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판치기 (2)
나와 에드먼드의 대치.
한서진은 눈치 빠르게 옆으로 물러났고, 나는 쓰러진 경비원을 사뿐히 밟고 에드먼드에게 다가갔다. 에드먼드의 앞에 도착한 나는 일부러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
가구 하나하나에서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장인이 손으로 빚은 예술품과 같은 아름다운 방이었다.
하지만 나는 에드먼드가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그 대단한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별거 없네. 가구에 돈을 쓴 티는 좀 나지만, 글쎄. 인테리어한 사람이 센스가 없는 건가."
에드먼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주일 전, 그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에드먼드가 자랑하던 미적 센스를 내가 철저하게 무시해버렸다는 것?
"무례하군."
"그런가? 하지만 그쪽도 충분히 무례했었으니 똑같은 셈 치자고."
에드먼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그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적개심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건 아닌 것 같고. 뭐하러 온 거지?"
"내가 요즘 좀 바쁘다 보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먼저 그쪽의 제안이 정말 재미있었어. 나더러 밑으로 들어오라니, 농담 실력은 수준급이더군."
나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서 에드먼드의 브레스트 포켓에 꽂아 넣었다.
에드먼드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농담 실력에 비해 사람을 보는 안목은 없는 것 같군. 이번에 왕립 한림의원에서 정보 받았지? 내가 조만간 핵융합 사업을 시작할거거든. 그럼 네가 하고 있는 석유 사업이 어떻게 될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내가 역으로 제안하지. 내 맡에 들어와. 내가 특별히 키워줄 테니까."
"···뭐?"
나는 에드먼드의 반응을 보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럼 좋은 대답 기다리겠어."
"저, 저!"
에드먼드가 불쾌함과 황당함이 섞인 소리를 냈지만, 그는 차마 고함을 지르지 못했다.
대신 이건우가 준 명함을 거칠게 구기며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감히 나더러 밑으로 들어오라고?"
언제 그가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있었던가. 로스차일드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이후,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당장 이건우에게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배우며 자랐다.
이런 예의를 모르는 동양인과 드잡이질하면서 자신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은, 그의 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속으로 어떻게든 이건우를 꺾어버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다니."
그저 몇 번의 작은 성공으로 기고만장하고 있는 저 젊은 사업가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옆에서 눈치를 보는 비서에게 말했다.
"조 베일리에게 연락을 넣어. 내가 보자고 한다고."
*
오일로드를 나온 나는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진즉 이렇게 해줬어야 하는 건데."
한서진은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고작 미국까지 와서 하는 일이라니, 당했던 걸 똑같이 갚아주기라니. 하지만 이런 복수, 나쁘지 않았다. 또라이 같은 상사이지만 꽤나 잘 맞는 구석이 있다.
나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제가 고작 이런 복수를 하자고만 온 것은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자극을 해줬으니 에드먼드는 분명 조 베일리에게 연락을 할 겁니다. 어떻게든 제 사업을 방해하려고 훼방을 놓으려고 하겠죠."
"그럼 일부러 자극했다는 건가요?"
물론 복수하려는 사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한 번쯤 이렇게 강하게 들쑤실 필요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죠. 어차피 에드먼드가 석유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지요."
미국 대선이라는 거대한 기회를 말이다.
한서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그를 자극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사업에 더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으려고 할거라면서요."
나는 씩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에드먼드와 베일리의 방해가 최고조에 달할 때, 저는 미국 사업을 접어버릴 겁니다."
"네? 갑자기요?"
"희토류 사업할 때 봤잖아요. 줬다 뺏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
"아···."
"이번 나노온과 파워온 공장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충주 희토류 공장 건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공장 하나 없어졌다고 어찌나 난리던지.
한서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가고 있는 이건우를 바라봤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유를 이것저것 갖다 붙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복수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거 같은데.'
유난히 이건우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에드먼드에게 선전포고도 했고, 캐리온도 핵융합로를 건설할 모든 준비를 끝냈다.
모든 준비가 끝나는 즉시, 나는 미국에 공장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
"파워온 공장을 미시간주에, 나노온 공장을 애리조나주에 짓겠습니다."
당연히 두 지역의 시민들은 쌍수를 들어 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사막과 라스베이거스밖에 없던 네바다주고 발전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도 그런 발전을 이룰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뉴클리온 프로젝트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또한, KW는 핵융합의 상용화에 도전하겠습니다. 바로 상업로를 만드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이미 200곳이 넘는 기업에 입찰 초대장을 발송했고 제안서를 받고 있습니다."
"핵융합의 상용화가 성공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에너지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겁니다."
나의 발표에 맞춰서 로날드도 정책적인 지원에 대하여 발표했다.
