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 아는 놈
팽이 가르간을 처음 본 건, 태어난 지 열두 해가 지났을 때였다.
어릴 때부터 쫓기던 삶을 살던 그녀는 그를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잿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오롯이 선 괴물이다.
그 밑으로 죽어 쓰러 진 이들이 천을 넘었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붉게 물든 달이 그를 향해 비췄다.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꽂힌 것 같았다.
[팽]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줄곤 그녀를 돌보던 늙은 남자다.
[가야 된다]
다급함은 없다.
‘달리는 칼’은 덤비는 상대를 제외하고는 죽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죽지 않는다.
만일 지금 이들이 숨은 곳에 메카니모스의 전사가 왔다면 몰살이었을 거다.
팽은 얌전히 늙은 남자를 따라갔다.
부모는 없다.
형제도 자매도 없다.
팽은 가족이 없었다.
전부 죽었다.
대신 그녀는 이 도망자 집단, 스스로를 반란군이라 부르는 곳에 있었으며.
열 살부터 한 사람 몫을 한 반란군의 전사였다.
[대장이라면 이길 수 있어]
팽이 중얼거렸다.
[또 그 소리냐?]
간신히 탈출해서 함선에 오른 팽의 말에 늙은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편다.
비웃음이다. 하지만 팽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그의 냄새, 목소리, 모습, 모든 게 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왜 모를까?’
이렇게 기억 속에 생생한데.
마지막 그의 모습이 잠들 때마다 떠오르는데.
아무도 그를 모른다.
팽은 그래서 혼자였다.
가까이 지내는 누구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장이 필요해]
[대장이 있다면 우린 살 수 있어]
[대장에게 가자]
그녀의 모든 대화는 대장으로 시작해서 대장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런 팽을 반쯤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 대장이 누군데?]
열다섯이 되던 해,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물음이었다.
묻는 그 말에 팽은 손을 들어, 오른쪽 이마와 왼쪽 이마를 번갈아 찍었다.
기억나지 않아.
왜일까? 이제까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믿었던 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왜 기억나지 않지?
너무 오래 만나지 않아서?
아니다.
그녀는 알고 있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실상 그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설명하려고 하니 입이 턱하니 막혔다.
‘왜?’
대장이 그녀에게 했던 마지막 행동도 기억한다.
설명할 순 없지만 팽은 그 순간에도 믿었다.
‘대장은 존재해.’
말이 없는 팽에게 친구가 물었다.
[그가 인간이긴 해?]
[당연하지]
반란군은 전부 인간이다.
은하를 지배하는 세 종족에게 행성을 빼앗긴 불우한 이들.
그게 반란군이었다.
[거짓말쟁이]
동갑내기 남자애는 그렇게 팽을 바보로 만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그녀는 믿었다.
대장은 있다.
매일 밤, 그 날의 일이 떠오르는 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팽은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믿을 수 있었다.
콰가가각!
청백색 칼날이 적을 둘, 셋씩 찢고 벤다.
치용의 전투력도 대단했지만.
달리는 칼을 흉내 내는 대장은 압도적이었다.
베고 또 벤다.
7급 전투원 둘이 30초를 버티지 못한다.
전투종 300마리.
7급 전투원 열.
어지간한 콴의 전사를 죽일 적의 병력이다.
하지만 몰살당하기까지 채 30분도 필요치 않았다.
팽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맞았잖아.’
모든 반란군의 희망, 은하를 지배하는 세 종족을 물리칠 남자.
수 없이 그녀가 외치고 말해왔던 대장이다.
반란군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은하계 최고의 전투력을 지녔다는 가르간과 비견되는 ‘인간’이 이곳에 있다!
[카르릉!]
팽이 자기도 모르게 기쁨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적을 몰살한 넷이 그녀를 돌아본다.
“치용을 닮아가나?”
세주가 중얼거린다.
“끔찍한 소리다.”
인준이 답하고, 유진이 다가와 팽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어흥!”
치용이 답을 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야, 조심하라고.”
세주가 그런 치용을 나무랐다.
주변 적을 다 죽였다고 해도 그들은 위장 전투 중이다.
계략을 써서 적을 속이는 중에 걸릴 일은 삼가는 게 옳다.
“빠져서 상처 치료한다.”
세주가 입을 열어 말하자, 그들이 한쪽으로 움직였다.
‘재밍.’
-맡겨 둬.
프로비던스가 적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도록 방해하는 전파를 뿌렸다.
바위산이 보였다.
메카니모스의 전초기지는 행성이자 함선이다.
식민지로 삼은 행성을 함선으로 개조한 물건이다.
그렇기에 주변 지형이 일반 행성과 흡사했다.
“휴식.”
세주가 명령을 내리고 앉았다.
전투는 빠른 시간 안에 끝냈다.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크흐흐.”
치용은 허벅지가 쩍하니 벌어질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세주도 여기저기 데이고 찢긴 상처가 남았다.
