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 함장 시켜 줄게
“박민우 소위님.”
“말해.”
긴 머리가 익숙하지 않다.
박민우는 얼마 전에 짧게 깎은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아머 목 뒤를 당겼다.
툭.
새로 지급된 아머는 편했다.
무거운 방탄모 대신 목 뒤를 잡아당기면 그대로 머리를 감싸는 천이 나왔다.
그리고 그 위로 모자를 눌러 쓰는 것.
이게 이들의 정복이다.
긴 머리는 역시 불편하다.
군인은 짧은 머리가 어울리고.
“그, 반세주 소장님에게 직접 훈련받으셨다고, 진짭니까?”
울컥.
갑자기 가슴에서 뭔가 치솟았다.
잊고 싶은 게 떠올라 버렸다.
“…그건 왜?”
“대단하지 않습니까? 영웅이잖습니까. 반세주 소장님.”
수많은 별명이 있지만, 영웅이란 두 글자가 더없이 잘 어울리긴 한다.
맞는 말이다.
반세주는 인류를, 아니 적어도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이니까.
새로운 훈련 체계 도입.
무기 개발 및 부대 창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대단한 사람이다.
영웅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캬, 영웅과의 대면도 부럽지만, 그 밑에서 훈련은….”
“그만.”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그 훈련을 직접 받아본다면 이런 말이 나올까?
“소개라도 시켜 줄까?”
박민우가 물었다.
“그거 진짭니까? 각서 쓰는 겁니다?”
심석호, 생각보다 말이 많은 부관이다.
“원망이나 하지 마라.”
박민우가 그에게서 눈을 뗐다.
지지직.
무전기에서 소음이 울렸다.
심석호가 무전기를 들고 버튼을 몇 차례 누른다.
“먹통입니다.”
“바꿔.”
박민우의 말에 심석호가 주머니에서 동그란 단추 같은 걸 꺼낸다.
두툼한 그걸 귀 뒤쪽에 붙였다.
그리고 단추 위로 솟은 버튼을 눌렀다.
박민우도 같은 걸 붙이고는 버튼을 누른다.
징.
가벼운 이명과 함께 목소리가 들린다.
“제이티 원, 현 위치에서 적으로 추정되는 두 개체 발견.”
제이티 원, 코드명이 가리키는 곳, 박민우가 대원을 배치한 위치를 떠올렸다.
‘스포츠 매장 옆 골목.’
곳곳에 뿌려둔 대원들이다.
“이동.”
민우의 목소리에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다섯 명이 발걸음을 뗀다.
귀에 붙이는 통신기는 전력을 이용한 게 아니었다.
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드는 물건이다.
그뿐 아니다.
지금 박민우와 대원들의 전신에 장비된 것들, 전부 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거다.
전기나 휘발유가 아니라, 외계인 침공으로 인해 발견한 에너지.
그게 이제 완벽하게 자리 잡아서 무기와 통신기, 아머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장비 점검 이상 없지?”
노파심에 묻자, 심석호가 답한다.
“물론입니다.”
조금 수다스럽고, 이상한 환상을 갖고 있을지 몰라도, 일은 제대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이 부대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거다.
박민우가 따로 빼서 훈련시킨 350명.
수도권, 지방을 통틀어 대한민국 전도를 돌아다니며 외계인을 사냥하는 부대다.
공식 명칭은 한국 방위 기동 타격대.
현재 박민우가 전주에 데리고 온 35명을 제외하고도 전국에 나타난 이 연쇄살인 외계인을 잡기 위한 부대다.
“경찰 쪽도 움직입니다.”
골치 아픈 것들.
이들은 철저하게 외계인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훈련된 부대다.
경찰이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싸우는 방식 자체가 다른 법이다.
그래서 진입하기 전에 놈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자리만 지키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선다.
공명심에 눈이 먼 건지, 아니면 치안을 지키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거는 건지.
“무시해.”
