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이민상의 일은 단순하지 않았다.
성진은 정유리가 그의 곁에 온 것도 믿기지 않았다.
메모리 상태로 세종의 소용돌이를 지났건만 어떻게든 넘어 온 모양이다.
최별이 말했다.
“유리 양은 본체 없이 메모리만 넘어왔기에 검에 깃든 게 아닐까요?”
송하린과 성진이 맞장구쳤다.
“아하! 혼만 넘어와서 그렇다는 거로군!”
“그렇죠.”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게 확률이 높겠어요.”
-이제 뭔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겠다.
-데자뷰의 기술력은 외계인들에게서 기인한다!
-그것도 왜 초모한테만?
-닥쳐! 한국 방송이니까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야!
성진은 정유리에 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보고 다른 주제를 언급했다.
“우리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에?”
“이곳까지 오면서 생각하던 종말의 특징이 있습니다.”
“종말의 특징이요?”
최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다가 그녀도 깨우쳤는지 소리쳤다.
“아!”
“네, 부산은 춥고 대구는 병들었고 대전은 야생이었죠.”
“울산도 보니까 불바다가 되어 있더라고요.”
“이렇게만 보아도 종말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는데…….”
“정작 세종은 스칸다로 전이된 것을 제외하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음…… 정말 그렇네요.”
“문제가 또 있소.”
가만히 앉아 있던 송하린이 툭 던진 말에 다들 돌아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이마의 용 각인.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모른단 말이지.”
“그렇죠. 이번에 넘어온 이방인들에게만 있는 각인이니까요.”
“다른 걸 떠나서 민상이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스칸다에 있으면 우리가 찾았겠죠. 어디 아무도 모르는 외딴 섬에 가 있는 게 아니라면 민상 씨도 우리를 찾았을 거고요.”
곰곰이 생각하던 일행은 결국 답이 없음을 알았다.
“민상이를 찾고 용 각인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 더 있어요.”
“하나 더?”
“에어리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요. 여태 모든 에어리어의 해방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잖아요.”
“그렇지. 옳은 말이오.”
얘기를 마친 성진 일행이 모닥불가로 다가가자 타놀드가 물었다.
“크, 크흠…… 얘기는 끝마쳤는가?”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이방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 그보다…….”
“네?”
“거, 검. 스칸다 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여신 스칸다가 직접 만든 검, 또한 검의 이름도 스칸다였다.
그러니 당연히 검의 모습을 빌려 말을 하는 것도 스칸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성진이 검을 슬쩍 내밀자 음성이 흘러나왔다.
“날 숭배하십시오, 작은 난쟁이들아.”
“오오오! 검의 신이시여!”
“검께서 우리를 굽어보신다!”
“크흑…… 내가 망치를 잡은 세월은 헛되지 않았어!”
“산의 옥좌에 계신 형님께서 우리를 부러워하실 거요!”
송하린과 최별이 기가 막히는 듯 코웃음 치는 사이, 정유리의 말이 성진의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이것 보십시오.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나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나는 혹시 신입니까?
***
새까맣다.
사방에 식별되는 물체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이럴 땐 보통 손을 내밀어 주위를 더듬곤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그랬다.
하지만, 흰 천을 뒤집어 쓴 사내는 손을 뻗지도 시야를 더듬지도 않았다.
사내는 마치 길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둠 속을 나아갔다.
“네시온도, 바훔도 머저리다. 한낱 필멸자에게 정화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유리온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이고…….”
혼잣말은 두려움을 이겨 내는 데 큰 도움을 주곤 했다.
하지만 남자가 혼잣말을 하는 이유는 그냥 심심해서였다.
그의 성격이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런 습관이 생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그가 관을 짊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을 낳았다.
“고귀한 메이른이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당신을 이 땅에 강림하도록 돕겠습니다.”
고귀한 메이른.
과거, 그 이름을 들은 자는 반드시 죽거나 미쳐 버렸다.
그래서 이제 그 이름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모두 메이른에게 죽거나, 시간에 쓰러졌으니까.
