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83화 (183/222)

183화

성진이 신아름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상황은 카페에서 데자뷰와 헤어진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만히 앉아서 나눈 대화를 곰곰이 돌이켜 보던 성진의 눈빛이 변한 것은 몇 분 후였다.

‘이상해…….’

심장 박동이 계속해서 빨라졌다.

호흡도 거칠어진 것 같고.

아니, 사실 이런 것보다 문제 되는 것은 지금 뭔가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겠군.

비가 떠나며 한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사실, 성진도 같은 느낌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단지 그 느낌이 모호해서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망설였던 것인데 마침 비가 자신의 심정을 정확하게 입 밖으로 소리 냈다.

비는 아마도 서울 전체에 내릴 것이다.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설마…….’

성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곳은 신아름의 회사였다.

드르륵.

성진이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다급하게 카페를 나가기 위해 그가 몸을 트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에 크게 부딪혔다.

촤악.

“꺄아악!”

“어, 어……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나요?”

“다치진 않았는데…… 옷을 다 버렸네요.”

“이런…….”

성진은 난감했다.

이런 경우,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 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신아름의 회사를 향했다.

상황을 짐작한 여인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옷을 닦으며 말했다.

“저…… 바쁘신 것 같은데…… 가 보셔도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세탁비는…….”

성진이 지갑을 뒤적이다 당황했다.

현금이 없었다.

그는 명함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카페의 직원에게 부탁해 펜을 받았다.

사삭.

카페 티슈의 귀퉁이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은 성진이 여인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 여기 적힌 번호로 연락 주시면 세탁비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아닙니다. 꼭 연락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성진이 자리를 박차고 카페의 문을 여는 동시에 카페에는 소음이 가득 찼다.

삐익.

삐익.

사람들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게이트 재난 문자? 뭐지?”

“서울시?”

“뭐야? 서울에 게이트가 열린다고? 그래서 어디에 열리는 건데? 그리고 18시면 몇 분 뒤잖아?”

방금 성진의 연락처가 적힌 티슈를 가방에 넣은 여인은 정혜리였다.

정혜리는 커피로 물든 카디건을 바라보고는 한숨 쉬었다.

“비싼 건 아니라지만…… 축축하긴 하네. 음? 재난 문자?”

더 이상 커피가 마시고 싶지 않아진 그녀도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

“어, 미스터 킴.”

-사랑하는 달링한테 무슨 소리야?

“그보다 방금 메시지는 뭐야?”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최 박사님이 관측하신 거야. 너도 위험하니까 지금 본부로 와. 기관장님이 찾으셔.

“서울 어디서든 게이트가 발생할 수 있는 거야? 그보다 지금이라고?”

-이것도 겨우 알아낸 거야. 사실상 계측의 의미는 없지만. 너도 얼른…….

“꺄아아아악!”

드드드.

“이게 무슨 소리야?”

-뭐? 자기야…….

뚝.

전화를 끊고 갑자기 진동이 전해진 곳을 바라본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두두두.

꽤 큰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비켜!”

“게이트다! 게이트야! 건물에 게이트가 열렸어!”

“게안부는 뭐 하는 거야! 누가 전화 좀 부탁해요!”

“꺄아아악! 도, 도망…….”

사람은 위급한 순간을 맞이하면 몇 가지 행동 패턴을 보인다.

첫째,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혼란한 와중에 몸이 굳어 사고가 정지하는 사람이다.

정혜리는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건물을 향해 뛰었다.

그녀는 당연히 첫 번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둘째, 무작정 위급 상황에서 도주하는 사람.

지금 정혜리는 위급 상황에 가까이 가고 있으니 이 타입도 아니었다.

셋째,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시, 가장 먼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

뚜.

“대 게이트 국가 존속 기관 소속 정혜리입니다. 현 시각 18시 2분. 현 위치…….”

-알겠습니다. 초동 조치 투입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서울 곳곳에서 같은 현상이 관측되어 투입까지 10분 이상 걸릴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피해 확대를 막을 수 있습니까?

“제가요? 저요?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다. 해 볼게요!”

그녀는 건물 가까이로 뛰어가며 재빨리 건물에서 튀어나온 샐러리맨을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안에 상황이…….”

“7, 7층을 시작으로 다른 층까지 게이트가…….”

“몬스터는요?”

“저, 정확히는 못 봤습니다…….”

