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사전 작업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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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렸을 적 누구나 다 그런 상상을 해봤을 거다. 돈이 복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앞의 500원짜리 동전이 두 개가 되고, 1,000원짜리 지폐가 두 장이 되며, 10,000원짜리 한 장이 20,000원으로 변하면 어떻게 될까.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아먹을 수 있고, 군것질을 두 배로 할 수 있으며,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만큼 과자를 살 수 있다. 그런 가볍고 즐거운 상상.
내 앞에 현실이 되어 펼쳐져 있었다.
60,000원이 120,000원으로 변했다.
종이를 찢어 허접하게 ‘1’과 ‘0’의 숫자들을 그려놓은 게 아닌 진짜 지폐. 두 분의 세종대왕님과 심사임당님을 뵈며 감탄했다.
‘이야...’
물론 나는 어렸을 때처럼 마냥 순진하지 않다. 화폐는 기술적으로 복제에 성공한다고 해서 맘 편히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통화엔 언젠가 추적이 붙기 마련이며, 계속 반복하여 위조지폐를 쓰다간 범죄자가 되어 나라의 처벌을 면치 못한다.
특히 마나를 이용한 헌터의 특수범죄는 가중처벌이 되어 무거운 형벌이 결정된다. 괜히 돈 갖고 장난치다간 이번 인생은 범죄자로 살아야 할 거다.
‘그럴 순 없지.’
이걸 사용하진 않기로 했다.
피식, 웃으면서 복제된 만 원짜리 지폐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위조방지기술도 그대로 적용되어 여백에 숨은 세종대왕님이 등장한다. 빛이 반사될 때마다 지폐에 코팅된 홀로그램에서 다른 문양이 반짝이는 것도 흥미롭다.
기분삼아 돈을 마구 복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돈을 산처럼 쌓아 그 위에서 미끄럼틀이나 타보자. 뭐 어떤가, 어차피 쓸 것도 아닌데.
돈을 내 키만큼 쌓아올렸다. 그 위에 누워 풀장에서 놀듯이 헤엄쳤다. 돈방석 위에 앉는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라는 걸 몸소 체험했다.
그러면서 놀고 있다가.
풀썩.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
돈이 전부 사라졌다.
내가 헤엄치던 현금풀장 위엔 맨 처음 올려두었던 만 원짜리 한 장과 오만 원짜리 한 장이 덩그러니 남았다.
‘없어졌네.’
복제된 돈들만 형체를 잃었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감에 고개를 돌려 다른 복제품들도 살폈다.
헌터소드(복제), 고블린몽둥이(복제), 배낭(복제)······ 등등 복제로 만든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흔적을 살펴본다. 마나가 흩어지며 공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응집이 풀리면서 일어나는 현상. 강제로 뭉쳐놓은 마나가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제어가 풀렸군.’
헌터가 쓰는 마력은 자연에 떠도는 마나를 기초로 한다. 평소 마나를 가공하여 쓰기 쉽게 몸속에 저장해놓다가, 필요할 때 원하는 형태의 힘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거다.
내가 가공해놓은 힘이 풀렸다. 제어가 사라졌다.
‘그래서 없어졌어.’
복제품들의 생성기반은 마나. 마나에 대한 제어가 풀리자 사라졌다.
복제를 통해 만든 물질의 한계를 깨닫는다. 내가 계속 신경 쓰지 못하면 없어져버린다.
‘마치 스킬과 같군.’
스킬들이 이렇다. 마나를 담지 못하고 마력을 조종하지 못하면 안 나간다. 복제는 스킬과 발현방식이 비슷했다.
아니, 아예 스킬이라 봐도 무방하다.
지난 생에 단 한 번도 스킬을 쓴 적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행동복제], [스킬복제], [아이템복제] 등등은 스킬과 같다는 걸.
내 특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나만의 ‘스킬.’ 내 고유한 기술이다.
“아하하······.”
이런 바보 같은.
모르고 있었다. 한 번도 가진 적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도 스킬이 생긴다는 걸, 나도 특성이 있다는 걸. [복제]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기술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복제]를 스킬로 분류했다. 그러자 사용법과 한계가 명확해진다. 모든 건 쓸모가 있다.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로 갈릴 거다.
그 자리에 남아 스킬을 연구했다. 실험을 지속하며 성능을 확인했다.
*
늦은 시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달깍.
현관문을 닫자 소리를 듣고 여동생이 쪼르르 달려 나온다. 내 유일한 가족. 스무 살의 나는 부모님을 일찍이 여의고 여동생과 둘이서 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빠른 말투. 오래 기다렸는지 톤이 높고 급하다.
“카톡했잖아. 좀 늦을 거라고······.”
나는 대답하다 말을 멈추고 멍하니 여동생을 보았다.
17세.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 어린 여동생이다. 내가 15년 젊어진 것처럼 얘도 15년 어려졌다. 작고 앳된 모습이 낯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시간이 몇 시야? 10시가 넘었어, 10시가. 내가 오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오늘 처음 던전에 간다더니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대충 올려 묶은 머리, 후줄근한 티셔츠, 공부할 때 끼는 크고 동그란 안경. 종알종알 열심히 투덜대니 마치 성난 다람쥐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재희야······.”
“?”
“반갑다.”
나는 어린 한재희를 안았다. 이상하게 감격스러웠다. 15년 뒤에도 얘랑은 떨어지지 않고 마물을 피해 살아가게 되지만 지금의 한재희는 색다르다. 오래된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 밝고 그리운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이래?”
깜짝 놀라는 여동생. 전해지는 체온이 따스하다.
지난 15년의 세월이 속속들이 떠오른다.
