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머라이어 '캐리' (3)
캐리온이 나가고 박홍근 이사는 아직도 열이 받는지 손부채질을 거듭했다. 정유미가 옆에서 핀잔을 줬다.
“제가 말했잖아요. 걔 정말 싸가지가 없다니까요. 인성이 빻았어요.”
물론 정유미도 인성이라면 만만치 않지만, 그녀는 최고투자자의 딸이다.
박홍근 이사는 뭣도 없이 까부는 캐리온을 제대로 밟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캐리온의 능력은 탐이 났지만 먹을 수가 없으니 영입하겠다는 마음은 그대로 접었다.
하지만 진즉 오디션에서 떨어뜨렸으면 모를까, 지금 2차 예선까지 다 통과하고 녹화까지 진행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정유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 뻔했다.
‘그러면 방송 내에서 이미지를 박살 내버리면 되지.’
마침 PD 중에는 자신의 입김이 닿는 놈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은 생방송이 아니라 녹화본이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악마도 천사처럼 보이게 할 수 있고, 천사도 악마로 보이게 할 수 있다.
‘걸림돌은 빨리 없애버려야겠어.’
*
박소현은 캐리온, 정유미와 같은 팀이었다. 한 팀 당 총 다섯 명이라서 그녀들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놀랍게도 쌍둥이었다.
쌍둥이는 둘이서 뭐가 재미있는지 저들끼리 까르륵대며 떠들었고, 내성적인 박소현은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구석에 가서 노래를 들었다. 이번 팀전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곡이었다.
맥스틴이라는 보이그룹의 노래였는데 빡센 칼군무로 유명했다. 박소현은 한숨이 다 나왔다.
‘잘할 수 있을까?’
맥스틴은 12명으로 구성된 보이그룹이지만, 그들은 5명으로 된 여성 팀이다. 줄어든 숫자에 맞춰서 안무를 수정해야하고, 남성적인 동작들도 바꾸고, 곡도 경연에 맞게 편곡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이주일 뿐.
이주일 동안 데면데면한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져서 안무를 수정하고 곡을 익힐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정유미와 캐리온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떠들던 쌍둥이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야, 근데 여기에 내정자가 있다더라.”
“헐 대박. 진짜야? 그럼 우리는 왜 뽑은 거야?”
“우리는 내정자를 위한 들러리인 거지. 정유미 걔도 내정자일걸?”
그 말을 듣는 순간 박소현은 침울해졌다. 그녀는 정유미와 함께 사라진 캐리온을 떠올렸다.
‘그 여자애도 내정자인 걸까? 그래서 따로 불려간 걸까? 근데 진짜 노래를 잘 부르기는 잘 부르더라.’
그때였다.
[여기에 있었네.]
캐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캐리온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여자라도 반할 것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박소현은 그 미모가 부담스러워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둘이서만 얘기하던 쌍둥이도 어느새 대화를 멈추고 캐리온을 쳐다보았다. 캐리온에게는 확실히 시선을 끄는 아우라가 있었다.
하지만 캐리온은 자신을 향해 모인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하자. 일단 우리가 부르기 편하게 노래를 편곡하고, 인원수에 맞춰서 안무도 수정하고 가사까지 분배하려면 오늘 하루는 조금 바쁘겠네.]
박소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오늘 하루가 바쁘겠다니?
“···근데 오늘 다 끝내려고?”
[그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캐리온. 졸지에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박소현이 말했다.
“아니, 편곡도 하루 만에 끝내는 건 무리인데 어떻게 안무 수정까지 하루 안에 다 해?”
캐리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못하지?]
“어?”
그리고 한 시간 후.
박소현과 쌍둥이는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되네?”
“진짜 천재인가? 못 하는 게 뭐야?”
캐리온은 진지하게 답했다.
[나는 못 하는 게 없어.]
“그래그래. 그러시겠지. 근데 이건 진짜 대단하다.”
캐리온은 즉석에서 편곡한 버전을 써냈고, 직접 각 멤버별 안무 영상을 찍었다. 심지어 안무들의 퀄리티가 웬만한 메이저 걸그룹들의 것들보다 훨씬 나았다. 정말 이대로 연습만 하면 팀전도 따놓은 당상이다.
