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미로의 유적 스트리밍 연결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고 했다.
데자뷰 측에서는 명확한 답변이 없었고 근시일 내로 해결하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왕이나가 커뮤니티로 초모에게 연락을 보내 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시청자들은 일단 로그아웃을 하고 조정을 한 후에 다시 공략을 진행하는 게 맞지 않냐고 물었지만, 왕이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상대가 게임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왕이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초모의 공략을 보고 있었지만, 초모의 상황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로그아웃하고 왕이나에게 연락을 하는 방법은 성진도 생각한 방법이었다.
그와 송하린이 이 방법을 눈치챈 이유는 다름 아닌 심대형과 이선익이 로그아웃을 시도해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혹시 번인이 아닌 진짜 심대형과 이선익일지 모른다며 로그아웃을 시도했었다.
결과는 반응 없음.
상태 창조차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가 번인임을 확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씁쓸해진 성진과 송하린이 그 모습을 보다가 퍼뜩 방송을 떠올리고 같은 방법으로 로그아웃을 하려 했다.
-상황이 혼잡하여 일시적인 장애가 발생하였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송하린은 상황을 고려해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하기는 했다.
그녀는 성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형님, 로그아웃이 안 됩니다.”
“……저도요. 무슨 일일까요?”
“스칸다 초기에는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긴 했습니다. 어차피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찝찝하긴 합니다.”
“메시지를 보니 조만간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그럼, 명색이 풀다이버인데 괜히 이런 걸로 호들갑 떨지 말고, 일단 유적 공략을 마무리하고 생각합시다.”
“네.”
방송 채널과의 연결이 끊긴 상황에서 로그아웃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아마 서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송하린이 과거에는 이러다 시간이 좀 지나서 복구가 되었다고 말하니 성진도 애써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냈다.
그들은 지금 다른 문제들이 산적해 있으니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이것이, 왕이나와 음탕의 방송이 쌍방향 소통에서 단방향 송출로 바뀐 이유였다.
***
혹시나 하는 기대와 과거의 잔인한 향수가 함께했던 시간이 끝이 났다.
시초의 유적 공략이 예상보다 길어진 탓에,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간 좋은 친구들.
김상혁은 끊었던 담배를 태웠다.
담배를 피운 지 오래되어 담배를 쥔 그의 손이 꽤 어색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지금 환영을 보고 있었다.
탁!
꽁초가 무언가에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병원 난간에 기대고 있던 그가 자연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다크서클.
잠을 설친 그의 눈은 담배 연기로 만들어진 누군가를 보았다.
-오에 아아!
몸에 나빠!
“후우우…… 끊을게.”
-아오이아!
약속이야!
이선익은 새끼손가락이 불쑥 들이밀었다.
김상혁은 가만히 그 새끼손가락을 바라봤는데, 정말 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약속하…….”
김상혁의 새끼손가락은 이선익의 새끼손가락과 만나지 못하고 쓸쓸히 허공을 스쳤다.
그는 일순간 꿈에서 깨어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선익의 형상이 담배 연기로 흩어졌다.
오한이 든 그는 몸을 쓰다듬으며 꽁초를 발로 비볐다.
담배는 아무래도 자신과 안 맞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회사에 사정을 설명해, 일정이 끝나도 바로 복귀하지 않았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괜히 나갔어.”
자신이 잃은 친구들의 흔적을 마주하기 위해 나갔던 방송인데, 지금 그는 방송에 나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모되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기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져서 그의 심장을 마구 헤집었다.
추억은 아팠다.
현재가 괴로울수록 기뻤던 기억들은 도리어 칼날이 되어 더 강한 통증을 불러왔다.
친구들이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마, 꽤 오랫동안 슬퍼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그 정도가 심해 일상생활도 버거웠다.
그가 지금 와 있는 곳은 데자뷰가 이선익과 심대형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는 병원이었다.
데자뷰 산하의 병원은 아니었지만, 매년 큰 금액이 오가는 거래를 하는 모양이었다.
당시, 사고가 났을 때 데자뷰 직원에게 직접 들었던 내용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때 만났던 직원도 조금 이상했었다.
분명, 이상한 말을 했었다.
