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오재완이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신명진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상대는 분명 각성자였다.
그것도 매우 강한.
그렇지 않다면 A급 각성자 중 실력만큼은 상수에 놓이는 오재완이 한 수에 당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한텐 안 돼.’
자신의 능력은 오재완에 비해 범용성이 떨어졌지만, 깊이는 있었다.
특히나 대인전에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드물었다.
각성자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드물기는 했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걸렸어!’
신명진의 눈에서 검붉은 기운이 쏟아졌다.
사특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상대의 몸을 옭아매려 했다.
신명진의 원천 능력은 ‘공포’였다.
대상이 두려움을 생산하게 만드는 정신 계통 초상 능력이었다.
대상을 제압하는 데도 이만한 능력이 없었고 여태 임무를 실패한 적은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같은 사람에게 공포란 감정은 무한한 부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화아악!
그런데 상대에게 들이닥치던 검붉은 기운이 청록의 푸른 막을 뚫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어? 무슨……. 아, 안…….’
콰앙!
검은 코트의 남자가 신명진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억!”
신명진은 그것만으로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었다.
-제압해!
-둘러싸!
철컥!
좁은 공간에서 사격은 아군을 상하게 할 수 있었기에 무명은 전류가 흐르는 삼단봉을 길게 늘어트렸다.
“이야아아!”
“후려쳐!”
부웅!
후우웅!
삼당봉은 탁탁거리며 허공을 허우적댈 뿐이었다.
상대가 워낙 빨리 움직였기에 그림자조차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웠다.
퍼억!
퍽!
“끄아악!”
“컥!”
“막아! 독 안에 든 쥐다!”
기이잉.
삼단봉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외친 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없어! 없다고!”
“뭐?”
“숨었어! 어디…… 컥!”
“어디야!”
“으아악!”
콰직!
퍼억!
퍽!
검은 남자가 무명 대원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를 간 대원들과 조장은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후웅!
“걸렸다! 개 같은 새끼!”
“갈겨어!”
투두두두!
투두두!
총구가 발하는 불빛에 사방이 잠시 환해졌다.
무명은 쓰러진 동료들 덕분에 공간이 넉넉해지자 도리어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후우우웅.
실탄이 공중에 뜬 채로 푸른 막을 뚫지 못하고 정지해 있었다.
“무슨…….”
“총알을…….”
2조의 조장이 상황이 이상함을 깨닫고 소리쳤다.
“피해! 피해라!”
그때, 검은 남자가 푸른 막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콰아아아!
광풍이 몰아침과 동시에 총알은 날아왔던 방향 그대로 튕겨 나갔다.
핑!
피잉!
“크악!”
“맞, 맞았어!”
“으아악!”
한순간에 바닥을 기게 된 대원들과는 달리 아직 2조장을 비롯하여 몇 명은 전투가 가능했다.
탁!
대원의 삼단봉이 검은 코트에 적중했다.
하지만, 뼈나 살을 후려친 게 아니라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도리어 가볍게 튕겨 나왔고 그 바람에 공격을 한 대원은 상반신이 상대에게 노출되었다.
퍽!
“크악!”
뻐어억!
“끄아악!”
대원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2조장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의 상황에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으아아!”
탁!
삼단봉이 아까처럼 상대의 손에 튕겨 나왔지만, 2조장은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 손에서 권총 한 정이 불을 뿜었다.
타앙!
“……괴물.”
“…….”
격발음은 들렸지만, 총알은 총구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대의 기이한 기운이 실탄이 외부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퍽!
손날로 조장을 기절시킨 검은 남자는 정리된 현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무명, 그리고 함께 파견된 각성자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뚜벅, 뚜벅.
검은 남자는 드러누운 각성자들에게 다가갔다.
“으윽…… 너, 너 누구야?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 뒤에 누가 있는 줄 아냐고! 대답해!”
검은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려 뭔가를 찾았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권총을 들어 각성자들의 허벅지에 한 발씩 격발했다.
