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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221화 (221/222)

221화

관리자와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는 관심에서 멀어진 곳.

“당신 뭐야? 누, 누구…… 끄윽…….”

털썩.

경비 인원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는 것이 단순히 기절한 듯 보였다.

이 일을 저지른 남자는 태연하게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던 장소로 들어갔다.

아주 뜨거운 장소.

“하…… 오랜만이다, 정말로.”

남자는 데자뷰의 헤이드룬이었다.

부산의 종말 거부 장치 앞에 선 그는 용광로에 손을 올린 채로 과거를 회상했다.

언젠가, 흐레스벨그가 모두를 모아 놓고 이런 얘기를 했었다.

-우리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길 수 없다니? 이기려고 싸우려는 것 아니었나?

거대한 신조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 의문에 답했다.

-종말의 수레바퀴는 영원불멸. 신보다 먼저 완성된 그 율법은 완벽하다. 그러니 한낱 신인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게? 지겠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수레바퀴를 파괴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잖아? 로키를 막으면…… 이런…….

이번엔 위아래로 끄덕이는 신조.

-로키는 분명 수레바퀴를 삼킬 것이다. 그는 욕심이 많은 자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더니 진짜 그렇네.

-하나, 그것이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은 아니다.

-뭐?

-우리에게도 지지 않을 방법이 있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로키는 창조주에게 수레바퀴의 힘을 건네받은 신이었다.

원래도 세계의 혼돈을 즐기는 자였는데 그런 자에게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니 헤이드룬은 그 말이 미심쩍었다.

흐레스벨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긴눙가가프…….

-……맙소사.

긴눙가가프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가 탄생하기도 전, 그와 암소 아우둠라가 접촉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존재해왔던 공간이었다.

하품하는 심연이자 크게 벌려진 공동.

신들도 그곳에 들어가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아니, 단순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레바퀴의 근원은 회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레바퀴가 기울고 회전하지.

-그래서?

-그것을 막으면 된다. 긴눙가가프에 수레바퀴를 집어넣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고 결국 종말도 끝없이 유예될 것이다.

-하지만…….

헤이드룬과 위그드라실에 사는 4마리의 사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흐레스벨그가 말하고 있는 계획은 그 전부를 들어야 납득할 만한 계획이었다.

사슴 다인이 물었다.

-잊었어? 긴눙가가프는 모든 걸 삼키는 공간이야. 굳게 닫혀서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열 수 없잖아. 그리고 수레바퀴를 삼킨 로키를 어떻게 그곳으로 집어넣을 건데?

흐레스벨그는 흐릿한 낯으로 답했다.

뭔가를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긴눙가가프는 신성을…… 우리의 신성을 벼려 열면 된다.

-미쳤어? 신성을 포기하면…… 우리는 그냥 인간이 되잖아?

사슴들이 반발했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흐레스벨그가 한마디를 던지자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로키가 수레바퀴를 집어삼켰다는 말은…… 종말의 율법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즉, 그가 모든 걸 불태우고 시들게 한다는 말이지.

-……신인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구나.

-……그렇다.

-좋아, 로키가 수레바퀴를 집어삼켰고 그걸 막기 위해 그를 긴눙가가프에 처넣으려고 우리의 신성을 사용한다고 치자고. 근데 그다음은? 단순히 밀어 넣는다고 들어갈 놈이 아니잖아!

두라스로르가 그 말에 호응했다.

-두네위르의 말이 맞다. 긴눙가가프는 특수한 공간. 태초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음습하고 끔찍한 곳이지. 신들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심지어 강제로 밀어 넣을 수도 없는 공간이야…….

헤이드룬이 흐레스벨그가 언급한 계획의 전말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네가 들어가서 잡아당길 생각이로군.

흐레스벨그가 답했다.

-그렇다.

-미쳤군! 그곳이 어떤 곳인데! 신조차 이성을 유지할 수 없는 곳이야! 자아는 끝없이 쪼개질 거고 한기와 허무감으로 정신도 가리가리 찢길 거야! 그런데도…… 그런데도…… 들어가겠다는 말이야?

흐레스벨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든 거냐?

-…….

-그녀냐? 베르드 폴니르 그녀야? 고작 그녀 때문에…….

-고작이 아니다.

-……뭐?

-고작이 아니라고 했다.

흐레스벨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모두를 응시했다.

-나는 영원을 살 수 있는 존재다. 폭풍을 뿌리고 세계수를 수호하며.

-그런데 왜…….

-그것이…… 의미 없어졌어.

-…….

-지금의 나에겐 모든 의미가 사라졌다. 그녀를 잃은 후부터.

-네가 희생한다고 그녀가 기뻐할 것 같아? 정신 차려라, 신조!

