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반갑습니다, 올빼미. 오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별다른 건 없었는데 꼬리가 하나 붙…….”
성진은 말을 하다 최재국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최재국이 성진에게 말했다.
“사거리까지 따라붙던 검은 세단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초청한 건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상대도 대담하군요. 벌건 대낮에 미행이라니, 혹시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마치 상대를 알고 있다는 말투에 성진은 최재국에게 물었다.
“미행을 한 상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짐작은 여러 곳 가는군요. 그래도 아마 강부용이 보냈을 확률이 높습니다. 세상에 근거 없이 상대를 믿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최재국의 말에는 인상을 굳혔다.
“무명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최성진 씨가 몸담았던 곳 말이죠.”
“…….”
“제가 최성진 씨를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하시겠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천안에 있는 비밀 연구 시설을 습격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 그런 적이 있었다.
성진은 임무를 나가면서 찝찝한 일이 있던 날에는 그것이 꼭 기억에 남았다.
천안에 숨겨진 비밀 시설은 말 그대로 불법적인 시설이었다.
정부가 통제하는 게이트 연구를 자기들 멋대로 자행하는 곳이니 그 결말은 뻔했다.
무명이 들이닥쳐 연구 기록을 강제로 빼앗았고 도주한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구금되었다.
성진도 분명 그 일에 가담했었다.
최재국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 얘기를 했다.
“기억하는가 보군요.”
“네. ……기억이 납니다.”
“제 동료 몇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죠.”
“동료들?”
“함께 미래를 대비하던 사람들입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사식이라도 넣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그건…….”
“최성진 씨와의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런 악연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가자는 것이지요. 괜히 나중에 알아서 서로가 불편해질 이유는 없으니까요.”
“…….”
성진은 이미 불편했다.
당시에는 분명 국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무명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어떤 신념이 있어 불법 연구소들을 습격한 것도 아니었고.
위에서 시켰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다.
성진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 원활하게 세상이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희는 최성진 씨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에 욕심쟁이인 사람은 결단코 아닙니다. 정부는 물론 우리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지만요.”
-그들을 믿지 마라. 넌 이용당하는 거야.
이제야 쓰러져 가던 연구원이 했던 말이 와닿았다.
물론, 지금 최재국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은 누구고, 모여서 무엇을 하는 거죠?”
“여기서 말씀을 나누기엔 조금 그렇고…… 안으로 들어가시죠. 다과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성진이 최재국을 따라서 이동했다.
그의 등 뒤로 수십 명의 사람이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이 올빼미라고?”
“전혀 다른데? 내가 상상한 모습이랑 전혀 달라. 원래 험상궂게 생기지 않았었나?”
“커스터마이징을 그렇게 했나 보지. 그냥…… 평범하게 조금 괜찮게 생긴 정도네.”
“연예인이다, 연예인. 포스가 진짜로…… 확실히 대기업들은 실물로 봐도 느껴지는 뭐가 있다던데.”
“사인…… 받을 수 있을까?”
“좀 가만히 있어 줄래? 나까지 쪽팔릴 지경이야.”
“승철이 형은 미리 받았던데? 그것도 사각 빤쓰에.”
“진짜?”
“뭐, 진짜? 진짜로 그런 데에다 해 줬다고?”
“어, 승철 TV 어쩌고도 적어 주셨대. 나 그거 듣고 오늘만 기다렸어.”
“……팬티 가져왔겠네.”
“……응.”
“몇 개나?”
“왜?”
“좀 빌려줘. 번들이지?”
***
고급 원두를 사용한 커피와 조각 케이크가 놓여 있었지만, 성진은 그것에 손대지 않았다.
애써 준비한 것을 성진이 손대지 않음에도 최재국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성진의 옆에 앉은 송하린이 자신의 다 먹은 접시를 보다가 성진의 케이크를 보았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형님. 역시, 아우를 생각해서…….”
“……네.”
최별이 웃음을 흘렸다.
가까운 이들이었지만 성진은 이들의 연락처도,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일반적인 교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믿되, 증표는 나누지 않은 상당히 독특한 관계였다.
최재국은 성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궁금한 게 많으실 테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서 최성진 씨의 궁금증은 대부분 해결될 것입니다. 약속드리죠.”
“반가운 말이네요.”
데자뷰는 뜻 모를 소리만 하고 떠났다.
정작 성진이 궁금해하던 것들은 모조리 의문으로 남겨 둔 채.
그런 상황에서 사건의 전말을 일부나마 설명해 줄 사람을 만났으니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먼저 궁금한 것을 말씀하시지요. 간단한 것들을 우선하여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성진의 첫 번째 질문.
