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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31화 (131/222)

# 131

131화

송하린의 심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빙산에서 홀로 외부 자극을 관조했다.

그녀는 그것이 싫었다.

그것이 지독하게도 외롭다 느꼈으니까.

심상의 송하린은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칼의 무게에 짓눌릴 만큼 어린 모습도 아니었고, 얼음 속에 갇혀 있지도 않았지만, 그 움직임은 힘겨워 보였다.

후웁…….

“피해!”

송하린이 소리치자 가까운 위치에서 지원하려던 고수들이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진기가 정상이 아니다.

붉은 안개가 깔린 전장, 송하린은 그것이 단순히 피 분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속이 좀 안 좋네.”

“본좌의 혈천제마강기(血天制魔罡氣)는 범인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주절주절 설명하기는.”

팟!

송하린은 절벽에 새겼던 글자를 기억했다.

그것을 새길 때의 손목 움직임, 힘의 강약, 몸의 균형까지.

하지만, 그것이 혈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진 않았다.

천마도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혈마는 붉게 변한 손을 휘둘러 그것을 측면에서 후려쳤다.

쩌엉.

“신기한 칼이구나.”

그녀의 천마도는 혈마의 공격을 받아 냈음에도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혈마, 담혼은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검은 그의 불길한 기세와 닮아 있었다.

챙!

하지만 천마도가 그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몇 배는 더 강했다.

그러나 송하린은 그 칼의 전부를 담아 휘두를 수 없었다.

캉!

“너에겐 과분한 칼이다.”

“뭘 먹었길래 이렇게 기운이 넘치실까.”

송하린은 자신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몸에 넘쳐흐르는 진기, 뜻을 품으면 움직여 주는 다리.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한 거지?’

혈마의 진기는 정순했다.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마공의 부작용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으니 공격할 틈이 없었다.

‘정순하다고?’

그녀의 진기 또한 마공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정순한 편이었다.

비록, 그녀를 닮아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지만.

아무튼, 혈정을 이용해서 온갖 패악질을 하는 혈마의 진기가 정순할 순 없었다.

송하린은 한 가지 의심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 진기, 네 거 아니지?”

“후후…….”

“남의 혈정을 사탕처럼 빨아먹고 힘을 불릴 수 있는 거구나?”

“이제 와 안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까?”

“……없지. 아, 있나.”

송하린이 다시 자세를 굳건히 했다.

이제부터는 호흡이 다할 때까지 천마도를 휘두를 것이다.

“네가 죽을 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걸.”

“글쎄…….”

달싹.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는 수사슴.”

훙!

횡으로 크게 벤 천마도가 기세를 드러내며 혈마의 검을 쪼개려 했다.

캉!

스르응.

칼과 검이 맞부딪히고, 혈마와 천마의 시선이 교차했다.

시선을 숨기고, 시선을 찾았다.

먼저 검을 뿌리친 건 혈마였다.

그의 시선은 천마의 몸을 뱀처럼 훑었고 틈을 찾아냈다.

“죽어라.”

콱!

송하린의 텅 빈 옆구리를 노렸지만, 그 공격은 그녀가 한 발짝 크게 움직이는 것으로 온전히 닿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엔 독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왔다.

“어딜.”

혈마의 검이 송하린의 소매를 찔렀고, 그녀는 그대로 팔을 접고 힘을 집중했다.

칼은 그녀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혈마가 검을 놓았다.

적수공권(赤手空拳)이 된 그는 송하린의 칼을 상대해야 했다.

캉!

카아앙!

“크윽…….”

송하린이 혈마의 하단을 노렸다.

훌쩍 뛰어 칼을 피한 혈마는 다시 그녀의 공격권 안에 들어왔다.

“나는 거미줄.”

캉!

캉! 카앙!

제아무리 절세무공을 부리는 자라도 그 도구가 손이냐 철이냐에 따라 부담이 달랐다.

천마도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칼, 혈마는 손이 떨려 왔다.

송하린이 이야기했다.

“너, 실수하면…… 죽어.”

“큿…….”

으직.

혈마는 아름드리나무 뒤로 몸을 뺐다.

송하린의 볼이 부풀었다.

“하아아!”

칼이 일도에 나무를 베는 것도 모자라 혈마에게 닿았다.

“……뭐?”

콰직.

콰지직!

“으아아아!”

혈마가 양팔로 그녀의 칼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건 그녀를 너무 얕잡아 본 행동이었다.

송하린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벴다.”

서걱!

혈마의 몸이 양단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에 들어차 있던 혈액이 나무와 돌에 튀었다.

치이익.

