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빌어먹을, 머리를 날려도 죽지 않는 게 제일 문제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데…… 이제 물러나면 영영 동부에는 돌아올 수 없소.”
수뇌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한참 전부터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기에 크게 표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재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법력 높은 고승이나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검객뿐이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아무도 와 주지 않는구려.”
“아무렴. 동부는 지옥이요. 이번 시기를 놓치면 혈마가 마음대로 동부를 잡아먹을 거요. 그러니 누가 오겠소? 혈마를 거슬러서 죽을 이유가 없는 거지.”
“하하……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은 마를 막을 수 없단 말인가.”
그때였다.
“제갈 군사께서 돌아오셨다!”
그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난 노인처럼 다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가장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에게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제갈 군사가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뭐, 뭔가 좀 알아냈습니까?”
“제갈 군사!”
그는 수뇌부를 슥 둘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답답했는지 사람들은 대답을 채근했다.
“답답하게 왜 그러시오? 할 말이 있을 터인데…….”
“다른 사람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거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혼자 살아 돌아올 배짱은 없을 텐데…….”
제갈 군사가 답했다.
“그럴 무력도 없습니다.”
“그, 그렇지.”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그러나? 불안하게…….”
“우리를 도와줄 분들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말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 정말인가? 정말로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고?”
“그게 어딘가? 협회? 설마…… 성국?”
“원탁은 아닐 테지. 아무렴, 그곳에서 날을 새워 달려도 지금 이곳에 도착하진 못할 테니깐.”
제갈 군사는 고개를 저었다.
“협회도, 성국도 원탁도 아닙니다.”
“신진 세력인가? 위기를 기회 삼아 한몫 챙겨 보려는?”
“예끼, 이 사람아. 숨긴 뜻이 무엇이든 지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때야.”
“썩은 동아줄이라…… 맞습니다. 지금은 그럴 시기죠.”
제갈 군사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과거의 다툼과 감정의 골로 최근까지도 가까워질 수 없었던 존재들.
“설마…… 월인?”
제갈 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장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것이…….”
그가 일금을 만나러 갔다가 일어난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단 하나의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중차대한 문제였다.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분들이 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송하린과 월교의 수뇌부였다.
문 하나를 격하고 모두 잠시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서로의 의중을 살피는 것도 아닌 침묵의 시간이었다.
노승이 말했다.
“들라 하시는 게 어떻겠나?”
“그, 그렇지. 저렇게 세워 두는 것은 무례한 짓이야.”
“그럼…….”
송하린과 일단의 무리가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들은 음양쌍마와 여덟 고승 중 수장을 지내고 있는 이였다.
“어서 오시게…… 맹에 오신 것을 환영하네.”
“반갑게 맞아 주지 못해 미안하군. 보시다시피 상만 안 치렀지 초상집이나 다름이 없어서…….”
“스읍…… 친구, 땅이라도 꺼졌나. 말을 가려 하게.”
음양쌍마가 송하린의 자리를 확인하고 안내했다.
송하린은 그곳에 턱 하고 앉았다.
“안녕하신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인 것을 보니 상황이 좋지 않은가 보오.”
“송하린…….”
“음양쌍마 자네들도…… 돌아간 것이 아니었나?”
음마가 답했다.
“돌아갔었지, 더는 맹에 붙어 있기 싫어서. 뭐, 지존께서 가시는 길에 따르는 게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겠나.”
“자네들…….”
쾅!
송하린이 탁자를 쳤다.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좌중을 노려보자 다들 침음을 삼켰다.
그녀의 기세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본녀는 송하린이라 하오. 부끄럽지만 지금은 본녀가 월인들을 이끌고 있지.”
“……우리를 도우러 온 거요?”
“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다른 이야기보다 도우러 왔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색을 굳혔다.
“좋은 얘기를 하기 전에, 마땅히 오고 가야 하는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
송하린이 언급한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 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저,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침만 삼킬 뿐이었다.
