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제물던전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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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던전은 C급 던전과는 난이도가 확연히 다르다. 같은 C급 몬스터가 나오더라도 물량에서 현저한 차이가 났다. 100마리를 넘어선 임프와 하피 무리가 공략대를 둘러싼다.
E, F급 헌터인 짐꾼들을 긁기 시작하고 힐러들도 위협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나서야겠다. 약해빠진 짐꾼 이미지를 조금 벗어버리기로 한다. S급 헌터소드를 복제해냈다.
가장 깊숙이 침투한 몬스터를 전부 베었다.
이하연의 앞.
그녀를 위협하던 임프 한 마리의 등을 뒤에서 뚫어냈다.
“어, 언제······.”
이하연은 내가 언제 나타난 지도 몰랐다. 워낙 재빠르게 몬스터를 휩쓸어댔으니, 눈앞의 환자를 돌보고 몬스터를 피하기에 급급하던 그녀의 입장에선 없던 사람이 등장한 거다.
“조심하십시오.”
몬스터는 아직 많이 남았다. 초록빛을 띄는 마법진은 가동을 멈췄더라도 이미 홀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남겨놓았다. C급이라도 수가 많다. 방심하면 크게 부상을 당할 우려가 있다.
약한 헌터들이 모인 공략대의 최심부. 짐꾼과 힐러들을 지켜내기 위해 싸웠다.
목표는 이하연의 보호였다. 중심부에 머물며 전사와 검사, 궁수들의 방벽을 뚫고 들어오는 몬스터를 썰었다.
임프 한 마리, 하피 한 마리.
다시 임프 한 마리, 하피 한 마리.
눈에 보이는 즉시 검으로 심장을 뚫고 목을 쳐낸다. C급 몬스터들의 접근 자체를 불허했다.
“우와······.”
누군가 감탄사를 흘렸다.
일성 길드의 B급 헌터들도 보여주지 못할 위용이다. 앞서 싸우고 있는 그들도 이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적을 베어내지 못한다.
아악, 크윽.
끼엑, 꺄아아.
뒤섞이는 악마와 인간들의 비명가운데, 악마의 목소리가 먼저 스러져갔다. 인간은 버티고 악마는 버티지 못했다. 인간은 서로 돕고 치유하였으나 악마는 다치고 죽었다.
전투는 공략대의 승리다.
스무 마리 정도 남은 임프와 하피 무리들. 4명의 B급 헌터들이 앞장서서 공격하고, 나머지 헌터들이 물러나는 적을 마무리했다.
이들은 일성 길드의 헌터들이다. 싸움과 전투에 이골이 나있었다. 동등한 전력의 싸움, 혹은 그 이상 되는 적들과의 싸움도 충분히 이겨낸다.
치열한 전투를 끝마치고, 간단한 전투보고가 오갔다.
“기적입니다. 이 정도 적을 마주하고도 사망자가 없다니.”
박우현이 부상자들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해보고 말했다. 어려운 싸움이었으나 놀랍게도 죽은 헌터는 없었다. 선두에서 싸워대며 몬스터의 숫자를 봐서 뒤편의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란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보니 완벽한 대승이다.
“저 사람. 저 짐꾼 헌터가 우릴 지켜줬어요.”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던 후방의 D급 헌터가 나를 가리켰다. 안쪽으로 밀려들어오는 적들은 전부 내가 처치했다.
“그······ 한재복 씨? 정말 D급 헌터가 맞나요?”
이하연이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묻는다. 직접 보고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치유마법을 쓸 수 있는 특이한 짐꾼 헌터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대단하다.
방금 보여준 전투는 검술에 문외한인 그녀일지라도 도저히 D급으로 믿지 못할 수준이다.
“템빨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최상급 헌터소드를 보여줬다.
찬란하게 빛나는 S급 헌터소드. 내가 높이 뻗자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제 무기가 S급이라서요. 칼이 정말 잘 듭니다.”
내가 몬스터를 슉슉 썰어버리던 건 순전히 무기 덕분이란 의미였다.
“그런가요? 근데 엄청 잘 싸우시던데······.”
“내가 볼 때 자네는 최소 B급 헌터는 되는 거 같은데.”
짐꾼대장 백범일도 이하연의 말을 거들었다. 비록 E급 헌터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상위헌터들과 함께 던전을 돌아본 백범일이었다. 얼핏 눈으로 견주기엔 나도 B급 헌터 이상으로 보였다.
“최상급 헌터소드 써본 적 있으십니까?”
멋지게 번쩍번쩍 빛나는 헌터소드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젓는다. S급 헌터소드는 200억 원. 돈 잘 버는 A급 헌터들이나 목돈을 써서 장비하는 아이템이었다. 여기서 이걸 써본 사람은 없었다.