피 자체에 힘이 깃든 듯 혈마의 혈액이 튄 곳에서 매캐한 검은 연기가 피었다.

“혈마가 죽었다!”

“뭐?”

“마두가 죽었다고! 어서…….”

송하린은 웃지 않았다.

혈마는 순식간에 재생했다.

우직.

잘렸던 그의 하반신이 혈액으로 변해 다시 그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혈마는 찢어진 옷을 입고 박수쳤다.

“대단해…… 대단하다고.”

“알아.”

“너의 힘도 내 것이 될 것이다.”

후우웅.

불길한 붉은 안개가 다시 사위를 좀먹었다.

혈마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린아! 조심해라! 사술이야!”

혈마에게 쓰러졌던 고수가 한둘이 아닌 만큼, 그의 능력은 몇 번 목격되었다.

악전이 그 능력을 경고했다.

맹의 최고수들을 붉은 인형으로 만든 그 사술이었다.

‘어디…… 읏!’

캉!

붉은 손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서 뻗어 나왔다.

송하린이 가까스로 그 공격을 쳐 냈지만, 분명 타격이 있었다.

“큭…….”

이건 사술이 맞았다.

혈마는 그녀의 육체를 노리면서 그녀의 정신도 함께 흔들었다.

그녀의 심상에 적이 찾아왔다.

붉은 뱀.

거대한 붉은 뱀이 요사스러운 혀를 날름거리며 빙산을 올랐다.

그녀는 흔들렸다.

“하린아!”

“조용히 하고 있어…….”

-하린아 네가 하늘이다.

그녀의 사부가 했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스칸다에 온 후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온 것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지금 그녀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 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만 알면 돼.’

송하린은 평생 무언가를 책임지는 삶을 싫어했다.

그녀가 그렇게 싫어하던 그녀의 부모도 책임을 저버렸다.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자그마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녀의 부모처럼 그녀 자신도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일까 봐.

그것을 알게 된 자신이 그 사실을 못 견뎌 할까 봐.

“지존!”

“돕겠습니다!”

“물러서!”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던 듯했다.

자신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붉은 뱀 앞에 서 있다.

분명 책임감 강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책임감이 강해?’

어쩐지 그런 사람을 알았던 것도 같다.

깡!

다시 한번 들어오는 공격.

안개 속에 숨었다 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 있을까.

깡!

까앙!

뱀이 빙산을 올랐다.

심상 속 송하린은 칼을 들었지만 뱀이 무서웠다.

뱀은 자신의 두려움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심상은 심상대로 위기에 처했고 현실의 대치 국면도 위험했다.

달라진 게 없는 것일까.

‘똑같구나.’

어쩌면 자신은 평생 쓸쓸하게 살다 죽지 않을까.

휘오오오오.

안개가 겹겹이 쌓였다.

‘어쩌면…….’

상대는 안개에 숨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혈마는 안개 그 자체다.

송하린은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압!”

파지직.

검은 강기가 안개를 후려쳤다.

텅!

허무한 감각만 되돌아왔다.

벨 수 없다.

“네 힘을 갖겠다…….”

“제길…… 으…… 으…… 으아아!”

무슨 위험만 닥치면 어린아이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불안에 허우적거리며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영감! 영감…… 도와줘!”

누가 자신을 도울 수 있을까.

뱀은 산의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발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뱉어라! 뱉어!”

“지존! 지금 가겠습니다!”

“으아아! 송하린 망할 년아! 죽지 마!”

텅!

터엉!

텅!

강오의 소리도 섞였고 수하들은 물론이고 맹의 병력의 소리도 섞였다.

작은 소리는 큰 소리로 바뀌었다.

타타타타타탕!

쾅!

콰아앙!

“버러지들이…….”

산의 정복을 목전에 둔 뱀은 머리를 휘저었다.

무언가 뜻대로 안 되는 것처럼.

쾅! 쾅!

“나와야 해! 거기서 빠져나와!”

“끄아아아악!”

“안개에 가까이 가지 마라!”

“하, 하지만…….”

송하린을 둘러싼 안개가 느슨해졌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에 혈마의 주의가 분산된 것 같았다.

그도 인간인 이상, 이런 술법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안개가 흐릿해질 때마다 안개 너머의 사람들이 보였다.

알록달록 저마다 색은 달랐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신은 이들을 책임질 만한 사람인가.

“……알 게 뭐야.”

파직.

-하린아.

파지직.

-네가 하늘이다.

송하린의 칼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쩌엉.

“커, 커헉…….”

안개가 신음했다.

그녀의 도강(刀罡)에 땅거죽이 갈라지면서 산세가 일순간 변했다.