-힘든 시간이 될 겁니다. 하지만, 분명 친구분들을 다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김상혁은 직원이 좋은 친구들의 앞날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것 같아, 갖은 욕을 하며 그를 몰아 붙였다.
사실,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그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죄악감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결국엔 그것도 착각이었지만.
드륵.
“어?”
심대형과 이선익은 함께 큰 병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과는 부딪히지 않는 큰 병실.
아마 VVIP들이 머무는 병실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김상혁은 친구들이 어차피 캡슐 안에 갇혀서 깨어나지 못하는데 캡슐이 큰 방에 있다고 달라지는 게 뭐냐고 물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달라지는 건 조금 있었다.
큰 방이 쓸쓸해서 그가 친구들을 더 자주 찾아오게 되고, 다른 환자들과 부딪히지 않기에 슬픔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 되었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누군가 방문했을 때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크고 쓸쓸한 병실은, 누군가 찾았을 때 그 쓸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지야…….”
“……상혁이구나.”
긴 머리의 송예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김상혁의 말에 대꾸했다.
학기 중이었을 텐데 어째서 돌아왔는지 김상혁은 잠시 답을 찾지 못했다.
“휴학했어.”
“왜?”
“그냥, 안 돼?”
“아니.”
김상혁은 이번 방송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는 송예지에게 연락했었다.
들려온 대답은 돌아오기 조금 어렵다는 대답.
사실, 송예지와 좋은 친구들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조금 소원해졌다.
그녀가 좋은 친구들과의 추억을 질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좋은 친구들을 너무도 사랑했고 상실의 반동은 그 사랑에 비례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유학을 더는 늦출 수 없자 도망치듯 출국했었다.
김상혁은 그 이후로 그녀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짧았던 머리는 어느새 길게 자라 있었다.
한 번도 자르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돌아온 거야?”
“……비행기 타고, 쓩.”
어설픈 농담에 김상혁이 피식거리며 다가갔다.
“본 거야?”
“방송?”
“응.”
“당연히 봤지.”
하아.
김상혁은 낮은 한숨을 뿜었다.
방송을 본 그도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는데, 송예지는 어떠했을까.
옆에서 살펴본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번인…… 맞아?”
“아마도.”
“확실히 말해, 번인…… 맞냐고?”
“나도 몰라. 근데 번인이래.”
송예지는 입술을 깨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좁은 그녀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김상혁은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녀를 꼬옥 껴안아 달래 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캡슐에 누워 있는 심대형이었다.
심대형과 송예지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좋은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번인일 수가 있어? 그렇게…… 그렇게 활기찬 모습이…….”
“나도 이해가 안 가지만, 어쩌겠어.”
“우리가 했던 말들이나 함께했던 것들 다 기억하잖아! 그게 어떻게…… 그게 어떻게…….”
“예지야.”
“그게 어떻게 가짜가 될 수 있냐고!”
“예지야!”
송예지는 흥분해서 목 주변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핏줄이 선 얼굴로 캡슐을 노려보다가 그 안에 잠든 친구들을 보았다.
이선익과 심대형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아마 깨어나면 고생을 좀 할 것이다.
그래도 깨어나기만 한다면 춤이라도 출 텐데.
그녀는 선팅이 되지 않은 투명한 강화유리에 눈물을 뚝뚝 쏟았다.
“……일어나. 일어나!”
“예지야, 진정해.”
“일어나라고, 이 새끼야! 이 나쁜 새끼! 이 나쁜 새끼들아!”
쿵쿵대고 유리를 두들기던 그녀는 억눌린 말을 했다.
“나, 다녀올 때까지 기다린다며! 나쁜 새끼! 근데 왜 내가 왜 기다려야 해! 너 거짓말했잖아! 나쁜 새끼야!”
아무래도 송예지와 심대형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미래에 관련된 일이라는 건 송예지의 말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김상혁은 한참이나 그녀를 달래야 했다.
모두의 상실감은 공평하지 않았다.
누구에겐 더 크고, 누구에겐 그보다 더 컸다.
이들에게 작은 상실 따윈 없었다.
***
킁킁.
성진의 예리한 감각에도 큰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코를 킁킁거리는 건 베어였다.
그의 특이한 행동에 성진이 물었다.
