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집맹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지쳐 갔다.
“대체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얼마나 더 떠들어 대야 하는 거요?”
“이제 신물이 다 날 지경이군. 그놈의 월인들 말이야.”
혈교에 관한 주제는 유야무야 넘어가 놓고 월인들에 관한 주제는 대체 며칠째 떠들어 댄 건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것이 옳겠지.”
“그놈의 돌다리도 계속 두드리다 보면 부서지는 것 아니오?”
“농담할 기운이 남은 것으로 봐서 족히 한 달은 더 떠들어도 되겠구먼.”
“……나는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소.”
차분한 인상의 남해신니(南海神尼)가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는 광도를 달랬다.
“대협,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준비를 시작한 지도 한참이오! 이제 슬슬 때가 되었지 않소?”
“…….”
걸인이 소매 한쪽이 헐렁거리는 외팔이 도사 전상에게 물었다.
“우리 외팔이 도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준비가 끝났습니까?”
“오늘 아침에 마지막 꼬리가 들어왔으니 지금이 적기겠지.”
“그럼, 저는 월인들을 맹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이상한 일이었다.
회의장이 들썩였다.
이제껏 절대 합의라고는 없을 것 같던 회의장의 인물들이 갑자기 내일 죽기라도 하려는지 순식간에 의결하고 있었다.
회의장의 반응은 판이하게 갈렸다.
당연한 일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고명한 도사나 스님, 이름을 떨친 대협객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맹에 가담한 지 오래되지 않은 가문, 또는 세가 강하지 않은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요? 다들 요기가 시원치 않았던 거요?”
“어허, 이 사람. 다 뜻이 있는 법일세. 이봐, 제갈 군사. 준비는 끝났나?”
염소수염의 중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마디 했다.
“오늘입니다. 이미 밖은 물 샐 틈 하나 없을 겁니다.”
악전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정기 회의는 이제 끝마칠 때가 된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악전의 시선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꼬집듯이 훑었다.
그 시선을 받은 이들은 몸을 떨었다.
악전이 왜 저러는 것인지 모르기도 했지만, 내심 찔리는 부분이 존재했기에.
“동해교룡(東海蛟龍), 귀검사영(鬼劍斜影), 천향옥녀(天香玉女), 무정검(無情劍), 그리고…….”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그들의 몸은 더 심하게 떨려 왔다.
“소요검(小搖劍). 어떻소?”
소요검이 악전의 질문에 답했다.
“……무엇을 말이요?”
“간 크게도 맹의 심장까지 기어들어 와 주인과 겸상을 하던 쥐새끼들의 이름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허허…… 이것 참……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오?”
“그렇소.”
호명된 다섯의 눈빛이 교차했다.
하아…….
“뭐 증거라도 있소?”
“제갈 군사.”
파라락.
“그간 당신들의 행적에서 수상했던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죽간이요. 이것은 당신들이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악인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와 동시에 그대들이 지옥으로 가는 이유지.”
“푸흡…….”
“우리가 집맹 시기를 당기면서 미리 이야기한 것들이 있었지. 맹 내부에 첩자는 늘 있었지만, 간 크게도 회의장에 나타난 첩자들은 당신들이 처음이요. 우리는 당신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통을 한 번에 물어뜯을 생각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요.”
“푸하하하하하하하!”
무정검이 웃었다.
첩자로 지목당한 이들도 끅끅대며 웃었다.
“하아…… 너무 웃기군. 재밌어.”
“부정하는 거요? 그대들이 첩자임은…….”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수고했다고 등이라도 두들겨 주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첩자인지는 아시나?”
“……혈교.”
“멍청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제법이구나.”
불호를 외우던 스님이 소리쳤다.
“갈! 어찌 감히 더러운 입으로 맹을 흔들려 하느냐? 오늘이 바로 너희들이 정화되는 날일 것이다.”
첩자로 지목받은 천향옥녀가 물었다.
“우리를 죽일 건가요?”
“붙잡아 심문해야 하니 제압만 할 것이다. 물론 반항하면 죽이겠지만.”
“더 어렵겠네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고.”
첩자는 다섯.
반대로 맹의 인물은 열이 넘었다.
상대가 되지 않을 터였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력이 같다면.
