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218화 (218/222)

218화

“막았어! 막았다고!”

“이, 이러면 된 거 아니야?”

“와아아아아! 됐어! 잘했다!”

짝짝짝.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이선익이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베르드 폴니르의 기억이 돌아온 신아름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진이 저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힘들 것이 분명한데, 이곳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예상보다 밝았다.

아마 그의 성격상 저 밝은 얼굴이 억지로 꾸며 낸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은 것 같았다.

“다행……이야.”

신아름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모든 기억과 그 시간대가 불명확했고 어떤 것은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고 어떤 것은 왜곡된 일이었다.

머리가 뜨거워진 신아름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성진이 기억을 되찾으면서 알게 된 모든 진상을 그녀도 알게 되었다.

물론 되찾은 기억은 그녀가 원래 알고 있던 부분까지였지만.

신아름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저 지옥에서 싸우고 있는 저 사람은 자신이 알던 최성진이라는 무뚝뚝한 사람인지, 아니면 흐레스벨그라는 폭풍으로 세상을 품던 신조인지.

‘모르겠어…….’

담담하게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에게는 베르드 폴니르의 기억보다 신아름의 기억이 훨씬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흐레스벨그의 곁에서 그의 깃털을 고르던 시절은 너무도 먼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베르드 폴니르로서 살아왔을지라도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그러니, 그가 최성진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녀는 그와 어울렸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와 성진이 살던 동네는 신기하게도 비가 자주 내렸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그렇다는 설도 있었고 과거, 동네에 터를 잡았던 조상들이 원한을 안고 죽어서 그렇다는 설도 있었다.

“또 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녀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아무리 큰 우산을 써도 결국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양말이 젖거나 긴 머리칼이 젖는 상황이 기어코 발생하고는 했다.

“아름아, 우산 챙겨가!”

“알았어, 엄마!”

그녀의 어머니는 매일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녀의 기념일은 꼬박꼬박 챙겨 주셨고 그녀의 생일에는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도 새벽같이 일어나 소고기를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또래의 부모님들처럼 자주 부딪히거나 어울리지는 못해도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끼익.

“하아…….”

쏴아아아.

이 동네의 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추적추적 내리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우산이 없는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길거리에 나온다면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곤 했다.

가끔은 싸구려 우산을 쓰고 있더라도 우산 자체를 강풍 때문에 못 쓰게 될 때도 있었다.

‘어? 저 사람…….’

오늘도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머리를 짧게 자른 고등학생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산을 깜빡하고 두고 왔거나 다른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를 오며 가며 보게 되었다.

특이한 점은 비가 오는 날만 그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보다 학년이 높은 것 같은데 말을 붙일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그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 그…… 최성진!”

“최성진?”

“응. 한 학년 위고, 조용한데 무시무시하대.”

“무시무시? 그건 무슨 소리래?”

“고아원 출신이래. 지금도 고아원에서 통학하고 있고.”

“그게 왜 무시무시한 거야?”

그녀는 친구의 편견에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다행히, 그녀의 친구는 오해라고 반박했다.

“아,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고아원 출신이라고 무시하던 선배들이 그 사람 건드렸다가 다 갈렸대.”

“아…….”

신아름은 그런 사람이 질색이었다.

시시껄렁한 삶을 사는 사람들.

남을 괴롭히고 폭력에 취해 누군가의 위에 서려 하는 사람들.

신아름에게 치근덕대는 남자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럼 완전 무섭겠네?”

“그건 또 아니라더라?”

“……뭐?”

신아름의 예상외의 반응에 신난 건지 그녀의 친구는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얘기했다.

“그냥 언터처블. 특이하긴 한데 조용한 사람이라 친구도 많고 그렇대.”

“음…….”

“왜, 사랑에 빠지셨나?”

“아니, 아침마다 오면서 마주치거든.”

“근데?”

“비 오는 날마다 우산 없이 오길래. 오늘도 비를 쫄딱 맞고 등교하더라고.”