스윽.
제갈 군사가 먼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월인들과 그대의 사부인 진호 어른에게 저질렀던 과거의 행동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
송하린이 입 다물고 있자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미안합니다, 그대의 일족과 그대의 사부의 일 모두.”
“너무 늦었구려, 당시의 나는…….”
쾅!
“장난하는 거요?”
송하린이 살벌한 기세를 풍기자 모두 말을 멈추었다.
이런 한두 마디 말로 그녀와 월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상처를 긁어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노승이 한마디 했다.
“무엇을 원하는 거요, 송하린? 우리를 돕지 않을 이가 귀찮게 이곳까지 방문할 필요는 없었을 터. 멀리서 비웃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게 몸부림 칠 우리거늘…….”
“눈치가 빠르네. 과거의 당신들의 행동에 대한 죗값을 받으러 왔다. 모두 받으면 너희를 돕도록 하지.”
“죗값?”
동부에서 죗값이란 단어는 조심해야 했다.
죗값으로 보통은 팔 하나를 받아 갔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원하는 이가 있었다.
노승이 팔을 내밀었다.
가사가 늘어져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팔을 가져가시오.”
“혜광대사!”
“스님!”
혜광대사가 침음하며 말했다.
“과거의 일은 나 또한 잘못이 있소. 본인이 더 현명했다면, 본인이 더 지혜로웠다면…… 그대의 사부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
“자, 어서!”
“뭐라는 거요?”
“……무슨?”
송하린이 천마도를 꺼냈다.
스릉.
쿵!
칼날의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제 저 칼로 노승의 팔을 거둬 가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악전과 조청도 팔을 내밀었다.
“우리의 팔도 거둬 가라.”
“늘 죗값을 치르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어르신의 분노를 삭일 수 있다면…….”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달았기 때문인지, 다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수뇌부가 전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내 팔을 거둬 가시오!”
“부디 도움을 주시게!”
송하린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러시오?”
“싸우기도 전에 병신부터 되면 어떻게 이기게?”
“하지만…….”
송하린이 자신과 함께 온 노승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큰 사발에 술을 따랐다.
꼴꼴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발에 술이 채워졌다.
“거기, 팔 내리지 마시오. 다치니까.”
“어?”
서석.
한 번.
딱 한 번의 휘두름이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뚝, 뚝.
하지만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베였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으니까.
피부만 얕게 베어 내 피를 흘리게 만드는 섬세함도 섬세함이지만, 한 번의 칼질로 이 자리에 모인 수뇌부의 모든 손에서 피를 본 속도도 엄청났다.
“대체…….”
송하린이 말했다.
“잔에 피를 흘릴 것이고, 마실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무엇이요?”
“월교가 친구를 사귀는 법이지.”
수뇌부는 그 말에 사발을 돌리며 피를 떨어트렸다.
모두의 피가 사발에 담겼다.
“아, 나는 싫은데…… 아픈데.”
“…….”
송하린도 단검을 꺼내 손아귀를 그었다.
그녀는 그녀의 천마도를 보고 이야기했다.
“영감, 보고 있나? 하린이가 결국엔 해냈어, 기특하지?”
“…….”
사발의 술은 모두의 잔에 공평하게 나뉘었다.
“잔을 들어라, 이 술을 마시면 우리는 친구일 것이요.”
“기한은 언제까지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내 마음.”
“제멋대로군.”
“싫음 말고.”
“누가 싫댔나?”
쭈우웁.
수뇌부가 일제히 술을 들이켜 잔을 뒤집어 보였다.
송하린이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안재욱의 친구를 어깨동무하고 떼창하고 싶지만, 본녀는 바쁘오. 용건만 말하겠소.”
“용건?”
“이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그건 우리가 더 잘 알지. 적들은 늘어나고, 목숨이 질기며, 혈마는 강하다.”
“정답. 본녀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소.”
좌중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뭐, 뭣이라?”