“연구소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도둑질하다 들켰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의외로 순순히 자신들의 행동을 인정하자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무엇을 도둑질한 거죠?”
“연구 기록이지요.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영역까지 진행된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다소 거칠게 행동한 겁니다.”
“어째서 정부의 연구 기록을…… 경쟁이라도 하는 겁니까?”
“최성진 씨가 알고 있는 정부라는 개념과 제가 알고 있는 정부는 개념이 다를 겁니다.”
“어떻게 다르다는 얘기죠?”
“최성진 씨의 정부는 국가의 일을 계획하고 집행하며 국가 그 자체라고 말할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부는 국가를 운영하는 조직의 일부입니다.”
“거기에 속하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꽤 크다는 말씀이시고요?”
“정확합니다. 저희가 경계하는 자들은 그런 자들이지요. 이번에 방문하셨던 인천의 연구 단지도 그런 자들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명 또한 그렇고요. 그들이 여태까지 해 온 짓은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성진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제껏 자신은 정부를 하나의 큰 조직이라 생각했는데 최재국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부 안에서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이 나뉘어져 있고, 최재국이 적대하는 이들은 그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바뀌게 된다.
“……그 조직은 얼마나 큰 겁니까?”
“크기로 말하자면 작다고 할 수 있고 가진 힘으로 말하자면 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암적…… 아니, 세계의 암적 존재이니까요.”
“그들을 무엇이라 부르죠?”
“사도(使徒). 물론 신성한 의미는 아니지만.”
“사도라…… 사이비처럼 신을 떠받들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정확하십니다.”
영문 모를 말이었다.
물론, 한국 사회에는 수많은 종교 단체들이 있다.
다만 그 종교 단체가 국가를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고, 애초에 그런 자들이 게이트에 관심을 가져서 무엇하겠는가.
최재국이 부연 설명을 했다.
“여기까지만 이해하셔도 제가 차례차례 설명하는 것에 막힘없이 이해하실 겁니다. 그들이 사도라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무엇? 그야…….”
‘이들은 어떤 존재지?’
말문이 막힌 성진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고는 대답했다.
“당신들도 사도입니까?”
“정답입니다.”
“수수께끼 같네요.”
“음,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리는 아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현대인이 그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엔…… 조금 그렇겠죠. 이해합니다.”
최재국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희 또한 사도,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죠. 어떻게 믿게 됐는지는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최성진 씨는 혹시 전생을 믿으십니까?”
“전생? 이전의 생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사도들은 전생의 기억을 가진 몇이 모여 만든 조직이죠. 저 또한 그런 사람이지만, 기억의 잔향은 약한 편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죠.”
“전생의 기억…… 설령 그런 것이 실존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이 석판을 보시죠.”
딸칵.
최재국이 딱딱한 형태의 가방을 꺼내 그 안에 감춘 것을 내보였다.
이곳저곳이 부스러진 석판이었다.
아주 오래된 것이었고 그곳엔 알 수 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데, 어째선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째선지.
‘왜 읽을 수 있는 거지?’
성진의 표정 변화에 최재국이 미소 지었다.
“어떠십니까, 이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두 개의 세계만 남게 되었을 때, 황혼을 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역시나, 읽으실 수 있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석판도 있습니까?”
“있었습니다.”
“있었다고요? 지금은?”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사진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왜…….”
“사라졌거든요. 일단 이걸 보시죠.”
최재국이 보여 준 사진, 그곳에 또 하나의 석판이 있었다.
석판에 적힌 내용을 읽은 성진은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세 자루의 검을 남겨 두고 하나의 세계가 닫힐 것이다……. 이건…….”
“뭔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 석판이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네. 정확히 성진 씨와 제 딸아이, 그리고 송하린 씨가 현실로 돌아온 날이죠.”
“그런…….”
스칸다였다.
분명 석판에 적힌 내용은 성진 일행이 스칸다에서 벌인 일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재밌지 않습니까? 이로써 제 말을 조금은 믿으시겠군요. 석판에는 각기 번호가 있었습니다. 마치 예언서처럼 말이지요. 방금 사진으로 보신 석판이 2였고, 지금 보고 계신 석판이 1입니다.”
“숫자가 작아지고 있군요.”
“맞습니다. 재밌는 점은 이 석판은 사도들에게서 대대로 전승되던 것이었고 1이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황혼을 건 싸움…….”
“네, 그것이 마지막이죠. 결과가 안 적힌 것으로 봐서는 이 석판을 남긴 사람도 결과만큼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진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하여도…… 아니, 그…….”
“알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우시겠죠. 제가 최성진 씨여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정부 쪽 사도들은 그럼…….”
