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 중용의 팽
콴은 빠르다.
사이드는 그걸 실감했다.
‘그런데 다섯이 아니었던가?’
달려서 놈들을 쫓았다.
5시간을 주구장창 달렸지만, 놈들을 놓쳤다.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이드는 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양동작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리는 쪽이 틀렸다.
자신은 고작 전투 드론 오십 기를 대동하고 뛰었을 뿐이지만.
본대에는 그보다 배가 넘는 병력이 남아 있다.
6급 전투원 다섯과 전투종, 드론, 함선 방어시스템까지.
그러니까 양동작전이었으면 자신을 노리는 게 옳다.
[빌어먹을 놈들]
욕이나 한 사발 해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기보고 겁쟁이라고 했으면서 도망가는 발이 광속이다.
본대로 향하던 사이드가 발을 멈췄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회색 연기 줄기가 보였다.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리고 본대를 확인한 그는 자신의 렌즈를 한 번 박박 닦았다.
믿을 수 없는 걸 본 그의 렌즈에 빛이 흔들렸다.
무너져 내린 땅, 휑하니 모습을 드러낸 함선 내부와 사방에 잘린 전투종의 시신이 보인다.
사이드는 함선 내부로 뛰어 들어갔다.
[바스]
렌즈를 회전시켜 연발 이형포를 쏘던 6급 전투원의 머리가 보였다.
죽었음은 확인 할 필요도 없었다.
머리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으니.
그 뿐 아니었다.
본대에 남은 6급 전투원 중 열 중 여섯이 죽었다.
[연구실이]
메카니모스의 가장 핵심 시설이다.
그들에게 연구실은 복싱 선수의 주먹이자, 육상 선수의 다리와 같다.
그들의 모든 것이자, 자식과도 같은 시설.
그 안에 야수가 뛰어 들어와 난리라도 친 것처럼 사방에 칼날 자국이 가득하다.
그 안쪽이다.
쿨럭!
기침소리가 들린다.
사이드가 그쪽으로 렌즈의 빛을 비추자, 다 죽어가는 이가 보였다.
렌즈의 빛이 깜빡거리는 6급 전투원 중 하나다.
[함장님]
[어떻게 된 일이냐?]
사이드가 묻자, 전투원이 자신의 메모리 칩을 꺼낸다.
사이드가 그걸 받았다.
그리고 곧 섬유 줄기 같은 목 사이로 끼웠다.
슉 하고 메모리 칩이 사라지고, 사이드의 머릿속에 그가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이 보였다.
다중영상재생 시스템이었다.
영상을 훑어보는 건 금방이었다.
사이드의 눈을 대신하는 렌즈의 빛이 번쩍였다.
연구실을 부순 이 빌어먹을 콴 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추적한다]
*
사이드가 쫓아오자마자 세주의 몸이 공기 중에서 흐릿해졌다.
그리고 옆으로 슬쩍 밀려난다.
이미 약속 된 행동이다.
증인이자 입김이 강하고 눈썰미가 좋은 놈을 밖으로 유인한다.
유인당하는 놈, 이 무대의 또 다른 주연인 사이드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놈을 달고 넷이 달린다.
그리고 세주는 남았다.
‘브로.’
남은 놈들이 통신이라도 해서 꼰지르면 작전은 거기서 끝이다.
-재밍 완료.
통신을 차단한 세주가 양 손등 위로 청백색 칼날을 뽑았다.
그리고 본대로 뚝 떨어졌다.
위이잉!
전투 드론 다섯 대가 다가왔다.
세주가 허공에 펀치를 날렸다.
칼날 끝이 분리되어 날아가 드론을 부순다.
‘봤냐? 커터 칼 날리기다.’
-자랑 할 때야? 언제 올지 모르니 빨리 끝내.
기습해서 콴과 메카니모스의 사이를 나쁘게 한다.
그게 작전의 끝이라면 싱겁다.
우라질 나게 열 받게 한다.
이게 적당했다.
[메카니모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거라면, 연구실이지]
팽의 조언을 들은 세주의 목표는 뻔했다.
“트레!”
적들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손등에서 뿜어낸 청백색 칼날을 들고 달렸다.
달리는 칼이라는 별명에 걸 맞는 움직임을 보일 차례였다.
콰가가각!
벽에 대고 칼날을 긋고, 적을 분쇄한다.
적과의 통신을 끊으며 이 일을 할 사람은 세주뿐이었다.
뻥!
연구실에 붙은 호스를 발로 밟아 터트린다.