“싸울 수 있는 거요?”
“어떻게…….”
송하린이 양 손을 펼쳐 아래로 까닥거렸다.
“진정하시게, 설명은 내가 아니라 우리 쪽 전문가가 하실 것이야.”
송하린과 함께 온 노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했다.
“단월이라 하오, 지존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사실이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겁니까?”
“적들이 사용하는 혈정이란 능력은 과거 현월신교와 대적했던 시조의 일맥이 구사했던 것이오.”
“시조? 설마 현월신교는 시조와 직접 싸웠다는 겁니까?”
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신교는 시조와 그들의 추종자들을 상대했소. 분명 과거에도 그들의 능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다행히 선조들의 기록에 혈정의 파훼법이 남아 있었소.”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품속에서 단환을 꺼낸 단월이 답했다.
“이 단환을 먹으면 적들의 뜻대로 이용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요.”
“하지만 우리는 수가…….”
“그만큼 수를 준비해 왔소.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다른 문제가 남았다.
“적들은 베어도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신교에서 신성시 하는 기름이 있소. 이무기의 기름이라고 전해져 오긴 하지만, 정확히는 일월망향산에 사는 독사의 기름이지.”
“그것이 중요한 겁니까?”
“이 기름은 혈정의 순환을 방해하고 파괴할 것이요. 선조께서는 이것을 무기에 발라 시조의 추종자들을 상대했소.”
“크하하하하!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권법가들은 어쩌지?”
“기름을 바른 단검을 지니고 있다 숨통을 끊는 용도로만 사용하면 될 것이오.”
“일리 있군.”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사실, 이 문제가 가장 컸다.
“혈마에게도 이것이 통합니까?”
단월이 고개를 저었다.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오.”
“어째서?”
“혈마는 살아 있는 마귀, 저주받은 시조의 유해를 훔쳐 달아난 본교의 배신자들이오.”
“시조의 유해?”
“신교에는 시조의 유해가 봉인되어 있었소. 그것을 악독한 이가 훔쳐 달아난 것이지. 그가 혈마요.”
“허어…… 혈마의 실질적인 무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가 손을 쓸 수 있는 반경에 들어서는 순간 끝이오. 피가 흐르는 인간인 이상 그의 괴상한 능력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오. 다시 적만 늘어나는 상황을 맞이하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송하린이 말했다.
“내가 상대하지.”
“인간은 상대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소?”
단월이 끄덕였다.
“인간은 그렇지.”
“무슨 말이오?”
“지존께선 인간이 아니오. 하늘이지.”
“……믿을 수 있는 거요?”
“과거, 기록에도 나와 있소. 시조의 목을 벤 건 천마였다고. 봉인된 시조의 시체나 도둑질하는 무뢰배는 지존의 칼을 피하지 못할 것이오.”
***
그렇게 한 주, 지독한 싸움이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한 혈교는 앞뒤 재 볼 겨를 없이 전투를 시작했다.
“크큭…… 포기했나?”
“크아아악!”
분명, 맹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몸을 던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전열이 격돌한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컥…….”
“으아아악! 파, 팔이…….”
팔이 재생되지 않았다.
팔뿐만 아니라 사지육신이 모두 혈정을 주입받기 전처럼 연약해졌다.
일검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무, 물러나라!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밀어붙여라!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다!”
“와아아아아아아!”
“동부를 마귀들에게서 되찾아라!”
하루, 혈교의 전열이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하루, 혈교의 전선이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맹은 그들을 악착같이 추격해 피해를 누적시켰다.
하루 또 하루, 협회의 소규모 지원이 도착했다.
맹은 이를 크게 기뻐했으며 추후에 따로 감사를 표하기로 했다.
하루, 혈교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
타닥, 탁.
전선이 교착됐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추위를 피해 모닥불을 쬐는 정도였다.
“혈교 놈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극적으로 나오는군.”
“듣기로는 혈마가 전장에서 죽었다던데?”