“무슨 냄새를 맡는 겁니까?”
“제 감각 중 이 후각이 가장 예민합니다. 바람이 통하는 곳은 어딘지, 모래의 냄새가 가장 짙은 곳은 어딘지 뭐 그런 것쯤은 이 코만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죠.”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죠?”
“그건 모릅니다.”
-아, 그건 몰랐네. ㅋㅋㅋ
-방장! 채팅 좀 읽어 줘. ㅠㅠ
-다 아는데 고것만 몰랐고요. ㅋㅋ
베어가 난감한 듯이 팔짱을 끼고 머뭇거렸다.
“흐음…… 아무래도 가장 깊은 장소에 떨어진 것 같은데, 곤란하군요. 올라가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그때, 이선익이 여러 방향으로 나 있는 문 중 하나를 퉁퉁 두들겼다.
“어이!”
“여기라네요.”
“왜죠?”
“재민이가 컨디션이 안 좋을 땐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선익이 감을 따라서 가면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았어요. 아마 맞을 걸요?”
성진과 송하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선익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베어가 다른 방법이 없자, 이선익이 말한 문의 구조를 살펴 물의 추기경에게 열도록 했다.
물의 추기경이 정신을 집중해 어렵사리 문을 열었다.
촤르륵.
그의 소매로 다시 물이 되돌아왔다.
“여기는…….”
“아무래도 맞게 찾은 것 같군요.”
통로는 직선으로 쭉 길게 뻗어 있었다.
베어가 눈을 빛내며 흔적을 짚었다.
“보시면 먼지는 수북하게 쌓였는데, 지나간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보통 왕릉에서 이런 경우에는 이런 판단을 내립니다.”
“어떤 판단을요?”
“만들어 놓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길은 보통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덤의 심장부로 이어지는 길이죠.”
“비약일 수도 있지만, 타당한 생각이기도 하네요. 가 볼까요?”
“그래도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이 길은 제가 먼저 들어가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나머지 인원을 밖에 세워 뒀던 베어가 가지고 들어간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신호에 맞춰 안으로 들어섰다.
앞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작은 전투가 발생한 것 같았다.
빠르게 다가가자, 베어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낌새가 이상해서 조심했는데도 당할 뻔했습니다.”
그의 가죽 장화에서 피가 흥건히 뿜어 나왔다.
성진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피가 멎었다.
이제는 그 혈흔만이 방금까지 이곳에 상처가 있었다고 증명했다.
심대형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엄청 신비한 힘이네요. 신성력이 어느 정도기에.”
“다치는 것 정도는 금방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함정은 없습니까?”
“이곳에는 딱히 함정은 없는 것 같고, 모래 병사의 습격만 조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앞뒤로만 길게 이어진 길이라 도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크게 곤란할 우려가 있습니다.”
스르륵.
쿠우웅.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판단하기로, 방금 들어온 문이 닫힌 것 같았다.
베어가 한숨 쉬었다.
“이렇게 말이죠.”
크으에에에.
모래의 병사가 앞뒤로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 수로 보아 이 길을 지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일행의 진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베어가 물과 심대형을 보호하고 제일 앞에는 이선익이, 제일 뒤에는 송하린이 자리했다.
성진은 슬쩍 상황을 보다 앞으로 나왔다.
사아아악.
밟고 있던 모래의 높이가 아까보다 올라왔다.
그 말은, 가만히 있으면 모래에 파묻혀 죽게 된다는 소리.
성진의 안색이 일변하고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심대형의 영창이 끝났다.
성진이 몸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임이 가벼워지고 몸 근처로 순풍이 불었다.
“속도로 보아서는 5분 정도면 입에 모래가 들어가겠네요.”
“아아!”
가자!
이선익이 자세를 낮추고 안면갑까지 내렸다.
그가 메이스를 휘둘러 내달리자, 근처에서 틈을 살피던 모래 병사들이 퍽퍽하며 쓰러졌다.
이선익의 갑옷은 금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신의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그 힘이 강해진다고 그가 간단히 말했었는데, 과연 금빛을 두른 그의 돌격은 기사의 마상 돌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분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하는 병사들은 성진과 송하린이 깔끔하게 처치했고 물은 지나온 길을 질척이게 만들어 진흙으로 적들을 둔해지게 했다.