그리고 광편 수류탄을 뒤로 던졌다.
꽈과광!
빛의 폭풍이 그 안을 휩쓸었다.
전부 죽일 순 없었다.
여기에 누가 있었는지 증명할 놈들이 필요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바닥을 박찬 세주가 맵을 확인했다.
지겨운 놈이 아직도 넷을 쫓고 있었다.
세주가 부리나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잠시 뒤, 일행을 찾은 세주는 사이드가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합류했다.
“아따, 그 놈 갔습니까?”
세주를 본 치용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옆에서 팽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아도 뭘 묻는지 알 것 같다.
“연구실은 다 작살내고 왔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돌아가요?”
유진이 그런 세주를 보고 묻는다.
그들은 타고 온 소형 우주선 쪽으로 달렸다.
우주선에 오른 뒤쪽에서 레이저 포가 날아왔다.
쿵!
순간적으로 배리어를 펼친 유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빠른데요.”
추격이 빠르다.
사이드 놈이었다.
어느새 본대를 확인하고 그들을 쫓아왔다.
‘재밍 풀렸어?’
-아니, 다른 방식으로 추적한 것 같아.
맞았다.
사이드는 적에게 본대를 습격당한 시점에 정신을 차렸다.
콴 놈들의 기술이 발전했다는 가정 하에 그는 불협화음을 찾았다.
전파가 유유히 흐르지 않는 곳, 발상을 바꾼 후 추격은 금방이었다.
어쨌든 이곳은 그들의 행성이자 거점이다.
이 행성에서 그들은 8은하 괴물들의 기술을 쓸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사이드는 막 도주하는 적의 비행체를 눈앞에 뒀다.
[격추]
그르르르릉!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진 직후, 땅이 울었다.
지대공 레이저 포, 이형포 오백이다.
전초기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행성.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밑에서 적의 이형포를 본 세주는 미소를 보였다.
치용이 미간을 모으고 밑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쓸어버립시다요.”
“무리.”
세주가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겨우 전초기지 하나.
팽의 말을 따르자면 이 전초기지 하나 없앤다고 해서 메카니모스가 받는 타격은 없다.
그러므로 작전을 성공시키는 게 가장 우선이다.
콴과 메카니모스를 싸움 붙이는 것.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망가는 것도 무리 같은데.”
[위험]
“형님?”
인준, 팽, 유진이 동시에 입을 연다.
세주는 그들에게 답하는 대신 팽에게 손을 뻗었다.
“우주선 조종간 넘겨.”
그들이 나포한 함선과 조종하는 원리는 같다.
몸이 젤라틴 같은 것에 잠기고 사방이 명확히 보인다.
밑에 선 500대의 이형포도 보였다.
이형포는 쉽게 말하면 기관총이다.
쉬지 않고 일형포의 레이저를 쏘는 기관 레이저 포!
전초기지의 방어력이 이 정도다.
메카니모스, 외계 종족의 힘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세주로서는 더더욱 놈들과의 전면전은 피해야 했다.
철저히 우주의 게릴라로 남아야 한다는 거다.
[조종은 내가 제일 나아]
팽이 말했다.
물론이다.
그녀는 훈련을 받았고, 이 비행체를 남자의 바이크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조종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보다 나은 파일럿이 있었다.
“넘겨.”
세주가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챘다.
팽은 이 순간에도 볼을 붉히며 세주에게 비행체의 모든 권한을 넘겼다.
순간 사방에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비행체의 주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
소형이지만 광속 비행이 가능하고, 도주용으로는 은하계 최고다.
우주선 모델은 콴이 사용하는 소형선, 비틀이다.
그 모델 이름을 듣고 보니 소형선 모양이 딱정벌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 독일 어디 회사의 차를 더 닮은 모양이기도 하다.
모델은 비틀, 팽이 지은 이름은 ‘프렌드’.
어지간히 친구가 없나보다.
비틀 쉽의 조종간을 받자마자, 밑에서 레이저 빛살이 쏟아진다.
후웅.
동시에 비틀 쉽이 요동쳤다.
“우리 살긴 사는 건가요?”
유진이 찢어지는 비명 대신 질문을 던졌다.
물론 산다.
세주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브로!’
-접수 완료.
세주와 프로비던스는 한 몸이다.
조종간은 세주가 아니라 프로비던스가 받았다.
그리고 제 입으로 수없이 말했듯, 불세출의 오버테크놀로지.
인류의 희망이자, 최강의 기계였다.