그들은 강하지만 인간이다.
아머 없이 제대로 된 일격만 맞으면 그대로 먼지처럼 스러질 거다.
인간의 육신은 단련함에 따라 강철만큼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레이저 포를 견딜 만큼 단단해질 순 없었다.
유진이 부지런히 나노킷 광선을 뿌렸다.
“몇 번이나 이런 전투를 할 작정이야?”
콴의 전투 스타일은 사출 무기를 자제하고 근접전을 주로 한다.
인간의 몸으로 따라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몰라.”
세주는 솔직하게 답했다.
언제까지는 무슨 언제까지.
놈들이 속을 때 까지다.
그러기 위한 준비는 지금도 하고 있었다.
*
이 작전의 기초는 팽이 알고 있는 정보에 근거했다.
애초에 이제까지 보지도 못했던 적의 전초기지를 찾는 법도 그녀 덕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전의 핵심은 ‘기만’이다.
그러므로 적을 속이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적의 수뇌는 누구인가?
이 전초기지를 점령하는 놈을 안다면, 그놈의 성격만 알 수 있다면 성공률이 높아질 거다.
[기지는 이 아래]
메카니모스는 취향이 고약한 놈들이다.
연구 시설을 항상 갖추고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 와중에 성공한 실험을 통해서 자신들의 몸을 개조하는 변태 놈들.
팽이 가리킨 곳은 지하였다.
프로비던스의 재밍 덕에 놈들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적의 습격 덕에 풍족하게 에너지를 꾸역꾸역 먹은 프로비던스가 대규모 스캐닝을 끝냈다.
그 덕에 세주는 홀로그램 맵을 보며 적이 없는 경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인사해.”
무표정하게 세주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인준이 나섰다.
그가 어깨에 걸친 건, RPG-7 대전차로켓포를 닮았다.
물론 일반적인 화약을 이용한 포는 아니었다.
포신 앞쪽, 구멍에 빛이 뭉친다.
끼이이이잉.
핸디형 일형포다.
콰앙!
레이저 포가 바닥을 뚫고 들어간다.
꽈과광!
밑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후폭풍의 영향으로 인준의 발이 가볍게 떴다.
사람 하나는 너끈히 들어갈 구멍이보였다.
“던져.”
밑으로 강습? 적이 몇 명인지 파악도 못했다.
그 대신 세주는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
그동안 얻어맞으며 외계인의 기술을 연구한 인류다.
그들이 만든 선물 중 하나였다.
광편光片수류탄.
인준과 치용, 유진이 각각 다섯 개씩.
총 열 다섯 개의 수류탄이 떨어졌다.
터지는 순간 사방에 레이저 탄을 뿌리는 수류탄이다.
맞으면 아야 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꽈과과과광!
밑에서 끔찍한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속이 다 시원하네.’
그동안 당하기만 했다.
역으로 놈들의 기지에 폭탄을 집어 던졌다고 생각하니, 속이 뻥하니 뚫린다.
-이제 시작이야.
프로비던스의 경고가 들렸다.
그래. 이게 끝이면 서운하다.
터진 곳에 반응이 시원찮다.
“하나 더 파자.”
세주가 시원하게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왜 마중 나오는 놈들이 없는지, 예의가 부족하다.
다시 한 번 문을 세차게 두드려 줘야 했다.
*
사이드는 흥분하지 않았다.
은하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세 종족은 언제나 전쟁 중이다.
전투 드론이 터지고, 7급 전투원 열이 당했어도.
그는 흥분할 필요가 없었다.
메카니모스의 진짜는 5급부터다.
콴은 어지간하면 계급을 부여하지 않고, 바이탄은 계급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메카니모스는 다르다.
그들은 모든 걸 나누고 세분화 한다.
세 종족 중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며 은하계에서 가장 진화가 빠른 종.
그게 바로 메카니모스, 자신의 종족이다.
그런 메카니모스에서 5급의 전투원인 자신이다.
그는 7급 전투원과 전투종이, 적을 멸살할 걸,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리고 정찰 드론을 띄워 전투 장면을 본 순간.
[…달리는 칼? 뻗는 칼?]
콴의 미친개 두 마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놈들은 지금 전방에 있는 것 아니었나?
더구나 이 전초기지는 그리 중요한 거점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지 방어 태세 전환. 색적 레이더 발동]
차분하게 명령한 후, 머리를 굴렸다.
적이 원하는 건 뭘까?
전초기지의 파괴?
이 기지의 목적은 지구 점령이다.
그걸 위해 보낸 전투원과 연구원이 실종됐지만,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구가 목적인 건가?
가르간이 기술력도 미약한 작은 행성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었다.
사이드가 홀로그램 화면을 바꾼다.
푸른 별이 보인다.
‘저게 목적?’
한참 머리를 굴리는 데, 적을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적의 위치는?]