박민우는 뛰면서 작전을 수정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그의 생각에 경찰은 딱 그 수준이다.
특히나 외계인을 상대로 싸워봤다고 해도 제대로 싸운 횟수가 몇 번이나 될까?
적어도 박민우가 모은 부대원은 비무장지대에서 살아남은 알짜배기들이다.
“대형 변경, 사살한다.”
두 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한 놈은 사로잡고 싶었다.
놈들의 특징을 찾으면 다음은 더 쉬울 거다.
하지만 생포를 노리다가 피해가 발생한다면 또 다른 문제다.
“네.”
박민우를 중심으로 둘둘 양쪽으로 찢어져 뛴다.
고양이 친척이라도 되는지, 뛰는 데도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뿐사뿐 뛰는 그들은 곧 목표물을 발견했다.
밝게 비추는 가로등이 깜빡이며 꺼진 곳이다.
“조명.”
팟팟팟!
전기 신호를 방해하지만, 그렇다고 배터리 자체를 멍텅구리가 만드는 건 아니다.
특수 제작된 손전등이 사방에서 놈을 비춘다.
일단 한 놈이다.
넓적한 돌판 같은 몸에 목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다.
봉긋 솟은 언덕 같은 대가리와 묵직한 주먹이 보인다.
“스캐닝.”
박민우의 말에 심석호가 허리춤에 찬 스캐너를 꺼내 들었다.
총과 같은 형태의 앞면은 디지털카메라의 렌즈를 닮았다.
징!
그걸 놈에게 향하자.
놈이 몸을 돌려 바라본다.
5초도 걸리지 않아, 스캐닝이 끝난다.
이것 또한 프로비던스가 도면을 만들어 제작해 양산한 제품이다.
자신의 스캐닝 능력의 일부를 활용한 것으로, 그 기능은 하나다.
상대의 급을 알아보는 거다.
가진 에너지양을 토대로 급을 측정해내는 기계다.
세주는 적의 급을 일부러 나눴다.
가장 최하급은 7급이다.
“4급입니다.”
7급은 무기 없이 싸워서 일반 병사가 간신히 이길 정도다.
그리고 4급은 최소한 레이퍼 급을 말했다.
일반 화기로 죽이려면 적어도 병사 셋 이상이 필요하다.
이런 놈들이 시가지에서 난리를 피운다면 어떻게 될까?
죽은 이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놈들이 이렇게 조용히 움직이는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전면에 나타났을 때의 그 공포와 패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머지 한 놈. 몰이해 와.”
“네.”
무전기에 대고 말하자, 곧바로 답이 온다.
심석호와 동급의 부관이다.
표정이 어둡고 말보다 침묵을 선호한다.
석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이지만, 둘은 꽤, 아니 상당히 친해 보였다.
그사이, 동산 같은 대가리를 가진 암회색 괴물 놈이 주먹을 든다.
맞으면 기필코 죽게 생길 만큼 무식하게 크다.
놈이 주먹을 휘둘렀다.
쌔액!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었다.
팔이 늘어나 수박만 한, 주먹이 뻗어온다.
박민우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달렸다.
노린 대원 앞을 막으며 아머의 가슴팍을 쳤다.
빡!
어찌나 세게 쳤던지, 가슴뼈가 뻐근해졌다.
그 대신이다.
웅!
아머 주변으로 푸른 장막이 생긴다.
쩡!
아머에 내장된 배리어를 발동시킨 거다.
적어도 브레인 레이퍼 급의 배리어다.
뚫리진 않을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수없이 반복한 훈련으로 세주에게 구르면서 겪은 일이다.
그와의 훈련을 떠올리자면, 눈앞의 괴물은 귀여운 수준이다.
“블래스터.”
침착한 박민우의 목소리와 함께 착착착 하고 대원 넷이 총을 뽑아 든다.
유선형의 총신과 캔 음료 두 개 쯤 되는 두께의 총이었다.