계산은 빠르고 움직임은 그 직후다.
하늘을 쏘다니며, 비틀 쉽이 레이저 포의 빛살을 피한다.
그야말로 신기 그 자체였다.
그걸 보는 세주는 웃었다.
치용은 덤덤했고, 인준과 유진은 절로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란 건 팽이었다.
[역시 대장!]
비틀 쉽 자체에 수평 제어와 중력 제어 장치가 없었다면, 그녀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을 거다.
제어 장치가 있음에도 미친 듯이 몸이 흔들렸으니까.
비틀 쉽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빠르고 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리다.
팽은 감격했고, 최고의 찬사를 보여야 했다.
세주를 본 팽은 양손을 들어 가슴을 받쳤다.
“응?”
그 기묘한 행동에 남자 넷이 눈이 모인다.
[날 가져 대장]
…어이?
그녀로서 최고의 찬사였다.
-하여간 사내새끼들이란.
그 바쁜 와중에도 프로비던스는 한 마디 날리는 걸 잊지 않았다.
“읍.”
인준은 순간 현기증이 일며 코 안에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걸 느꼈다.
치용은 웃었고, 유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세주는 안색을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지 좀 마라.”
안 그래도 인내라는 끈이 성욕이라는 촛불에 타고 있다.
비틀 쉽이 어느새 부드럽게 우주를 누볐다.
놈들의 행성에서 빠져 나온 거다.
“죽다 살았네요.”
유진이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나이스한 대사다.
무대는 끝났다.
놈들이 속았는지, 안 속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가는 겁니까?”
치용이 묻는다.
이전에 유진도 물었었던 질문이다.
“그럴 리가.”
인준이 고개를 젓는다.
그래. 이들도 이제 세주를 안다.
고작 요기서 분탕질 한 번 치고 갈 거면 출발도 안 했다.
“이제 시작이지.”
이런 대사는 비릿한 미소를 물며 말하는 거다.
“안 어울리는 얼굴입니다. 더 상큼하게 웃어보세요. 여자들은 그런 얼굴 싫어합니다.”
분위기 깨는 유진을 무시하고 세주가 허공에 손짓했다.
비틀 쉽에 내장된 은하 지도가 펼쳐진다.
기점이 되는 행성을 중심으로 거리와 이름들이 보인다.
“다음 목적지는 여기다.”
세주가 손을 찍은 곳.
세 종족은 은하를 얌전하게 나눠먹었다.
삼국지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는 듯하다.
그 와중에 인간은 줄기차게 얻어터지는 역할이라 안타깝지만.
세주가 가리킨 곳은 콴의 소행성 중 하나다.
메카니모스의 전초기지와 비슷한 행성 중 하나다.
“내가 또 공평한 사람이라. 여기도 한 대 때려줘야 옳은 거 아니겠냐?”
셋의 흡족한 표정이 보인다.
동시에 팽이 다시 가슴에 손을 올리려 하는 걸 본 세주가 급하게 그녀를 만류했다.
“넌 그거 하지 마라.”
팽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녀가 얌전히 손을 내린다.
잠시 궁리하더니, 입을 연다.
곧 죽어도 한 마디는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대장 당신은 도덕책]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지구에 있을 때, 경계병이 알려줬어]
팽을 지키라고 했더니, 누군가 작업을 걸었구나.
아주 그냥 사내새끼들이란 예쁘면 외계인이든 물고기든 다 상관없지?
그러니까 인어공주도 미녀라서 좋은 거지.
개구리처럼 생긴 공주였어 봐라.
잘도 인어공주랑 썸 타고 스킨쉽을 하겠냐고.
-남 말 하고 있네.
프로비던스가 세주의 가슴에 치명상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다.
‘야, 난 양심은 있거든?’
-강슬은 가슴 커서 좋아하는 거고, 안나는 가슴 작아서 싫은 거잖아.
팽의 가슴은 그 둘 사이에 중간을 지켰다.
중용의 팽이라고나 할까?
-눈깔 뽑아버리고 싶네.
‘넌 무슨 여자한테도 질투를 하냐?’
-그냥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형을 본 솔직함 감상일 뿐이야.
썩을 기계 새끼.
하여간 남 좋은 꼴을 못 봐.
그렇다고 팽을 어떻게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세주에게는 강슬이 있다.
글래머 중의 글래머가!
“가자, 콴 자식들 똥침하러.”
세주는 간단하게 상황을 일축했다.
비틀 쉽이 방향을 바꿨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