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말을 마친 정홍서에게 성진이 물었다.
“제대로 전달된 겁니까?”
“마지막까지 제대로 들어갔으면요. 다 떠나서 이동 경로만 수신 장치에 제대로 잡혀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정홍서 씨의 말이 누구에게 전해지는 겁니까?”
정홍서가 짐을 챙기며 일어섰다.
“서울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죠. 정확히는 쉘터와 벙커 등의 거주지에 숨은 사람들. 아니면 종일 수신 장치를 붙잡고 정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거나요.”
“그들이 우리를 도울 거라 생각하십니까?”
“돕지 않으면? 당장에 죽게 생겼는데 하루 이틀 더 살겠다고 숨어만 지낼 것 같습니까? 어…… 말하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나갑시다. 본대를 따라잡아야 해요.”
정홍서는 머물렀던 곳을 떠나며 성진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그는 성진이 믿을 만한 사람이고, 성진의 뒤에 붙어만 있으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다는 걸 눈치챘다.
“찾았습니다.”
“저기 있네요! 제 동료들도 합류했어요. 저도 이만 합류하겠습니다.”
“네.”
“감사했습니다.”
정홍서를 본대에 합류시킨 성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식을 전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이민상이 다가와 성진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형! 가신 일은 잘된 거예요?”
“그래. 상황은?”
“본대 지원받으면서 등불이랑 대원들이 저 기분 나쁜 기구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있어요. 이미 작동된 기구에는 주변 인원들이 합세해서 게이트를 닫고 있고요.”
“피해는 없었어?”
“대원들 조금요. 근데 꾸준히 피해가 누적되는 게 조금 걸리네요. 지금은 1명의 인원도 허투루 쓰여선 안 되는데…….”
지금, 병기에 비해 인원이 부족했다.
대구에서와 같은 상황.
그때는 싸우려 하는 사람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이번엔 사람 자체가 부족했다.
“일단은 전진하자. 다른 움직임은?”
“전방에서…… 아, 잠시만요.”
삐.
“네, 예? 알겠습니다. 지원 요청하겠습니다.”
“왜 그래?”
“최전방에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요.”
“문제?”
“네, 완성자가 목격되었다네요.”
“……가자.”
“네!”
본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불과 대원들은 옥상에 설치된 철판을 차근차근 해제했는데, 그중 등불 대원 하나가 이런 의문을 던졌다.
“여기는 왜 철판이 2개지?”
대원이 서 있는 곳의 철판은 2개가 포개서 뭉쳐 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이 든 대원은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철판이 2개가 포개어져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도 같은…….
-여기도입니다!
-여기는 3개입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성진이 이민상과 함께 최전방에 도착했을 때도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들 겹겹이 쌓인 철판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완성자다!
-사도들입니다!
-저기! 동북쪽 피아노 학원 건물!
성진이 누군가 가리키는 옥상을 쳐다봤다.
이곳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이었는데, 얼굴에 문신을 잔뜩 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불순물…….”
손성일에게 상황을 알리자, 그도 신음했다.
-마음 같아서는 포격이라도 가하고 싶지만……. 제길.
포격을 가하면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접어야 했다.
“어이, 신조. 너무 굼뜬데.”
“……왜 나타난 거지?”
“알면서 뭘 그러나? 너희들이 갑자기 찾아온 덕분에 이쪽도 준비 없이 손님을 맞아야 하잖아. 그럼…… 어차피 마중은 글렀고, 문턱도 넘은 김에 진짜 파티를 시작하자고.”
“파티?”
불길한 예감.
성진은 그들이 차지한 건물의 옥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철판 4개가 포개어져 있었다.
그것이 본대가 포격을 가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이쪽도 준비가 끝났으니, 언제든 오라…… 읏!”
기이잉.
퍼어엉!
성진의 소총이 조롱하는 완성자의 머리를 향해 불을 뿜었다.
“…….”
“놀랬잖아. 쇼크 건인 줄 알고 안 피했으면 죽을 뻔했네.”
그는 피하며 다른 남자를 붙잡아 그의 앞에 세웠다.
그 결과로 불순물 하나의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아깝게…… 그래도 마침 잡힌 게 재생이 가능한 놈이어서 살았지.”
“할 말은 끝났나?”
“그래. 난 이만 갈게! 또 보자고. 그리고 다시 볼 때쯤엔 머릿수가 좀 줄어 있었으면 좋겠네. 바글바글한 게 징그러워서 말이야.”
말을 마치고 완성자 몇이 떠났다.
문신한 불순물 몇과 철판만이 남자 등불과 대원들은 황급히 움직였다.
“막아!”
“일단 불순물들부터…….”
철컥.
그때, 불순물 중 1명이 레버를 장치를 작동시켰다.
“아, 안 돼…….”