“알겠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네? 시, 싫습니다!”

정혜리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 남자는 서둘러 인파가 모인 곳으로 향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여기서 봉쇄하지 못하면 몬스터가 어디까지 퍼져 나갈지 몰라요.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

“꺄아아악!”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통제가 힘들었다.

또한, 안에서 계속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안으로 진입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오면 초동 조치 각성자가 오기 전까지 건물을 봉쇄해야 해요! 입구를 막을 겁니다! 도움을 주실 분들이 있을까요?”

“…….”

사람들이 도망치다 말고 망설이는 찰나,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정혜리에게 가까이 왔다.

“내가, 내가 돕겠습니다!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정혜리가 건물의 정문과 후문을 통제하고 있는 사이, 성진은 건물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여기다.

분명 여기서 신아름이 느껴졌다.

입구로 진입하면 늦는다.

본능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신아름이 있는 건물은 높이가 꽤 있었지만, 주변부에 튀어나온 장식물들이 많았다.

성진은 재빨리 재킷을 벗었다.

팍.

셔츠를 풀어헤친 그는 심호흡했다.

오랜만에 해서 잘 안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콰르릉!

쏴아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작일 뿐이지만 조금 있다 더 퍼붓기 시작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다.

건물을 오르다 미끄러져 추락할 수도 있다.

텁.

성진은 가까운 구조물을 붙잡았다.

턱.

터억.

누가 뒤에서 그의 모습을 본다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비가 오는 미끄러운 구조물을 붙잡고 안전 장비도 없이, 높은 층계의 건물을 망설임 없이 오르는 모습은 광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름아…… 아름아…….”

계속 애타게 신아름의 이름을 부르던 성진이 빗물에 구조물을 놓쳤다.

팟.

우지직.

“큭…….”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지만 계속 가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으으…… 지금…… 갈게.”

팍!

“내가 가고…… 있어. 조금만 참아…….”

팍!

다시 구조물에 오르는 데 성공한 그는 자신이 어느새 아득한 높이에 오른 것을 느껴지는 바람으로 알 수 있었다.

쏴아아.

신아름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기이한 감각.

자신은 카페를 나서기 한참 전부터, 아니 어쩌면 집을 나서기 전부터 이 사단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느꼈던 찝찝함이 게이트가 발생할 전조였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하아…… 하아…….”

정장이 군데군데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금세 빗물에 씻겨 나가 흔적을 감추었다.

마침내, 신아름이 있는 5층에 도달했다.

통유리 너머의 그녀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옆방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성진에게는 들렸다.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소리를 흘렸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옆방은…….’

건너갈 수 없다.

중간 다리가 되어 줄 구조물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유리를 깨야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을까?’

척 보기에도 평범한 유리가 아니었다.

난간에 한쪽 팔로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알 게 뭔가.

쾅!

힘을 받지 못한 주먹이 유리를 때렸다.

콰앙!

소리는 요란했지만, 주먹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부서지고 있는 건 유리가 아니었다.

성진의 나약한 살과 가죽이었다.

“아름아…… 무섭지? 조금만 참아…… 오빠가 거기로 건너갈게…….”

쾅!

콰앙!

신아름이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이.

자신은 버리고 떠나란 듯이.

성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콰앙!

악에 받친 주먹이 방금 충격으로 기괴하게 꺾였다.

‘알겠어…….’

알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단순히 운동 신경과 담력이 뛰어난 정도로는 여기까지다.

‘그래, 여기까지.’

쾅!

부서진 주먹은 유리를 두들겼다.

마치, 최후의 발악인 것처럼.

평범한 삶을 위해, 평범한 최성진은 죽어야 했다.

‘고생했어.’

“끄아아아악!”

마음속 새장을 열어젖히자 어마어마한 힘이 흘러들었다.

이제는 평범하지 않은, 조금은 특별한 최성진이다.

그녀와 있기 위해서 그는 평범함을 포기했다.

후우웅.

매달린 팔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탓.

건물을 박차 반동을 얻은 성진의 주먹에 상서로운 기운이 흘렀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성진의 주먹에서 난 소리인지 하늘에서 난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콰아아아앙!

쩡!

유리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가 찬바람을 건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또, 성진도 함께.

“오, 오빠…… 어떻게…… 구해 줘……. 흑…….”

신아름의 동그란 눈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다행이다.