-아마 슬퍼하겠지. 그녀의 한평생은.

헤이드룬은 신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끝없이 윤회해. 창조주의 벌을 받아 신성을 잃고 인간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슬픔도 잠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신처럼 모든 일을 기억하지 않지. 그녀는 나의 죽음을 알게 되면 슬퍼하겠지만 나의 부재는 결국에 잊힐 것이다.

-…….

-그녀는 내가 곁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종말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그녀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어.

다인은 납득할 수 없었다.

-……너는?

-…….

-그러는 너는? 반대로 너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영원을 썩게 될 텐데. 그건 괜찮다는 거야?

-상관없다.

-왜, 그녀가 뭐라고? 왜 신이 정에 얽매여 비이성적인 짓을 하는 거야?

흐레스벨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벌이는 것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헤이드룬은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신조의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내 폭풍을 훌륭하다 말했다.

-……뭐?

-다른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떠오르는 것이 그것뿐이다.

이유는 단지 구실일 뿐이다.

그에게는 그녀를 구할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고.

흐레스벨그가 헤이드룬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그녀를 나 대신에 지켜봐다오.

-망할 자식! 정작 우리가 지켜보더라도 네가 알 수는 없잖아! 그런데…….

-너희를 믿는다.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위그드라실의 생물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쳤다.

헤이드룬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오래전 기억을 들춰서 지금부터 행할 일에 당위성을 찾으려 했지만, 부질없었다.

그저, 때가 되었기에 계획을 실행할 뿐이었다.

부산의 심장, 용광로에 손을 올린 그가 말했다.

“프로토콜 ‘봄’ 시동.”

전국 각지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구에 가 있는 다인이 바람개비에 손을 얹고 말했다.

-프로토콜 ‘숨’ 시동.

프로토콜을 발동한 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토콜 ‘비’ 시동.

-프로토콜 ‘눈’ 시동.

***

송하린과 최별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땅에 각자의 검을 꽂았다.

검은 아스팔트를 두부 썰 듯 파고들었다.

성진이 미리 꽂아 놓은 검까지, 삼각형을 이루었다.

최별과 송하린은 끝까지 망설였지만, 성진이 결정한 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었다.

그가 결정했으면 따라야 했다.

한순간의 망설임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테니까.

최별과 송하린이 동시에 외쳤다.

“프로토콜 ‘집’ 시동.”

“프로토콜 ‘집’ 시동.”

후우우우우웅!

하늘의 빛기둥들이 한곳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부산, 울산, 대구와 대전, 인천과 세종의 빛이었다.

광주의 종말 거부 장치는 미리 부산으로 옮겨 와 헤이드룬이 함께 발동시켰다.

빛무리들이 다다른 곳은 성진의 몸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성진의 몸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며 무언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끼기긱.

끼긱.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로키였다.

성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로키. 함께 잊히자.”

“닥쳐! 난 사라질 생각 없어! 거기는…… 거기는 가기 싫다고!”

“이미 결정된 일이다.”

“제발, 제발 나를 놓아줘! 그, 그래! 수레바퀴를 원했잖아! 내가 패배했다고 말할게! 그러면 창조주가 너의 승리를 인정할 거야!”

끼기기긱.

끼기긱.

거대한 인력은 계속 로키를 빨아들였다.

“끄아아아!”

“로키, 착각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창조주와의 내기 때문이 아니다.”

“무슨 헛소리야! 전부 그렇게 시작된 건데! 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훨씬 더 이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이 베르드 폴니르를 사랑한 것,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내, 성진의 손으로 로키가 빨려 들어갔다.

끼기기기기긱.

“뭐, 뭐야…….”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어떻게 되는 거야?”

충격적인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

성진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간들이여, 행복해라. 너희는 진정한 자유를 쟁취했으며 이것은 너희의 투쟁으로 얻어낸 것이다. 당당히 살아가라.”

누군가 성진에게 말했다.

“시, 신조 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성진이 미소 지었다.

인간에게서 배운 표정이었다.

그의 미소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를 잊어라.”

쿠우웅.

성진이 마치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졌다.

툭.

투둑.

쏴아아아.

성진이 사라지자, 하늘에서 툭툭 떨어지던 빗줄기가 거세졌다.

그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겼다! 이겼어!”

“종말을 극복했다! 인간이 창조주에게 승리했다!”

“우리는 이제 자유야!”

분명 성진을 잃었기에 슬퍼해야 마땅한 사람들.

하지만, 승리에 기뻐하고 있었다.

후련한 표정이 마치 성진이라는 존재의 희생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우리가 승리했다!”

“승리야!”

“와아아아아아!”

승리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무엇으로부터 승리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지 부조화.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기억의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납득했다.