박소현은 이제 캐리온을 질투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 캐리온은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다.
*
캐리온은 1, 2차 예선에서 노래만 보여주었다. 그래서 다들 캐리온의 댄스 실력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캐리온의 이미지는 댄스 가수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를 저렇게 잘하는데 설마 춤까지 잘 추겠어?’
설마 그랬다. 캐리온은 진짜 잘 췄다.
박자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듯한 리듬감. 어떤 곡을 갖다 줘도 바로 안무를 만들어내는 창의력. 한번 보고 바로 복사하듯 따라하는 정확함까지.
심지어 캐리온은 노래를 부르며 격한 춤을 춰도 호흡 하나 가빠지지 않았다.
쌍둥이가 투덜거렸다.
“캐리는 진짜 천재인 듯.”
“맞아 맞아. 여기에는 왜 나온거래. 그치 소현아?”
그들과 조금 친해진 박소현이 배시시 웃었다.
“응? 그래도 우리가 그 덕을 보고 있기는 하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에휴. 소현이는 너무 착해.”
사실 박소현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그들은 정말 캐리온 덕을 많이 보는 중이었다.
먼저 하루 만에, 아니 한 시간 만에 모든 편곡과 안무 수정을 마쳤다.
캐리온의 팀이 빠르게 편곡과 안무를 마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촬영팀도 그들을 더 주목해서 찍었다. 쌍둥이와 박소현은 막간에 들어갈 인터뷰 영상을 찍기도 했다.
“히히. 우리 빼박 방송에 나올 듯.”
“맞아. 편곡도 엄청 잘됐어. 원곡보다 중독성이 쩌는데.”
편곡하면서 원곡에 있던 포인트를 다른 방식으로 후킹 했다. 그런데 그게 원곡을 더 매력적으로 살렸다. 후킹 부분이 어찌나 중독적인지 밥을 먹을 때도 흥얼거릴 정도였다.
안무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격렬한 보이그룹의 춤이었으나, 캐리온은 단순하지만 포인트를 확실하게 줄 수 있는 동작으로 바꿔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캐리온은 막히는 게 있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연습하다가 쉬는 도중, 박소현이 물었다.
“캐리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노래를 잘 불러?”
그냥 물어본 거였다. 그런데 캐리온은 진지하게 대답해줬다.
[너는 섬세하고 계산적으로 불러. 크레셴도를 할 때도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까지 올라가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있지.]
박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원래 소심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많이 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철저하게 음을 계산해서 부른다.
[하지만 그건 술 취한 내 친구가 부른 것만 못해.]
캐리온은 가끔 이건우가 술을 거나하게 먹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걸 떠올렸다. 그때는 분명 이건우만의 느낌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박소현의 노래는 그저 자로 잰 듯한 느낌이다. 듣기는 좋지만 흥이 나거나 소위 말하는 '느낌'이라는 것이 없다.
캐리온의 정확한 지적에 박소현의 얼굴이 충격이 어렸다.
“···어?”
[흥이 없지. 기교보다도 노래가 가진 진심과 감동을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가 중요해.]
[테크니컬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으니 감정에 집중해봐.]
캐리온의 얘기를 듣던 쌍둥이 중 하나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나는?”
갑자기 물었는데도 캐리온은 큰 고민 없이 술술 말했다.
[너는 목소리의 울림이 커. 기계로 특별한 이펙트를 주지 않았는데도 힘이 있지. 악기로 치면 처음부터 울림통이 큰 악기를 타고 태어난 거야.]
캐리온의 칭찬에 쌍둥이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히히. 나는 좀 대단한 듯.”
[하지만 발성을 할 때 턱에 힘이 많이 들어가. 특히 턱에 힘이 들어가면 혀가 안으로 말리게 되고 그럼 목구멍이 막히지. 중요한 순간에 목소리가 눌려서 나오게 돼.]
캐리온은 이번에도 쌍둥이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쌍둥이가 깜짝 놀랐다.
“헐. 어떻게 알았지? 내 목을 뜯어봤나?”