악전은 창을 빼 들었다.
이 싸움은 기세에서 시작해 기세로 끝날 것이다.
“쳐라!”
쾅!
열이 넘는 인영이 각자 미리 정해 둔 첩자에게 달려들었다.
첩자들은 눈이 붉어진 채로 부단히 저항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꺼어어어억…….”
“컥…….”
“푸학!”
하나둘 몸이 꿰뚫리거나 내장이 진탕되어 쓰러졌다.
모두 저항하려 했기에, 살려 둘 수 없었다.
“어째서…….”
악전이 상황이 일단락되자 현장을 확인하던 중,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경악했다.
동료 넷이 탁자와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 갈 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무정검, 소천.”
“큭큭큭…….”
이상했다.
무정검을 상대하기로 했던 인물은 둘이었다.
운현대사(雲峴大士), 그리고 일검진천(一劍振天) 전상.
특히나 전상은 마왕 토벌 경험이 있는 전대의 거인이었다.
운현대사는 죽은 듯이 모로 쓰러져 있었고 전상은 한마디를 남겼다.
“황(黃)…… 황이요.”
“빌어먹을!”
털썩.
전상이 쓰러지는 것을 본 조청이 소리쳤다.
황은 이번 첩자 색출 작전을 제안한 악전이 미리 짜 둔 상황의 심각성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면 청이라 말했겠지만, 황이라 말했다.
황은 상대의 저항이 거세고, 회의장에 있는 인물들로만 제압할 수 없을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황이라니.’
무정검의 알려진 무위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협행을 주로 했기에, 인물됨이 훌륭했기에, 그렇다고 모자란 무력은 아니었기에 맹의 좌석을 차지한 인물이었는데 분명 그의 무력은 전상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더불어 줄곧 회의를 진행한 운현대사까지.
적막이 감돌았다.
전상과 운현대사가 죽었다.
무정검 소천에 의해.
“맹은 재밌는 친구들이야.”
“뭐라?”
“서로 싸우다가도 이렇게 단결하는 걸 보면 과연 오래 살아남을 만한 집단이지.”
“넌…… 소천이 아니구나.”
“아, 아직도 소천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의 기세가 달라졌다.
“크윽…….”
“윽…….”
공기가 무거워졌다.
소천이 손짓하자 죽은 사람들의 피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오오.
“그래도 나쁘지 않은 맛이야.”
조청과 악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를 흡수하자 소천의 기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적은 오래 싸울수록 강해진다는 말이다.
소천이 말했다.
“본좌가 몸담은 곳은 혈교가 맞다. 미천한 비렁뱅이 놈들아. 이 얘기가 무슨 얘기인 줄 아느냐?”
“뭐?”
“너희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말이지. 더 촘촘한 그물을 가져오지 그랬느냐?”
“너…… 네가 일마(一魔)구나!”
소천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자, 이제 어쩔 생각이지?”
“마다! 마가 나타났다!”
“황이다! 진을 펼쳐라!”
그 외침에 회의장 외부에서 언제든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무인들이 회의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 왔다.
“스, 스승님!”
“봉마진(封魔陳)을 펼쳐라!”
“하!”
“하!”
맹에 속한 무인들이 공동으로 익히는 무공이 존재한다.
그중 현월신교와의 오랜 싸움으로 만들어진 진법이 봉마진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은 이 봉마진을 운용할 수 있어야 했다.
드드드드드드드.
200에 가까운 인원이 정해진 위치에 서서 진기를 운용하자, 회의장에 진기의 파도가 몰아쳤다.
“크아아아아!”
“됐어!”
“어리석은 놈, 여기가 맹이라는 걸 잊고 호랑이 소굴에 제 발로 들어왔구나. 봉마진은 너희 혈교 놈들을 소탕하기 위해 선대께서 창안하신 절세 무공이다!”
무릎을 꿇고 가해지는 충격에 몸을 떨던 소천이 웃었다.
“푸흐흐…….”
“실성이라도 했나? 왜 웃는 거지?”
“너희는 말이야, 발전이 없어.”
“뭐?”
“선대의 무공이 어쨌다, 문파의 전통이 어쨌다…… 결국 오래되고 낡았다는 소리잖아?”
“놈!”
