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 뒤 끝
시작부터 지금까지 세주는 똑같았다.
‘현재 할 수 있는 걸 한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최악의 결과라면.
신에게 엿을 날리며, 맨땅에 헤딩하듯 반복할 뿐이다.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초인프로젝트 세컨드를 완료하고 연구실, 기술실을 개방했다.
그리고 지금.
“주십시오.”
“무리하는 거 아냐? 차라리 외박을 다녀와. 몽정까지 할 정도라며.”
놀린다. 보는 사람이 족족 놀린다.
“그런 거 아닙니다.”
“좋아. 농담은 접어두고 이 총 쓸 수 있겠어?”
배럿 m82 커스터마이징 달수.
12.7m 탄을 쏘는 대물 저격총 배럿 m82의 개조판이다.
대물저격총이며 반동을 적게 한 명기라고 부르기 아깝지 않은 무기다.
몇 명의 저격수가 주 무기로 쓰는 저격병이 가장 선호하는 총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에 맞춰 커스터마이징 방식도 얼추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주와 보급소 담당 장교 사이의 물건은 그런 일반적인 법칙을 위배하는 종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이 배럿 m82는 실패작이었다.
“무식하게 전용 탄을 만든 덕분에 탄약은 비싸고, 볼트 액션 방식이라도 취하지, 쇼트 리코일 방식을 계속 취해서 반동 자체가 미쳤지. 인간이 견딜 만한 무기가 아냐.ㅋ”
“탄창 크기나 좀 늘려줄 수 있습니까?”
10탄들이 탄창은 너무 적었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
“네. 똑똑히 잘 듣고 있습니다.”
중위가 이마를 짚었다.
“무게만 30kg 넘어.”
“됩니까?”
“수호신의 부탁이라고 하면 하겠지.”
“그럼 부탁드립니다.”
“고집불통이다. 너.”
“칭찬도 감사히 듣겠습니다.”
“좋아. 이건 어차피 애물단지였어. 부대 수호신이 가져다 쓴다는데, 오백만 받을게.”
“감사합니다.”
본래라면 그 열 배 가격까지 간다.
경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는데.
“쉬엄쉬엄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들어? 자대로 복귀도 안 하고. 미친놈은 많이 봤지만, 너처럼 잘 싸우는 미친놈은 처음이다.”
골goal 이라 이름 붙인 놈을 보지 않았다면.
여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럼 외박 나가서 적당히 즐기기도 하고 휴식도 취했을 것이다.
인류 멸망을 막으라지만, 그것도 영웅의 정신 상태가 멀쩡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세주는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세계를 구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봐 버렸다.
목표를.
“이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되도록 빨리.”
“뭐?”
그대로 막사로 향했다.
-연구실 완료했어. 저 무기 빼돌릴 수 없을까?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무리다.’
최전방이기에 더 총기 규제와 관리가 엄격하다.
‘계급이 높아지면 가능할지도.’
대위 이상이 되면 개인 화기를 소지 할 수 있다.
나흘 뒤.
상황실로 쓰는 천막에서 세주는 자신의 새로운 무기를 받았다.
배럿 m82 총탄 사이즈 18m.
대물 저격용 총이 아니라 저격 포다.
12.7m 나토탄 만하더라도 사람이 맞으면 시체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다.
“…이걸 쓴다고?”
상황실 장교가 물었다.
“네. 가져가서 총기 수입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놀란 얼굴을 넘어섰다.
-내일쯤 되면 몽정의 수호신이 아니라 몽정의 또라이라고 불릴 것 같은데?
총을 집어 들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퉁.
막사로 돌아가 총을 내려놓고, 노란 장판을 깐 평상을 폈다.
그 위로 총을 하나하나 분해했다.
그리고 정성 들여 닦았다.
다시 조립, 분해.
십 수 번을 반복했다.
“여자 대신 총을 사랑하기로 한 거냐? 파이팅.”
옆자리 중사, 몽정 소문의 근원지로 파악되는 놈이 말했다.
그의 말이 정말인 것처럼, 정말 총을 사랑하듯 정성 들여 닦았다.
하나하나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파악했고.
총알이 어떤 방식으로 발사되는 지까지도.
시선도 돌리지 않고 세주가 친절히 답했다.
“거, 신경 좀 끕시다.”
“넌 상관에게 하는 말이 너무 불손하다.”
“다음 전장이 끝난 뒤에도 댁이 내 상관이겠습니까?”
“음, 잘 부탁한다. 수호신.”
누가 들으면 하극상이라고 거품을 물지도 모르지만.
이 중사 꽤 성격이 좋다.
애초에 서로 농담을 건넬 정도로 친해진 것도 이 자가 옆에서 치근댄 덕이다.
“들었어?”
“뭘 말입니까?”
신중하게 총열을 닦는 중이었다.
“병원에 새로 여의사가 왔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 인류 멸망을 시킬지 모르는 괴물을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깟 여의사가.
“C컵이래.”
병원 건물은 두 동이다.
“…A동, B동?”
“역시 아직 총보다는 여자구나. 자.”