“네, 이 황혼의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죠.”
들을수록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이런 집단이 다 있을까.
하지만, 스칸다의 이야기가 적혔던 석판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예언은 실존할지도 몰랐다.
번호가 새겨진 석판을 보며 성진은 생각에 잠겼다.
“하…….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맙소사.”
“최성진 씨는 이미 다녀온 세계가 있지 않습니까?”
“종말…… 이후.”
“그렇습니다. 지금 추정컨대 모든 세계가 닫히고 단 두 개의 세계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종말 이후.
그렇다면 그곳을 연결하는 데자뷰들은 어떤 존재일까.
“최재국 씨는 데자뷰와 관련이 있으십니까?”
“전혀요. 그들과 접점이 없습니다. 오히려 최성진 씨가…….”
“그들이 최근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역시…….”
“데자뷰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아마도…….”
최재국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석판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설마?”
“신. 그들은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캡슐을 만든 자들입니다. 기기를 분해하여 확인해 보아도 오버 테크놀로지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것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신이라니.”
“그렇지 않다면 가상현실을 표방한 다른 게임이 어째서 나오고 있지 않을까요? 그야 뻔합니다. 이렇게 진짜 같은 가상현실은 없으니까.”
최재국이 하는 말은 결국, 성진이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에 답을 주었다.
“종말 이후는 실존하는 세계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 수도,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다른 차원의 모습일 수도 있죠.”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최성진 씨, 그렇게 두려워하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어째서?”
“데자뷰가 단순히 방관자는 아니라는 사실, 사람들을 종말 이후와 스칸다로 집어넣은 자들이 바로 데자뷰입니다. 그런 자들이 무엇을 원했겠습니까? 결과를 보면 되지요.”
“그 결과라…….”
스칸다에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고, 사라졌다.
또한, 스칸다라는 세계가 결국 회생했고 또한 닫혔다.
종말 이후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2세대 각성자가 되어서.
‘2세대 각성자?’
성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최재국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왜 이들을 모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데자뷰가 게임을 만든 이유 중에 한 가지…… 하지만, 어째서?”
“결국에는 우리 곁에 남지 않았습니까? 사도의 두 축 중 한 곳에 들어왔으니 저희를 지지하는 쪽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데자뷰가 저희를 위해 이들을 안배했다면, 그 이유도 있겠죠. 저는 그것이 이 석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황혼을 건 싸움.”
“그렇죠. 저는 이들이 황혼을 건 싸움을 위해 준비된 자들일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딘이 신들의 황혼을 막기 위해 발할라에 위대한 전사들인 에인헤야르를 예비한 것처럼…….”
“…….”
오늘 하도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이제 최재국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와도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았다.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있으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선 당장의 거취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게이트 탄생과 관련한 연구들의 안전, 다른 사도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사회의 붕괴를 막는 것 정도지요.”
사회의 붕괴.
게이트가 빌딩에 생성되면 대부분 초동 조치가 시행되기 전에 희생자가 발생했다.
앉은 자리에서 아무 조짐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고 그것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성진은 문득 떠오른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번 인천 게이트 사태를 설마 미리 아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어떻게? 저와 한승철 씨는…….”
“그쪽으로 예민한 대원이 있습니다. 한승철 씨는 그에게 전달받았고요. 저희는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대원마다 개인차가 있더군요.”
“그렇다면 왜 예비하시지…… 아!”
“네, 연구원들이 급하게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더 늦춰서 얘기하려 했지만, 최성진 씨가 그 전에 느끼신 거고요.”
하아.
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새벽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을 누군가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직 게이트 발생은 충분히 예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재국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당분간은 평소처럼 행동해 주시죠. 도움을 구할 일이 있으면 따로 한승철 씨를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고요. 저희를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저희는 최성진 씨를 믿겠습니다.”
***
성진은 돌아와서 담담하게 지냈다.
태연한 그의 반응에 강부용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성진은 그녀가 자신을 감시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미행은 더는 눈에 띄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진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했는지, 미행을 아예 포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진은 그 후로도 최재국, 그리고 등불들과 교류를 나눴다.
그는 누군가를 완벽히 믿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그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주말 오후, 경기도 부천시 일대.
“이런 데 숨어 있었네.”
“얕보면 안 돼. 지난번에 3조 소식 못 들었어?”
“3조 실패한 거?”
“실패만 했게? 도리어 두들겨 맞았다더라.”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지. 우리는 총 들고 진입하는데 상대는 주먹으로 찜질만 하니 말이야.”