파아아앙!
파아앙!
심대형의 회오리 마법이 모래 병사들의 머리를 잘게 쪼겠다.
베어가 갑자기 소리쳤다.
“이런! 연쇄 기관이었군요! 천장 쪽의 기관을 당겨야 합니다!”
“좋은 소식이구려!”
“연쇄 기관이라 계속 이런 기관을 찾아서 당겨야 합니다!”
“나쁜 소식이구려!”
끼기긱.
확실히 그들이 지나는 길목마다 모래가 쌓였지만, 기관을 당길수록 그 속도는 점차 둔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직 이 통로의 출구는 보이지도 않는데 모래는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이거 모래 병사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데, 문제는 모래요! 발이 빠져 뛰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는군!”
송하린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심대형의 주문도 완성되었다.
바람이 앞쪽에서 거세게 불어와 뒤편으로 모래를 날려 버렸다.
이선익이 굳건히 버티고 서 있고 나머지가 그를 중심으로 바람을 버텼다.
한차례 모래를 뒤로 밀어낸 그들은 다시 앞으로 달렸다.
나중에는 모래가 너무 쌓여 헤엄치다시피 달려야 했다.
성진이 인상을 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늘의 호흡을 사용하자 그의 일행을 포함한 주변에 모래가 모두 물러갔고 병사들의 공격은 그 방원형 공간에 닿자마자 모래로 변해 사라졌다.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출구다! 출구요!”
“기관은?”
“시간이 없어! 문을 부숴야 합니다!”
“아 오애!”
난 못해!
“제가 하죠!”
물의 추기경이 거대한 물 구슬 2개를 떠오르게 했다.
찰나에 두 구슬 중 하나가 창처럼 변해 앞으로 쏘아졌다.
콰직!
창이 문에 박히자 문 전체에 금이 갔지만, 여전히 문은 자리를 지켰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른 구슬 하나를 그대로 쏘아 보냈다.
구슬은 문에 박혔던 창의 창대를 크게 후려쳤고 그 충격으로 석문이 박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일행은 모래 먼지와 함께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그들이 빠져나오자 통로는 모래로 빽빽하게 차오르더니 더는 미동이 없었다.
베어가 바닥에 누운 채로 높은 천장을 보며 얘기했다.
그는 지쳤는지 계속 헐떡였다.
“하아…… 하아…… 아무래도 제대로 온 것 같군요.”
“아직 지하긴 한데…… 이상한 힘이 느껴지네요.”
베어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벽을 가리켰다.
“저 벽이 보이십니까?”
“보입니다.”
“문자들을 조합하면 발동하는 구조 같네요. 아마 저걸 만지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문자를 아십니까?”
“종류가 다양하지 않으니 몇 번 만지면 규칙이야 금세 알게 되겠죠.”
“실패하면?”
“벽은 잘 타십니까?”
“알아들었소.”
송하린이 주변 경관을 살피며 재잘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저거 보십시오, 형님. 다리 같지 않습니까?”
“……정말이네요.”
“제 생각으로는 여기 벽면의 기관을 작동시켜 가야 하는 곳이 저곳이라고 여겨지는데, 아마 다리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까지 이어졌을 거고요.”
“그런 것 같네요.”
일행도 그 말에 동의했다.
“자, 어디 보자…… 너는 여기에…….”
베어가 문자를 맞추고 있는 동안 성진은 심대형을 살폈다.
그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왜 그러시죠?”
“그냥요. 제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면 초모 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번인에게 남은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심대형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선익이 툭하고 심대형의 등을 쳤다.
“왜.”
“으아.”
“그냥?”
심대형은 피식 웃고 팔짱을 풀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좋은 친구들을 여기까지 이끈 원동력이었다.
끼긱.
“됐다! 됐습니다!”
“잘했소!”
벽면의 문자가 황홀하게 빛나더니 큰 소음을 만들어 냈다.
쿠구구구궁.
“물러나십시오! 뭔가 발동했습니다!”
쿵!
쿠웅!
“저건…….”
벽이 일사불란하게 해체되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일행의 안색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계단이네!”
“계단입니다!”
