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쪽.
성진의 볼에 입을 맞춘 신아름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차 끊기기 전에 가야 한다고 서두를 땐 언제고 문 앞에서 떠나기 아쉬워했다.
“금요일에는 데리러 오지 마.”
“왜?”
“끝나고 엄마 집에 잠깐 들리기로 했어.”
“나는 가면 안 되는 거야?”
“가 봐야 좋은 소리 못 들을 거야. 부담감도 줄 거고. 오빠가 괜찮아도 내가 싫어. 그냥 금요일 지나고 보자.”
“……알겠어.”
신아름과 하루라도 떨어져 있는 게 싫었지만, 별수 없었다.
그녀는 여려 보이지만, 한 번 결심한 것은 기어코 해내는 성격이었다.
속된 말로 고집이 셌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성진을 기다린 원동력이 되어 주었을 수도 있었다.
성진은 다시 방에 앉았다.
주인이 출근하고 집에 홀로 남은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그만큼 쓸쓸했고 집에 즐거움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할까.
사실 이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통장에 모인 돈으로 뭔가 해 볼 수도 있었다.
성진은 문득 군인이라는 직업과 자신은 참 맞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 군인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텐데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군 생활을 제외하면 성진의 삶에 무엇이 남는가.
‘그러고 보니…….’
그는 자신의 회복 소식을 신아름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모두 자신이 낙오되자 떠나가 버린 사람들이었다.
성진은 이제 사람을 사귀고 정을 나누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관계의 깊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오랜만에 동료들을 떠올린 이유는, 그들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전에 복무했던 부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 자연히 떠오른 것이었다.
‘대체 뭐였을까?’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상부에서는 임무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겉핥기에 불과한 정보였다.
게이트를 정부가 공인한 신분 이외의 사람이 파고드는 것은 불법이었다.
순수한 연구 목적이라면 정부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하면 될 것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성진은 아주 가끔 그런 사람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무것도 몰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성진이 올빼미로 활동하던 당시, 어깨에 구멍이 뚫린 연구원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들을 믿지 마라. 넌 이용당하는 거야.
‘이용?’
사냥개 노릇이라면 어느 조직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특수부대의 경우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보통 자신을 이용하는 쪽은 정부였다.
원래부터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꼬집다니.
‘내가 모르는 게 있나?’
그라고 해서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이란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 가고 저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 가는 존재였으니까.
특별히 사명감을 가지고 하지도 않았고 세계의 비밀을 궁금해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조직이 수상하다고 느낀 적은 몇 번 있었다.
게이트 불법 연구 조직의 제압 명령이 떨어져 모두 제압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아무도 반항하지 않았고, 순순히 이송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결말로 이끌었을까?
게이트를 단순히 돈벌이로 생각해 정부의 빈틈을 노린 것일까?
‘머리 아파…….’
사실, 이제 그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성진은 다시는 군과 엮이기 싫었고 신아름과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애써 마무리되지 않은 생각을 정리하고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군 생활을 제외했을 때 그에게 무엇이 남을까.
신아름과의 행복한 시간?
그것을 떠올리면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뿐일까.
‘……아니.’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방송.
어째서 갑자기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떠올리게 됐다.
인터넷 방송을 하며 스트리머로 활동할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참으로 기묘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던 그가 게임에 뛰어들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시청자들은 그가 하는 별것 아닌 행동에도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그리고 늘 자신의 선택을 응원하고 함께 싸웠다.
종말 이후의 삭막함을 그들의 도움으로 이겨 낸 것 같았다.
이곳에 안착하고 나서도 가끔, 채팅 창을 떠올리며 피식하곤 했다.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였는데, 이제는 가끔 그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홀로그램 너머의 세상.
시청자가 수십만 명이라면 그 홀로그램 너머에 수십만 개의 생각이 있는 것이고 자신의 영상을 본 이가 수백, 수천만 명이라면 그만큼 많은 삶이 자신을 본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경험이었지만, 힘든 점도 분명 있었다.
통각 기능을 최대로 하고 활동했기에 실제로 고통을 느낄 때도 많았고 종말에서 일어날 법한 온갖 해괴한 일들도 겪었다.
분명, 이런 일들이 있을 거라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참, 기적적으로 돌아왔다 싶었다.
‘다시…….’