“이걸 쓰면 누구나 저처럼 강해보일 수 있습니다. 제 비장의 무기입니다.”
“헌데 D급에 불과한 자네가 어떻게 S급 헌터소드를······.”
“제가 돈이 좀 많습니다. 비싼 아이템도 차고 넘치게 많아요.”
“그런데 왜 짐꾼 헌터를 하는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성 길드를 동경해서 짐꾼으로 지원했다고요.”
사람들의 질문을 흘러 넘겼다.
내 수준을 남들에게 널리 퍼트릴 생각은 없었다. 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SS급이 될 때까진 실력을 숨기는 편이 나았다. 그 전에 섣불리 나를 드러내면 유망한 인간을 제거하려는 마인의 대대적인 견제를 받게 된다.
고분고분하고 조종하기 쉬운 인간이 아니면 웬만해선 크기 전에 새싹을 밟아놓으려 하는 마인들이다. 일성 길드 사람들에게 내 실력을 여실히 드러낼 순 없다.
의뭉스레 얼버무리자 사람들은 대충 납득하고 지나갔다.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D급 헌터가 이렇게도 강하니 자축하며 기뻐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신뢰가 더해졌다.
다가오는 김수로.
조용히 속삭인다.
“노력, 끈기, 열정의 헌터 한재복님. 이렇게나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본연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돈이 얼마나 많으시길래 S급 헌터소드를 들고 다니는 겁니까.”
소형 카메라를 들이대며 인터뷰를 시도한다.
“꺼져.”
기자 놈을 쫓아냈다.
*
제물던전 1층. 초록색 빛깔 마법진이 계속해서 등장했고, 일행은 슬기롭게 대처했다. 사상자 없이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하연의 세상만사 근심을 다 짊어진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사람들은 게이트를 타고 던전 2층으로 향한다.
던전 2층.
1층. 제물던전 첫 단계에서 마주했던 아치형 대문과 제단이 똑같이 모습으로 서있었다.
비석의 글귀는 조금 바뀌었다.
「지나가려는 자. 보물을 바쳐라.
너의 정성에 따라 재앙이 결정될 것이다.」
힘에서 보물로 제단에 바쳐야 할 제물이 달라졌다.
“보물? 이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 모인다. 1층은 내 해석을 따라온 덕분에 무사히 이겨낼 수 있었다.
마법진에서 등장한 몬스터는 모두 C급. 사람들은 제단에 바치는 정성에 따라 적의 등급이 결정되는 제물던전의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다. 빨주노초파남보. FEDCBAS. 제단의 색깔에 따라 나타나는 적의 등급이었다.
이번에도 제단은 보라색으로 빛나고, 문은 열리지 않는 상태였다. 무엇을 제단에 바쳐서 색깔을 변화시킬지가 중요했다.
“‘보물.’ 제물던전을 지나가려는 자는 헌터들이죠. 헌터에게 보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헌터에게 무엇보다 가치 있는 물건. 바로 아이템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선 제단에 아이템을 바치란 의미로 보입니다.”
당당하게 해석했다. 틀릴 리는 없었다. 다 직접 겪어본 걸 말하는 거다.
“오.”
“그렇군.”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다른 의견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내 해석에 따른다.
“제단에 아이템을 한번 넣어보죠.”
나는 성큼성큼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이하연이 임시 공략대장으로서 옆에 붙어 나를 따라왔다.
“저, 그런데 아이템으로 뭘 바치죠?”
“일단 제 헌터소드를 넣어보겠습니다.”
내 허리춤에 껴있는 일반 헌터소드(E급)를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위이잉.
제단 한가운데 박혀있는 마석이 보라색 마력을 뿜어 일반 헌터소드를 감싼다.
헌터소드를 둘러싼 마력이 아주 조금 남색으로 변했다.
“아이템을 바치는 건 맞습니다. 헌데 E급 헌터소드로는 어림도 없네요.”
제단의 변화를 해석했다.
“그럼 어떡해야 돼요?”
이하연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느새 바로바로 내게 질문하며 의지해오고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급격히 쌓인 신뢰에 흡족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제단이 만족할 만큼 성능 좋은 아이템을 바쳐야 하지요.”
“아······.”
1층에서 마력을 바칠 때와 같았다. 마력을 많이 바쳐야 색깔이 변했던 만큼 좋은 아이템을 많이 바쳐야 2층 제단의 색깔이 변했다.
“다들 아이템을 모아보죠.”
공략대는 제단에 바칠만한 아이템을 모았다. 각자가 당장 쓰고 있는 아이템을 모을 순 없었다. 앞으로 나올 적과 싸워야 하니 필요 없는 아이템을 위주로 제단 앞에 쌓아본다.