성진의 마음은 지금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신아름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아름아, 울지 마. 무서웠지?”

“오빠아아아!”

계속 우는 그녀를 달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와아아아아!

몬스터의 괴성은 밖에서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꽤나 공포였다.

신아름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타탓.

슈아악!

붉은 괴물은 성진에게 달려와 한쪽 팔을 휘둘렀다.

성진은 고개를 슥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하고 양손을 이용해 괴물의 팔을 꺾었다.

크아아아!

뿌직.

빠지직.

괴물의 팔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진은 괴물의 등을 가차 없이 밟아 괴물의 팔을 마저 뽑았다.

크와아아아아아!

쾅!

키이익!

괴물의 목이 바닥에 딱 붙어 성진의 구두에 제압당했다.

후웅.

쾅!

뿌드득.

성진이 다시 한번 발을 굴리자, 괴물의 목이 부러졌다.

괴물의 입에서 혀가 덜렁 튀어나와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그 끔찍한 모습에 신아름이 입을 틀어막았다.

성진의 하얀 와이셔츠는 비로 젖어 그의 강인하지만, 상처투성이인 몸을 드러냈다.

성진의 주먹에서 튄 피와 몬스터의 피가 섞여 와이셔츠를 붉게 물들였다.

성진이 개의치 않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름아, 업혀. 여기서 나가야 해.”

“오빠…… 어떡해…… 밖에도…… 밖에도.”

밖에도 괴물들이 있을 거야.

성진도 그것을 알았다.

유리 너머로 몬스터가 빽빽이 들어찬 층들을 확인했으니까.

초동 조치가 투입되더라도 이곳에 있는 성진과 아름을 구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신아름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신아름은 두려운 눈으로 성진을 바라봤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제껏 그가 감춰 왔었으니까.

성진은 해맑게 웃으며 등을 내주었다.

“어서, 집에 가자.”

“우으응. 흑…… 흑…….”

신아름의 뜨거운 눈물이 성진의 축축이 젖은 셔츠를 다시 한번 적셨다.

그 무게만큼 성진에게 책임감이 더해졌다.

신아름을 등에 업은 성진이 천천히 발을 뗐다.

“무서워…….”

“눈 감을래?”

“그래도 돼?”

“응, 아무 일 없을 거야.”

“무서워, 오빠. 무서워…… 돌아가자…….”

“집에 가자, 아름아.”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층계를 울렸다.

평소라면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곳에서 울리는 당연한 소리였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굉장히 이질적으로 들렸다.

찰박.

찰박.

다른 생명체들은 이런 소리를 내며 걸어 다녔으니까.

크와아아아!

크르르…….

사람보다 더 큰 개, 근육질의 외눈박이.

몬스터들이 성진을 발견하자 사납게 울었다.

“으으…….”

“아름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눈을 감은 신아름에게 성진이 물었다.

그녀는 겁을 잔뜩 먹어 5층을 내려가기 전부터 탈진할 기세였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성진이 생각한 고육지책이었다.

“눈 감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알았어.”

성진의 의도를 짐작한 신아름이 눈을 감은 채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오, 오늘은…….”

콰직!

“꺄아아!”

“계속 말해.”

“계속? 응, 으응…….”

퍽!

콰아앙!

크아아아아아아!

“오, 오늘은 아침부터 팀장님이 히스테리를 부렸어.”

“히스테리?”

콰직!

“응, 우리 팀이 평가가 안 좋았나 봐. 그럴 거면 자기가 일 좀 도와주지…….”

“그러게,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히스테리를 부리고 그래.”

“그러니까. 그래서 아침에는…….”

콰아아앙!

키이이이이이.

콰직!

이상한 소리가 계속되었지만, 신아름은 성진을 믿고 눈을 뜨지 않았다.

“점심에는 통화한 대로야. 또 제육볶음 먹었어. 며칠 째인지 모르겠어, 정말.”

“같은 데서?”

“응! 맛있긴 한데, 일주일 내내 먹으니까 좀 물려서.”

크아아아아아!

콱!

“그……래? 나도 같은 음식 매일 먹는 건 좀 그렇더라.”

“그치, 그치?”

퍼억!

깨에엥!

“메뉴 좀 다른 거 먹고 싶다고 해도 그 딸랑이가 맨날 팀장 편만 들어서…….”

“하하……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아야지…….”

“나 그냥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닐까?”