[보이지 않습니다]
승무원 중 하나다.
콴의 기술은 메카니모스보다 떨어진다.
그들은 고리타분하게 아직도 여왕을 모시는 멍청한 족속이다.
[그들의 재밍 기술로 우리의 색적 레이더를 피할 순 없을 텐데?]
[알 수 없습니다]
승무원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펑!
폭음이 들렸다.
[1갑판 안쪽, 일형포 흔적]
‘습격?’
깜짝 놀랄 틈도 없다.
꽈과과광!
엄청난 폭음이 다시 들리고.
기우뚱하고 몸이 흔들릴 정도로 지반이 붕괴된다.
시스템이 습격당했다는 표시로, 사방에 붉은 빛이 번쩍였다.
[1갑판 전투종 전멸]
[전멸?]
이게 무슨 개소린지.
사이드가 홀로그램 화면을 돌린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칼날로 만들어 진 폭풍이라도 몰아쳤는지 엉망이 된 방이 보였다.
[다 죽었네]
사이드는 허탈함을 느꼈다.
그는 섣불리 공격을 지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행성을 점령할 때도 적이 하나라도 남아있는지 세 번은 정찰대를 보내고서야 땅에 발을 디디는 게 그다.
[봉쇄]
갑판 봉쇄를 한다면 들어온 적이 나갈 구멍은 없을 거다.
거기에 화학 무기라도 터트리면 게임 오버다.
1갑판을 봉쇄한 직후다.
펑!
[2갑판 위 일형포 흔적 발견]
‘또?’
꽈과과광!
기다렸다는 듯 폭음이 연이어 터진다.
[니들 뭐하냐? 드론이랑 전투종 안 보내?]
잘못하면 머리 위로 폭탄 세례를 맞게 생겼다.
아주 조금 흥분한 사이드가 말했다.
그 순간.
펑!
위로 구멍이 뚫린다.
바스스스.
부서진 외갑판 조각과 흙무더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이드의 렌즈가 위로 향했다.
빛이 스며드는 곳, 오롯이 선 이들이 보였다.
콴 놈들의 은회색 아머가 보인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겁쟁이]
불끈.
사이드가 세상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겁쟁이 사이드.
하지만 단숨에 달려들진 않는다.
그러자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배알도 없는 놈]
[썩어빠진 자식]
[쓰레기]
[평생 흙이나 파먹고 살아]
[우주 먼지만도 못한 놈]
[우주 최고의 겁쟁이]
[지렁이 보다 느린 놈]
[너 같은 놈도 오드꾸와를 먹고 살아간다니, 하 기도 안 찬다]
미친 녀석이 쉬지도 않고 말했다.
사이드는 신중하고 잘 참는 성격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의 성격을 보고 조롱하면 금세 발끈하고는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으려는 그를 향해 콴 놈들이 양손을 쥐었다 펴는 게 보였다.
모두가 비웃고 있었다.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트레에에에에에.”
그의 렌즈 세 개에 빛이 모인다.
일형포는 한 발의 레이져.
이형포는 다연발.
삼형포 부터는 출력이 달라진다.
콰우우웅!
렌즈에 모인 빛이 하늘 위로 뻗는다.
콰가가가각!
머리 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밖으로 자욱한 안개가 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은회색 아머를 입은 콴 놈들도!
[염병할 것들]
사이드는 몸을 위로 날렸다.
그걸 본 콴 다섯이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튀는 거냐!]
동시에 돌아보는 다섯이 다시 손을 들어 쥐었다 편다.
박장대소, 터져 나오는 웃음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겁쟁이]
그리고 들리는 여성 콴의 목소리.
으득.
어금니를 갈며 그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끼이이잉.
눈과 머리를 대신하는 세 개의 렌즈가 뱀처럼 앞으로 뻗는다.
그는 세 방향으로 동시에 일형포를 쐈다.
두두둥!
다섯은 기다렸다는 듯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움직임, 전신에 두른 노블 에너지!
콴이다.
사이드는 확신했다.
*
[아는 놈이야]
두 번째 폭발 이후에도 적이 드론만 보내자 팽은 아는 척을 해왔다.
메카니모스의 고급 전투원 중 이런 소심한 놈은 하나뿐이다.
겁쟁이 사이드.
흥분하면 무서울 정도로 세지만, 그 전에는 신중함을 넘어서 소심할 정도다.
잘 아니까 도발도 쉽다.
여기 적들을 전멸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다.
팽은 자신의 할 일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래서 적을 보자마자 도발했다.
효과는 주효했다.
콰우우우!
삼형포를 뿜는 적이다.
세주가 그걸 보고 눈짓으로 말했다.
아프겠다.
그걸 본 인준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을 들어 발을 가리킨다.
안 맞으면 그만.
맞는 말이었다.
이제부터가 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적을 속이고, 놀리고 튄다.
세주가 계획한 작전의 주요 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