다시 스트리머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기를 쓰고 신아름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는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녀의 옆에 있을 생각이었다.
특히, 데자뷰의 게임은 위험했다.
그들이 만든 게임은 현실에 영향을 줬다.
이제 몸이 회복되었으니 그런 위험한 게임에 휘말릴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띠리릭.
‘응?’
자신에게 연락이 올 사람은 신아름을 제외하고는 없을 텐데.
스마트폰을 확인한 성진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그가 싸늘한 시선으로 메시지를 훑었다.
-안녕하세요! 최성진 님!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저희 한 번 봬야죠? ㅋㅋ 아 참, 제가 누구냐면…….
성진이 눈을 감았다.
-당신과 계약한 사람입니다.
데자뷰였다.
***
약속 날짜는 금요일.
어느새 그날이 다가왔다.
여느 때보다 긴장한 성진이 데자뷰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가 조금 이상했다.
성진의 집 근처가 아닌 신아름의 회사 근처였다.
기분이 이상해진 성진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한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
“…….”
누군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손을 든 것은 건장한 남자였는데 성진은 저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았다.
‘병상…….’
그가 누워 있던 병상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꼭,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던 제안을 한 목소리.
-계약 성립입니다. 당신은 이제 종말에 떨어질 겁니다. 살아남으세요. 그리고 그 끝을 보세요.
“……당신입니까?”
“어…… 질문이 정확히 뭐죠?”
“당신이 나에게 제안을 했던 그 남자입니까?”
“물론입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옆에 얘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의 옆에는 빙수를 무지막지하게 퍼먹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와 복색은 비슷했고 묘하게 매력이 있는 외모였다.
“오랜만…….”
“……무슨 말씀이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진은 여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제게 볼일이 남은 겁니까?”
“하하, 왜 그렇게 급하십니까. 누가 안 잡아갑니다. 얘기 천천히 나누시죠.”
“계약은…… 계약은 끝난 거 아닙니까?”
성진의 물음에 데자뷰의 직원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성진에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계약 전에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성진은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는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저자가 했던 말이 있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마음에 걸리는 말이 떠올랐다.
-만에 하나라도 최성진 씨께서 게임을 클리어할 시에는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게임을 클리어할 시…….’
남자는 음흉하게 웃었다.
“아…… 정말 사회인으로서 계약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을 싫어하거든요. 혹시 최성진 씨께서는 그런 분입니까?”
“……설마, 게임을 클리어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응? 이상하다. 분명 종말 이후를 플레이하는 한국의 모든 유저에게 발송했을 텐데요?”
사과문과 함께 서버를 잠정 폐쇄한다는 내용.
성진은 그것을 근거로 게임이 끝났다고 판단했었다.
“받았습니다.”
“점검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고, 서버는 다시 열릴 계획입니다.”
“…….”
“와아아! 정말 기쁜 소식 아닌가요?”
남자가 옆에 앉은 여인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풉!”
빙수를 퍼먹던 여인이 충격으로 빙수를 뱉고 기계적으로 박수쳤다.
짝짝짝짝.
“놀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최성진 씨, 그렇게 적대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남자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 모습이 소름 끼쳤다.
“그거야, 최성진 씨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저희와 대화할 수준까지 회복이 된 것을 보면…….”
“…….”
맞는 말이었다.
거동도 못 하고 속으로 피눈물 흘리는 나날을 보내던 성진이 이렇게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은 데자뷰의 덕이었다.
“당신들…… 정체가 뭡니까?”
“하하하! 이제야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군요. 글쎄요, 지금의 저희를 무엇이라 표현할지가…….”
“친구.”
“음? 아, 그렇지. 그런데 지금도 친구가 맞을까?”
“그건 모르겠는데.”
옆에 앉은 여인과 뜻 모를 대화를 나눈 남자는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단, 저는 비라고 하시면 되고 옆에 얘는 송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송이?”
“송.”
“알겠습니다.”
데자뷰가 직접 찾아왔으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성진은 그 이유를 물었다.
“왜 저를 다시 찾은 겁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다시 게임에 접속해야 하더라도 서버가 열린 후에 찾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
송이 몰랐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가 그녀를 툭 건드리고 말했다.
“계약에 대해서 재차 설명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고, 사실 오늘 찾은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성진 씨. 이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말씀하세요.”
비는 손가락 3개를 나란히 폈다.