“불법으로 험한 짓하는 사람들치곤 순진한 건지…… 뭐, 그렇다고 총알이 튕겨 나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봐 줄 것도 아니니.”
“내 말 이해 못 했어? 상대 쪽에도 각성자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총 든 상대를 두들겨 팬 거잖아.”
“알아, 안다고. 그런데 어쩌나? 우리도 이번엔 각성자 대동하고 찾았다고. 상대에게 붙은 게 어떤 개뼈다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은 A급 둘이 따라붙었어. 재수 없는 새끼들이긴 한데 실력은 뛰어나니 믿을 만해.”
보호구를 착용한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아 임무 시작 전부터 무슨 얘기를 이렇게 쏙닥쏙닥하십니까, 그려?”
“그러게, 궁금하네?”
당황한 대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답했다.
“이, 이번 임무에 대해 고찰을 좀…….”
“우리가 있는데 굳이 고찰까지야…… 우리 욕한 거 아닙니까?”
“그, 그런 짓은…….”
“절대 아닙니다!”
뱀 같은 눈을 흘기는 A급 각성자 신명진, 해골처럼 눈이 툭 튀어나온 A급 각성자 오재완.
둘은 사생활이 별로 좋지 못한 거로 알려진 각성자들이었다.
마약과 성추문 등 이슈가 끊이지 않았는데, 실력만큼은 업계에서 인정받았다.
오늘은 그들이 조력으로 함께했다.
“슬슬 돌입하지? 따분하기도 하고, 오늘 끝나고 예쁜이랑 드라이브 가기로 했거든.”
“아직도 만나? 뭐 하러?”
“오늘까지만 만나게. 아무튼, 가자고. 나랑 일 한두 번 하는 거 아니잖아?”
대원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몸을 풀었다.
그들 중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바이저를 내렸다.
탁!
-무명, 2조. 불법 게이트 연구 시설 타격 및 제압 임무. 불복 시 사살, 기본적으로 제압이다.
-확인.
-확인했습니다.
-확인…….
공성추처럼 생긴 도구를 들고 초를 센 조장이 통째로 문을 날려 버렸다.
퍼엉!
-돌입!
지하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길을 검은 전투복을 입은 대원들이 차례로 진입했다.
미리 알아차린 것인지, 개미굴처럼 복잡한 길은 전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대략 3분 동안 어지럽게 주변을 탐색한 조원들은 이곳의 길이 복잡하긴 했지만 결국 한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거대한 철문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거…….
“비켜, 비실비실한 것들아.”
해골처럼 마른 오재완이 철문 앞에 섰다.
뚜둑.
그는 양손을 빙글 돌려 관절 소리를 내고는 능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원천 능력은 거력(巨力).
마치 두부처럼 철문에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흐아압!”
끼긱!
끼이이익!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통째로 뜯어지기 시작했다.
뒷골이 쭈뼛 선 무명 대원들은 긴장한 채로 문 너머의 적에 대비했다.
“하아…… 하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예! 돌입!”
무명을 앞세운 각성자 둘이 철문 너머로 들어섰다.
-야시경 작동해.
삑.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다 빠져나간 것 같은데요?
-자료들은?
-대부분은 이미 파악된 내용…….
치이익.
-그…… 요?
-뭐?
치이익.
-……다!
무명의 2조장은 인상을 쓰고 바이저를 체크했다.
오류.
홀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통신 채널도 흐트러졌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끄아아아악!”
“무슨 소리야! 전원 플래시 켜!”
총구에 매달린 플래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갑자기 잠시 환해진 연구실.
하지만, 마치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병호야! 왜 그래!”
“으…… 으…… 뭔가가…… 일어날 수가…….”
“부딪혔다고? 부딪힌 거야?”
“으……. 모, 몰라…… 수, 숨이…….”
멀찍이서 지켜보던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일 똑바로 안 할래? 갑자기…….”
콰르릉!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뭔가 떨어져 내렸다.
거력의 오재완은 웃었다.
그림자가 똑바로 자신을 향했기 때문에.
아마 난전을 기대한 것이겠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잡히면 일단…….’
그는 자신과 부딪힌 상대를 일단 반쯤 죽일 생각이었다.
그의 힘이라면 코끼리도 쩔쩔맬 것이다.
콰직!
타격음이 우렁차게 들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신명진이 오재완에게 소리쳤다.
“죽이지 마, 재완!”
플래시가 오재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끄아아아악!”
분명 비명을 지르는 이는 낯선 이여야 했다.
그런데. 부러진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건 거력의 오재완이었다.
“어?”
오재완은 힘으로 코끼리는 이길 수 있었지만, 공룡을 이길 수 없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얼굴을 가린 이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신명진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