“광탄.”
그 말과 함께, 블래스터 앞에 빛이 가볍게 번쩍였다.
“트레에에!”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발사.”
자신을 향해 휘어지는 채찍 같은 팔과 철퇴 대가리 같은 주먹이 날아오지만.
박민우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4급, 레이퍼 수준의 외계인은 이걸 견딜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다.
그놈의 시뮬레이션 모드!
세주에게 미친 듯이 굴러지며 당했으니까!
슈슈슈슝!
푸른빛이 번쩍였다.
퍼버버벅!
달려들던 놈의 전신에 구멍이 뚫린다.
한 놈을 해치운 직후다.
“으억!”
“피해!”
갑자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포위망을 만든 곳이었다.
“비켜!”
거친 소리가 들렸다.
그곳이었다.
회색 바위가 굴러온다.
외계인 괴물 중 하나다.
전신을 공처럼 굴려서 사람을 납작하게 터트려 죽이는 놈이다.
‘저런 형태라면.’
포획도 가능할 것 같았다.
빠르게 계산을 끝낸 박민우가 입을 열었다.
“생포한다.”
한 마디 읊조리자 대형이 변한다.
콰우!
놈이 굴러오다 멈춘다.
크지는 않았다.
방금 잡은 놈에 비하면 반 정도다.
초등학생, 그러니까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다.
“가시가 있습니다.”
말 안 해도 보인다.
전신이 삐죽삐죽 돌기 같은 가시가 솟아있다.
놈이 다시 퉁하고 땅을 박차더니, 허공에서 몸을 만다.
다시 돌덩이가 돼서 쿠르르하고 인간을 향해 굴러왔다.
파바바박!
아스팔트 바닥이 거침없이 파인다.
검은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이킥.”
박민우가 입을 열자, 부대원 중 둘이 나와서 목에 핏대를 세운다.
“합!”
기합과 함께다.
펑!
땅에 큰 구멍을 만든다.
바위 놈이 달려오는 길목이다.
아스팔트가 깨지고, 밑에서 흙이 솟구친다.
사이키커 둘이 만든 틈에 바위 괴물 놈이 텅하고 부딪치더니, 속도가 줄어든다.
철컥.
민우는 블래스터를 뽑았다.
그리고 놈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슝! 퍽!
푸른 조약돌 같은 탄환이 날아가 놈을 관통한다.
끼에엑!
한 방 맞았지만, 놈은 아무렇지 않고 몸을 다시 위로 날려 동그랗게 만든다.
역시나 한 방에 죽지는 않는다.
박민우는 무표정하게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슝! 슝! 슝! 슝!
퍽! 퍽! 퍽! 퍽!
네 발, 박민우는 놈의 몸에 가상의 선을 그려 네 군데로 나누고 한 발씩 쐈다.
인간과 비슷한 구조의 놈이었다.
쿠아아아!
땅을 세차게 타고 오는 놈의 앞이다.
박민우가 블래스터를 집어넣고, 손잡이만 남은 원통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쥐고 자세를 잡은 순간이다.
웅.
풀 업과 동시에, 원통형 끝에서 푸른빛이 솟구친다.
퓨슉!
에너지 블레이드다.
슈컥!
그리고 달려드는 놈을 향해서다.
칼날이 허공에 푸른 선을 그렸다.
꾸에엑!
그리고 바닥에 놈이 두 동강이 나 떨어졌다.
“생체 반응 있습니다.”
스캐너를 돌린 심석호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인간과는 생명력이 다르다.
“그물.”
촤르륵!
특수 제작된 철 그물이 놈을 감싼다.
바윗덩이에서 변한 놈은 짧은 팔다리를 가진, 마치 어릴 때 쇼 프로에 나오던 불량감자 인형을 닮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전주에서 일은 일단락이다.
그 외 전국에서 오늘 같은 일이 있었을 거다.
침투해 온 놈들을 잡아 죽이는 것.
