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본진털기 (3)
정연화는 가출청소년이다.
어려서부터 이혼한 아버지 아래서 살고 있었지만, 술만 마시면 손찌검을 하는 통에 결국 가출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 가출팸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상황은 다를 것이 없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그 돈의 대부분을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갔다.
그래서 벌어온 돈의 액수를 속여서 꿍쳐놓고 있었는데, 관리하는 언니에게 들켜서 미친듯이 맞았다. 그녀를 때리던 사람이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도망치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들에게 납치되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마취가 풀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녀는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으윽."
몸을 조금만 움직였는데도 배에서 큰 통증이 느껴졌다.
아픈 배를 살펴보니 투박하게 매듭지어진 의료용 실 사이로 불룩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다. 만져보니 딱딱한 고체로 된 물체였다.
정연화는 겁이 덜컥 났다.
‘죽는 건가?’
그녀 옆에는 작은 아이와 꾀죄죄한 몰골의 아저씨, 그리고 노인이 있었다. 그들이라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노인은 열이 올라서 얼굴이 붉어진 상태에서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연화는 그들과 얘기를 해보았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러지?'
지옥 같은 집구석에서 탈출해서 가출팸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녀를 업소에 보내면서, 가진 것도 없는 그녀를 발가벗겨 먹으려고 했다. 청소년센터에 도움을 받으려고 했지만, 거기에 연락하면 다시 끔찍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여기에 떨어지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때 옆에서 작고 마른 아이가 말했다.
“저···저기로 가면 되나요?”
그들끼리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지기 전, 납치한 사람이 떠나면서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KW 데이터 센터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라. 그게 너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데이터 센터는 메마른 땅밖에 없는 이곳에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었기에 잘 보였다.
정연화에게는 기댈 곳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함께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는데 멀리서 무언가가 걸어나왔다.
“로봇?”
은빛 금속질의 몸체를 갖고있는 사람 형태의 무언가.
미니온이었다. 미니온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아. 들리십니까?]
“···누구?”
[저는 KW 대표 이건우입니다.]
정연화는 드디어 도움을 요청할만한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대표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저는 고향이 서울인데 갑자기 여기에 내던져져서···.”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이 친구에게 몸을 맡기겠습니까?]
“친구요?”
[그러니까 로봇 말입니다. 여러분을 해칠 일은 없을 겁니다.]
미니온은 손을 내밀었다. 마치 손을 달라는 듯한 동작에 정연화는 머뭇거리며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지. 잘 했어요.]
다정하게 어르는 듯한 말투에 정연화는 조금씩 안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우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다. 그는 한국을 위대하게 만든 영웅이며 천재개발자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앗”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손목에서 피가 찔끔 나왔다. 붉은 피에 겁먹은 눈동자가 흔들리자마자 이건우가 말했다.
[걱정마세요. 함께 있겠습니다.]
이건우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갑작스럽게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제일 의료원이었다.
*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니온의 나노로봇은 성공적으로 기계식 타이머를 고장 냈다. 나노로봇 자체는 인체에 피해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사람의 몸에 폭탄을 심는 과정에서 각종 유해균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을 병원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다 피로해졌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긴장감이 장난 아니었다.
동시에 분노가 밀려왔다.
“사람들을 이딴 식으로 이용해?”
나는 미네르바 가문을 돌아보았다. 소란을 듣고 나온 사람이 웅성거리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건들지 않겠다.
“하지만 가문은 확실하게 박살 내주지.”
지금까지 공을 들이며 윌리엄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든 보람이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떠오른 거대한 표적.
사람들은 지금 거대한 사업체를 이끄는 미네르바 가문의 위대함을 떠들어대며 포장하고 있지만, 곧 그 사람들이 돌아서서 공개처형을 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곧이다.
*
윌리엄은 기사를 훑어보았다. 언론 쪽으로 힘이 있는 듀퐁 가문이 힘을 쓴 덕분일까? 기사는 미네르바 가문에 대한 호평 일색이었다.
원래라면 이건우가 캐리온을 앞세워서 여론을 싹 갈아엎었겠지만, 지금 이건우는 데이터센터 때문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지금쯤 데이터센터가 폭발했겠지.’
데이터센터에 영향을 못 미쳐도 상관없다. 사람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사회적 여파는 엄청날 것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KW의 데이터 센터에서 사람이 폭발하다. 아무리 이건우라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관련 내용들은 이미 모두 준비해두었고, 작전 보고가 들어오면 전세계에 뿌려질 것이다. 이쪽에서 작전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직 윌리엄과 몇몇만 알고있는 미네르바 가문의 중심부에서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이 정도면 이건우의 정신을 쏙 빼놓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았다. 윌리엄은 간만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비서가 사색이 된 채로 들어왔다.
“윌리엄 님. 지금 가문과 통신이 완전히 두절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통신이 끊겼다니?”
“아무래도 전자기 교란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비서의 보고에 윌리엄은 불안해졌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로 당하다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면 전부 이건우가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특히 가문과의 통신은 윌리엄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던 곳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말썽이라니. 느낌이 싸했다.
윌리엄의 생각은 가문에서 시행하던 작전에 미쳤다. 마침 지금쯤 이건우의 데이터센터를 폭파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데이터센터 폭파 건은 어떻게 됐는가?”
그 말에 비서가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통신이 끊겨서 거기에 신경 쓰느라 미처···. 지금쯤 연락이 왔을 겁니다.”