과거에 대붕괴가 있었다.
몰타 제국 최후의 황제가 열어젖혔던 수많은 세계의 균열.
그곳으로 흘러들던 힘이 일시에 끊기자 스칸다는 천지가 뒤집혔다.
메이른과 그것을 짊어진 자는 그 일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메이른의 관을 짊어진 자는 영혼의 대공(大公) 지악트였고, 고귀한 메이른은 4명의 대공이 섬겼던 첫 번째 피였으니까.
두 존재는 그 이름만으로도 스칸다의 존재들을 두려움에 젖게 할 수 있었다.
지악트는 오랜 세월 잠들었다.
그의 주인인 고귀한 메이른은 대붕괴가 있고 나서 계속 잠들어 있었고.
무슨 일인지, 세상이 요동쳤다.
그 흔들림이 지악트를 깨웠다.
아마 다른 시조들도 그 흔들림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메이른의 부활을 위해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야 했다.
한데, 네시온과 바훔이 필멸자에게 소멸당했다는 소식이 지악트에게도 전해졌다.
그럴 리 없다며 소리쳤지만, 그럴 수 있었다.
시조의 힘은 고귀한 메이른의 존재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그에게서 권능을 부여받았지만, 그 힘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고귀한 메이른은 대공 넷을 합한 것보다도 강했으니까.
“메이른 님…… 당신께서 일어나시면 온 세상이 당신을 경배하기 위해 모여들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정해진 이치입니다. 부디, 부디 힘을 내셔야 합니다.”
쿵.
쿠우웅.
석문이 지독한 진동을 만들며 밀려났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몇 가지 단어의 조합으로 여는 것은 가능했다.
흔히, 고대 유적에서 이런 방식으로 열리는 문들이 많았다.
지악트는 지금 메이른의 유해를 짊어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장소에 와 있었다.
과거, 몰타 제국의 심장이었던 곳.
그러나 토사에 파묻혀 아무도 찾지 못한 곳.
오랜 전투로 각인되다시피 한 그곳의 위치는 시조의 기억으로도 어렵사리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하군…… 흔적?”
누군가 들고 난 흔적.
자세하게 살펴도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로 작은 흔적이었지만 지악트는 그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최근은 아니군.”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지악트가 멈칫했다.
“이건 또 뭐야?”
닫힌 석문 앞에 두 인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단한 돌처럼 굳어 있었고 지악트에게 해를 입힐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지악트는 그것을 잠깐 보고 지나쳤다.
지악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이곳에 넘쳤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는 유적의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함정과 최소한의 방비들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뭔가가 이상했다.
“아까 그 둘이 부순 건가?”
함정은 중간중간 끊어져 있었다.
아마 부수면서 나아가다가 결국 도주를 택한 모양.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지악트는 마지막 석문만을 남겨 두었다.
석문은 굳게 닫힌 채로 암호문을 요구했다.
“빌어먹을…….”
고대의 언어는 지악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지금 화가 난 것은 자신들과 모든 걸 걸고 싸웠던 존재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에 따른 예를 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악트가 고개를 숙였다.
“아투르시만 몰타 도학스, 투르하제 칸카라만.”
영원한 제국 몰타여, 지지 않는 힘이여.
“티오만 케페, 만타이오 주락!”
몰타는 신이다, 또한 전능하다.
“이오사마트 살라무르…….”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날…….
“타만 잠세스.”
모든 게 끝날 것이다.
그그긍.
“역겨운 놈들.”
지악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만, 몰타의 대적자였던 지악트는 그들의 추악함을 알았다.
야만적이고 오만하며 오로지 파괴에 충실한 자들.
그들은 순수한 악이다.
물론, 지금 지악트를 휘두르는 것도 분명 악이었지만, 그들의 악과는 조금 다르다.
몰타의 황제들은 색이 없다.
마치 흑백으로 된 세상에서 태어나 파괴만을 원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용할 가치가 있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시조들만 알았다.
스칸다의 새로운 태동과 함께한 존재는 시조들이 유일했으니까.
