서진 투엘븐에 사체 위로 피가 흘러 스며들었다.
푹.
파헤쳐진 모랫바닥이다.
발목까지 박힌 채 세주는 옆을 돌아봤다.
파아아아앗!
타이밍 좋게 실버가 적을 죽이는 걸 봤다.
-형은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만큼 합리적인 사람이 어디 있냐?’
-지구에 있는 합리적인 사람을 다 죽일 작정이야?
쌍놈의 기계 새끼.
“후아. 실버. 너 너끈히 해치우지 못하겠냐?”
[…대장이야말로]
응?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인간에게 충성하는 걸 삶의 낙으로 삼는 저 안드로이드가 지금 뭐라고 한 건지.
[적이 옵니다]
실버의 경고대로다.
세주는 라이플을 들었다.
피곤했다.
오버 클럭 모드를 열었던 때처럼 어질어질하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맥없이 쓰러질 생각은 없다.
‘에너지 쓸어 담아.’
-그런 건 안 시켜도 합니다.
건방진 프로비던스를 외면하고 라이플을 들었다.
“염병.”
다가오는 기계병의 숫자를 본 세주가 투덜거렸다.
더럽게 많았다.
까맣게 앞을 채우는 놈들을 보고 세주는 실버에게 물었다.
“상태는?”
[평소의 10% 출력입니다]
“고물상에 팔아먹을 놈이 늘었네.”
이런 순간이면 당연히 대장을 위해 희생도 하고 앙? 고생도 하고 그러는 거 아냐?
정작 고생은 세주가 하게 생겼다.
두두두두두두두!
과거, 중국의 인해전술이 몰려올 때,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지들이 무슨 개미 새끼들도 아니고, 진짜 무지막지한 숫자다.
“근데 이것들 왜 이렇게 늦어.”
세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견착 후 벼락의 방아쇠를 당겼다.
쾅!
적의 전투력을 측정해보고 싶었다.
과연, 전장에서 이놈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반반이다.
한 놈에서 두 놈.
숫자가 늘어나면 다시 뇌를 태우며 싸우는 방법이다.
비효율적이다.
지쳤고, 세주는 자신이 조금 무모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필요했다.
“이 게으른 새끼들.”
자신의 부대원이.
“아, 염병할 형님아! 커어어어어엉!”
기다렸던 목소리다.
불만 가득한 치용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다다다당!
그것도 뒤쪽도 아니고 적의 옆이다.
옆쪽 무리가 박살나고 흩어진다.
“저 새끼 이번에는 정말 짜증났어.”
그리고 뒤에서 인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양손에 들린 기관총을 보는 순간 세주는 벼락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힘들다.”
그리고 주저앉아 버렸다.
[대장]
팽과.
“왜 두고 갔습니까?”
유진도 왔다.
“내 마음이지.”
세주는 피식 웃고 말했다.
여유가 있었다.
무려 1년.
세주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토할 정도로 이들을 굴렸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라면.
1만 대군도 두렵지 않았다.
그 응축 된 힘이 적을 쳤다.
기계병 숫자가 줄어든다.
방금 산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지는 속도만큼이나 퍽퍽 준다.
그걸 보며 숨을 돌리자 프로비던스가 물었다.
-진짜? 10만 대군이 안 무서워?
꼭 초를 치는 놈이다.
세주는 진짜 두렵지 않았다.
‘응.’
-진짜?
이 자식이, 자꾸.
세주는 한 번 쉬고 말을 이었다.
‘도망갈 자신이 있거든.’
-그러면 그렇지.
아니, 십만의 병력 앞에 열 명도 안 되는 숫자로 왜 덤비냐 이 말이다.
그건 자살행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