탕!
타앙!
“으아악!”
“사, 살려 줘……. 다, 다 말할게…… 뭐든…….”
검은 남자는 가면 너머로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은 다른 이들보다 더 까만 것처럼 보였다.
오재완과 신명진은 그 눈을 보자니,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뭐?”
검은 남자는 말했다.
“관심 없어.”
“무슨…….”
변조된 음성이 흘러나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제 모조리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검은 남자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무명 대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사망자가 나온 임무보다 더 공포를 느꼈다.
총알도, 최신식 무장도 단 1명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3조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갔다.
지하에서 빠져나온 검은 남자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감시가 미흡한 구역을 몇 번 거친 후,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크게 한숨 쉬었다.
무명을 제압한 검은 남자는 성진이었다.
성진은 무명의 무장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삼단봉에 흐르던 것은 분명 펄스의 아류였다.
어찌 보면 자신의 힘의 파편이 알 수 없는 적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관은 없지만.’
무명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도 전에는 저곳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하니 찝찝했다.
성진이 인이어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무명 2조 타격 완료했고, 함께 온 각성자 둘도 확인했다.”
-오재완과 신명진이 온다고 확인했습니다. 맞습니까? 능력은 괴력과 정신 오염입니다.
“맞는 것 같다.”
-확인, 고생하셨습니다.
***
성진은 부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차해 둔 차를 타고 국존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요즘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이트 차단 인력이 부족한 것도 그 피로에 일조했지만, 정확히는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모든 게 최재국을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와 정보를 교류할수록 믿지 못할 일들이 줄을 이었다.
정부라는 조직은 절대 선이 아니었고, 그중 일부가 사도라는 이름 아래 수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무명과 행정 조직 일부, 그리고 기술 쪽은 아예 전멸이었다.
‘정부는 믿을 수 없어.’
국가에 소속된 각성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사실이었다.
성진은 당장이라도 이 어두컴컴한 굴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그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다른 길이 존재했다.
-강부용의 신임을 받는 이상, 먼저 제 발 저려 도망치듯 빠져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적절한 시기가 있을 테니 그때를 틈타 나오면 되겠죠.
성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특히, 강부용이 사도와 한 패거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일을 열심히 할 뿐인 상사였다.
철컥.
성진은 신아름의 어머니가 하는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탁.
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낯익은 번호판이 보였다.
‘음?’
안색이 굳어진 성진은 가게로 들어갔다.
“하하하! 그러니까 평소에도 그런 성격이란 말입니까, 어머님?”
“아유, 말도 마요. 그 무거운 입 열게 만들려면 아무리 알랑방귀를 뀌어도…… 어? 마침 왔네! 최 서방! 여기 기, 기관…… 뭐더라?”
“기관장이에요, 어머님.”
“맞다, 맞아! 내 정신 좀 봐! 기관장님이 오셔 가지고 최 서방 얘기를 하시네?”
성진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신아름도 표정을 감췄다.
강부용이 성진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2팀장, 와서 앉지. 오늘은 가게가 일찍 닫나 봐. 같이 한잔하고 들어가자고.”
“…….”
“에이, 뭐 더듬거나 그러지 않는다니까? 의전도 필요 없어. 오늘은 혼자 왔으니까.”
“그럼.”
성진이 구석진 방에 강부용과 함께 앉았다.
“어머님, 여기 2팀장이랑 조용히 얘기 좀 하겠습니다. 안주는 지금 있는 거로 충분하고 술만 좀 더 내와 주십시오.”
“그, 그래요.”
강부용이 어떤 의도로 신아름의 어머니를 찾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성진은 지금 예민한 상태였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고 여기서 조금만 미끄러지면 수렁에 빠져 허우적댈 수도 있는 상황.
조심에 또 조심하는데 갑자기 강부용이 나타났으니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어? 2팀장 지금 인상 쓰는 거지?”
“아닙니다.”