“그거야 뜬소문이고. 맹의 기세가 무서우니 어디 산세 험한 절간에나 찾아가 숨어 지내는 것 아닌가 몰라.”
“에이…… 말이 되는 소리라고.”
“아무튼, 그보다 월인들 말이야…….”
“알지. 무시무시하더만?”
“어쩌면 혈교 패거리보다 진짜 무서운 건 월인들 아닐까? 천마인지 뭔지 이상한 것이나 섬기는…….”
“떽! 이 사람아! 짐승도 은혜는 아는 법이야! 정신 차리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큰 소리는 내고 그래, 사람 놀라게…….”
“진짜 놀라고 싶어서 그러나?”
사내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경계를 함께 서던 사내가 웃었다.
“아, 해 보든지.”
“……어?”
“이보게, 좀 더 열성적으로 할 순 없을까? 그 정도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
“이봐? 이, 이봐?”
스륵.
장난을 친다던 사내의 몸이 장난처럼 사선으로 갈라졌다.
놀란 사내가 서둘러 습격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시도로 그쳤다.
“스…… 커헉…….”
“쉬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쪽은 이곳의 경계병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야습이다! 혈교 놈들이다!”
“이런…….”
전열을 정비한 혈교와 기세가 오른 맹이 재차 충돌했다.
“측면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야!”
“죽여라! 사지를 잘라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게 해라!”
“크아아악!”
이번엔 쉽사리 승패를 점칠 수 없을 정도로 혈교 쪽도 전력을 다했다.
혜광대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슬픔을 견디기 어려울 때 고개를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노사, 어찌하여…….”
그와 함께 수행하던 고승, 무화대사(武火大師)가 혜광의 앞에 서 있었다.
그 안색은 창백했고, 눈에는 인간의 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군…… 편히 가시오.”
혜광이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오옴!”
서광이 이는 그의 주먹이 무화의 어깨를 격타했다.
무화는 한쪽 어깨가 무너졌지만, 곧바로 재생했다.
무화가 반격을 시작했다.
쩡!
“큭…….”
이곳저곳에서 고수들이 출현했다.
그 중에는 혈교의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맹이 혈교와의 싸움으로 잃었던 고수들이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맞받아쳤지만, 감정은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
원래도 강했던 고수들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학살을 자행하자 그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능선으로 모여라! 흩어지면 위험하다!”
“전열을 정비해! 혈교에게 뒤를 잡히면 그거야 말로 최악이다!”
“죽여어!”
전장에 피와 철 냄새가 가득했다.
광기는 광기를 낳는다.
사람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로 사람을 찌르는 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진기의 불씨가 꺼져 가는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때, 맹이 가장 회피하고 싶어 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측면이 뚫렸다!”
“아니야! 아직이야! 악전님과 조청 님이 버티고 계셔!”
재빠르게 악전과 조청이 뚫린 부위를 틀어막았기에 피해는 최소한으로 그쳤다.
하지만, 절망적인 소식이 전선에 더해졌다.
“혈마다! 혈마야!”
“가까이 가지 마라! 가면 안 돼!”
전선에 혈마가 등장했다.
***
서걱.
서걱.
최소한의 진기를 운용해 적들을 베어 넘기던 악전.
그의 창이 꿰뚫고자 했을 때는 막을 수 없었고, 베고자 했을 때는 반드시 그렇게 됐다.
쩌엉.
“늙은이는 본녀와…… 꺽…… 꺼억…….”
여인의 몸이 반으로 조각났다.
악전의 상상 이상의 무력에 혈교가 주춤했다.
그는 전장에서 은빛을 발하는 괴수였다.
그를 막기 위해 투입되었던 고수들은 그를 잠시 막는 정도의 수확만을 거둔 채 자신의 목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재밌구나.”
갑자기 들려온 소름끼치는 음성.
악전은 이 음성의 주인을 알았다.
“무정검 소천, 기어코 돌아왔구나.”
