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심 봤다로 하자
넷이 한자리에 모여서 우적우적 먹었다.
-형.
‘나도 봤어.’
일정 순도 이상의 음식을 먹으면 표시가 되도록 해둔 장치가 발동했다.
혹시나 고열량 음식을 골라 먹으려고 해둔 건데.
[군용 에너지바 – 5↑]
5.
눈을 비벼볼까? 세주가 다시 홀로그램을 노려봤다.
‘브로, 우리가 갈 곳은 취사장도, PX도 아니었다.’
-그래. 우리가 갈 곳은 부식창고였어.
‘그것도 1종 창고.’
1종은 음식이 모인 곳, 분명히 이 에너지 바도 그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멍한 눈으로 프로비던스와 말을 나누는 세주를 보며 유진이 중얼거렸다.
“그리 감동적인 맛은 아닌데.”
다른 건 다 서글서글한 녀석이 맛에 대해서는 유달리 예민하다.
“동감.”
인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맛이 콧물 퐁듀에 빠뜨린 초코바 같았다.
무지막지하게 달고 밍밍한 맛이 났다.
“음. 설탕 뿌린 미더덕 같다.”
치용이 멋진 비유를 하며 군용 초코바의 평가를 끝냈다.
세주는 맛 따위는 잊은 채 부지런히 먹을 뿐이었다.
*
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 시간.
톡, 톡,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더니, 곧 보슬비가 내렸다.
사아아아 하고 봄비 내리는 소리가 내무실 안에도 들렸다.
“에이, 내일 땅 젖었겠다.”
신체능 력이 발달해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먹으라기에 먹었지만, 다들 군용 초코바의 맛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 없이 세주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불침번 위치.’
세주가 내무실 문을 슬쩍 열면서 묻자, 프로비던스가 어깨에서 떨어져 난다.
붕하고 주변을 둘러본 뒤 돌아온 프로비던스다.
-앞, 뒤가 비었어.
‘오케이.’
프로비던스로 사방을 살핀 후 몰래 내무실 밖으로 나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판초 우의를 입을 순 없다.
그렇다고 오늘처럼 어두운 밤을 그냥 보내는 건 아깝다.
옷이 젖을까 봐 맨발에 속옷만 입고 나온 세주가 창고를 찾아 헤맸다.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
-낮에 그 초코바 찾으면 되지? 잠깐만.
프로비던스가 말하고 푸른빛 렌즈를 깜빡인다.
5분쯤 지나, 참지 못하고 세주가 물으려 할 때 프로비던스가 한쪽을 향해 빛을 비췄다.
-이쪽.
‘오, 냄새 맡았어?’
훈련시킨 마약 탐지견 부럽지 않았다.
-무슨 냄새? 날 개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양반이 미쳤나?
‘아냐.’
-아니긴 맞고만.
‘아니라니까. 오해다. 자, 가자. 쫑.’
-후, 짜증 나는 인간이야. 정말.
짜증이 난다면서도 개만큼이나 유용한 로봇이 순순히 날아갔다.
세주는 시멘트 길을 따라갔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불침번은 프로비던스의 도움으로 피했다.
-여기.
문은 잠겨 있었다.
사아아아.
비가 계속 내려 소음을 숨겼다.
먹구름 덕에 달빛 한 줌 없었다.
‘다행이긴 한데.’
자물쇠가 보인다.
어쩔 수 없었다.
봉인지고 뭐고 뜯고 모른 척하는 도리밖에.
힘으로 뜯어낼 수 있을까?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소리는 어쩔 수 없다.
속옷만 입은 채로 비를 맞았다.
이 몰골로 1종 창고를 털다 죽은 훈련병이 되고 싶진 않았다.
죽이지 않는다 해도 죽는 것과 비슷한 치욕이다.
‘프로야 만능열쇠 같은 건 없냐?’
-알아서 해.
‘또 삐졌냐? 아니,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왜 이래?’
-하, 어이가 없네. 삐져? 사춘기 소녀? 개 취급당한 소인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소만?
‘그래, 그래, 다 내 죄다.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
-아, 지금쯤 엿 먹여야 형이 짜증 날 거 아냐. 지금이 딱 그 순간이지. 배신의 순간.