“표정이 없다고 모를 줄 알아? 다들 2팀장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알아. 눈으로 다 보이거든.”
“제가 오기 전에 몇 병이나 드신 겁니까?”
“한 2병? 괜찮아, 강부용은 왕년에 취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물론, 지금이 그 왕년과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꼰대들 술 상무 정도는 아직도 너끈해.”
얼른 이 자리가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말을 던졌다.
“절 기다리신 겁니까?”
“매일 이곳에 오잖아? 낮에 찾았더니 자택을 나갔다길래. 이제는 미행도 안 붙이잖아.”
“…….”
“그래, 꼬리 좀 붙였었다. 등신 같은 놈들이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들켜서는 상사를 쪽 주고 말이야. 다들 팀장들처럼 일하면 좋을 텐데…….”
미행 사건의 전말을 세세하게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술술 얘기할 줄은 몰랐다.
사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와 함께 종말을 극복하던 확실한 우군인 등불을 찾았다.
그런 와중에 미행까지 들켰으니 성진이 강부용에게 받은 불신감은 컸다.
더군다나 정부가 믿지 못할 조직이라는 것도 차례차례 증거가 나오고 있었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
“미안해…….”
“미행은 왜 한 겁니까?”
“그거 가지고 꽁할 줄은 몰랐지. 난 또 대범하게 바로 물을 줄 알았는데, 하하…… 이렇게 신용이 없을 줄이야. 아니, 내가 잘못한 거지.”
“미행은 왜 한 겁니까?”
“푸후우…… 그게 말이야. 사람이 조급해지더라고. 자네도 알잖아? 2세대 각성자들이 홀연히 사라져서 단 둘뿐이야. 우리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 지구촌 세계가 얼마나 혼란한지 2팀장께서는 아실랑가 몰라?”
“…….”
“뭐, 다른 나라야 1세대 각성자 수도 넉넉하고 인구 밀집 지역이 한정되어 있으니 내 알 바 아니지만, 우리는 다르잖아? 막말로 둘 중 1명이라도 사라져 봐. 국민의 생명은 누가 지키나?”
강부용은 곧은 사람이었다.
곧은 사람은 언제나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
그러나 가끔은 그 과정에서 부러질 때도 있는 법이다.
“국외에서 접촉하고 있는 건 아닌지, 교섭이 진행되던 2세대 각성자들처럼 사라지는 건 아닌지. 이 강부용도 고민이 많았다는 말이야. 알아듣나?”
“예.”
“뭐, 말도 안 하고 미행을 붙인 건 내가 백번 잘못한 일이지. 면목이 없어. 서로의 믿음을 깬 내가 죽일 년이지 뭐. 욕해도 돼. 강부용 이 의심만 많은 썅년!”
“강부용…….”
“진짜 하는 건 아니지? 그거 들으면 오늘 잠 못 잘 것 같아.”
“…….”
“삼남 일녀 중, 장녀였어. 나.”
갑작스럽게 자신의 가정사를 풀어놓는 강부용.
성진은 가만히 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노름빚에 용궁 가시고, 어머니는 보따리 싸서 떠나셨지. 짐작 가지 않아?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장녀는 동생들을 책임지고 뒷바라지하잖아.”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땡, 반대였어. 동생들이 누나 학업 마치라고 공부도 포기하고 일을 했어. 덕분에 나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강부용 석 자 얘기하면 알 만한 사람이 됐지.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뭐냐?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지. 우리나라에 가구 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모릅니다.”
“나도 몰라. 근데 무식한 놈도 무진장 많다는 건 짐작하겠지. 난 말이야, 단순한 사람이야. 이 강부용이는…….”
술에 취한 듯 같은 말을 반복하다 자신의 뺨을 치는 강부용.
짝!
