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악전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 며칠 전에 서찰을 보내신 그분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웬 여성분이 오셨습니다.”
“흐음, 들라 하시게.”
악전은 중천에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할 만한 장소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며칠 전, 그에게 서찰이 도착했다.
함께 일을 도모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악전을 마주하자마자 벗어 버렸다.
“미인이군.”
“과찬이십니다. 소녀를 즐겁게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니, 아니. 정말이야. 물론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더 중요하니 칭찬은 이만하기로 하고, 서찰을 보내신 분은 그대의 주인 되는 분이신가?”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분께서는 맹과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만금검의 정당한 후손이라, 들어 본 적 있지. 그건 그렇고 대삼림을 뚫고 올 줄이야.”
“어떤 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게 누군가?”
“혹시…… 이런 가면을 쓴 무인을 아시는지요?”
“음…… 이건.”
악전이 아는 가면이었다.
송하린과 그의 의형제가 쓴 가면이었다.
여인이 뭉근히 웃었다.
“어느 쪽인가?”
흑백쌍괴 중 검은 쪽과 흰 쪽 중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이다.
“백입니다.”
“특이한 사내였지. 무척 강하기도 했고.”
악전이 턱을 매만졌다.
“그분께서도 저희의 일을 돕고 계시는데 불행히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런, 우리도 행사 때 본 게 전부인데.”
“워낙 바람 같으신 분이니 아마 동부를 질타하고 계실 겁니다.”
“아마 맞을 걸세. 그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하지. 자네의 주인이 맹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선대의 유산을 되찾는 것입니다.”
“허어, 되찾는 것이라?”
“저희가 비록 금을 휘두르지만, 그 금에 인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천금은 아니라는 얘기군.”
“받아들이시기 나름이지요.”
“그럼 뒷배가 되어 달라는 말인가?”
고개를 든 여인이 답했다.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럼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는군.”
“저희가 ‘무엇을 지불할 것인가’겠지요.”
“잘 아는군.”
여인이 자신들이 지불할 것과 무릅쓸 위험들을 설명했다.
악전은 눈을 감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 답했다.
“자네들의 의도와 마음은 잘 알았다. 음…… 주인께서는 상당히 장사에 능하신 분이시군.”
“왜 그렇게 여기시는지 소녀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장사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하는 법. 지금 이때, 우리는 믿을 만한 아군이 필요했었으니 자네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군.”
“시기라니요?”
의문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악전이 말했다.
“서찰을 하나 줄 것이야. 이것을 주인에게 가지고 가게. 그리고 건네준 전서구는 잘 쓰겠네.”
“따로 전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까?”
“곧, 곧이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집맹에 참여한 문파 일부의 병력이 조용히 중천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을 타고 도강(渡江)하며 존재를 감추었다.
***
“참나무와 박달나무까지 이렇게 빨리?”
참나무는 원숭이였고 박달나무는 쥐였다.
그들의 수련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는 절벽에 자란 나무 넝쿨을 타고 하늘을 너울 뛰어야 했고 쥐는 사시사철 칼바람이 이는 장소에서 눈을 가리고 바람을 피해야 했다.
크르르…….
개의 형상을 한 은행나무의 수도사가 으르렁거렸다.
“그 녀석이 레이서를 넘어섰다고?”
“…….”
“돼지, 어떻게 생각해?”
돼지와 개, 그리고 토끼는 성진이 먼저 통과한 홍예들보다 한 세대 이전의 인물이었다.
다른 홍예들은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이들은 그 강력함을 넘어선 자가 없기에 세대교체가 늦어지고 있었다.
돼지가 말했다.
“레이서 님을 기억해?”
“그야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따라다녔는데.”
“그럼 알겠네. 그분의 강함은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그렇지.”
돼지가 한 차례 머리를 가리켰다가 다시 심장을 가리켰다.
“그분의 진정한 강함은 정신과 마음이다. 그분을 넘어서는 수도사가 지금 와서 나타날 리가 없어.”
“하긴, 탄력의 호흡과 날카로움의 호흡은 우리의 깊이를 따를 수 없지.”
돼지는 무거움의 호흡, 개는 단단함의 호흡을 담당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봐, 토끼! 다음은 너지?”
“그래요.”
“시시하게 당할…….”
토끼가 개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일어섰다.
개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토끼?”
“시시? 정말 시시한 건 이런 얘기예요. 호흡을 전승할 생각은 하지 않고 투쟁심으로 불타오르는 것. 과거의 인물에 연연하는 것.”
“이봐! 말이 심…….”
“저는 레이서 님을 뵙지 못했지만, 그분이 당신들의 이런 모습을 원했을까요?”
돼지와 개가 토끼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가면을 써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을 오래 겪어 본 토끼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토끼는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한마디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예언의 사내예요. 저는 제 호흡을 완벽하게 전승하는 것에만 신경 쓸 거예요. 이딴…… 이딴…… 시시한 얘기가 아니라.”
***
호랑이, 원숭이, 양, 쥐는 모두 성진이 그들의 가르침을 넘어섰다고 인정했다.
“초모는 대단해! 깨우치는 속도가 정말 빨라!”
“메에에…… 예언의 사내가 맞아메에에…….”