"미국 에너지정책법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에 아직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신에너지 패러다임에 맞춰 에너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바이다. KW의 핵융합 프로젝트가 바로 그 첫 번째 타자이다."
"그리고 KW의 미시간주와 애리조나주 공장 건립을 환영한다. 이는 미국 국민의 일자리를 증대시키며 제조업과 첨단산업을 부흥시킬 것이다. 나는 KW의 사업에 국가 차원의 지원을 약속하겠다."
내가 발표하고 로날드가 서포트해주는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여세를 몰아 재빠르게 미시간주와 애리조나주 주지사를 만나서 부지를 매입하는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제 미국에 KW의 공장이 들어선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물론 공장이 들어서는 위치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한서진이 물었다.
"그런데 왜 애리조나주인가요?"
미시간주는 옛날부터 제조업 허브 역할을 했던 곳이니 넘어가더라도, 반도체 공장이 들어가는 애리조나주는 반도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주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나의 철저한 계획 아래 선정이 된 것이다.
애리조나주는 원래 여당의 텃밭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민심이 야당 쪽으로 이탈하며 경합 지역이 돼버렸다. 이참에 애리조나주에 로날드가 유치한 공장을 지어줘 민심을 다시 여당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애리조나주 옆에는 캘리포니아주가 있고, 캘리포니아주에는 실리콘밸리가 있지요."
캘리포니아주.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주이며, 미국의 주 중에서도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캘리포니아주의 GDP만 하더라도 웬만한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5위 수준이다.
수많은 기업이 있는 이 지역에 자연스레 내 영향력을 미리 넓혀둘 수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이다.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땅값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싼 데다 공장부지를 확보하기가 용이하지 않기도 하였고.
따라서 반도체 공장은 수요처가 많은 실리콘밸리 근처의 애리조나주에 짓는 게 훨씬 좋았다.
"게다가 희토류가 있는 네바다주, 반도체 공장이 있는 애리조나주, 반도체의 최대 수요처인 캘리포니아주. 세 곳이 다 이웃 동네거든요."
지도를 보면 세 주가 삼각형을 이루며 있다. 나는 여기에 똬리를 틀고 앉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 동네들은 서로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의 확실한 거점이 되어줄 것이다.
내가 진짜 공장 부지까지 매입하자 주변 상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부지 매입한 내용이 있는 기사를 보니, 여기에 들어올 공장이 보통 규모가 아닌 것이다.
당장 주변의 숙박업, 요식업, 유흥업 등이 수혜를 입었다. 또한, 워낙 대규모 공사가 예상되다 보니 공사를 위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까닭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반도체 장비 기업과 제조업 주가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각종 관련 업체들이 공장 주변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은 덤이었다.
실리콘 밸리 또한 흥분으로 가득 찼다. 그 구하기 어렵다는 나노온을 바로 이웃 동네에서 구할 수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나노온만 있으면 그들이 판매하는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고, 연구하는 장비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자 ‘이건우 이펙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의 어느 기자가 썼던 용어. 이건우 이펙트.
이건우가 기술을 개발하고 공장을 세우면, 그 지역의 경기가 부양한다는 단어가 이제 미국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시간주와 애리조나주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고, 같이 수혜를 보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도 덩달아 기뻐했다.
그들은 공장을 세워준 이건우에게 환호했고, 정책적인 서포트를 해주며 적극적으로 공장을 유치한 로날드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졌다. 로날드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행복해하고 있었다.
조 베일리만 빼고.
*
조 베일리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건우가 공장을 지은 지역에서 그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공장이 들어선 지역이 베일리에게는 뼈아팠다.
양당의 중요한 경합 주인 미시간주와 애리조나주를 빼앗긴 것은 둘째치고, 캘리포니아주에서 베일리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바로 조 베일리가 상원의원으로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번 이건우와의 협상이 틀어졌을 때, 로날드가 나노온과 파워온 공장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절묘한 지역에 사용할 줄은 몰랐다.
캘리포니아주를 둘러싼 네바다와 애리조나.
이 두 곳에 파워온 공장과 반도체 공장이 들어앉으니 캘리포니아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심지어 지지율이 떨어지는 속도가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캘리포니아에 실리콘밸리가 있기 때문에 반도체 장비를 수급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건 누가보더라도 남의 텃밭을 대놓고 빼앗아버리겠다는 스탠스임에 분명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주의 선거인단은 54명으로 모든 주에서 가장 큰 선거인단을 가지고 있다. 아직까지 그의 텃밭이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후원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은 따놓은 당상인 줄로만 알았건만,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처참하게 박살 날 게 눈에 훤했다.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저쪽이 가지고 있는 카드가 너무 강했다. 조 베일리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이건우를 박살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에드먼드가 조 베일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