기억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뭔가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끈기는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금세 공백을 다른 기억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들과는 다른 이들이 있었다.

송하린과 최별이었다.

직접 이 계획에 나섰던 두 여인은 지금,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으아아!”

“안 돼…… 안 돼!”

종말로부터의 승리.

그 환희의 현장에서 울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조병창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왜 우는 겁니까?”

“왜 우시는 거죠?”

우는 모습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는 걸 자각한 송하린과 최별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왜…….”

송하린은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았다.

성진은 이들에게서 잊혔다.

그러니, 그렇게 두어야 했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눈물과 콧물이 가득한 얼굴로 송하린은 억지로 웃었다.

“히히……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요.”

그녀는 슬퍼서 웃었다.

***

종말 전쟁 1년 후.

사람들은 제 위치로 돌아갔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아름 씨, 이거 카피 좀 부탁해요.”

“네, 팀장님.”

사회는 상처를 씻어 냈다.

게이트 폭주 사태를 비롯하여 많은 혼란을 야기했던 일들은 서서히 잊혔다.

1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회가 안정을 유지한 것도 그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아침에 까칠한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주차된 차의 사이드미러를 들여다보았고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인상을 썼다.

여전히 공부가 성공으로 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가르치고 배웠으며, 독립한 자녀들은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는 것을 망설였다.

사회는 이렇듯, 그대로였다.

“아름 씨, 무슨 생각해요? 카피는?”

“아, 여기 있습니다!”

“난 또, 깜빡한 줄 알았잖아. 멍 때리고 있어서. 요즘 부쩍 멍 때리더라?”

“그러게요……. 요즘 자꾸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일은 잘하고 있으니까. 그냥 걱정돼서 그래. 병원이라도 좀 가 보는 거 어때? 큰 병이라도 앓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까 봐요…….”

그대로인 것이 있다면, 반대로 바뀐 것도 존재했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용일도 그 변화를 맞이한 사람 중 1명이었다.

“후우우…… 긴장하지 말자.”

찰싹!

신용일은 심호흡하며 자신의 뺨을 짝짝 쳤다.

본인이 너무 긴장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끼이익.

“서재구 님, 방예인 님, 신용일 님 들어와 주세요.”

“예!”

“예.”

“네.”

면접에 임하는 자세, 복장의 정갈함, 궁지로 모는 질문에 답변하는 방법 등 그의 머릿속에는 정리되지 않은 정보들이 떠돌았다.

사람과의 부대낌이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 오늘 목줄을 움켜쥔 넥타이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했고 마치 교수대의 밧줄처럼 느껴지게 했다.

트리거처럼 장치가 작동하면 덜컥하고 밧줄이 목을 조를 것이다.

면접에서 당황한다면 그에게 벌어질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면접을 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옆 사람에게 건네진 질문을 듣고 당황했다.

자신이라면 저 질문에 숨이 턱 막혔을 텐데 경쟁자는 그것을 능숙하게 답변했다.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옆의 사람도 대단했다.

면접관이 그의 스펙과 수상 경력 등 줄줄이 읊는 내용이 살벌했다.

자신은 이런 자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겨야 하는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뭘 위해 싸우는 건지, 뭘 하려는 건지도.

“신용일 씨?”

“아, 예!”

“음…… 평범하네요. 다른 건 인상적일 게 없는데…… 그리고 왜 자꾸 땅을 보시죠?”

실수했다.

습관처럼 면접관을 마주 보지 못했다.

중앙의 면접관이 눈을 치켜뜨고 신용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땅을 보는 게 버릇인가 봐요?”

“아…… 그게…….”

또 실수.

물을 닦으려다 다시 컵을 쓰러트린 격이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호흡이 가빠지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게…….”

“침착하게.”

“그…….”

“차분하게, 아무도 자넬 해치지 않아.”

하늘에서 들려온 것처럼 그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신용일이 홀린 듯 그곳을 쳐다보았다.

중년의 남성이 볼펜을 인중 사이에 눕힌 채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풉…….”

“웃긴가?”

“아…… 죄, 죄송…….”

“웃기면 웃으면 되지, 죄송할 건 무언가?”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고 언뜻 낯이 익었지만, 지금은 면접장이었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중앙에 앉은 여인이 방금 말한 중년의 남성을 향해 조용히 다그치는 모습을 보고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면접에 관련된 질문만 하셔야 합니다.”

“내 회사에 내가 쓰려고 뽑는 인재인데 묻고 싶은 걸 못 묻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인가?”

“……그럼 질문하시죠.”

“고맙네.”

인중에 볼펜을 올려놓고 장난을 치던 중년이 신용일의 서류를 보며 웃었다.