송하린의 눈에서 검은 번개가 쳤다.

그녀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칼은 폭풍이 되었다.

푸화악!

캉!

서걱!

서걱!

혈마는 몸이 조각조각 나면서도 그녀의 공격에 반격하려 했다.

“이…… 감히…….”

서걱!

마침내 송하린이 혈마의 목을 날렸다.

그녀는 지체 없이 수하들을 불렀다.

“지금!”

단월을 비롯한 8명의 중이 합장한 채로 불호를 외웠다.

혈마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크, 크아아아…….”

기분 나쁜 붉은 액체가 그의 파편들에서 출렁였다.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그의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는지, 좀처럼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단월과 나머지 중들이 그를 봉(封)하기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만.”

송하린이 흠칫하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만하라.”

승려들의 불호가 뚝 끊겼다.

치열한 전장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모두가 침묵했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조각난 혈마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조각난 혈마는 그 틈에 재빨리 몸을 재생했다.

“크…… 크으으…….”

그러나 송하린의 일격이 소용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오른팔과 가슴, 그리고 머리만 간신히 재생했다.

“너, 너는 누구…….”

“혈마라…… 잘도 신의 흉내를 내었구나.”

“누구냐…….”

무심한 눈으로 손을 뻗은 남자는 조각난 혈마를 빨아들이려 했다.

“크아아아아아! 너, 너는 분명 내가 죽였어…… 내가 너를 먹었다고…….”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그렇게 믿게 했다. 너에게 힘을 준 것은 나였으니까.”

“너는…… 너는…….”

“이리 와서 내 일부가 되어라.”

혈마의 잔해가 꿀렁거리면서 남자에게 흡수되었다.

흙먼지가 묻고 피가 잔뜩 튀었던 혈마와는 달리,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송하린이 몸을 떨었다.

심상에서 뱀은 물러갔다.

하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는 붉은 뱀보다 더 큰 재앙이었으니까.

“너…… 뭐야…….”

“칼.”

“뭐?”

“그 칼 말이다.”

“또 칼 얘기…….”

쾅!

송하린이 보이지 않는 공격에 당해 날아갔다.

“커헉!”

“주군!”

“우, 움직이지 마라.”

송하린이 날아간 자리엔, 덩그러니 천마도가 놓여 있었다.

“결국에…… 내 손에 들어왔구나.”

정체불명의 남자가 천마도를 움켜쥐려는 찰나, 송하린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쾅!

파팟, 팍!

송하린은 양손을 끊임없이 연계해 남자를 칼에서 밀어냈다.

남자가 인상을 썼다.

“쓸데없는 짓을…….”

송하린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남자의 공격에 머리가 충격을 받았는지 어질어질했다.

“하아…… 윽…… 너 뭐지? 혈마는 뭐고 넌 또 뭐냐고.”

“이런…… 하긴, 모를 수 있겠지.”

남자가 포권했다.

“시조, 흡혈의 대공 바훔이다.”

“바훔?”

사람들이 기함했다.

“시, 시조라고?”

“그, 그보다 대공이라고?”

“시조는 분명 죽었을 텐데…….”

단월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힘겹게 입을 뗐다.

“시조는…… 죽일 수 없다…….”

바훔은 흰 피부가 돋보이는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단월에게 물었다.

“승려는 나에 대해 아는가?”

단월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훔이 턱을 쓸었다.

“호오…… 신기한 일이구나. 내 이야기가 아직 전해지는가?”

“죽지 않는 자…… 영원한 자…… 커지는 악……. 천마조차 완전히 멸할 수는 없었던 존재.”

“음…… 모두 들어 본 듯하다. 그보다 영원이라…… 인간이 영원을 입에 담을 만큼 오래 살았던가?”

“…….”

“어쨌든, 힘이 돌아왔다.”

바훔은 담혼이 훔쳐 달아난 시조의 유해였다.

그는 오래전에 이미 깨어나 있었다.

담혼의 심상을 흔들어 그가 자신을 탈취하도록 한 것 역시 그의 계획이었고, 그 계획은 성공했다.

담혼은 이미 바훔의 유해를 훔치는 순간부터 그의 노예였다.

그의 의도에 따라 혈교를 일으키고 자신의 몸 안에 혈정을 쌓아 바훔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바훔의 목을 베었던 마검과 혈정으로 사용할 양질의 재료들을 그의 코앞까지 유인했다.

비록, 죽는 순간까지 담혼은 그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그그그그.

막대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진기를 바닥까지 소모한 자들은 바닥을 구르며 피를 토했고 실력이 낮은 자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조청이 소리쳤다.

“흑(黑)! 흑이다!”

흑색.