지악트는 앞으로 나섰다.
난간이 없는 다리는 발을 헛디디면 추락할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하지만 지악트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곳을 건넜다.
마침내, 부채꼴로 늘어선 관들이 보였다.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곳에 남은 힘을 긁어 고귀한 메이른을 깨울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은 메이른의 것이 될 것이다.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지악트.
긴장한 것인지 이마에 땀이 흘렀다.
‘긴장? 내가?’
영혼의 귀곡성이 유적을 흔들었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영혼들이 부채꼴로 세워져 있는 사람 모양의 관을 두들겼다.
그 속에 잠든 힘을 가져오기 위해.
그때, 메이른의 관이 꿈틀거렸다.
“메이른 님!”
“돼…….”
안에서 비집고 나온 음성은 지악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네? 그게 무슨…….”
“안 돼…… 도망쳐…… 그만…….”
쾅!
서 있던 관들 중 하나의 관에서 검은 손이 뻗어 왔다.
***
바스카리.
신성국가의 총체.
그곳의 힘은 하나로 집중되었다.
사제회가 그 집중된 힘이 모이는 점이었고 경쟁의 장이기도 했다.
집중된 힘을 독식하여 모든 이들을 아래에 두기 위한 경쟁의 장.
바위, 불, 물, 바람, 그림자, 빛, 그리고 꽃.
사제회는 각 교단의 추기경들이 모여 바스카리와 스칸다의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다.
그것도 최근엔 시들해졌지만.
“지겹군.”
바위의 추기경이 툭 던진 말에 불의 추기경이 달려들었다.
“욕심이 없으니 그렇지.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에게 이런 정치판은 따분하기 마련이니까.”
“위록, 당신 얼굴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 너무 따분하게 생겼어.”
“같잖은 도발을.”
“그리고 욕심은 사제라면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욕심에 초연한 사람은 없어. 사제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야. 욕심도 품어야 하는 것이지. 배척해 봐야 적이 될 뿐이야.”
“당신이 입에 담을 만한 말이야. 좋네, 좋아.”
“그만들 하시지. 격 떨어지게.”
이들의 혀에서는 뱀의 독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사제회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고상한 대화가 오고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림자의 추기경과 빛의 추기경은 여성이었고 나머지는 남성이었다.
그림자의 추기경이 말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예요. 이렇게 쓸모없는 말만 나돌 뿐이라니…….”
그녀의 말에 빛의 추기경도 거들었다.
“영광의 빛이 바랬기 때문이죠. 성국이 침몰하고 있습니다.”
“침몰은 무슨! 어림도 없다! 밖을 보시게, 찬란한 빛의 건물들 그리고 웃는 사람들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저들의 웃음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잖아요?”
“이…… 이…….”
“우리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고 나중에는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겠죠.”
물의 추기경이 비웃었다.
“신성력의 고갈은 당연한 것이다. 믿음은 결국 의심을 이길 수 없어. 인간이기 때문이야.”
“신성력의 고갈이 어째서 당연한 거죠? 그건 당신들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웃기는군, 진정한 믿음?”
“믿을 만하니 믿고, 믿어야 하니 믿고 그런 것이잖아요, 당신들의 믿음은?”
“당신은 아니라는 것이오?”
그 순간, 빛의 추기경의 몸에서 광채가 퍼져 나왔다.
“윽…….”
“당연하지! 그대들이 신성력을 헐값에 팔아넘길 때 나는 진정한 믿음을 실천했어요!”
불의 추기경이 한마디 했다.
“진정한 믿음이라…… 무엇을 믿지?”
“그건…….”
“솔직해지라고, 당신도 이제 신을 믿지 않잖아.”
“…….”
“당신이 믿는 건 당신 자신과 신도들이지. 아닌가?”
“……적당히 하세요.”
“믿음은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거야. 한낱 인간 따위가 아니라.”
“……그게 무슨 문제가 되죠?”
“흔들리게 되지. 결국엔 말이야. 그 믿음은 모래성 위에 쌓은 것이니까. 물이 고이면 결국 썩기 마련이야.”