그게 박민우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게 세주가 손수 그를 훈련시킨 이유고.
*
“어떻게 알았지? 외계인 놈들이 계속 올 거라는 걸?”
-그야, 그 우주선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프로비던스가 중얼거렸다.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믿지 않는 건 둘째 치고, 또 미친놈 보듯 볼 게 뻔하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세주는 나호필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사라진 우주선을 내 안에 잠재된 또 다른 욕망 같은 기계 새끼가 흡수해서….”
“후, 됐다. 그래. 그냥 운 좋게 맞췄다고 치자. 소 뒷발에 쥐를 잡았다고.”
나호필은 포기를 아는 남자였다.
“아니, 진짜라니까.”
“알았다니까.”
신경질이 난 얼굴에 세주는 입맛만 다셨다.
“어쨌든 방비 시스템은 유효해. 개발한 장비들도 다 멀쩡하고.”
“당분간은 침투해 온 놈을 처리하는 거로 하자고. 대신 알지? 1급 이상은 무조건 특수 부대 호출해야 해.”
적어도 알파, 그것도 안 되면 반세주 또는 그의 부대원이 직접 가야 한다.
1급 이상은 비트레이어 급 이상이다.
현재 병력으로 잡아내기는 벅찬 놈들이다.
“후, 아무리 네가 준 정보가 있고, 놈들의 우주선을 해독한다고 해도, 방비 시스템 자체를 갖출 수가 없다. 애초에 어디서 놈들이 오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오는 놈 족족 죽이면 돼. 그리고 준비가 되면 우리가 직접 간다.”
나호필은 세주의 눈을 바라봤다.
미친놈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미친놈만이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정말 제대로 미쳐야 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반세주는 제대로 미친 또라이다.
“마음처럼 쉽게 될까?”
“안 되면 되게 하라. 몰라?”
나호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짓이라고 치부했지만, 세주가 의도한 일이 맞았다.
적이 지구를 침공하는 이유 같은 건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는 놈들이 쳐들어오지 못할 만큼 강해지면 된다.
그리고 그 강해진 힘을 놈들에게 보여준다.
그가 짠 청사진의 토대에 깔린 생각이다.
일단 연합군 결성.
덕분에 지구 방위 연합군,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이름의 세계 연합군이 만들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두 번째, 우주로 타고 나갈 것을 만드는 것.
그건 놈들이 타고 온 우주선, 놓고 간 기둥.
거기에 세주가 준 도면과 기술들.
나호필은 크게 욕심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잘 먹고 잘살면 좋겠지만, 어차피 싸울 사람 없으면 나라고 뭐고 다 망하는 거야. 기술 공유해.”
반세주의 말이다.
필요한 것은 전부 공유했다.
세주는 이전 싸움에서 알 수 있었다.
국가 간 일반 병사의 수준 차이를.
그래서 공유하도록 밀어붙인 일이다.
하여간 목적은 하나다.
강해진 힘을 보여준다.
반세주는 우주에 올라갈 준비가 끝난다면, 직접 간다고 했다.
나호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훌쩍 높아진 하늘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한층 다가왔다.
“내년 봄까지는 만들 거다.”
그 사이, 지구를 습격하는 놈들을 부순다.
그리고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우주선을 만든 순간.
세주와 연합군 최정예부대가 타고 올라간다.
정말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은하수를 배경으로 전쟁을 치르는 거다.
그 일로 인해서 세주도 툭하면 연구실로 와서 기술 개발에 힘을 써주고 있다.
나호필은 긴장감을 숨겼다.
적어도 직접 나가는 반세주보다는, 자신이 한결 나은 처지다.
툭.
세주가 그런 호필의 어깨를 쳤다.
“같이 가고 싶지?”
“음?”
전혀 아니다.
이건 나호필의 스케일을 넘어섰다.
“함장 시켜 줄게.”
나호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음.”
그저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