흑색은 혈교와의 전쟁이 길어졌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만일 맹이 혈마를 막지 못하거나 혈마보다 강한 적이 나타나 동부뿐만 아니라 스칸다의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 염려될 때, 그때를 흑이라 했다.

지금이 바로 흑이었다.

흑색의 대응 방안으로 적절한 것은 단 한 가지.

다른 대응 방안이 없기도 했고 남은 한 가지 대응도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전력으로 도주하는 것.

어떻게든 살아나가 이 사태를 알려야 했다.

분명,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하아…… 하아…….”

“도망치지 않는가?”

“도망치면…… 보내 줄 거야?”

“…….”

송하린이 힘들게 답했다.

“도망치면 어디로 가야 하는데?”

“그도 그렇구나.”

“그러니까 내가 이겨야 해.”

그녀가 도망치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도 도망치지 않았다.

때로는 거대한 절망보다 작은 희망을 믿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바훔의 안색이 아주 조금 변했다.

소강상태가 되었던 전장은 시조의 등장과 함께 혈마가 쓰러지자 아예 전투가 중단됐다.

“혀, 혈마 님이…….”

바훔은 가까이 있는 혈교의 잔당을 손으로 빨아들였다.

“끄아아악!”

머리가 붙잡힌 잔당은 혈정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혈정이 한 차례 주입됐던 몸은 바스러졌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혈마는 거짓된 존재다.”

“그, 그런…….”

“내가 너희를 거두겠다. 너희 또한 쓰임이 있으리라.”

아무도 거부하지 못했다.

거부했다간 방금 목숨을 잃은 자처럼 고통스럽게 죽을 게 뻔했다.

일단은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혈마의 수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무것도, 그저 지켜보아라. 덧없는 삶을, 그리고 그들의 끝을.”

그때, 악전이 혈마의 의표를 찔렀다.

악전뿐만 아니었다.

맹의 다른 사람들은 뒤까지 돌아가며 떠들고 있는 시조를 노리고 이 일격에 반드시 그를 죽일 각오로 덤볐다.

그리고 일시에 튕겨 날아갔다.

“컥…….”

“커헉…….”

쿵!

날아가 나무에 부딪히는 사람들 틈에 숨어서 송하린도 칼을 휘둘렀다.

쩡!

그러나 가볍게 막혔다.

“빌어먹을.”

콰아앙!

송하린은 먼저 튕겨 나간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다.

그녀는 계속 공격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튕겨 날아갔다.

어딘가 잘못 부딪힌 건지, 몸이 무거웠다.

자신이 칼을 휘두르는 사이, 시조의 손에는 어느 맹원 1명이 붙잡혀서 정기를 뽑히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거웠던 몸이 움직였다.

“놔아아아!”

터엉!

쩡!

콰아앙!

그녀는 계속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소리와 강도만 다를 뿐, 튕겨 날아가는 결말이 반복되었다.

‘못 뚫어.’

확신이다.

저 바훔이라는 시조는 괴물이다.

혈마 따위보다도 훨씬.

상대도 승리의 순간을 즐기는 것인지 천천히 자신을 무너트렸다.

마치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부웅.

“하린아…….”

“지존!”

송하린의 얼굴이 퉁퉁 붓고 그녀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다.

비칠비칠 걸어서 칼을 휘둘렀다.

뭔가 허전했다.

칼이 없었다.

칼을 빼앗긴 것도 모른 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칼바람…… 나는 바위……”

바훔이 송하린의 턱을 움켜쥐었다.

“고작 인간인 주제에 가소롭구나…….”

그가 힘만 주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

해 볼 건 다 해 본 것 같다.

불운한 점이라면 그저 상대가 강했을 뿐.

‘아직 더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녀의 탁한 눈은 바훔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도 분명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긴 했지만, 송하린은 그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하얀 옷을 걸친 남자의 환영이 보였다.

그는 누구일까.

기억의 편린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백괴라는 사내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형님을 잊고 있었지?’

최후의 순간, 바로 곁에서 그를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정신 차려! 송하린! 놔라! 놔아아!”

자신이 붙잡힌 것을 보고 뛰어든 사람은 강오뿐만이 아니었다.

악전과 조청, 음양쌍마, 그리고 수많은 사람.

하지만, 어찌어찌 한 수는 쳐 냈더라도 다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이 자신을 빼내 목숨을 구하는 사이, 바훔은 귀찮은 파리를 쳐 내는 듯 무인들의 숨을 거둬 갔다.

강오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하, 하린아! 형님이 올 것이야, 네 형님이! 내, 내가 분명히 서찰을 보냈다.”