“그래? 아! 비 맞고 다닌다는 소문은 듣긴 했었어!”

그녀의 친구는 명탐정이라도 된 듯 있지도 않은 파이프를 무는 시늉을 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거 아닐까?”

“뭐?”

“고아원이라 애들이 많을 거잖아? 인원수만큼 우산을 다 못 챙겨 주니까 동생들에게 양보하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그렇기야 하려고?”

“아니야, 모른다? 그쪽 주변에 못사는 애들이 많잖아. 아침 굶으면서 학교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고아원도 상황이 안 좋아서…….”

“……그래?”

“응, 뭐 아닐 수도 있고. 그냥 비가 좋아서 미친 사람처럼 맞는 걸 수도 있잖아?”

“뭐래…….”

“이게?”

신아름은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인근의 고아원에 사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향하는 길은 그녀의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가는 길과 겹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비가 오는 날마다 마주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왜 비를 맞고 다니는 것일까.

그녀는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비가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그녀는 이른 아침 준비를 마치고 평소보다 한참 일찍 밖으로 나섰다.

“아름아! 아침은?”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갈래!”

“왜 이렇게 일찍 가!”

“그럴 일이 있어요, 엄마!”

끼이익.

평소보다 일찍 나왔기 때문에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곧장 그가 지내는 고아원 인근의 건물로 향했다.

쏴아아아.

잠복근무라도 하는 양 최성진이라는 남자를 기다리는 게 영 마땅치 않았지만, 그녀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끼이익.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렴, 성진아.”

고아원은 마음씨 착한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성진은 지금 우산을 들고 있었다.

‘뭐야…… 우산 들고 나왔으면서……. 응?’

그런데, 우산이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일곱.

그가 가방을 툭툭 치는 거로 봐서는 가방 속에도 우산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점점 더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그는 우산 장수도 아니건만 어째서 우산을 저렇게 많이 들고 다니며, 많이 들고 다니면서도 왜 그 자신은 비를 맞는 건지.

일생일대의 궁금증이 생긴 그녀는 그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이 비밀을 밝혀내면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곧 그녀는 그가 어느 판자촌을 지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는…….’

-아니야, 모른다? 그쪽 주변이 못사는 애들이 많잖아. 아침 굶으면서 학교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고아원도 상황이 안 좋아서…….

친구가 말했던 못사는 애들이 많은 곳.

그곳이 이 일대였다.

똑똑똑.

끼익.

성진이 문을 두드리자 거짓말처럼 안에서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마치 마법의 주문인 것 같았다.

똑똑똑.

끼익.

“고마워, 형!”

“……응.”

성진의 우산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그 많던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전부 다른 이들에게 전해졌다.

스윽.

그가 마지막으로 쓰던 우산을 접었다.

툭.

툭.

거칠게 우산을 흔들어 빗방울을 털어 낸 그가 우산을 가지런히 정리해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끼이익.

“고마워요…….”

성진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신아름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비를 맞는 건 우산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우산을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비가 오는 날마다 신아름의 집 인근으로 통학을 하는 것은 이 판자촌을 지나기 때문이었다.

신아름은 어떠한 거리낌 없이 비를 맞고 걸어가는 최성진의 뒤를 따라가다 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할 것 같아 그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접근하는 그녀에게 최성진이 물었다.

“아까부터 따라오시는 것 같은데…….”

“아…… 저, 저 말인가요?”

“네.”

“하, 하하……. 집이 이 근처라…….”

“그런가요?”

“그게…….”

신아름은 빗물이 주르륵 떨어지는 그를 보다가 일단 그에게 바짝 다가서 우산을 씌워 주었다.

“괜찮아요. 이미 다 젖었으니.”

“이러고 학교 가서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으시는 거예요?”

“네.”

신아름이 느끼는 최성진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몇 가지 궁금한 걸 해소하고자 했다.

“왜 자기 거까지 넘기는 거예요?”

“뭘…….”

“우산 말이에요, 우산.”

“아.”