“우리 좀…….”
끼긱.
찌지지직!
“끄아아아아!”
“으아아악! 살…….”
지지지지직.
지지직.
철판이 4개가 되었듯, 비명도 4배가 되었다.
아무리 전장을 종횡하던 등불이라도 그 광경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가…….”
후우우우우웅.
기어코 게이트가 열렸다.
문제는, 크기였다.
“뭐, 뭐야…… 왜 저렇게 커?”
주변에서 압도적인 크기의 게이트를 보고 신음했다.
이민상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성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 문제가 생겼는데요.”
“일단 제압하자.”
“네.”
-넘어오기 전에 게이트를 닫으면 문제없습니다! 일단 게이트를 닫는 데…….
-불순물이! 불순물이 게이트를 보호합니다!
-젠장…….
크우으으으.
크악!
우직.
우지지직.
불순물들이 육체를 찢고 괴물이 되어 갔다.
대원들이 불순물에게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쪽도 불순물들을 단시간 내에 정리할 수 없었기에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불순물들부터!
기이이잉.
투두두두두두!
투두두두!
-사격 중지! 타격이 없다! 근접전으로 제압한다!
스릉.
칼을 뽑아 든 등불 대원들은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 몸으로 게이트를 봉쇄하는 불순물들이 기가 찼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근접전이기에 적들은 물론 등불도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중에서 한 번이라도 얻어맞는다면 그게 곧 추락으로 이어지기에.
콰아아아앙!
“형!”
가장 먼저 상황을 반전시킨 건 성진이었다.
그는 펄스를 이용해 건물 옥상 모서리를 무너트렸다.
크우아아아!
졸지에 한쪽 발판을 잃은 불순물이 미끄러지며 건물에 매달렸다.
크우어어!
서걱!
푸슉!
촤아악!
사지의 자유를 잃은 불순물을 등불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칼과 창이 무수히 쏟아지자 불순물은 육편이 되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으으.
콰아아아앙!
난간을 딛고 올라온 성진이 남은 불순물들을 쳐다보았다.
-얼른 처리하고 게이트부터…….
그때였다.
후우우웅.
게이트 너머로 불타는 거인의 손이 넘어왔다.
화르르륵!
불타는 거인의 손이 더듬더듬 무엇이든 잡으려 했다.
키이이이!
턱.
운이 좋지 않은 불순물이 그 손에 붙잡혔다.
화르륵!
그리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재가 되었다.
“맙소사…….”
“저건…….”
“엘드요툰…….”
성진이 스칸다에서 상대한 적 있었던 불의 거인.
그때는 엘드요툰이 떼로 막아도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다양한 이능을 지닌 스칸다인과 세종시민들이 함께했기에.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펄스였기에 엘드요툰을 상대로 얼마나 분전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성진의 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여기는 저희가 막을 테니 게이트를 닫으세요!”
최별과 송하린이었다.
그들이 다른 곳의 일을 처리하고 나타나 불순물들을 막아섰다.
성진은 상황을 판단하자마자 게이트를 향해 뛰어갔다.
“데후우움.”
좁아.
성진은 거인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철판 4개를 집어삼킨 게이트는 거인이 넘어오기엔 좁은 모양이었다.
사도 측의 실수였다.
성진은 재빨리 펄스를 검에 응축했다.
콰르릉!
성진의 검이 빛나며 거인의 팔에 긴 선을 남겼다.
‘……절단하진 못했어.’
“훔!”
거인의 팔은 상처에 고통스러운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지금이 기회였다.
후우우웅.
성진은 한 손에 펄스를 집중해 게이트 방향으로 향했다.
후웅.
후우웅.
찰나의 감응이 이어지고, 게이트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성진은 이제는 처음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게이트에 집중했다.
게이트 저편에서 무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팔에 상처를 입은 엘드요툰인 것 같았다.
그 시선이 꼭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찌지직.
게이트가 닫혔다.
성진이 크게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니 불순물들도 정리가 끝나 있었다.
쩌정!
콰직!
송하린에 의해 얼어붙었던 불순물의 머리가 깨져 나갔다.
“형님, 보셨습니까?”
“엘드요툰 말입니까?”
“네, 수르트의 자식들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무스펠하임.
성진이 일전에 닫았던 세계였다.
그곳에 사는 생물들은 늘 지옥 불을 몸에 두르고 있었으며 불을 먹고 불을 배설했다.
그야말로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닫았던 세계인데…….”
“제물을 이용해서 억지로 틈을 비집는 것 같습니다. 로키나 생각할 법한 짓이죠.”
“골치 아프게 됐군요.”
성진의 곁으로 이민상이 다가왔다.
“형,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문제?”
“방금 통신을 들었는데, 사도 측에서 이 끔찍한 장치에 매달아 놓은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난가 봐요.”