“……당신 생각이에요.”
“흐흐흐…… 신성력의 고갈…… 중요하지. 왜 중요한 줄 알아? 모두에게 닥쳐온 문제기 때문이야.”
“뭐, 뭐요?”
“당신도 알잖아. 당신의 힘도 흔들리고 있어. 모두 몰락하고 있다고, 그것이 빠르던 느리던 말이야.”
“불쾌하군요…….”
“당신도 그걸 느꼈으니 반박하지 않는 거겠지. 뭐, 알아서 하라고.”
바람의 추기경이 탁자를 쳤다.
탕!
“시끄럽고, 모인 건 다름이 아니다.”
“쳇…….”
“그간 외부 활동에 나가 있던 꽃의 교단이 귀환할 것이라고 했다.”
“그치들은 본국에 뭐 하러 기어 들어온대?”
“말을 삼가라, 물이여.”
“말이 그렇잖아.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데.”
“그 말인 즉, 성국이 빈 그릇이라 이거인가?”
“비워진 그릇이겠지. 가득 찼지만, 금세 동이 난.”
바람의 추기경은 다루는 힘과는 달리 경직된 자였다.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그도 그렇군. 좋은 표현이다.”
“애초에 바스카리가 이렇게 땅에 딱 달라붙은 게 무슨 의미겠어?”
“그만, 한탄은 무의미하고 내 시간은 소중하다. 꽃의 교단이 돌아오는 이유를 아는 자가 있는가?”
“뻔하지, 뭐 떨어지는 거 없나 하고.”
“꽃의 사제들은 당신처럼 타락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진정한 성직자라고요.”
“얼씨구, 그럼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번 말해 보시지.”
“그건…….”
빛의 추기경의 말문이 막혔다.
바람의 추기경이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의 추기경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간만에 편을 들어주는군!”
바람의 추기경은 누구의 편을 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사실만을 말했을 뿐.
“그들의 세력은 미비하다. 항간에 이방인들을 기반으로 기존 세력을 흔들어 흡수한다는 얘기도 돌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지?”
“힘이 없기에. 단순히 머릿수만 많다고 성국의 권력이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대외적인 영향력, 또 국민들의 지지, 또한 사제회에서의 신망 등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있지! 그들을 이끌 사람이 없잖아.”
“그렇다. 꽃의 교단이 응당 성국을 이끌 만한 힘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신망이 두터운 일개 교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뭐, 두고 볼 일이고 일단 다른 얘기나 하지.”
그림자의 추기경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두 가지가 남았어요. 첫째, 동부가 혼란을 수습했고 성국을 규탄했어요.”
“움직일 수가 없잖아? 시조든 뭐든 우리의 전력은 흔들리고 있는데.”
“경제적으로도 영향이 있고요.”
“쌓아 놓은 걸로 어떻게든 해 봐야지. 맹과 성국의 관계가 정리된 것은 조금 아쉽군.”
동부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꽤 긴 얘기였기에 피로를 토로했지만, 대응 방식은 정해졌다.
“다음, 지혜의 고리에서 소식이 넘어왔어요.”
“무슨 이야기지? 그 노친네들이.”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움직였다고 하네요. 하나는 서부의 끝자락, 용의 고원 쪽에서요.”
“탄타르빌이 있는 곳이군. 그곳에 용인과 황무지 말고 뭐가 있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군. 넘어가지.”
그림자의 추기경이 다른 위치를 말했다.
“또 한 곳은…… 중부 대륙의 최북단. 이유 없는 사막에서 일어났다고 하네요.”
“대체 이유 없는 사막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거야?”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하니 누군가 지었겠죠. 아무튼…….”
“지혜의 고리 그 늙은이들이 다른 말은 안 갖다 붙였나? 보통 말이 많은 편인데.”
“그게…….”
그림자의 추기경은 망설였다.
그녀가 지금부터 입에 담는 말은 허무맹랑한 소리에 가까운 말이었으니까.
“스칸다의 멸망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균열의 생성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고 균열의 규모도 점차 거대해지고 있다고 하네요.”