“아, 뭐라고 했지. 맞아. 자, 들어 봐. 그렇게 무진장 많은 사람을 내가 지키고 싶다, 이거야. 나라는 사람은 나 홀로 탄생한 것이 아니니까. 2팀장 미행도 그래서 저질렀어. 그게 잘못된 건 줄 알면서도. 원래 높은 자리에 오르면 뻔뻔해지거든. 2팀장도 나 정도 되면 뻔뻔해질걸?”
“……취하셨습니다.”
“오늘…… 동생들하고 통화했어. 요즘 2팀장하고 소원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난 큰일을 앞두면 나를 이 자리에 올려 준 동생들한테 묻거든. 걔들이 뭐라는 줄 알아?”
“…….”
“누나가 잘못했대. 가서 싹싹 빌래. 에라이 동생들이 참…… 똑똑해. 누나보다 더 높은 사람 됐을 애들인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강부용이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미안해, 2팀장. 내가 민폐를 좀 저질렀네. 그래도 그 이후로 꼬리는 안 붙였어. 진짜야.”
이제야 미행의 이유를 알게 됐고, 그것이 별것 아닌 이유였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내가 그만큼 2팀장을 아낀다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보답을 하거든.”
“보답?”
강부용이 술 대신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벌컥, 벌컥.
“어으, 취하네. 혹시 녹음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 믿는다?”
“네. 아닙니다.”
“무명, 2팀장이 원래 소속되어 있던 곳 말이야.”
“…….”
무명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던 성진은 괜히 찔렸다.
오늘 그의 폭력에 무명의 한 조가 통째로 갈려 나갔으니.
“거기뿐만 아니야. 내가 알기로 이 나라 막후들께서 손대는 곳들이 여럿 있거든. 이건 강부용 피셜이긴 한데 나 그래도 나름, 정치 감각 있는 여자니까 믿어도 돼. 아무튼, 그들이 2세대 각성자들에게 관심이 많아.”
“관심?”
“어떻게 탄생한 건지, 능력은 어느 정도인 건지, 약점은 있는지, 가족 관계부터 출생 이력까지. 궁금한 게 참 많은 양반들이야.”
“그자들이 원하는 게 뭐죠?”
“뭐겠어. 팀장들 넘기라는 거지. 오늘 아침에 전해 온 따끈따끈한 개소리야. 신기하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어…… 그게 참…… 이런 경우엔 내가 먼저 대답한 것도 보답으로 쳐 주나? 선 조치, 후 보고 들어 봤지?”
“네.”
강부용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엿이나 까 잡수세요.’ 했다. 나도 눈치 보는 팀장들을 어디 날름 삼키려고 하냐고 쏘아붙였어.”
“…….”
“이 정도면 보답이 좀 됐을까? 아니, 사과의 의미로 받아만 줘. 응?”
“네, 알겠습니다.”
강부용이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아, 나가서 펴야 하나?”
“영업 종료했고 장모님 가게라 그냥 피셔도 될 겁니다.”
“흐흐, 이거 든든하네. 그럼 실례, 푸후우…….”
“그들이 왜 저희를 원하는 걸까요?”
“난들 아나. 근데 아마 최근에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는 것 같아. 거국적인 차원에서의 요구를 강부용이는 소심해서 거절했어.”
“……감사합니다.”
어차피 그렇게 된다면 국존을 떠났겠지만, 성진은 굳이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국민 1명에겐 하나의 삶.”
“네?”
“국민 수천만 명에겐 수천만의 삶이 있는 법이야. 나는 동생들의 삶을 희생해 이 자리에 올랐으니 그걸 지킬 생각이야. 물론, 혼자는 힘들겠지. 국민들도 도와줘야 하고, 정부 쪽 하이에나들과도 가끔은 손을 잡아야 해. 또…….”
강부용이 연기를 반대로 뿜고 성진을 보았다.
“2팀장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나 혼자서는 역부족이거든.”
“……알겠습니다.”
쨍.
술잔이 기울어지고 같은 속도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직은.
성진은 국가 존립 기관만큼은 사도의 손길이 뻗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
“형님, 요즘 한가하신 거 아닙니까?”