툭 하고 사진을 건넨다.
얼굴은 흐릿해서 잘 안 보이지만.
몸매가 발군이다.
-이럴 땝니까? 제군, 정신 차립니다.
닥치라는 말도 지겹다.
‘음소거 모드 없냐?’
“이제 스물여덟이라고 하더라.”
“그런 고급 정보는 어디서 얻는 겁니까?”
“나랑 전우조 인 사병. 상병인데, 오지랖이 넓고 여기저기 소문에 귀도 밝고, 사진도 잘 찍고.”
“다재다능한 친구입니다.”
“그렇지.”
한번 보고 싶기는 하다.
흐릿한 사진 덕에 얼굴이 궁금하다.
-제군?
‘알았다. 좀 닥쳐라.’
하지만 정말로 여자를 만나서 노닥거릴 시간은 없다.
한 달 뒤, 전장에서 다시 레이퍼 다리나 맞추며 수호신 놀이할 생각은 없다.
“뭐, 나중에 기회 되면 보겠습니다.”
중사가 이상한 눈으로 세주를 쳐다본다.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닥치고 꺼지십시오.”
“큭큭. 알았다고 몽정의 수호신님.”
총은 다시 조립해서 상황실에 맡기고.
바깥으로 나왔다.
전투가 끝나자 대부분 자대로 돌아갔다.
바글바글하던 인원이 반도 안 남았다.
죽은 사람도 많았고.
다친 이도 많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들 중 수술대 위에서 죽은 이도 많았고.
-같은 꼴을 당할 생각은 없지?
‘당연한 말을.’
한 달.
누구에게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어느새 세주에게 물든 프로비던스다.
그도 그와 같은 말을 뱉었다.
포기는 없다.
인류를 위해서? 솔직히 그런 거창한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를 보고 모른 체할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다.
그러니까 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결연한 각오를 뱉은 프로비던스에게 세주가 말했다.
‘따라 하지 마라. 개성이 없냐? 넌?’
-분위기 초 치는 데는 정말 탁월한 재능이다. 박수가 절로 나오네. 염병.
‘뭔 병?’
-아, 졸리다. 잠깐 잘게.
‘로봇이 무슨 잠을 자?’
-차별 적인 발언 오지고요.
‘가지가지 하네.’
피식 웃고 세주는 걸었다.
여름밤의 공기에 섞인 땀 냄새와 화약 냄새.
갖가지 냄새가 사방을 아우르는 밤이었다.
*
20일 뒤.
타 부대에서 속속 지원이 왔다.
전투를 대비하는 이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때였다.
“이번에는 규모가 크다고 하던데.”
유진이 말했다.
사람 열댓 명은 서서 뛰어놀 공터였다.
“규모가 커?”
“네. 규모 3 이상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요.”
규모 1은 소수의 레이퍼 무리다.
숫자가 커지는 데로 그 무리는 더 커진다.
현재까지는 규모 4가 최대라고 했다.
규모 4에 사망자 숫자가 하루에 천 명을 찍은 적도 있단다.
규모 2는 박격포 추가.
규모 3은 데몬 플라이 추가.
규모 4는….
“알 게 뭐냐? 오는 족족 죽이면 그만이지.”
콧김을 뿜는 치용이다.
“에효.”
인준이 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중.”
그 앞, 세주가 그들을 불렀다.
동시에.
우우웅.
전신에 푸른빛을 뿜는다.
곧 물결처럼 전신을 빛이 감싼다.
마치 코팅된 듯 전신에 아우르는 푸른빛.
작은 호수에 갇힌 것 같은 기묘한 광경이었다.
-좋아. 풀 업 성공.
커버링 에너지를 전신에 씌우는 짓이다.
초인프로젝트 세컨드를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증거였다.
“덤벼.”
그 상태에서 셋에게 말한다.
“아무리 형님이라도.”
“우리 셋한테.”
“덤비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치용, 인준, 유진.
한 달 내내 세주는 그들을 괴롭혔다.
그것도 쉬엄쉬엄한 것도 아니었다.
진짜 죽일 듯이, 싸우는 법, 살아남는 법,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
“1분 버티면 오백씩 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굶주림 짐승 같고, 돈에 미친 사채업자 같다.
“갑부야? 1분에 오백?”
인준이 중얼거렸다.
그게 신호였다.
웅.
셋의 양손에 전부 푸른빛이 생긴다.
커버링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쌔액!
그대로 셋이 달려든다.
세주의 눈에 셋의 모습이 잡혔다.
팡!
그리고 세주도 움직였다.
*
-36초.
슈우우욱.
전신에 어린 빛이 사라진다.
“그래도 꽤 하네.”
“끄응.”
유진이 신음을 흘렸다.
“1분도 못 버텼는데요?”
“잘 한 거야.”
세주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 얼굴에 금칠 하는 거냐?”
인준이 투덜거렸다.
“형님. 너무 무식하게 셉니다.”
인준이 치용을 돌아봤다.
“넌 무식하다는 말 쓰지 마. 마치 돼지가 삼겹살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뭐라는 거야?”
세주가 셋을 일으켰다.