“답답하네, 진짜. 그래도 자기 쓸 건 있어야죠.”

“…….”

“우산이 모자라요?”

“네, 모자랍니다.”

“얼마나요?”

“8개쯤?”

“어떤 기준에서 모자란 건데요?”

“저 판자촌에 살면서 저한테 우산을 빌리지 못한 초등학생들만큼요.”

신아름은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찝찝함이 이 남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요?”

“어느 정도요?”

“네, 딱 그러니까…… 적당히 착한 일하고 본인 우산도 챙기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지가 않아요.”

“네?”

“그렇지가 않다고요.”

최성진의 보폭은 빨랐다.

그녀가 겨우 따라붙을 정도였다.

성진은 그런 신아름을 잠시 쳐다보다가 보폭을 맞춰 주었다.

“우산을 못 빌리는 아이는 분명 나옵니다. 제가 그만큼 우산을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비가 오는 날에 제가 우산을 쓰고 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차례가 오지 않았구나’ 하고 넘어가겠지만 내가 우산을 쓰고 간다면 나를 원망할 겁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나는 저 아이들 모두에게 우산을 빌려줄 때까지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산을 빌리지 못한 아이가 원망하는 대신 언젠가 내가 우산을 빌려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라도 가지겠죠.”

“우산이 비싼가요?”

“비싼 건 아닌데, 제가 있는 곳도 사정이 좋지 않아서요. 달마다 들어가는 돈을 빼고서 우산을 사 모으고 있는데도 늘 부족하네요. 고장이 나는 것도 있고.”

신아름은 이 사람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그의 눈은 뭔가를 바라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차가움이 그의 이상을 흐릿하게 했다.

“우산을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우산 도둑이란 말을 아나요?”

“웩, 진짜 싫은데 그거. 왜요?”

“비 내리는 날, 누군가 우산꽂이에 꽂힌 우산 하나를 도둑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그야…….”

신아름은 성진이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모두가…… 훔치겠죠?”

“악행은 전염되죠. 특히나 늘 좁은 선택지만을 강요받는 저 아이들에게는요. 그래서 알려 주려는 겁니다.”

“어…… 저…… 그 성진…… 오빠가요?”

“내 이름을 아나요?”

“네, 그…… 어쩌다가 듣게 돼서.”

성진이 고개를 갸웃했다가 말했다.

“대충은 그렇습니다. 저야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저 아이들은 아니니까요.”

“아이들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정문을 지나쳤다.

성진은 표정 없이 그녀를 지나쳐 그의 교실로 사라졌다.

신아름은 멍하니 서 있다가 교실로 들어갔다.

반나절이 지나, 수업을 전부 마친 성진이 한밤중이 되어서 아침에 지나온 길을 걸었다.

“……뭐죠?”

허름한 판자촌.

그곳에는 신아름이 먼저 와 있었다.

“있더라고요.”

“뭐가…….”

“우산요. 집집마다 다들 문 앞에 펼쳐 놓았더라고요.”

“그랬나요?”

“쪽지도 있더라고요. 읽으면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우산대에 메어 있어서 봤어요. 미안해요.”

“…….”

“‘우산 형아 고마워요’래요.”

“……누가요?”

“어…… 그 누구더라? 이 노란 우산이요.”

“네, 알겠네요.”

신아름이 벌떡 일어나 우산을 건넸다.

“15개, 맞나요?”

“……맞습니다.”

신아름은 이때부터라고 생각했다.

최성진이란 사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아…….”

신아름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위에서는 모두 게이트와 하늘 너머의 상황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그녀는 성진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가 좋아했던 최성진이.

광장에 설치된 음향기기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에에에에엥.

-현 시각, 게이트 경보 발령.

***

“로키! 나를 속였구나!”

수르트가 뒤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 행동을 통해 그의 분노가 김우열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르트와 김우열의 관계가 깊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송하린이 성진에게 눈짓했다.

“형님…….”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열이 개입하여 상황을 어지럽히면 더 어려울 것이다.