“남들 공부할 때 놀았구먼.”

“예?”

“대학교 시절에 쌓은 스펙은 거의 없고 최근에서야 정신 차리고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한 모양이군.”

실제로 그랬다.

아픈 부분을 찔렀기에 신용일도 진지하게 답해야 했다.

“남들 공부할 때 뭘 했나?”

거짓말을 할까, 아니면 수치심에 얼굴을 붉혀야 할까.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눈치 볼 게 뭐가 있어?

신용일은 갑자기 그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무심결에 답했다.

“게임을 했습니다.”

일순,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신용일의 표정은 당당했다.

“게임을…… 좋아하나 보지?”

“예, 좋아합니다.”

“음…… 남들이 공부할 때 게임한 걸 후회하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게임은 제 많은 부분을 내면에서부터 바뀔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공부야 따라잡으면 되는 거고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했던 것에 시간을 쏟은 것에는요.”

“……그렇군. 잘 들었네.”

실수다.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할걸.

아쉬운 마음에 입맛이 썼지만, 신용일은 기죽지 않기로 했다.

‘회사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는 다음 질문을 기다렸지만, 다음 질문은 주어지지 않았고 경쟁자들에게 질문이 넘어갔다.

그래도 후련하게 대답한 것에 만족했다.

이렇게 한 걸음씩 다가가다 보면 언젠가 취업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면접이 마무리되어 가는 도중 예의 중년 면접관이 신용일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신용일…… 군이라고 했나?”

“예? 아, 예!”

“자네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본인을 정의해 보게.”

“정의…….”

“힘들겠나?”

“……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놓쳐도 죽지는 않겠지만 많이 아쉬울 기회.

신용일은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기 좋아하고 온라인을 통해 남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악플러이기도 했습니다. 남들을 헐뜯고 끌어내리면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느꼈었죠. 지금 와서 후회되는 일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남탓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게임 탓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부모님 탓이고 사회 탓이다…….”

“이런, 자네를 뽑을 이유가 하나도 없군. 계속해 보게.”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모든 건…… 제 탓이었습니다.”

“…….”

“절 궁지로 몰고 남들과 비교하여 위축되게 한 것은 저였습니다. 그걸…… 어쩌다 알게 되었죠.”

“자네는 자네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신용일이 면접관들에게 말끔한 미소를 보였다.

“바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럼 자네를 그렇게 바꾼 계기가 있나?”

“계기라면…… 있습니다.”

그날.

종말 이후와 지금 사는 세상이 연결된 그 날, 신용일의 무언가가 바뀌었다.

“1년 전 그날…… 그날…… 어?”

그날을 떠올리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에게 질문을 던진 면접관의 얼굴이 그날 마주쳤던 누군가와 비슷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저거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좋아하지?

-…….

그때, 질문을 던졌던 중년이 지금 앞에 앉아 있었다.

드르륵.

신용일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의자를 넘어트렸다.

허둥지둥 넘어진 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그에게 마지막 질문이 전해졌다.

“게임, 좋아하나?”

신용일은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차분히 답했다.

“네, 정말, 정말 좋아합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이미 한 번 걸어 봤습니다.”

“어떻던가?”

“못 할 짓이더군요.”

“푸하하하! 다들 수고했네! 연락 갈 걸세!”

***

신아름은 요즘 통 입맛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솜씨 좋게 제철 나물을 무쳐 와도 깨작깨작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애 섰니?”

“응?”

“애 섰냐고?”

“아니, 엄마는 무슨…….”

“그런데 왜 이렇게 밥을 대충 먹어?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조금 지치네…….”

“얘가…… 멀쩡히 좋은 직장 찾아 들어갔으면 건강하게 버틸 생각을 해야지. 왜, 회사에서 누가 괴롭혀? 엄마가 나서?”

“아니. 회사 문제는 아니야. 일도 재밌어.”

“근데?”

“그냥, 그냥…… 모르겠어.”

“허이구……. 알았다.”

그녀는 줄곧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텅 빈 것처럼, 뭐에 홀린 것처럼 하루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 꼭…….’

뭔가를 잊은 것처럼.

재채기가 나오려다 말고 들어갔을 때, 아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다.

참을 수 없는 허기였다.

‘그냥 기다리다 보면…… 기다려?’

신아름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언제 돌아올 건지도 몰랐지만, 분명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그녀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바람을 쐬기 위해 거리를 걸었다.

툭.

투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분명 비 내리는 날의 추억이 많았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으…… 젖겠다.”

비가 퍼붓기 전에 돌아가려 했다.

그녀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도중, 두통이 찾아왔다.

“윽…….”

우산.

색색들이 알록달록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전에도 느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네.”

신아름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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