각종 잡템들이 제단 위에서 굴러다녔다.
위잉.
제단은 겨우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변했을 뿐이다. 잡템은 모아봤자 잡템.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이하연 님.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저희가 쓰고 있는 무기나 방어구를 바칠 순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상대할 적은 A급 몬스터 무더기다. 일행에게 주어진 운명은 전멸.
그렇다고 전투에 이용할 아이템을 제단에 넣을 순 없었다. 무기 없으면 그것도 전멸이다.
제물던전이 가진 모순. 적을 약화시키려면 나도 약해져야 한다. 공략대는 첫 번째 위기에 봉착했다. 이 선택도, 저 선택도 전멸이다. 제물던전의 시스템을 알아도 소용이 없었다.
혼란에 빠진 헌터들 사이로.
나는 압축형 보관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최상급 헌터소드를 제단 위에 올린다.
위이잉.
제단이 크게 울렸다. 남색이 파란색으로 바뀌어간다.
최상급 단검, 방패, 창, 활, 마석을 계속해서 쌓았다.
제단의 남색은 파란색, 초록색에 이어 노란색으로 변했다.
“······!”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나는 마석을 눌렀다.
구우우웅―
제물던전 첫 단계인 1층에서 그랬듯이 바닥이 열리고 제단이 떨어져 내렸다. 제단을 집어삼킨 바닥이 닫힌다.
*
“방금 무엇을······.”
헌터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나 혼자서 제물을 바쳐 제단을 노란색으로 만들어냈다. 마석을 눌러서 문을 열어젖히기까지 했다.
“아아, 아쉽네요. 아껴왔던 물건들인데.”
나는 짐짓 아쉬운 한숨을 내었다. 전혀 아쉽진 않았다. 복제한 물건들이니. 제단에 복제했던 E급 헌터소드를 놓았을 때 반응하길래 S급 아이템들을 복제해서 집어넣었다. 내게 손해는 없었다.
“잠깐 봤는데, 당신 S급 아이템을 바친 거야? 그리고 말도 없이 마석을 눌렀어?”
헌터들이 당황했다. S급 아이템이 있다면 공략대가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마석을 누르는 건 모두가 의논하여 함께 진행할 일이었다. 일단 상대할 적은 노란색 제단으로 D급 몬스터인 게 확정되었지만 그 전에 내가 한 행동이 맞는 판단인지 의심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제가 바친 아이템들은 가짜입니다. 진짜와 비슷한 가짜 아이템들. 제단이 그 효과를 알아챌까봐 얼른 마석을 눌러버렸습니다.”
“가짜라고······?”
“예.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단도 속일만한 엄청난 모조품입니다. 아까워하지 않아도 돼요.”
“······.”
헌터들이 내 말에 입을 다문다. 내가 꺼낸 물품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확히 확인한 헌터는 없었다. 워낙 빠르게 물품을 올려놓고 마석을 눌러버렸으니.
이것저것 트집 잡아 따졌다. 상의 없이 가짜를 집어넣어도 되냐, 그렇다고 마석을 막 눌러도 되냐 등.
하지만 어쨌든 내 덕에 위기를 넘겼다. 공략대가 아이템을 넣지도 말지도 못하고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은인에게 계속 화를 낼 만큼 헌터들이 염치없진 않았다.
임시대장도 이하연이고 하니. 내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넘어간다. 대신 다음부턴 행동하기 전에 상의하자고 신신당부한다.
나는 알았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이후 2층에서 나온 적들은 D급 몬스터. 노란색 마법진에서 임프와 그렘린 등이 튀어나왔다. 어렵지 않게 물리치고 지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오묘한 시선을 보내왔다. 뭔가 대단하며 신비롭다. 신분은 짐꾼인데 정작 공략대의 대장 같고, 엄청 도움을 주는 듯한데 어떻게 보면 또 독단적이다. 힐끗힐끗 흘겨보는 시선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튕겨냈다.
그렇게 도착한 제물던전 3층.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마지막 제물을 바칠 순간이다.
「지나가려는 자. 생명을 바쳐라.
너의 정성에 따라 재앙이 결정될 것이다.」
“생명을 바치라는데요. 이건 도대체······.”
이하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여태까지 문구 중 가장 난해한 단어였다. 또한 가장 위험하기도 했다. 생명을 바치라니. 뭘 제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지나가려는 자는 공략대. 공략대는 모두 헌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들에게 생명을 바치란 건 뭘 뜻할까요. 동료헌터의 목숨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 중 일부가 제단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물던전이 마지막으로 원하는 건 사람이다. 희생양이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