“이런…….”
***
난쟁이들과 성진 일행은 별자리 관에 도착했다.
부적 덕분인지, 난쟁이들이 정유리와 신나게 떠드느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추위를 쉽게 이겨 냈다.
“하하하! 검님, 제 수염을 좀 보십시오. 멋들어지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지저분합니다, 나는 자르는 걸 추천합니다.”
“당장 귀환하는 대로 자르겠습니다!”
“스, 스칸다 님. 어떻게 해야 당신 같은 검을 조형할 수 있을까요? 극상의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당신을 벼려 낸 것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오! 허락해 주셨어!”
‘개판인 것 같은데.’
-모두 나를 좋아합니다. 난 특별함을 느낍니다.
성진은 정유리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 우려되었지만, 난쟁이들이 좋아하니 되었다고 넘겼다.
일행이 별자리 관에 도착하자 제닌이 뛰어왔다.
“도, 도착하셨다고 듣자마자 달려왔습니다!”
“제닌 님, 왜 그러시죠? 마침 짐을 풀고 가려 했습니다.”
“그, 그것이…… 제헤르 님이 결국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네?”
“몸이 빠르게 말라가고 계십니다. 신하들이 계속 피를 권했음에도 끝까지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요정들이 제헤르 님의 상태에 충격을 받은 상황입니다.”
“이런…….”
제헤르는 요정의 상징이자 아비였다.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요정 전체에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헐;; 큰일이다
-빨리 가서 용의 피로 CPR!!!!
-아 근데 이거 줘도 되는 거?
-제헤르 : 큭큭큭, 계획대로군. 저놈들을 죽여랏!
-아 개끔찍해.
-ㄹㅇ 이거 간단한 문제아님. 생각해 보셈. 별나무가 거의 양분을 다 뺏어가는 상황이고 용의 피로 회복한다고 쳐도 그 왕관을 다시 쓰면 또 기약 없이 힘을 뺏겨야 하잖아.
-그러네. ㅈㅈ치고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탈주각인데.
-ㅇㅇ 원래 통수는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지.
-당신의 선택은?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이, 이쪽으로!”
-고민조차 없었고요.ㅋㅋ
-초모 저러다 크게 당한다 진짜. 인생 선배가 해 주는 말이야
--꼰-
-아 불안한데…….
-그런 의미에서 제 보증 좀 초모님!
제헤르가 나무로 된 침대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요정들이 그를 빙 둘러싸 흐느끼는 광경이 낯설었다.
“흑…… 흐윽…… 제헤르 님…… 제헤르 님!”
“이렇게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제발, 제발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
나무와 숲이 울고, 요정이 울었다.
성진은 제헤르에게 다가갔다.
제헤르를 둘러싼 인파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지만 제닌이 길을 텄다.
“초모 님이 귀환하셨다! 길을! 어서 길을 내라!”
“물러나! 엘론드의 성자님이 오셨어!”
“오오, 제발…… 제발 제헤르 님을 살려 주세요…….”
성진 일행은 압박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제헤르가 잘못된다면 큰일이었다.
염원이 배신당했을 땐 분노가 되곤 했으니까.
성진이 제헤르의 말라비틀어진 손을 잡았다.
아무 힘이 없던 손이 성진의 손을 쥐었다.
곁에 있던 오란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제, 제헤르 님!”
성진이 그에게 눈총을 보내자 오란이 입을 틀어막았다.
제헤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의 울음소리를 차단한 성진이 그의 입가에 다가갔다.
“찮아……. 난 괜찮아…… 그럴 필요 없네…….”
“피를 마셔야 합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 싫어……. 몰타가 무서워…… 내가 누군가를 해치는 게 싫어…….”
“그럴 일 없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 피는 용의 피입니다.”
“거짓…… 마알…… 날…… 속일 생각…… 하지…….”
성진이 유리병의 뚜껑을 따고 제헤르에게 그것을 마시게 했다.
약하게 저항하던 제헤르가 결국 그 피를 전부 마셨다.