“맞…… 다…… 서찰.”

새를 보내기로 했었는데.

강오가 대신해 주었던 모양이다.

“백괴가 와서 너를 구할 거야!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돼!”

버틸 기력이 없다.

이제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송하린은 웃었다.

“똥자루…… 당신 말이 맞았소.”

“송하린?”

그녀의 채팅 창이 켜졌다.

-아, 설이 살찐 거 봐. ㅋㅋㅋ

-번식 좋았냐? 좋았냐고? 썰 좀 풀어 봐. ㅋㅋ

-아씨, 어디야 근데.

-저기다! 저기!

-하린쟝 우리가 왔어. -3- 뽀뽀뚁

-뭐? 기다린 건 초모고 우리는 꺼지라고? 그럴 수는 없지!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연동되었던 채팅 창이 켜진 것이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바훔을 무시한 채 소리쳤다.

“엎드려어!”

붉은 태양이 추락하고 있다.

그만큼 붉은 사람이 오고 있었다.

무인들은 송하린의 말대로 납작 엎드렸다.

씨이이잉.

으직, 으지직!

나무들을 갈아버리다시피 하고 지나간 것은 새하얀 그리핀이었다.

구우우우우!

“저, 저게 뭐야!”

“뭐지?”

바훔이 잠시 공중을 선회하는 그리핀을 쳐다보다가 송하린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천마도가 들려 있었다.

바훔이 그녀에게 물었다.

“왜 웃지?”

“어? 웃고 있었나? 뭐, 웃을 만하지.”

후우우웅.

콰아앙!

흙먼지가 일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대봉이었다.

쾅! 쾅!

쾅쾅쾅!

대봉이 하나둘 떨어졌다.

무지개 사원의 홍예들도 함께 떨어졌다.

홍예들이 뒤집어쓴 동물 가면을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가면…… 무지개 사원이다.”

“사, 살았어. 그들이 왔어!”

그리고 마침내, 그가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떨어진 사내는 용 가면을 쓰고 코에서 구름을 뿜는 자였다.

송하린은 이 사내의 등을 본 적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등이었다.

송하린이 말했다.

“네 천벌이 퀵으로 왔나 보다.”

“…….”

용(龍)의 수도사가 된 성진이 지금 막 도착했다.

그는 카이에게 받은 황금 용 문양이 각인된 대봉을 쥐고 있었는데 전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송하린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겁던 몸이 점차 가벼워졌다.

그녀는 호쾌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형님 콧구멍에서 바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 몰래 가면도 바꾸신 것 같고.”

“동생, 저자는 뭡니까.”

“어…… 바, 바질? 바흐? 아무튼 그런 놈이었던 것 같습니다.”

“몸은 어떻습니까?”

“엄청 아팠는데 지금은 엄청 좋습니다.”

송하린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내 탕아(蕩兒)를 다오!”

콰아앙!

바훔의 천마도가 그녀를 노렸지만, 그 공격은 그녀를 티끌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

성진의 대봉이 가볍게 그 공격을 걷어 냈기 때문에.

성진은 가면을 벗었다.

그의 눈에서 새하얀 정광이 흘러나오고 코에서는 연신 구름 같은 연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변이 안개로 자욱해질 무렵, 송하린의 손에 탕아가 쥐어졌다.

그녀가 성진에게 뭐라 속닥거리니 성진이 한숨을 쉬고 왼팔은 허리에, 오른팔은 쭉 뻗어 대봉을 길게 늘였다.

송하린은 그의 대봉에 올라섰다.

“들어라! 바, 바퀴벌레! 네 잔악무도함에 하늘이 깜짝 놀라 우리 형님을 로켓 배송하였다. 환불은 불가, 대리 수령도 불가, 반송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우리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래방에서 소주 한잔을 부르면 96점이 나오고 대봉을 휘두르면 적들의 머리가 병뚜껑 챌린지가 되는 기적을 보이시는 분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쉽게 말해, 네 머리가 곧 바닥으로 떨어질 거라는 얘기다. 아무튼, 위대한 그 이름 백괴! 나는 그냥 흑괴! 둘이 합쳐 흑백쌍괴! 새겨라, 네게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내릴 그 이름을!”

“내게 천벌을 내린다고?”

바훔은 싸늘하게 웃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벌을 내린다고 하는 것이냐?”

“어…… 저…… 그…….”

송하린이 성진에게 속삭였다.

“형님, 쟤가 동생을 막 괴롭혔습니다. 혼내 주세요!”

성진의 시선이 송하린에서 바훔으로 옮겨 갔다.

시청자들이 송하린의 말에 답했다.

-무슨무슨 죄로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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