치용은 워낙 튼튼해서 다친 부분이 없었고.
유진도 날쌘 편이라 크게 다치진 않았다.
둘은 타박상 정도.
“끄응.”
대신 인준의 팔이 부러졌다.
“괜찮냐?”
이 정도는 그동안 훈련에서 수없이 있었던 일이다.
대신 단련이 되니, 인준으로서는 불만이 없는 일이었고.
넷은 곧 병원 건물로 향했다.
“또?”
그런데 막 병원 건물에서 나오는 여자가 그들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또 다쳤습니다. 이 자식이, 얼마나 몸이 허약한지 툭하면 다칩니다.”
세주가 나섰다.
붉게 염색한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다.
하얀 가운을 입고, 하얀 피부와 따뜻한 가슴이 특징인.
“깨끗하게 부러뜨렸네요.”
“이인준, 이 자식. 잘 넘어졌네. 뚝 하고 부러지고.”
“솜씨 좋네요. 반 하사님?”
“저한테 반했습니까? 진도 한 번 빠르십니다.”
“귀 막혔어요?”
“귀를 뚫은 적은 없습니다.”
세주가 귓불을 당기며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의사가 인준을 데리고 건물로 들어가고.
“저 여자 마음에 드십니까? 여자는 한 방에 팍! 그럼 끝입니다. 너 좋다. 나랑 살자!”
치용이 말했다.
유진이 옆에서 세주의 팔을 붙들었다.
“정말 저 말을 들을 작정은 아니죠?”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보기 드물게 화가 난 얼굴이다.
다른 일에는 무덤덤하면서.
치용의 여성관을 들을 때면 유진도 견디기 힘들어했다.
“응. 아냐. 지금이 연애할 때냐?”
“그런 것치고는 관심 있지 않습니까?”
유진은 남녀 관계에 관해서 만큼은 눈썰미가 면도칼보다 날카롭다.
“나중에 이 일이 끝나면 그때는 관심 좀 더 갖고 싶다.”
“뭐가 끝나면요?”
“아냐.”
골에 관해 얘기할 순 없다.
믿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저기 지원 오나 봅니다. 신병 놈들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
야, 신병이 아니라 지원 병력이다.
이등병이 여기에 오는 건 드문 일이고.
근데 운전병 얼굴이 낯익다.
“강습대?”
한 달도 지내지 않은 자대지만, 자대는 자대다.
25사단 마크를 단 차량이 병원 건물 사이 뒤편에 있는 위병소를 지나고 있었다.
“어?”
치용이 먼저 알아봤다.
“김완?”
그다음이 유진이다.
“허허.”
세주는 웃었다.
지금 여기에 인준이 없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유진아.”
“네?”
“기합 일발 장전. 명령이다.”
“넷! 반세주 하사님. 기합 일발 장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따라 한다.”
“넵!”
“25사단 김완!”
“25사단 김완!”
유진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저기.”
차에서 막 내리는 이들과 주변 시선이 모인다.
“수호신이네?”
세주와 일행을 알아본 얼굴도 있다.
넷 모두 꽤 유명했다.
한 달 동안 전장에서 나름 활약한 이들이니.
“야, 새끼야!”
“야, 새끼야!”
“뭐?”
김완이 듣고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다시 봐서 반갑다. 씹쌔야!”
“다시 봐서 반갑다. 씹쌔야!”
“미친 새끼들이!”
김완도 세주 일행의 얼굴을 알아보고 달려든다.
“치용 로켓 펀치 준비.”
“준비 완료.”
“발사.”
달려오는 김완을 향해 치용이 어흥 하며 앞을 막는다.
“넌….”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했지만.
“상병 김치용 님이시다. 로켓 펀치!”
뻑!
그대로 턱을 갈긴다.
휘릭하고 공중에서 몸이 한 바퀴 돌았다.
쿵 하고 떨어지며, 그대로 졸도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프로비던스가 말했다.
“무슨 짓이야?”
이전에 사정 봐주라던 병장이 달려왔다.
자신의 전우조가 당했으니.
“불만 있나?”
이번에 세주다.
손가락으로 가슴의 계급장을 가리킨다.
다시 물었다.
“불만?”
그의 눈이 반세주의 계급장으로 향했다.
“…없습니다.”
“나 하사야. 하사. 일병이 하사한테 덤비면 안 되지.”
“네. 맞습니다.”
“목소리 작다.”
“네 맞습니다!”
그대로 뒤로 돌아서자, 유진이 뒤를 보고는 말했다.
“뒤끝 쩌십니다. 형님.”
“신나서 소리 질러 놓고?”
유진이 킥킥대며 웃었다.
“속이 다 후련하네.”
치용도 말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뒤끝이라니.
덤빈 놈이 잘못이지.
-기억력이 좋아졌더니, 뒤끝이 살벌하졌네?
‘무슨 헛소리야.’
-아냐?
‘브로, 원한은 기억하는 게 아냐. 가슴에 새기는 거지.’
멀쩡한 척해놓고 용케도 참았다.
-아, 네.
프로비던스의 답을 들은 세주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