[혀에 힘을 빼려면 가슴을 편하게 해야 해. 너무 숨을 많이 들이쉬려고 하지 말고 편하게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나아질 거야.]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어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러나 내정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기운이 한풀 꺾인 상태였다.
하지만 캐리온의 존재는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열정을 불어넣어줬다. 캐리온이 활약하자 촬영팀도 그들을 점점 주목했고, 캐리온 덕분에 실력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 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캐리온과 함께하면서 가능성을 보았다.
‘캐리가 있으니까 우리도 눈에 띄지 않을까?’
‘이대로라면 팀전에서 우리가 우승할 듯!’
‘떨어지더라도 임팩트는 남기고 떨어져야지.’
캐리온은 그녀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빠졌다. 미니온을 학습시키는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마다 성향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랐다.
그리고 가르칠 때마다 받아들여서 쑥쑥 자라는 모습이, 마치 이건우와 함께 회사를 키우고 성장시킬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이 주 동안 모든 동작을 완벽하게 연습했다. 특히 박소현과 쌍둥이는 실력적인 부분에서도 일취월장했다. 쌍둥이가 말했다.
“학원에서 트레이닝 받는 것보다 캐리한테서 한 마디 듣는 게 더 좋아. 난 이제 떨어져도 여한이 없다.”
“그래도 나는 떨어지면 한은 남을 듯”
박소현도 한 마디 끼었다.
“캐, 캐리야. 나중에 오디션 끝나고도 연락하고 지낼래?”
캐리온은 이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번호를 교환하고 단톡방을 팠다. 박소현은 행복해했다.
‘친구가 생겼어!’
박소현은 그러다가 문득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유미.
정유미는 이 주가 넘는 시간 동안 거의 연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캐리온은 그녀의 파트를 줄이고, 연습이 거의 없어도 지장이 없을만한 것들만 골라서 넣어주었다. 그래서 이번 곡에서 정유미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연습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유미는 뭘 하느라 이렇게 연습에 안 오는 걸까?”
그러자 쌍둥이가 말했다.
“냅둬. 내정자인데 알아서 잘 하겠지.”
“혼쭐이 나봐야 할 듯.”
정유미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이미 그녀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
한편, 그 시간 정유미는 인터뷰를 찍고 있었다. 인터셉션에 들어가는 짧은 인터뷰 영상인데, 이걸 통해서 박홍근 이사는 정유미를 부각할 계략을 짰다.
박홍근 이사가 보기에 정유미는 실력 면에서 캐리온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정면으로 붙으면 백이면 백, 박살 날 게 뻔했다. 그러면 다른 방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전략을 잘 짜야 한다.
그래서 박홍근 이사는 아예 캐리온과 정유미가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대신 캐리온은 완벽한 악역으로, 정유미는 그에게 피해를 보는 포지션으로 잡았다.
박근홍의 연출은 이랬다.
캐리온은 정유미를 제외한 팀원들을 자기 밑으로 끌고 들어가 정유미를 견제하는 나쁘고 이기적인 년이 된다.
반면, 정유미는 불쌍하게 캐리온에게 찍혀 파트 배분도 제대로 못 받고 연습도 못 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다.
심지어 아이들은 정유미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단톡방을 만들어 예선 무대에 관한 것을 공유한다.
하지만 정유미는 친구들의 따돌림에도 아이돌이 되겠다는 열정으로, 혼자 남아서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정유미의 노력이 돋보일수록, 그리고 캐리온의 견제가 심해질수록 상황은 정유미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다.
정유미는 이번 팀전에서 돋보이지 않아도 소위 말하는 까방권을 얻게되는 셈이다.
정유미도 이 일에 흔쾌히 찬성했고, 그래서 관련 내용으로 인터뷰를 찍었다.
“이번 팀전을 준비하는 데 힘든 점은 없었나요?”
진행자의 질문에 정유미는 눈꼬리를 서글프게 내려뜨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조금 서먹서먹해서 아쉬워요.”
진행자는 어린 학생이 울먹거리자 마음이 짠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면서도 정유미는 캐리온이 어떻게 자신에게 야박하게 굴었는지 절절하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끝에 덧붙였다.
“캐리는 정말 잘하죠.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따르는 것도 이해가 돼요.”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 정유미는 발개진 눈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