손가락이 참 길었다.
“자,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사람. 둘째, 시스템에 순응하되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 셋째, 시스템을 거부하기 위해 맞서는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최성진 씨는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첫 번째 타입일 것이다.
시스템 자체를 개인이 바꾸기엔 너무도 힘드니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모르겠습니다…….”
“음…… 하기야, 저도 당장에 저렇게 놓고만 보면 선택하기 어려울 수 있겠네요. 그래도 재밌는 말을 한 가지 해 드릴까요?”
“……재밌는 얘기?”
“네, 들으시면 나중에 생각날지도 모릅니다.”
“…….”
비의 표정이 사라졌다.
“당신은 세 번째 타입입니다. 시스템을 거부하기 위해 맞서는 사람.”
“그걸 당신이 어떻게 단정 짓는 겁니까?”
“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죠. 최성진 씨, 최근에 어떤 이가 주변에서 기웃거리지 않습니까?”
“주변…… 아!”
“역시! 혹시 아수라 백작처럼 특이한 모습이거나…….”
“맞습니다.”
“……송, 역시 곧 때가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찾아오길 잘했네.”
성진의 앞에서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눴고 비가 성진에게 이어서 얘기했다.
“그 여인은 헬이라는 여잡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 같았어요.”
“네, 실제로 봤으니까요.”
“……스칸다?”
“뭐, 스칸다도 포함해서. 아무튼, 저희가 만든 게임이나 저희의 정체는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것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리죠.”
“…….”
“첫째, 곧 헬이 당신에게 접근할 겁니다. 그리고 구구절절 말을 풀어놓을 텐데, 전부 믿진 마십시오.”
“전부 믿지 말라니?”
“일단은 아군인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과거에는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녀가 결백하든 결백하지 않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죠.”
대화를 나누고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성진은 누군가를 함부로 믿지 않았으니까.
“두 번째, 당신은 마지막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종말 이후에 들어가게 되면…….”
“그거.”
“그 선택을…… 네?”
“그거 꼭…… 들어가야 합니까?”
성진의 말에 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을…….”
“이제 몸도 회복되었고, 아름이 곁을 떠나기 싫어요.”
“…….”
“다시는……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최성진 씨.”
“알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거. 그렇다면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말씀하세요.”
성진은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를 상대에게 던졌다.
“종말 이후에서 제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죽는…… 거죠?”
“하아…….”
송이 한숨 쉬는 비에게 말했다.
“비, 그냥 다 얘기할까?”
“그렇게 되면 저편에서도 기억이 돌아올 거야. 함부로 오픈해서는 안 돼. 모든 게 준비되었을 때 알아야 해. 그래야만 이길 수 있어.”
“알지만……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잖아.”
비가 머리를 벅벅 긁다가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굵은 목이 보였다.
“이봐요, 최성진 씨. 아니, 최성진. 알아, 겁먹었지?”
겁먹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지?”
“나는 그냥 아름이와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이봐, 평범한 행복? 푸흐흡.”
“……뭐가 웃기죠?”
“그 평범한 행복을 얻기 위해…… 아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말할 게 아니지. 당신, 돌아와서 몸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진 적 없어?”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연하게 행동했다.
정상인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그래서 다가오는 먹구름을 모르는 척했다.
“억지로 운명을 거부해 봐야 소용없어. 그 힘도 결국 필요에 의해 주어진 거니까.”
“…….”
“당신은 결국 운명을 받아들일 거야.”
비와 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다가올 운명은, 당신이 그토록 애쓰며 뒤튼 운명이니까. 당신이 준비한 운명을 거부해서야 쓰나. 아무튼, 우리는 이만 가지. 또 봐. 연락할게.”
비가 조소하며 문을 열었다.
성진의 귀에 그의 혼잣말이 들렸다.
“비가…… 오겠군.”
딸랑.
성진은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아까부터 몸이 으스스한 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씨가 왜 이렇게 꿀꿀하지?”
새로 편성이 예정된 조직에 미리 배정된 미스 정이었다.
현재는 기관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 아무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와 성진의 눈이 마주쳤다.
***
그 시각, 신아름은 회사에서 팀원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아름 씨, 남자친구 무슨 일 해?”
“제 남자친구 얘기가 업무와 무슨…….”
“아니 업무도 업무인데 팀원들끼리 교류도 못 하나? 사람이 왜 이렇게 삐딱해?”