드드드드드드드드.
진동이 더욱 거세졌다.
봉마진을 구축한 제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천이 담백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는 나날이 노력하고 발전하는데 선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제자리걸음이다. 내가 마일 경우까지 상정한 모양인데, 그래도 준비가 부족했다.”
“……끄으.”
악전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나왔다.
소천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봉마진의 기운을 오히려 그의 손으로 빨아들였다.
“진기는 본좌에게 소용없다. 본좌는 혈마(血魔).”
“크아아아악!”
“컥!”
쩌정!
기어코 봉마진이 깨졌다.
“즉, 신(神)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200의 인원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봉마진의 200명 분량에 달하는 진기를 흡수한 혈마는 처음보다 몇 배는 강해져 있었다.
악전이 제자들을 챙기며 도망쳤다.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 모두 같은 행동을 보였다.
“적(赤)! 적이다! 후일을 도모하라!”
적.
청도 황도 아닌 상황.
상대의 무력이 상상을 초월하여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 경우를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맹의 수뇌부는 강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힘을 합치면 물리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대 제자들을 비밀리에 중천으로 향하게 해 봉마진의 수까지 준비했건만, 상대는 예상을 벗어났다.
“혈마는 진기를 흡수한다.”
적 상황에 따른 대응 방식은 제자들이 주도해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문파에 대피령을 발령해 새로운 본거지에서 모이는 것이었다.
다행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악전은 어쩐지 얼마 전 만난, 그녀가 떠올랐다.
중천을 벗어나며 전령을 마주쳤다.
“악전 님!”
“소식은?”
“습격입니다! 맹에 소속된 문파들 대부분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두드리자 뱀이 놀랐다.
맹의 준비가 부족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혈교의 준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을 테니까.
“……지금 서찰을 하나 써 줄 터이니 내가 말한 곳으로 가 이것을 수뇌부에게 넘기도록 하여라.”
“예!”
동부는 백여 년이 지나 다시금 혈교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
용인이 이야기 한 호흡은 성진이 모르는 호흡이었다.
성진이 되물었다.
“천룡팔부의 호흡 말씀입니까?”
“그래, 물론 전부를 가르칠 생각은 없다. 팔부의 호흡은 용인의 몸에 적합하게 만들어졌기에, 또한 막상 운용해 보니 결함이 큰 호흡들은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거북이가 끼어들었다.
“조사님, 이 아이는 아수라를 익혔습니다.”
“호오, 역천의 호흡을? 누군가 가르쳤느냐?”
고개를 젓는 거북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쳤다고 합니다. 물론, 호흡의 기초는 레이서가 가르쳤다고 합니다.”
“큭큭큭…… 운명이란 참으로 기이하구나. 아수라를 익혔다는 건 다른 호흡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본 개념은 있는 아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겠구나.”
성진은 물론 횡재한 기분이었다.
아수라에 필적하는 호흡들을 성심성의껏 알려 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궁금했다.
“왜죠?”
“…….”
“왜 저를 가르치시는 겁니까?”
“그가 원했다.”
“그 예언자 말씀입니까?”
대체 예언자는 자신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그래.”
“예언자와는 어떤 연관이 있으신 겁니까?”
“나는 오래 전, 그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여행은 마왕을 처치하며 끝이 났지.”
“마왕?”
-헐 ㄷㄷ 송하린 사부랑 같이 간 사람이 여기도 있었네?
-알고 보니 되게 흔한 거 아니야?
-일단 우리들 중에는 없으니 흔한 건 아님. ㅋㅋ
“그는 마왕을 처치한 보상으로 미래를 훔쳐 볼 권리를 얻었다. 그는 그 이후로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졌지.”
“……그 사람이 저를 가르치라든가요?”
“아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성장할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마침 나도 무료하던 차다.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권태가 몸을 짓누르더구나.”
“…….”
“너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단지, 팔부의 호흡 중 세 가지만 더 익히고 떠나거라. 아, 나무는 심고 가고.”
“나무는 대체 무엇입니까?”
“네 이상, 네 신념, 또…… 음, 아무튼 심을 때 말해 주겠다. 어떠냐? 배울 생각이 있느냐?”
“…….”
꺼림칙했다.