베어는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별다른 함정은 없어 보였다.
까마득한 높이까지 쉼 없이 올라간 그들은, 마침내 다리에 다다랐다.
“대체 이 다리 끝에 뭐가 있을까요?”
“다리 밑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떨어지면 죽는다는 건 확실하네요.”
“이제 곧 끝날 겁니다. 균열주가 나타나면 쓰러트리고 균열을 닫으면 그뿐이겠죠.”
일행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다리를 지났다.
다리는 꽤 길었는데, 가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불쾌한 기운만 더 강해졌다.
다리의 끝에 다 와 갈 때쯤, 뭔가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관이었다.
안은 텅텅 빈 관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일행은 몇 가지 가설만을 내비친 후 앞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랏빛 불꽃이 지펴진 화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곳이 균열이 있는 곳 같습니다.”
“저기! 저기에 균열이 있어요!”
“맙소사…….”
누군가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균열 하나의 힘이 이렇게 커다란 것이면 상황이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균열 하나의 힘이 아니었다.
“3개?”
“균열이 3개야!”
“여, 여기! 여길 좀 봐!”
베어가 소리친 자리엔 사람이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앞으로 뻗은 모습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상대의 입에서 힘겨운 질문이 토해졌다.
창백한 안색의 인물은 눈을 감고 있는지 일행을 전혀 보지 못했다.
베어가 말했다.
“우리는 바스카리와 협회의 임무를 맡아 시초의 유적에 생성된 균열을 닫기 위해 찾은 모험가들입니다. 당신이야말로 누구입니까? 이 외진 곳에, 그리고 이 위험한 곳에 왜 혼자서 와 있는 거죠?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겁니까?”
“그만…… 그만…….”
“네?”
“위험해, 위험하다!”
상대가 다급하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3개의 균열 중 한 곳에서 빛이 번쩍이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저게 뭐야!”
“무슨…….”
“머리잖아?”
균열의 너머에서 이곳에 던져진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앉아서 균열에 손을 뻗고 있던 상대만큼 창백한 머리는 놀랍게도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머리는 상황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메이른 님…… 실패했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지악트!”
그들은 힘을 되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던 지악트와 메이른이였다.
메이른은 짧은 의식을 통해 약간의 힘을 되찾았지만, 그것은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저벅, 저벅.
균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로브를 입고 양쪽 눈이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사람.
성진은 그를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은 칠흑같이 검었다.
“도망! 으, 으아악!”
으직.
지악트의 머리가 균열에서 걸어 나온 자에게 짓밟혔다.
메이른은 모험가들에게 말했다.
“나는 메이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시초의 유적 따위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몰타, 몰타들이 묻힌 곳입니다.”
성진이 그 말을 알아듣고 물었다.
“몰타 제국?”
“제국을 아시는군요! 이미 잊힌 줄 알았건만…… 이곳은 몰타의 역대 황제가 묻힌 곳입니다. 그들이 의식을 되찾기 전에 재빨리 다른 균열을 열어 봉인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군요. 1명이 균열을 넘어왔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몰타를…… 몰타를 막아야 합니다. 단 1명이라도 더 균열을 넘어온다면…… 이번에야말로 스칸다는 먼지로 변할 것입니다.”
균열을 넘어온 몰타의 초대 황제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상관없다는 듯 메이른에게 말했다.
“이미 늦었다.”
“웃기지 마라!”
“……두고 보면 알겠지.”
몰타의 황제가 손을 휘젓자 유적이 진동했다.
드드드드드.
일행은 자세를 잡고 황제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다리 밑을 확인했다.
쿵, 쿵.
수백의 모래 병사가 일어나 작은 균열을 통해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성진 일행을 노리는 것인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몰타의 황제가 말했다.
“모래가 일어나리라.”
쿵, 쿵.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 나왔다.
재빨리 방패를 내세운 이선익이 신음했다.
“크윽…….”
다른 쪽 방향에서 모래의 창이 형성되어 베어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억!”
성진이 그를 재빨리 회복시키자 모래의 창은 사라지고 그의 경갑에는 동그랗게 뚫린 흔적만 남았다.
베어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두려운 듯이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오만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선언했다.
“몰타여, 다시 일어나라.”
그들이 선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