비서가 서둘러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띠리리 띠리리
윌리엄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표시제한으로.
윌리엄은 잠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이 휴대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휴대폰은 가문에 연락하는 용도로만 쓰는 휴대폰이니까.
그런데 발신인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온다?
아무래도 가문의 통신이 끊긴 것과 관련이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윌리엄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자동으로 영상통화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화면에 한 남자가 나왔다.
삐딱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
윌리엄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건우”
“오랜만이야.”
이건우가 뺀질거리며 주위를 보여주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야. 너 좋은 데서 살더라.”
휴대폰을 통해 보이는 가문은 지금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윌리엄은 자식을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네르바의 성을 가지고 있는 방계 가문 사람들은 꽤 있었다.
아무리 윌리엄이 냉혈한이라도 가족을 아끼는 마음은 있다.
“너···.”
“걱정하지 마. 가족들은 안전하니까.”
이건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안전한 건 아닌가? 곧 있으면 체포될 거니까?”
“뭐?”
“메인 서버를 털었는데 지금 미네르바 가문에서 지금까지 해 먹었던 일들은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으니까 기대해. 곧 있으면 전세계 사법부에서 출석요구서가 날아올 거다.”
윌리엄은 머리가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뭐? 가문의 메인 서버가 털렸다고?
“무···.”
뚝
윌리엄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전화는 뚝 끊어져 있었다. 그는 동안 휴대폰을 내려보았다.
지금 내 가문이 털렸다고?
수백 년 동안 은밀하게 암약하던 내 가문이? 이렇게 쉽게?
“으아아아악!”
윌리엄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그때 이건우의 데이터센터 폭파 작전에 투입된 사람들과 연락한 비서가 돌아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뭐야?”
“그게···. 이번에 인체 폭탄을 만든 정황이 다 탄로 났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저희 가문에 대한 규탄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휴대폰의 부서진 액정에 문자가 하나 떠올랐다.
- 아 깜박했다. 맛보기로 선물 큰 거 하나 준비했어.
*
윌리엄을 깎아내릴 건더기는 차고 넘쳤다. 기특하게도 미네르바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모든 치부를 기록해놓고 있었다. 윌리엄뿐만 아니라 이번에 휘하에 있다고 알려진 기업까지 모두 나의 표적으로 돌아섰다.
캐리온은 내부자료를 탈탈 털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하드웨어를 아예 뜯어왔다. 그런 다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자료집으로 만들었다.
기자들이 이것만 보고 받아적어도 일 년치 기삿거리는 그냥 나올 것이요, 책으로 낸다면 베스트셀러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이 중요한 법.
뭘 먼저 터뜨릴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은 바로 이것.
따끈따끈하면서도 엽기적인 인체 폭탄 사건을 꺼냈다.
인체 폭탄 작전 도중에 가문을 급습했고 현장에서 모조리 제압한지라 증거는 차고 넘쳤다.
이 자료들은 예쁘게 정리되어서 각국의 수사기관으로 보내졌다. 수사기관이 더 조사할 것도 없이, 그대로 교차검증만 한 후 기소하면 될 정도로 깔끔하고 완벽한 자료였다.
캐리온은 수사기관뿐만 아니라 언론에도 관련 자료를 슬쩍 흘렀다. 유럽 쪽의 언론은 듀퐁 가문이 장악하고 있지만, 나는 특종이라고 하면 달려드는 기자의 본능을 믿었다.
역시나 기자들은 자료를 보자마자 생각했다.
‘이건우의 데이터센터에 테러가 일어났다고?’
‘심지어 인체폭탄? 어떤 미친 새끼야?’
‘이건 안 쓰면 뒤처진다.’
<’인체폭탄’을 이용해 KW의 데이터 센터를 공격하려 해>
<테러 범인은 누구?>
<각국 수사기관···아직 조사중>
일부러 범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누구인지 추측하고 씹어대면서 논란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윌리엄을 처형대에 매달기 위해서였다.
범인이 나와야 속이 시원할 텐데, 기자들은 똥을 싸다가 끊긴 느낌이었다. 그들은 피해자와 인터뷰하기 위해서 제일 의료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제일 의료원의 경비는 삼엄했으며 피해자들은 특실에서 보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병원의 정원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 한 기자가 산책하러 나온 정연화를 발견했다. 기자는 사건을 담당한 경찰에게 술을 먹이고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깡마르고 왜소한 체형. 목덜미에 닿을락말락하는 짧은 머리. 팔과 목 주변에 있는 구타당한 흔적.’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기자의 촉이 발동했다. 저 소녀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다른 기자들 몰래 정연화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네?”
정연화는 겁에 질린 얼굴로 기자를 쳐다보았다. 원래도 평범한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납치 및 폭탄테러 사건을 겪은 이후, 정연화는 트라우마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소스라치듯 반응했다.
그녀의 겁먹은 눈망울을 보는 순간 기자는 죄책감을 느꼈다.
정연화는 매우 어렸다. 서류상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못 먹고 자라서 또래에 비해 왜소해보였다. 특종에 눈이 멀어 달려들었던 기자는 자책했다.
‘내가 미쳤지. 이런 어린애를 가지고.’
그가 별거 아니라며 그냥 돌려보내려는 순간, 정연화가 말했다.
“저기, 기자님인가요?”
“아 네.”
“저 인터뷰해도 될까요?”
기자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