송하린이 눈짓을 한 건 지금이 호기라는 걸 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팟!

파앗!

성진, 최별 그리고 송하린이 동시에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신호였다.

“지원을!”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치워 버려라!”

전장에는 수르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키아아아아!

여전히 흉악하고 거대한 몬스터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고 엘드요툰도 수르트를 엄호하기 위해 전장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후우웅!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일대의 땅이 진동했다.

이제는 수가 많아진 에인헤야르들.

성진 일행은 그 무리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보았다.

“하아아아아아!”

으지직.

이시스의 얼굴이 찌그러지다시피 하고 얼굴에는 검붉은 핏줄이 징그럽게 솟았다.

이제는 주름진 눈매를 가진 그녀가 양손을 뻗자, 거무튀튀한 사슬이 수르트에게로 향했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수르트의 한쪽 팔을 휘감았다.

치이이익!

“끄으으윽.”

비명은 수르트가 아닌 이시스의 것이었다.

이시스의 사슬은 곧바로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수르트의 유황에 녹았다.

“물러나!”

화륵.

콰아앙!

수르트가 던진 화염구가 이시스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유황은 지우개처럼 건물의 외벽을 태웠고 그 부산물도 깔끔하게 없앴다.

수르트는 다른 에인헤야르를 상대하고 있었기에 이시스를 향한 추가적인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시스는 다행히 누군가의 품에 안겨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이시스를 품에서 내려놓은 것은 레이서였다.

카이와 홍예들이 그의 곁에 섰다.

후우웁.

이들이 일시에 같은 호흡을 내뱉자,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무거워졌다.

쩌저적.

단지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카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죽겠군.”

“네.”

“푸흐흐…… 죽지 뭐.”

카이가 홍예들을 쳐다봤다.

“죽자.”

“예!”

수르트의 몸에서 사방으로 엄청난 양의 유황이 뿜어 나왔다.

작은 파편들로 쪼개어진 유황들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적이었다.

퉁.

투둥.

신관들과 주술사들이 그 대부분을 쳐 냈지만, 모든 유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아아악!”

“꺼어어어…….”

화르륵!

병사들이 유황에 붙들리는 순간 몸이 새까맣게 타올라 재가 되었다.

그것이 확인되자, 실바는 병력을 뒤로 물렸다.

“수르트가 쓰러지고 나서 움직인다! 주변을 방비해라!”

“예!”

실바가 물살을 일으켰다.

촤아악.

물살은 동그란 구체 두 개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곧 창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쒜에엑!

물의 창이 날아가 수르트의 손등에 적중했다.

치이익!

그러나 수르트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애꿎은 수증기만 팔 한쪽을 에워쌌을 뿐 수르트의 몸은 멀쩡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실바는 이 정도로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화르륵!

수르트가 불길을 일으켜 사방에 모여든 에인헤야르를 쫓아냈다.

유황에 닿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리니 누구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수르트도 그것을 아는 건지, 수비는 도외시하고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힘이 온전할 때 적들의 수를 줄여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날아온 화살에 주의를 끌린 사이, 수증기가 잔뜩 낀 곳에서 누군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으랏차!”

“마니! 너로군!”

송하린이었다.

콰지직!

검은 도신이 수르트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그녀의 힘은 유황을 뒤집어써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때, 수르트의 어깨에서 수르트를 닮은 작은 인간이 튀어나왔다.

카아앙!

화르르륵!

“크으윽…….”

“끈질기긴……. 진즉 잡아먹혔어야 하는 존재들이!”

송하린은 분신에게 막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어? 작아졌네?”

“…….”

작은 분신을 꺼낸 수르트는 송하린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하아압!”

최별이 수르트의 흘러내리는 다리를 노리고 엑스칼리버를 휘둘렀다.

서걱.

뭔가를 베었지만, 최별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종아리에서 솟아난 수르트의 분신이 엑스칼리버에 몸을 던져 대신 베였다.

촤아아악!

치이이익!