F급 짐꾼 헌터로 전전하고, 요령이 없어서 미친 듯이 노력하고, 인기를 얻어 한국 최고의 길드에 들어갔다가, 잘리고. 작은 길드에 들어가서 스킬도 없이 사냥에 연연하고, 노력하고 좌절하고, 노력하고 좌절하고.
그러다 10년 후에 EX급 게이트가 터져 세상은 아포칼립스처럼 변한다. 매일 죽고 도망치고, 죽고 도망치며, 눈물과 투쟁으로 얼룩진 나날을 반복한다.
그 때.
얘가 옆에 없었다면.
헌터로 각성한 한재희가 계속 나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동경하던 이가 죽고, 친애하던 이가 죽고, 존경하던 이도 죽어나가는 가운데, 얘는 끝까지 내 곁에 있었다.
회귀하기 전 그 순간까지.
“고맙다.”
15년의 기억을 모아 말했다. 일상 속에선 말하기 힘든 단어다. 어린 한재희를 보니 꺼낼 수 있었다. 지난 시간동안 고마웠다고.
“뭐야... 오빠 이상해! 어디 다친 거야?”
품에 안긴 한재희가 식겁하는 게 느껴진다. 화들짝 놀라서 부르르 떨더니 내 상태를 살핀다.
특히 머리를 맞았나 두상부분을 꼼꼼히 쳐다보고 있다.
“······.”
나는 한재희를 놓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리둥절한 모습마저 귀엽다.
“던전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이상함이 느껴지는지 의문어린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평소와 다른 듯한 오빠를 멀거니 떨어져서 살핀다.
많은 일이 있었지. 15년이라는 정말 많은 일. 이 시간대에선 아마 나만 기억하고 있는 일.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나는 애잔한 감상을 접고 훌훌 털어 넘겼다.
그때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바뀌어야 한다. 전혀 다른 시간을 만들어갈 거다.
*
“재희야. 공부하고 있었어?”
짐을 대충 풀어놓고 여동생에게 물었다.
“으, 응. 그런데?”
경계하는 한재희.
던전에서 막 돌아온 오빠는 이상하다.
나는 재희의 방문을 열었다.
책상 스탠드에 불이 켜져 있고, 교과서와 문제집, 잡다한 필기구와 연습장이 보인다.
날 기다리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고 1의 한재희는, 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 학교가 끝나고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자발적으로 공부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원도 못 다니지만, 이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긴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 않고, 잠도 줄여가며 학업에 열중한다.
“이번에 기말고사 봤잖아. 혹시 성적 나왔어?”
나는 재희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경계를 낮추기 위한 부드러운 목소리.
“어, 어? 기말고사 성적? 나오긴 나왔는데······ 그건 왜?”
“좀 볼 수 있을까?”
“아, 안 되는데. 오빠 평소에 그런 거 안 물어봤잖아. 갑자기 왜 그래?”
재희가 바짝 긴장한다. 차렷 자세로 서서 쭈뼛거리며 눈동자를 흔든다.
그럼 그렇지.
이 시절의 나는 멍청하게도 착각하고 있었다. 막연히 재희가 공부를 잘할 거라는, 그런 착각. 얘는 내가 매일 F급 헌터로서 굴러가며 돈을 벌어올 때 집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무척 열심이고, 성실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인강을 듣고 문제집을 풀어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어디로 일탈하거나 딴 짓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기계처럼, 완벽한 모범생으로 지냈다.
그래서 난 기대했다. 이렇게 공부해서 재희가 좋은 대학에 가고, 끝끝내 의사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길 바랐다. 나는 비록 노력, 끈기, 열정만 가지고 있을 뿐인 최저의 F급 헌터이지만 재희는 엘리트 의사가 되어 사회에서 인정받길 원했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성적표 줘봐.”
손을 내밀며 재희를 재촉했다.
“······.”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재희가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서랍을 연다. 성적표를 살그머니 내 손바닥 위에 올린다.
<이름: 한재희>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성적표>
―국어: 6등급
―수학: 6등급
―영어: 6등급
―과탐: 총합 6등급
처참하다.
예상대로다.
재희가 공부에 들이는 시간에 비하면 일반 학생의 평균 이하에 가까운 6등급으로 성적표를 도배하는 건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이걸 몰랐었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오빠, 나 그래도 성적 많이 좋아졌어. 지난번엔 국어 7등급이었는데 이번에 열심히 공부해서 6등급으로 올랐단 말야.”
재희가 다급히 설명한다. 그동안 노력했던 성과로 국어등급을 살짝 올린 걸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얘는 잘못이 없다. 진짜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좋아질 거라 믿고 있었다. 거짓말하는 성격이 아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잘못된 건 진로선택이었지.
그 이유는 3년 후에 밝혀진다. 재희가 스무 살 의무적인 각성 테스트를 받고 헌터로 드러났을 때, 특성이 알려준다.
재희의 특성은 이렇다.
<이름: 한재희>
<특성>
1. 단순(A)
2. 무식(A)
3. 전사(S)
쓰여 있는 그대로다.
얘는 단순 무식한 전사 타입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힘캐다.
지력이랑은 하등 관계가 없는, 힘에 재능을 몰빵한 캐릭터. 심지어 나보다도 강해진다.
그때부터 지지부진한 공부를 그만두고, 헌터일을 배워나간다. 재희는 전형적인 탱커. 꿋꿋이 파티를 보호하는 역할이었다. S급이라는 드높은 등급을 가지고 활약한다.
의사로서 성공하지 못해도, 탱커로서 성공한다.
“재희야.”
나는 나긋하게 말했다.
“응?”
재희가 조심히 귀를 기울인다.
“공부 때려 치자.”
얘도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공부 대신 훈련을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