“……군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역하고 쉬고 있어요.”
“그럼 지금은 아름 씨가 부양하는 거야? 남자친구도 너무하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드는 팀원.
팀장의 꿀을 받아먹으면서 그가 좋아할 말들만 골라 했다.
하지만, 어쩐지 팀장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팀원에게 호응해 주지 않았다.
“아니 뭐, 남이야 먹여 살리든 말든 뭔 상관이래.”
“대리님…….”
“아름 씨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실래요?”
“아니, 나는 그냥 걱정돼서…….”
“걱정은 제발 본인 노후나 걱정하실래요? 로또 되셨어요? 건물 있어요?”
“…….”
“일합시다, 일!”
대리님에게 엄지를 몰래 치켜세운 신아름은 미처 처리 못한 업무를 마저 보았다.
삐이.
삐이.
사무 공간에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스마트폰에서 난 소리였다.
보통 동시에 스마트폰이 울리는 경우는 잘 없었다.
단톡방에 누군가 메시지를 올려도 무음으로 처리되곤 했으니까.
역시나, 재난 문자였다.
“음, 미세먼지인가?”
“미세먼지 때문에 경보가 울리나요?”
“아니면 서울 한복판에 재난 문자가…… 이게 뭐야?”
-[게안부]오늘 18시 서울 게이트 긴급 경보, 야외 활동 자제, 항시 도주로를 확보하시고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재난 회피 유의 바랍니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긴급 경보? 게이트 안전 본부 새끼들 세금 받아 처먹고 이게 무슨 헛소리야?”
이제껏, 게이트가 서울에 발생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부가 한참 전부터 예측하여 사상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팀원들은 서둘러 옷을 챙겼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퇴근 시간이기도 했고 기분이 꺼림칙해진 상황에서 야근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이, 일단은 퇴근들 하자고.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 어디에 발생하는지도 고지를 안 해 주니 알아서 피하라는 소리겠지.”
“이거 불안해서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겠네요. 애들 학원 선생님한테 일단 전화 좀…….”
드드드.
“어?”
건물 전체가 잠시 진동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줄 안 사람들은 재빨리 책상 밑으로 숨었다가 진동이 멎자 바로 일어섰다.
“뭐야…… 지진?”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두두두두.
마치 소떼가 질주하듯이 어마어마한 소음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게, 게이트! 7층에 게이트가…….”
따르르릉.
소화전의 경보음이 울리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아비규환으로 빠져나갔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게이트.
그렇다는 얘기는 저급의 게이트란 소리였다.
하지만, 저급의 게이트도 이렇게 샐러리맨이 가득한 직장에서 아무 대비 없이 맞이한다면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이이잉.
서둘러 빠져나가려던 팀원들이 도중에 멈췄다.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비상구로 향하는 길목에, 흐릿한 형상이 생성되더니 뭔가가 튀어나왔다.
“여, 여기도…….”
“어, 어떡해요!”
“계단! 계단으로 어떻게든…….”
팀장의 딸랑이와 한 남자 사원이 균열이 생성된 곳을 빠르게 지나치려 했다.
아직, 몬스터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턱.
턱.
“어?”
“어…… 어?”
콰지직!
꾸직.
머리 두 개가 수박 으깨지듯이 부서졌다.
게이트에서 튀어 나온 새빨간 몬스터의 붉은 두 팔이 저지른 일이다.
“꺄아아아!”
“으, 으으으.”
이곳은 5층.
구조가 큼직해 일반 5층보다 높이가 높았다.
‘어, 어떡해야 해.’
다른 부서는 오늘 일이 있어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즉, 5층에는 신아름, 대리, 팀장 3명만 존재했다.
방금까지는 5명이었지만. 다른 둘은 머리가 터졌으니 굳이 셀 필요 없을 것이다.
“계단으로 못 가요!”
“무, 문 잠그고 구조를 기다리면…….”
“언제 올 줄 알고!”
“이, 일단 구석으로 가요! 아직 우리를 못 봤으니까 그냥 내려갈 수도 있어요!”
신아름의 말에 서둘러 셋이 내달렸다.
끄아아아아!
몬스터의 괴성이 온몸을 경직시켰다.
아무래도 게이트를 넘어온 것 같았다.
“여기로! 여기에…….”