“다음 출동은 이틀 뒤라서 온 겁니다.”
“하하하! 저희야 일도 안 하고 뺀질뺀질 여기서 밥만 축내는데 형님은 어엿한 사회인이셨네요. 원래 게임 레벨이랑 현실 레벨이랑 반비례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그러게요. 누구랑은 다르게 멀쩡하신 분이었네요.”
“최별 양도 그렇게 떳떳하진 않은 것으로 아는데…….”
“저는 공부까지 다 마치고 아버지…….”
“지금 학벌로 차별하는 겁니까? 지금 등불에 고졸과 중졸이 얼마나 많은지…….”
“죄송해요. 제가 졌어요. 됐죠?”
“이겼다! 최별 양에게 이겼다!”
평소처럼 최별과 송하린의 소소한 말장난을 보고 있으니 성진은 스칸다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상이는 제대로 돌아갔을까?’
이번만큼은 그가 힘든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전이었다면 인공지능을 걱정하는 나사 빠진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진상을 알고 난 지금은 달랐다.
“아, 스칸다가 떠오르는구려. 내 천마도…… 시가로 30억은 받았을 텐데……. 그럼 평생 집에만 있어도 되는데…….”
“잘 있겠죠……. 다들?”
혼자만의 좋은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는 조금 쓸쓸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추억이 되었다.
스칸다에서 되돌아온 지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셋은 추억에 젖었다.
“솔직히 란슬롯이 최별 떡 바를 듯.”
“월인 금수저가 할 말은 아닌 듯.”
“나 보육원에서 자랐소!”
“란슬롯도 체급 차이였거든요?”
성진 일행이 떠드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서, 최성진 님 여기 계셨네요.”
조병창이었다.
“저번에 주신 싸인 집에 액자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네.”
“저도 이야기에 끼워 주실 수 있을까요?”
“별 다른 얘기는…….”
“제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조병창이 대화에 끼자 화제가 바뀌었다.
“다들 가상현실은 어떻게 시작하신 겁니까?”
“가상현실?”
“뭐어…… 저야 아버지의 부탁으로 뛰어들었었고…… 여기 계신 송하린 양은 알다시피 그냥 게임광이라…….”
“아니거든. 완전 마음의 상처가 있는 여성이 극복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것이오.”
“라네요.”
조병창이 피식 웃고 성진을 쳐다봤다.
“오, 올…… 성진 님은요?”
“어째 형님에게만 긴장하는 눈치인데.”
“제가요? 이 조병창이요? 하하하…… 하. 아무튼.”
“저는…….”
성진은 고민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큰 비밀까지는 아니었다.
계약과 관련된 내용만 피해 가면 될 것이다.
“저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역시.”
“짐작했습니다.”
“각성자와 합동 임무 중에 사고를 당해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때 접한 겁니다.”
성진의 말에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들 성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기적적으로 회복하긴 했습니다. 지금은 잘 걸어 다닙니다.”
“다들 사연 하나씩은 있는 법이네요. 그런데 임무를 같이 한 각성자는 누구였죠?”
“그건…….”
굳이 말해야 할까.
아니, 굳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은퇴하고 사라진 사람인데.’
“몇 명이 더 있긴 했는데…… 기억에 남는 건…… 김우열이네요.”
“김……우열?”
“네, 염동력 능력자.”
“자, 잠시만요. 정말 김우열이요?”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최별과 조병창이 동시에 난리를 피우니 성진은 어리둥절했다.
송하린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시오?”
“송하린 양은 일전에 확정자 명단 안 받았어요?”
“보기야 봤지. 기억하진 못했고.”
“거기에 있었잖아요.”
“응? 그게 무슨 말이오?”
조병창이 성진에게 말했다.
“염동력 능력자 김우열. 그는 정부 쪽 사도가 확실시되는 자입니다.”
“……이런.”
악연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굳이 찾지 않아도 언젠가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