이런 개 염병할 로봇 새끼야라고 외치는 대신 세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불세출의 오버테크놀러지, 인류의 희망, 반세주의 왜 이러나?’
-더. 영원한 단짝이자 등불 같은 존재가
‘내 너를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아, 이 자식은 영혼의 동반자구나.’
-그거 칭찬 맞아?
‘반해버릴 수밖에 없는 너의 날개는 자유를 상징하며 하늘 아래 너보다 유려한 곡선을 가진 로봇을 본 적이 없으니…’
-오케이. 거기까지.
위잉.
프로비던스의 앞에 홀로그램으로 열쇠가 나타난다.
-이런 단순한 자물쇠는 기술도 필요 없지.
홀로그램이 열쇠가 봉인지를 뚫고 자물쇠 안으로 들어간다.
투둑.
곧 문이 열렸다.
“좋다고.”
세주는 읊조리고 들어갔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창고 안에 그 초코바가 든 상자가 보였다.
“이럴 때 유레카라고 외쳐야 하냐? 아니면 심 봤다라고 해야 하냐?”
개당 에너지 5.
열 개만 먹어도 50이다.
양이 많지는 않았다.
한 박스에 개수로만 100개 정도 들었다.
그런 박스가 두 개였다.
‘오늘 분출하고 남은 건가 본데.’
200개면 에너지 천이다.
‘유레카보다는 심 봤다가 어울리겠다.’
막 세리머니를 정하고 박스에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동작 그만.”
여기서 들어서는 안 될, 아니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젠장.
세주가 손을 이마에 올리며 말했다.
“필승.”
“필승.”
경례를 받는 각진 군모의 조교가 보인다.
“산책치고는 위치가 안 좋습니다. 훈련병.”
3소대 전담 조교 박민우였다.
*
1종 창고를 털다 걸리면 죽는다는 경고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정상인으로 보일 것인가.
‘변태라고 생각할까? 도둑놈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냥 굶주림 불쌍한 영혼?’
-정신병자가 가장 확률이 높겠지.
어떻게 봐도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젖은 몸에 팬티랑 런닝만 입고 맨발이다.
흙이 묻은 발을 따라서 발자국이 바닥에 나 있고.
젖은 머리칼과 흙이 튀어 지저분한 다리다.
‘아, 시발.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은 없냐? 브로?’
걸려도 이런 몰골은 싫다.
한동안 말이 없단 박민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할 겁니까?”
사아아.
그의 뒤로 비가 계속 내렸다.
‘흙이 되어 비에 쓸려 내려가고 싶은 밤이다.’
-정신 차려 이 미친 형아.
그래.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거다.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인 겁니까?”
너 같으면 이 상황에 대답하기 유쾌하겠냐?
두 번이나 질문을 던졌다.
세 번째 물음 대신 총탄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배고파서 그랬습니다.”
“총알 박아드립니까? 아니면 정직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엄청 정직했는데.
목적은 바로 이 초코바라고.
-적당히 양념 쳐. 진짜 정신병원에 갇히겠어.
뇌에 당 공급이 시급한 순간이었다.
뭐라고 해야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왜 이런 차림으로 1종 창고를 온 것인가?
어떤 이유를 대야 믿어 줄까?
머리를 쥐어 짜낸 정도를 넘어서 누르고 눌러 짜냈다.
“…여자 문젭니다.”
“여자?”
“여기 처음 올 때, 여자들도 같이 온 거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강간 미수범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죽여 달라고 하는 겁니까?”
강간? 강제로 하는 거?
이 새끼가 형이 그렇게밖에 안 보이냐?
-날카로운 구석이 있네. 박민우.
‘닥쳐.’
“강간이라니, 아닙니다! 그냥 먼발치서 잘 지내나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근데 왜 여기에?”
“길을, 길을 잃었습니다.”
-나 같아도 못 믿겠다. 길을 잃었데. 하, 변명도 좀 그럴듯해야 되지 않아?
‘이 미친 로봇아. 나 여기서 끝장나면 너도 끝장이야.’