문 두 개가 연이어 보였다.
가장 구석진 장소로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신아름을 밀쳐 첫 번째 문으로 집어넣었다.
“어?”
철퍽.
“아야…….”
“아름 씨, 미안해…….”
“팀장……님? 대리님?”
신아름은 두 사람이 자신을 첫 번째 방에 내팽개친 이유가 궁금했다.
유리문 너머로 미안한 기색을 하고 옆방으로 가는 대리님의 얼굴이 보였다.
‘아…….’
이제 알았다.
그녀도 그 때문에 이곳을 지나치려 했으니까.
‘완강기…….’
옆방에는 완강기가 있었다.
한 명씩 지상을 디딜 수 있게 만든 완강기가.
옆방만 완강기 설치를 위해 구조가 특이했다.
다른 곳은 통유리였지만 옆방은 달랐다.
‘그런데 나는 왜…… 설마?’
신아름은 입술을 깨물었다.
완강기는 한 명씩 내려가도록 설계된 도구다.
동시에 여러 명이 내려갈 수는 없으니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저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던져 놓은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은 통유리.
부웅.
탕.
단단한 유리는 신아름이 책상을 있는 힘껏 던져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쿠직.
쿠직.
뭔가가 방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아름은 반쯤 미쳐 있었다.
사람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을 어디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동료들에게도 버림받았으니.
억울해서 눈물이 흘렀다.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이 화장을 흘러내리게 했다.
“……아!”
“……생각해요?”
옆방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싸우는 것 같았다.
아마도 누가 먼저 완강기를 탈지 정하지 못한 건지도.
신아름은 창가에 붙어 무릎을 안았다.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흑…… 흐윽…… 가! 나한테 오지 마…… 가라고…….”
쿠직.
크워어어어.
붉은 몬스터가 문 너머로 보였다.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몬스터는 충혈된 눈으로 두리번거리다 문 앞을 지나쳤다.
“……어?”
신아름이 화들짝 놀랐다.
몬스터가 옆방으로 건너갔다.
“뭐, 뭐야!”
“꺄아아아아아!”
“으아악!”
콰직!
콰아앙!
반항하는 소리와 뭔가가 찢어지고 터지는 소리.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곧 조용해졌다.
아마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방금은 운이 좋았지만, 그녀를 놓칠 몬스터가 아니었다.
쿠직.
쿠직.
피에 젖은 발자국이 찍히며 몬스터가 옆방에서 나왔다.
크워어어.
몬스터는 이제, 유리문 너머로 신아름을 보고 있었다.
“흑…… 흐윽…….”
그녀는 지금 성진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성진이 무엇을 해 줄 수는 없겠지만, 배웅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뚜우.
뚜우.
“왜, 왜 안 받아…… 나 죽는단 말이야, 오빠…… 흑…… 흐윽…….”
쿵!
쿠웅!
이상한 소리와 진동이 들렸다.
“어?”
쿵!
쿵!
누군가, 코너 쪽 난간에 매달려 주먹으로 강화유리를 치고 있었다.
쿵!
쿵!
성진이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주먹이 찢어지든 부서지든 개의치 않고 유리를 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곳은 5층인데,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
신아름은 잡다한 것들은 전부 잊었다.
쨍그랑.
몬스터가 유리문을 부쉈다.
“오빠, 괜찮아……. 보지 마…….”
쿵!
쿵!
사람이 저 유리를 부술 순 없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진은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기에, 변화하기를 거부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집에 신아름과 함께 지내는 것을 상상하며.
하지만, 소나기는 피할 수 없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집은, 평범한 행복을 담기엔 부족했으니까.
그는 선택해야 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언젠가 그들을 위한 안락하고 평화로운 공간을 발견하기까지, 그는 머무를 수 없었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성진은 종이로 지어진 집을 버리고 그녀의 비를 막아 줄 우산이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다시 원점이다.
“으아아아아!”
성진의 몸이 비명을 질렀다.
줄곧 막아 왔던 둑이 터지듯이 몸에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넘쳐흘렀다.
그의 두 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콰르릉!
쩌엉!
성진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주먹을 내뻗자, 강화유리가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성진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신아름은 아직도 스마트폰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오, 오빠…… 어떻게…… 구해 줘……. 흑…….”
성진이 신아름에게 말했다.
“아름아, 울지 마. 무서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