“얼마나?”
“몇만 명 정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1만 명은 확실히 넘는데요.”
“지금까지 해체한 기관에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지?”
“2천 명에서 3천 명 사이일 거예요.”
“…….”
“남은 인원들도 물론 가는 길목마다 이런 식으로 떨어트려 놓았겠지만, 사도가 있는 심부에는 대부분의 포로들이 있겠죠.”
“그렇겠지.”
“그때는 철판이 4개가 아니라 5개, 8개, 10개 이렇게 있을 게 뻔한데…… 모두 막을 순 없겠죠?”
이민상이 하려는 말의 의도를 성진은 알 수 있었다.
그도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기에.
“만약에…… 이것보다 더 큰 게이트를 만들 능력이 사도들에게 있으면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성진이 이민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가야지……. 지금은 다른 방법이…….”
삐익.
그때, 통신음이 울렸다.
성진이 인이어에 손을 올렸다.
-보고, 본대에 거수자 다수 접근 중.
-확인, 확인 결과 거수자들은 무장하지 않았다. 불순물과 완성자들은 아닌 것 같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확인이 끝날 때까…….
이민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진을 쳐다봤다.
***
“저게 뭔 일이요?”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데…….”
“간판이 한글로 써진 거 보면 영락없이 한국인데…… 우리나라에 저런 난리가 난 곳이 있던가?”
“영화 아니야?”
“요즘 영화는 이렇게 하늘에다 대고 시사회를 여나? 이거는 민폐지, 민폐야!”
“영화 아니라니까? 누가 아까부터 실제 상황이라고 그러고 다니더라고.”
“아니, 누가? 그딴 미친 소리나 하는 게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야?”
군중은 점차 불어났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물이 더 큰물로 향하듯이 사람들은 원인을 알기 위해 사람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정부는 뭐라는데?”
“사태 파악하는 중이라는데 뭐. 별 기대도 안 했어.”
“이러다 저번처럼 서울에 게이트가 팡 터지는 거 아니야?”
“이 사람, 불길한 소리를 사람 많은 데서 하면 어쩌나? 그러다 잡혀가!”
“세상이 뒤숭숭하니 그렇지. 저녁이 다 돼 가는데 사람들이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빽빽이 모여 있는 게 이상한 광경이잖나?”
“월드컵이나 촛불 시위할 때가 생각나는구먼. 나도 그때는 열정적이었는데.”
“언제 적 얘기를 하고 그러나? 과거에 젖어 살면 큰 사람이 못 돼요!”
“이미 다 컸는데 여기서 더 클 건 무언가?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나 같은 노땅한테는 추억만 한 연료가 없어요.”
그때,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의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완성자라는 놈팡이…… 완성자 심재석 아니야?”
“나도, 나도 그렇게 봤어요. 심재석이랑 똑같이 생겼던데…….”
“일전에 게이트 사태 때 사라졌다며? 완성자들 다 해외로 도주한 거 아니었어?”
“그런 찌라시도 있었지. 해외는 무슨 해외야. 국내에서 멀쩡히 잘 살고 있을 거랬잖아.”
“저기가 근데 국내예요?”
“간판이 한글로…….”
“간판이 다 떨어져서 달린 곳도 몇 곳 안 되고 그나마 달린 간판도 달랑거리는데 저기가 진짜 한국 맞아요?”
“그건…….”
남자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로서도 대답이 궁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떠돌던 말을 기어코 떠올려 냈다.
“가상현실이라며! 누가 그랬는데? 저기는 지금 게임 속이라고…….”
“그 사람이 그렇게만 말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뭐라고 덧붙였는데요?”
“……가상현실인데 사실은 현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걸 믿어요?”
“그게…….”
사내는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믿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자신은 점점 그 말이 맞다는 근거를 찾고 있었다.
“아니, 이상하잖아? 행방불명된 완성자들이 뭐 주워 먹겠다고 게임에 들어가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그럼 하늘에 저런 게 떠 있는 건요?”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지금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사내는 잠시 말을 망설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그러다 적당한 말을 골라 마무리 지었다.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니까…… 가상현실이 현실이라는 말도 영 아닌 건 아니지 않아?”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뭐…… 누가 정부에 연락 좀 해 보지?”
신용일 패거리가 벌였던 기행들이 이들의 벽을 깨기 시작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마음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었다.
“가만, 그럼 저게 진짜 현실이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까 사람들이 그러던데? 저기가 망하면 우리도 망한다고.”
“무슨…….”
현장은 아직도 아비규환이었고, 일생일대의 기상천외한 광경에 사람들은 아직도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었다.