-덤비면 어쩔 수 없지. 저 자식 처리하고 우린 이제 군대가 아니라 독고다이 하는 거지.
언제는 현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며?
박민우가 말없이 모자를 고쳐 썼다.
사람 긴장되게 하는 재주가 훌륭하다.
그가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는다.
문은 왜 닫는 거냐.
“오늘 이후로 이런 일은 없습니다.”
당연하지!
“네, 없습니다.”
“조건 하나 겁니다.”
세 개 정도 걸어도 그러려니 해줄 수 있다.
“앞으로 훈련 중 2소대와 경쟁 훈련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얼마 전 현무암 자식을 자근자근 손봐 준 것도 경쟁 훈련이었다.
“2소대 무조건 이깁니다.”
‘…브로, 얘 뭐라고 하는 거냐?’
-2소대가 졸라게 싫으니까 지면 오늘 일도 물고 늘어질 거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그 자식들은 이기는 거다?
해석 한 번 기가 막히고.
“물론입니다.”
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 훈련에서 이길 시 3소대는 회식입니다.”
‘뭔가 있는데?’
-내기라도 한 거 아냐? 음. 형, 저 초코바 달라고 하자. 꼭 이길 테니까.
‘갑자기?’
-내기든 뭐든 꼭 이기고 싶다는 거잖아. 이 정도는 들어 줄 거야.
“조건은 아니지만, 저 초코바 가져갈 수 있습니까?”
“…저거 말하는 겁니까?”
박민우도 안다.
세 끼 분의 식량이 되는 열량과 영양소를 갖췄지만.
맛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린 물건이다.
전투식량의 혁명이라 불리고 맛의 퇴보라 불리는 초코바.
일명 군코바라고 부르는 거다.
군대 초코바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대에서 만든 콧물 맛 나는 초코바라는 의미도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박민우가 세주를 바라봤다.
이 새끼 정말로 먹을 거 훔치러 온 건가 싶은 거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훈련병입니다. 가져갑니다. 다만.”
그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2소대 5분대장과 같은 일은 반복하지 않습니다.”
세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애초에 그가 박민우에게 알렸다.
정말로 죽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찾고 나서도 별말 없기에 그냥 넘어간 줄만 알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세주는 초코바 두 박스를 들고 추레한 차림으로 내무실로 돌아갔다.
“되도록 옷은 입습니다. 훈련병.”
널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이 새끼야.
“네, 알겠습니다.”
내무실로 돌아와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초코바를 개봉했다.
부스럭.
“아, 시끄러워.”
비닐 뜯는 소리에 누가 말했다.
알았다. 새끼야.
밖으로 나와 내무실 뒤편으로 갔다.
곧바로 초코바를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근데 맛은 정말 지랄 맞네.’
-에너지를 생각해.
하나, 둘 먹으면 먹을수록 차오르는 에너지다.
크기도 크고, 맛도 지랄 맞지만.
세주는 꾸역꾸역 먹었다.
결국 몇 시간에 걸쳐 먹고 나니.
[에너지 1,000]
아,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다.
아니, 너무 먹어서 배가 부른 게 맞았다.
-에너지 쓰자.
‘뭐?’
방금 얻은 에너지다.
이런 방식으로 얼마를 더 얻을 수 있든 매일 이렇게 먹을 순 없었다.
지금도 볼록하고 배가 올챙이 배가 됐다.
‘지금?’
-응. 쓰자니까.
‘뭐에?’
이전에 모인 에너지는 전부 프로비던스를 구현하는 데 사용했다.
-훈련실 개방이 어려우므로 편법으로 내가 아는 기술을 형에게 가르치는 거야.
‘그게 에너지가 1,000이나 필요해?’
-내가 말을 쉽게 했지? 그치? 고작 1,000으로 형한테 쓸 만한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거야.
‘아, 그렇구나. 근데 그리 흥미가 안 당긴다?’
에너지는 소모성이고, 1,000이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이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현상 재생에도 도움이 될 거고.
-에효, 이 형이. 내가 직접 가르쳐준다니까. 형 앞에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형태로 변한다고.
세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말은 맞으면 아프고 때리면 부서지는 그런 몸으로 변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