“피곤하지 않겠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면 점심때 기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아! 밤에 오빠 집에 들렀다 돌아가면 아침에 좀 피곤하려나?”

“음…… 그렇겠네. ……아름아, 아무래도 퇴근 시간에 차 좀 막히겠다.”

“으…… 응, 괜찮아.”

두두두두.

크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엑!

신아름은 바보가 아니었다.

방금 소리로 보아 위층에서도 몬스터가 몰려온 것 같았다.

아니, 건물의 모든 괴물이 성진과 신아름을 노리고 모이고 있었다.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그 생각에 무서워진 신아름이 성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후우…….”

“오빠…….”

“계속해.”

“응?”

“얘기 말이야. 계속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알겠어. 있잖아…….”

콰아아앙!

콰르릉!

펑!

키에에에에에에!

카악! 칵!

콰직!

끔찍한 소음 속에서도 신아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어차피 눈을 떠 봐야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성진을 믿었다.

성진은 신아름을 업고 오로지 다리로만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몬스터들이 과하게 몰려들 때는 펄스를 휘둘러 걷어차면 전부 갈기갈기 찢어졌다.

“후우…….”

퍼억!

팍!

뜨거운 핏물이 이제는 성진뿐만 아니라 신아름도 덮쳤다.

촤악.

“읏…… 그러니까…….”

신아름은 그때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다.

성진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성진은 자신이 그녀에게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백마도 없고 왕국도 없지만, 그녀를 위해 피와 오물을 대신 뒤집어쓸 기사가 될 각오는 있었다.

지금, 그는 무수한 적들을 뚫고 그녀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하아…… 하아…….”

“오빠…….”

“아름아…….”

키에에에.

콰직!

“이제…….”

“어?”

“눈 떠도 돼.”

“정말? 정말이야?”

“응…….”

신아름은 성진의 말에 감았던 눈을 떴다.

오랫동안 눈을 감아서인지 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윽…….”

“다 왔거든.”

“뭐?”

“다 왔어……. 이제 집에 가자.”

“…….”

정말이었다.

성진의 말대로 어느새 1층에 도달해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문 너머의 사람들은 성진과 신아름을 귀신 보듯 했다.

“어, 어떻게…… 생존자가 있었나?”

“지금 그게 문제예요? 문 어쩔 거예요?”

“저…… 공무원 언니야한테 물어봐야지. 나한테 물으면 쓰나.”

“어떻게 해요? 열어요?”

정혜리는 지금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분명, 아까 카페에서 마주쳤던 남자였다.

그녀가 자신의 카디건을 내려다 봤다.

여전히 커피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전신이 피에 젖어 있었다.

여자도 피에 절어 있었지만,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들어간 거지? 아니, 어떻게 나온 거야? 저 피는 다 뭐고?’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정혜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혈색이 어두워진 그녀는 사람들의 채근에 당황하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같은 기관 소속 각성자였다.

몇 번 얼굴을 익혔기에 그가 이곳에 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는 혼자였다.

“어? 혼자 왔어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서울 곳곳에서 소규모 균열이 줄을 이어서……. 늦었죠?”

“……일단, 부탁드릴게요.”

각성자는 혼자였지만, 그를 보조하는 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총과 방검복으로 무장한 후, 시민들을 통제하며 안으로 진입했다.

반대로, 문이 열리자 성진과 신아름이 나왔다.

피를 뒤집어쓴 그들의 모습에 초동 조치로 파견된 각성자가 물었다.

“생존자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안에 상황은 어떻죠?”

“……모르겠습니다.”

“이봐! 이분들을 가까운 병원으로…….”

“괜찮습니다. 다친 데 없어요…….”

“그럼 피는…….”

“괜찮아요, 정말…….”

“……네. 알겠습니다. 진입! 1층 틀어막고 지하부터 올라간다! 건물 비상 전력 가동해!”

“예!”

신아름을 업은 성진이 계단을 차례차례 걸어 내려갔다.

계단 밑의 정혜리는 그에게 의문이 남았지만,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도 도와준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건물 관리실 위치를 물어 대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여기네요.”

“일단 화면을 보면…… 어?”

정혜리는 대원의 놀란 모습에 덩달아 더 놀랐다.

“왜, 왜요?”

“화면을…….”

“네?”

“화면을 보세요…….”

“네, 보고 있는데…… 맙소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