“아아…… 이 피 냄새는 정말 훌륭하다. 그리고 늙은이. 내 이름은 소천이 아니다.”
혈마는 소천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지만 소천은 아니다.
고오오오.
“크윽…….”
혈마의 기세가 크게 확장했다.
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흰자위를 뒤덮었고 얼굴에서 기괴한 소리가 났다.
우득, 우드득.
잠시 후, 변용(變容)을 마친 그의 얼굴은 악귀와 같았다.
“본좌는 담혼. 그 이름을 기억하라.”
“끄아아아악!”
악전은 담혼과 가까이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빨려나가고 피가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본좌를 영원히 섬겨라.”
후웅.
쩌어엉!
혈마가 한 손을 휘둘러 그에게 쏘아지는 장풍을 막았다.
“악전! 죽지 마라!”
“하아…… 하아…… 조청…….”
“가까이 가지 마! 우리가 상대할 수 없다!”
“알아…… 하지만…….”
조청이 부산스럽게 몸을 숨기며 장풍을 쏘아 냈다.
그것만으로도 견제의 의미로서는 차고 넘쳤지만, 상대는 혈마였다.
곧 혈마의 장법에 나무를 사이에 두고 적중당했다.
퍼엉.
“크아아아악!”
“늙은이들…… 가는 길이 추하구나.”
“푸흐흐흐…… 예끼 이놈아, 너도 언젠가 늙는다…….”
“죽어라.”
혈마의 손에서 핏빛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화아아악!
콰아아앙!
푸스스.
조청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크게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또 뭐지? 넌 누구냐?”
조청과 악전은 검은 곤룡포를 입은 여인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채 웃고 있었다.
“히히…… 하린아, 이 정도면 아직 쓸 만하지?”
“무리는 왜 했을까, 영감들.”
“이 정도는 끄떡없어! 으윽…….”
“물러나.”
송하린이 그들을 집어 던졌다.
“어이쿠!”
“악!”
악전이 한마디 했다.
“하린아, 힘내라.”
“그래.”
“이번엔 함께야.”
함께라.
송하린은 어쩐지 함께라는 말이 그리웠다.
전장에 홀로 선 그녀는 혈마를 보았다.
“네가 월교의 새로운 교주인가?”
“그래.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람.”
“본좌의 위대한 선(善)에 함께하라. 그대라면 자격이 있다.”
송하린이 콧방귀를 끼었다.
“선?”
“그렇다.”
“시체가 산만큼 쌓였는데 선이라고?”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구나. 본좌가 천하를 다스려 모두의 고통을 없앨 것이다.”
“아까 두 영감은 고통스러워 보이던데? 그보다 그것도 결국 사리사욕 아닌가?”
“선의 의도나 목적은 중요치 않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선인가 아닌가일 뿐이지.”
송하린이 담혼의 말을 곱씹었다.
위선은 선인가?
혹은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그 의도가 불순해도 선을 행하는 게 맞는가?
“아, 머리가 나쁘니까 모르겠네.”
“본좌의 뜻에 따르겠느냐?”
“아니, 곱씹을수록 별로라서. 그리고 마는 마다. 네가 선이라는 얘기는 네 엉덩이에 달린 구멍과 하지 그러냐? 수준이 비슷해 보이는데.”
담혼이 악귀의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일단 죽어야 말을 듣겠구나.”
송하린이 그녀의 왼쪽 팔을 오른쪽 두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쉭.
채채채챙!
채앵!
짧은 격돌.
그녀의 건(巾)이 끊어지고 머리칼이 조금, 그리고 소매가 조금 잘려 나갔다.
콰직!
그리고, 담혼의 팔이 잘려 나갔다.
송하린이 가리켰던 왼쪽 팔과 같은 부위였다.
담혼이 이를 갈았다.
“그 칼…….”
송하린이 이번에는 자신의 목을 두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나는 들개, 너는 겁쟁이. 자, 이제 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