후우웅.
신비로운 일이었다.
우득…… 우드득…….
제헤르의 하얗게 새었던 머리는 검은 흑발이 되었고, 주름은 모두 사라져 팽팽한 피부가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젊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흡혈귀로 돌아가고 있었다.
흐릿했던 눈의 색은 완연한 붉은 색으로 변했고 손톱은 길어졌으며 송곳니는 자라났다.
“제, 제헤르 님!”
“이게 무슨! 너희는 대체, 제헤르 님에게 무슨 짓을!”
“제헤르 님! 괜찮으십니까?”
막강한 힘의 파장.
드드드.
되돌아온 힘에 적응하지 못한 건지 제헤르가 요정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일행과 제헤르에게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오직 오란과 제닌만이 당황한 와중에 침착하게 변명하려 했다.
“아, 아니다! 이것은…….”
“제헤르 님은 아직…….”
제헤르의 입이 열렸다.
“그만…… 되었다. 변명할 필요가 없다.”
“제헤르 님!”
“그 이름도 되었다.”
“…….”
제헤르가 자신의 오래된 이름이 필요 없다고 못 박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요정들아, 이 숲에서 너희와 오랜 세월 함께했다.”
“제헤르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그보다 모습은.”
“나는 시조다. 생명의 대공 유리온이 내 이름이다.”
경악을 금치 못한 요정들이 헛바람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요정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리온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었다.
유리온은 이곳에 자신이 자리 잡은 사연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가 입을 뗄 때마다 요정 중 몇은 실신하거나 ‘그만! 제발 그만!’이라고 말을 하며 듣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
“어째서…….”
“어째서 너희를 속였는지 묻는 것이겠지. 다 말해 주겠다.”
“…….”
“나를 용서하기 힘들겠지…….”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군중에 파묻힌 여성 요정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뭐?”
“나, 아니 우리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어째서…… 어째서 우리를 지킨 것입니까? 당신은…… 시조잖아요.”
유리온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시조이기 전에 유리온이었고…… 너희들의 아비였다.”
“그럼!”
“…….”
“그렇다면! 되, 된 것 아닙니까?”
“……뭐?”
“그럼 된 거 아니냐고요!”
그녀의 말에 요정들이 무언가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것처럼 외쳤다.
“맞아! 우리는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던지는 상관없어요!”
“내가 아는 별나무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가 제헤르이든 유리온이든 나는 좋을 대로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유리온이 침묵했다.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우리를…… 우으…… 우리를 버리지…… 말아…… 으…… 주세요…… 제발.”
유리온인지, 제헤르인지 모를 존재가 삶의 굴레를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별 나무에서 이어진 가시나무 관이었다.
그는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숲의 아이들아, 악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이 있다.”
“……예.”
“그 악이 이곳에 있다. 하지만…… 악은 자신이 싫었다. 그 악을 구원한 것은 너희들이다.”
“예!”
“나는 묻는다. 너희와 같지 않은, 너희와 다른, 그리고 너희를 속인 내가 너희를 안아도 좋단 말이냐?”
마지막 질문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은 가(可)와 부(不)를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더 좋은, 더 옳은 대답을 하기 위함이었다.
군중과 숲이 이야기했다.
“당신이 부디 우리의 아버지이길.”
“온 숲에 바랍니다. 당신만이 우리를 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곁에 서겠습니다.”
“유리온, 이제야 우리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이 필요해요!”
유리온이 가시나무 관을 물끄러미 보다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이 굴레를 쓰겠다. 이번엔…….”
가시나무 관이 그의 이마를 찢고 들어갔다.
유리온은 피가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영원히. 유리온은 너희를 안을 것이다.”
“으아아아아!”
“숲의 아버지시여!”
유리온이 가시나무 관을 쓰자, 숲의 녹음이 더욱 우거졌다.
북부의 찬바람을 몰아내고, 새 나무가 자라났다.
성진의 시나리오가 완료되었다.
-chapter 6-10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chapter 6-10을 클리어합니다.
-지혜의 샘을 마실 자격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