곧, 최별이 있던 자리에 유황이 흥건하게 남았다.

“전부 죽여주…… 크아아악!”

콰르릉!

실바의 공세 덕분에 전장은 더 어지러워졌다.

수증기는 수르트의 시야마저 혼란스럽게 했고 그 틈을 타 성진의 일격이 먹혀들었다.

치이이익!

수르트의 한쪽 팔이 떨어졌다.

“어, 어? 또 작아졌다!”

송하린이 수르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제는 눈에 띄게 작아진 수르트는 송하린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카아아앙!

송하린이 그 대검에 맞서려 하다 충격에 뒤로 죽 날아갔다.

“커헉…….”

“…….”

“퉷…….”

송하린이 피를 찍 뱉고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맞을 만한데?”

수르트의 잘린 팔이 분열하더니 몇 구의 분신들을 만들어 냈다.

성진이 그것을 자세히 지켜보다가 일행에게 말했다.

“수르트…… 이런, 속았다!”

“네?”

“소, 속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진은 신성을 가진 수르트가 이렇게 무기력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의심은 현실이 되었다.

치이이익.

수르트의 몸이 부글부글 끓더니 그 속에서 수십 마리의 작은 거인들이 나왔다.

“이, 이게 뭐죠?”

“수르트가 아닙니다. 수르트의 파편들로 급조한 것들입니다.”

“대체 왜…….”

분신으로 나뉜 수르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뒤를 향해 내달렸다.

수십 마리의 수르트는 비록 파편이긴 하지만 하나하나가 에인헤야르들보다 강했다.

함부로 수르트의 분신을 막아섰던 에인헤야르들이 분신의 반격에 가슴을 꿰뚫렸다.

“컥…….”

“크윽…….”

성진이 수르트의 분신들을 추격하며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었다.

서걱!

콰직!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고 곧 대부분이 몬스터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죠?”

최별의 질문에 성진이 답했다.

“수르트는 간신히 신성만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본체는 이미…….”

“로키이이!”

수르트의 분신 중 하나가 울부짖었다.

“날 속였구나!”

수르트는 온전하지 않았다.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수레바퀴의 힘을 가진 로키뿐이었다.

김우열이 작은 불길이 되어 다가오는 수르트에게 말했다.

“에그머니나, 귀여워졌네?”

“로키…… 무슨 짓을 한 거냐?”

“푸흐흐…… 그걸 이제 물으면 어떡하나?”

“로키!”

우뚝.

수르트가 로키에게 달려가던 그대로 멈춰 섰다.

다른 분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려던 자세 그대로인 것으로 보아 로키가 멈춘 것이었다.

“이게 무슨…….”

“네 힘은 잘 쓰도록 하지.”

“……수레바퀴에 손을 댔구나!”

“…….”

“아무리 신이라도 그 힘에 손을 대면 너 또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상관없어.”

김우열의 눈이 서서히 변했다.

늑대의 눈처럼 날카로워진 그의 눈.

그와 더불어 그의 몸이 점점 커졌다.

우직.

우지지직.

“멍청한…….”

로키의 혓바닥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뱀의 혀였다.

“자식들마저 삼켰군…….”

로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너까지.”

“……창조주에게 거스를 생각이냐?”

“아, 창조주! 맞다! 그랬었지!”

“…….”

“뭐, 그 친구도 상관없고.”

휘오오오오오.

수르트의 분신들이 서서히 끌려갔다.

로키에게로.

수르트는 저항하려 했지만, 분신들이 로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크으으으…… 로키!”

“하하하하하! 그간 너무 싸웠으니 이제는 화해하고 하나가 되자고!”

로키의 거대한 입으로 수르트의 분신들이 전부 빨려 들어갔다.

텁.

끔찍한 광경에 성진 일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로키가 뱀의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파 보였다.

그의 몸은 그가 삼킨 수르트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종말의 수레바퀴 따위는 필요 없어.”

수레바퀴를 집어삼킨 그가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사스러운 늑대의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내가 종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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