자신만 모르는 일들을 이들은 알고 있다는 게.
하지만 용은 성진이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곧 두 번째 재앙이 도래한다고 하였다.”
“그 예언자가요?”
“그렇다. 그 재앙은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도탄에 빠트릴 것이다. 이것을 막지 못하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결국 스칸다가 멸한다고 했지.”
“배울 수밖에 없군요.”
-가불기 오바자나. ㅋㅋㅋㅋ
-너 안 해? 하지 말든가. ㅋㅋ 근데 그럼 세상 멸망함. ㅋㅋㅋ
-초모는 부럽다.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에서 가르쳐주겠다고 난리니까.
-그럼 너도 재능 있었어야지!
-나는 구경하는 데 재능이 있어. 구경할래.
***
성진이 떠난 거북이를 뒤로한 채 뱀에 올라탔다.
뱀은 신기하게도 흔들림 없이 날았고 덕분에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일체 들지 않았다.
“존함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존함은 무슨…… 카이 아시만이다. 카이라고 불러라.”
특이한 이름이었지만, 용인은 원래 그렇게 불리는 구나 싶었다.
“카이, 용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큭큭큭…… 별게 다 궁금하구나.”
“말씀해 주십시오.”
“사라져 가는 종족이지. 막대한 힘, 넘치는 총기, 별과 같은 지혜. 그야말로 잠재력의 총채나 다름없다.”
“무지개 사원은 왜 세우신 겁니까?”
“나의 일족은 폐쇄적이었다. 쇠락하는 종족을 보전하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 말은 잘 안 들었거든.”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공감했다.
“그랬군요.”
“무리를 벗어나 세상을 주유했다. 강자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미지를 탐험하고 약자를 구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전능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스스로가 할 수 있다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능하다고 느꼈던 감정은 어느새 뒤바뀌었다. 이 세상엔 내 힘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 그것이 어느새 100여 년도 더 된 일이다.”
성진은 지금 카이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무지개 사원이다. 후학을 육성하겠다는 당초의 마음도 수련을 거듭하다 보니 흐릿해졌지만. 팔부의 호흡은 무지개 사원에서의 시간이 꽤 지나고 완성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그 뼈대만 있었지.”
뱀은 산의 외딴 장소에 도착했다.
안개에 휩싸여 둥둥 떠 있는 돌섬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산장이 있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낼 것이다.”
“경치가 좋네요.”
-노인네냐. ㅋㅋ 경치 얘기는 왜 해. ㅋㅋ
-소개팅하면 이름이 뭐예요? 취미가 머에요? 이런 거만 물을 듯.
-그건 국룰 아니었냐?
카이가 물었다.
“아수라를 깨우쳤다 들었다. 그렇다면 멀리 갈 것 없겠지. 아수라부터 가르치겠다.”
“바로 시작하는 겁니까?”
“아직 정오도 안 됐다. 싫으냐?”
“좋습니다.”
카이가 숨을 고르고 손을 까딱했다.
“나에게 아수라를 운용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성진은 호흡의 시초에게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결례는 범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성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일 것이다.
후우웁…….
성진의 눈이 정광을 흘렸다.
화르륵.
“커헉!”
“괘, 괜찮으십니까?”
“신성력을 쓰면 어떡하느냐! 기도가 타 버릴 뻔했다!”
“죄송합니다.”
“뻥이다.”
“예?”
“뻥이라고.”
-이 영감탱이가?
-수인 놈들 하는 짓거리들이. ㅋㅋ
카이가 성진의 아수라에 대해 첨언했다.
“너의 아수라는 지독하게 공격적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예…….”
“아수라의 용도는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칼을 단지 상대를 베는 데에만 사용하면 쓰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여 주겠다. 숨을 쉬어 보아라.”
후우웁…….
“계속 의식하여 쉬어 보아라. 네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들이 마시고, 내쉰다.”
후우웁…… 하아아…….
“이제 멈춰 보아라.”
후우웁…… 하아아…….
성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숨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저 홀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게 무슨 트릭이야?
-호흡의 마술사;
카이가 즐거운 듯 말했다.
“내가 쉬는 것이다. 너는 내 호흡에 잡힌 것이고.”