신을 부르짖으며 종말을 찾는 여인도 있었고, 이때다 싶어 포교하는 사이비들이나 하늘에 떠 있는 화면을 과학적으로 풀어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맞네! 아까 완성자랍시고 나와 있는 사람들, 다 정부가 공표했던 명단에 있던 사람들이야!”
“정말? 사진이 잘못된 건 아니고?”
“정말이라니까? 여기 봐봐.”
“어디……. 어? 정말이네? 이 사람들이 저기 왜 가 있는 거야?”
신용일의 패거리는 점차 많아졌다.
이제는 그가 사이비 교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제 사람들한테 뭐라고 할까요?”
신용일에게 의견을 묻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신용일은 이제 뿌듯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도 꺼려졌다.
지금 당장 트레이닝복을 입은 자신보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저 남자가 자신보다 똑똑해 보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신용일의 말을 믿었다.
신용일은 말의 무게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얘기했다.
“그렇게 전달하면 될까요?”
“아뇨, 이건 상당 부분 제 생각이고 참고만 하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세요.”
“그러면 될까요?”
“네, 그거면 충분해요.”
왜일까.
신용일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는 단지 누군가의 승리를 염원하기에 앞서, 염원의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위기에 놓였는지에 대해서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힘이 모이니까.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덤덤한 신용일의 표정.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헬은 입매를 비틀었다.
“재밌네. 저 사람.”
***
김우열의 주변에 완성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엘든요툰이 넘어오려면 적어도 장치를 10개 이상 직렬로 연결해야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하지?”
“그, 그건…….”
“종말의 거인들이 아우성이야. 이런 일 하나 똑바로 처리 못 하느냐고.”
“죄, 죄송합니다.”
“10개 밑으로는 그냥 무작위로 개방하고 시청으로 향하는 길목이나 제대로 지켜. 갈가리 찢겨서 개밥이 되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툭.
투욱.
김우열은 큐브처럼 생긴 장치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고 다시 던졌다 받고 했다.
“그 종말 거부 장치는…….”
“그래, 인천에 있던 건데 아직도 어떤 원리인지 알아내질 못했어. 빌어먹을, 저쪽은 염소고 사슴이고 새대가리고 옹기종기 모여서 싸우는데 내가 아무리 전능해도 단기간에 알아낼 수는 없어.”
“그럼 그냥 무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시? 나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수상하잖아. 신인 나조차 알 수 없는 장치. 빌어먹을, 뭔가를 숨겨 놓은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네.”
“단순히 에너지원을 빨아들여 재난을 극복하는 장치 아닙니까? 저는 여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어이, 포석(布石)이라는 말 알아?”
“바둑 용어 아닙니까? 다음 수를 위해 깔아 두는 돌이라고 압니다.”
“그래, 참 좋은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 느낌이 굉장히 불길한 게 이 장치가 포석이 아닐까 싶은 거야.”
“그랬다면 가장 먼저 그걸 회수하지 않았을까요?”
김우열이 웃었다.
“내 얘기를 허투루 들은 거야? 내가 알 수 없는 장치라는 말은 내가 파괴할 수도 없는 장치라는 거야. 빌어먹을! 발두르가 한낱 겨우살이에 죽었을 때 깔깔대며 웃었는데, 지금 나 웃고 있나?”
“인상을 쓰고 계십니다.”
“그래, 솔직하네. 아무튼, 꺼림칙하니 원래대로 갖다 놓지도 못하겠고…… 일단은 내가 갖고 있어야겠어.”
“그래도 저희가 먼저 손에 넣었으니 저쪽에도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그보다 서울의 종말 거부 장치는?”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로키 님은 무언가 느껴지십니까?”
“아니, 전혀. 그래서 더 짜증이 나네. 흐음…….”
다른 완성자가 로키에게 첨언했다.
“로키 님, 헬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헬? 그녀는 내버려 둬.”
“네? 어째서…….”
“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그녀부터 죽일 거니까.”
“어, 어째서…….”
“그녀와 나는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서로 증오하는 사이지. 내가 그녀를 혐오했듯 그녀도 나를 혐오하니까. 라그나로크 때도 헬하임에 틀어박혀서 군대만 보냈지.”
“그럼 지금 바로 손을 쓰시는 게…….”
“그녀는 헬하임에선 무적이나 마찬가지야. 그녀가 스스로 신격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시시한 얘기는 그만하자고. 내가 초월 신이 된다면 헬하임을 통째로 무너트릴 거니까.”
“역시!”
“그보다, 그녀가 신조와 무슨 거래를 한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으니…….”
“무려, 창조주와의 승부입니다. 함부로 직접 개입했다가는 먼지로 변하겠죠. 그렇지 않은 걸 보면 크게 개입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그렇겠지.”
로키가 한참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을 하는데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로, 로키 님! 1차 저지선이 뚫렸습니다!”
“……뭐?”
“그, 신조의 군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