“아수라는 단순히 호흡을 거스르는 것만이 아니라는 얘기군요.”
“이해가 빠르니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영특한 아이구나.”
“설마, 아수라는 상대와의 교감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까?”
“정답. 하산하라.”
카이가 껄껄 웃었다.
“물론 상대의 숨을 멎게 하고 호흡을 뒤틀어 정기신의 흐름을 어그러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사용해서는 끝에 도달하기 어렵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서 밥을 앉혀라.”
“…….”
“식재료는 부엌에 다 있으니 점심을 내오거라.”
성진은 군말 없이 부엌으로 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었다.
-종말에서 먼치킨이던 내가 스칸다에선 설거지?
-김 씨, 아수라고 나주라고 나발이고 밥 차려.
함께 산채를 먹던 카이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제부터는 혼자 수련할 것이다.”
“아수라를 혼자 수련할 수 있습니까?”
성진은 의문을 품었다.
그간 아수라를 익혔음에도 수련할 수 없었던 것은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이는 지금 그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호흡은 모든 생명이 쉰다. 그것을 깨닫도록 해라. 지켜보겠다.”
“예.”
***
성진은 그날로 수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해가 뜨기 전부터 호흡을 시작해, 식사를 차리고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호흡에 투자했다.
그 끝은 새벽이었다.
후우우웁…….
호흡은 안정되어 갔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게 아니야.’
인위적이고 불편했다.
들이쉬고 내쉰다.
내쉬고 들이쉰다.
갈수록 의문만 늘어갔다.
카이에게 답을 얻을까 했지만,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한 것 같기에 관뒀다.
‘호흡은 모든 생명이 쉰다.’
가장 확실한 것은 동물.
그 다음은 식물일 것이고 그 다음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도 모르는 바위나 흙일 것이다.
‘호흡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언젠가 레이서가 했던 말이다.
이미 레이서의 수준은 벗어난 성진이지만, 그 진리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방법을 바꿨다.
동물들과 따라 호흡하려 했다.
날아드는 작은 새들.
그들의 호흡을 가지려 했다.
삐이…….
새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황급히 호흡을 놓았다.
새가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다시 방법을 달리 했다.
이번엔 관찰만 했다.
새의 호흡을 느끼고, 뱀의 호흡을 느꼈다.
생명은 각자의 파장이 있다.
그것은 심장 박동이고 그것은 호흡이다.
가만히 그것을 느끼자니 정말 달랐다.
무작정 따라 했다.
새의 호흡을 했다.
자신의 호흡으로 억지로 새를 다루는 것이 아닌, 새의 호흡으로 새와 교감했다.
실패했고, 실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삐이…….
새는 별다른 이상을 못 느끼는 듯 잘만 날아 다녔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그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의 마음으로 세상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신이 나서 뱀을 노려보았다.
뱀의 호흡을 구사했다.
실패했고, 성공했다.
‘이거야.’
식물은 좀 더 어려웠다.
꽃들도 숨을 쉰다지만 그건 인간이 알아채기엔 너무 약한 호흡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관찰을 시작했다.
종일 꽃밭에 앉아 멍하니 있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우수수 빠져 나갔다.
그러나 성진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어느 날, 그곳에 나비가 다가왔다.
‘이건…….’
뭔가 달라졌다.
꽃이 마치 나비가 찾아 온 것에 흥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호흡이 느껴졌으니까.
그 호흡을 놓치지 않고 무작정 따라 했다.
실패가 길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다.
성진은 꽃밭이 되었다.
카이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으로 성진이 시도한 것은 생명 그 자체였다.
바위, 자갈, 모래.
성진은 또 종일 그 앞에 앉아서 가만있었다.
어느 날, 카이가 집 밖으로 나오며 말을 걸려 했다.
밥시간은 어기지 않던 성진인데 이미 요기할 때가 한참 지났기 때문이다.
“얘야, 밥…….”
카이는 성진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그를 둘러싼 공간이 그와 함께 호흡했다.
저곳에 들어갔다간 호흡을 빼앗길 것이다.
“……혼자 먹어야겠군.”
바위도, 꽃도, 새와 벌레도.
성진과 호흡했다.
그렇게 2주.
성진이 팔부의 호흡 중 네 가지를 깨우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제 식사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