쥐와 원숭이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원숭이는 이따금 헛구역질을 했으며 쥐는 얼굴이 반쪽이 되었고 옷도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우웁…….”
“어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호흡에 바친 세월은 이렇게 가벼운 것인가. 그가 단 며칠 만에 깨우칠 정도로.”
호랑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자랑스러워해야 해! 그렇게 연마한 호흡을 누군가에게 넘겨주었으니까!”
“그렇겠죠?”
“온다! 초모가 와!”
성진은 이들에게 다가와 밝게 인사했다.
거북이가 그를 맞이했다.
“흘흘흘…… 좋은 아침이군.”
“오늘은 어떤…….”
-거하~!(거북이 하이)
-다들 잘 잤지? 오늘은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 피곤했어.
-출근? 기만이냐?
-아니, 초모 방송 출근했다고.
-아 ㅋㅋ 난 또 ㅋㅋ
-정말이지 조선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너희가 행복하면 됐어…….
토끼가 성진의 앞에 섰다.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눈에 떠오른 서릿발 같은 기운에 상쇄되었다.
“초모, 오늘은 가벼움의 호흡을 전수할 거예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토끼가 수련장을 가리켰다.
수련장은 절벽 위에서 내려온 밧줄과 연결된 나무들이 발판이 되어 있었다.
신기한 점은 나무의 굵기와 발판의 간격이 제각각이라는 점.
“간단해요. 저곳을 오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걸 어케 해;;
-장난치나 나뭇가지도 있네? 저거 밟으면 바로 부러지겠구먼, 누구 실족사시킬 일 있나;
-토끼가 마음 독하게 먹었네;
“그럼, 먼저 시범을 보이죠.”
팟!
팟, 팟, 팟.
토끼가 나무 발판을 밟고 순식간에 절벽을 올랐다.
“보셨죠? 이렇게 하시면 돼요.”
“……해 보겠습니다.”
-어케 했누?
-아 잘하면 된다니까. ㅋㅋ
성진이 가장 밑의 나무 발판을 밟았다.
발판이 흔들거려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오늘은 조언 없으십니까, 노사님?”
“흘흘흘…… 예끼! 또 벗겨 먹으려고…… 굳이 말해 주자면 당연한 건 없는지고.”
“당연한 게 없다라…….”
뜻 모를 말에 무작정 성진은 발판을 건너뛰며 올라갔다.
발판을 3개쯤 건너뛰었을까, 흔들리는 중심을 바로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초모!”
“괜찮아?”
흙먼지가 피었지만, 낙법을 취해 큰 피해는 없었다.
성진의 머리는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에도 이 절벽을 어떻게 오를 것인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다시.’
쿵!
‘다시.’
쿵!
원숭이가 거북이에게 물었다.
“저…… 오늘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만하심이…….”
“흘흘흘…… 그걸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 청년이지. 그리고 감을 잡지 못했다고?”
“아닙니까?”
“분명 디딘 발판의 개수는 동일하지. 하지만, 저것을 보면 다르다는 걸 느낄 것이야.”
아까와는 달리 성진이 디딘 발판이 흔들리지 않았다.
원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주제넘었군요.”
성진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쿵!
쿵!
-뒤통수 납작해지겠다. ㅠㅠ
-생각해! 뉴턴이 머리에 사과가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뭐라고 말했을까?
-아야!
-정답! ㅋㅋㅋㅋㅋㅋㅋㅋ
성진은 지금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니야.’
중력도, 만유인력도 진리에 가깝다.
하지만 이곳은 온갖 이능이 존재하는 스칸다다.
그 진리들을 거스르지 말란 법은 없다.
팟!
‘하나.’
팟!
‘둘.’
팟! 팟!
‘셋, 넷.’
“저, 저저!”
수도사들이 절벽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거북이가 독백했다.
“정말 귀신같은 깨달음이다. 다음에는 저 혼자 해내겠구나.”
콰앙!
성진이 날개 잃은 새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낙법을 취했지만, 반나절 가량 몸을 혹사한 상태였다.
결국 그는 이어진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노사님!”
“숨은 붙어 있다.”
“저,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그래도 원숭이보다는 똑똑할 것이다.”
“대사부님?”
성진이 몇 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말했다.
“다시.”
거북이가 고개를 저었다.
“독종이구나, 참으로 독종이야.”
성진이 실마리를 찾았다.
팟!
팟!
순식간에 까마득한 절벽의 중턱에 도착한 성진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연약한 나뭇가지.
도약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발판의 간격.
하지만, 성진은 다르게 생각했다.
‘의심하지 말자.’
나는 가볍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어디든 내려앉을 수 있다.
성진이 재차 발판을 건너뛰었다.
팟!
하나, 둘.
팟!
다섯.
“대사부님! 저것 좀!”
“호들갑 좀 떨지 말려무나, 보고 있나니.”
“예…….”
일곱.
아홉.
절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한 성진은 지금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나뭇가지에 올라와 있다.
절벽까지 단 하나의 발판도 없다.
도약을 두세 번은 더 해야 오를 수 있는 높이다.
‘어떻게…….’
단순히 믿음만으로 가능한 높이가 있고 불가능한 높이가 있다.
이번엔 후자다.
그때, 이상한 감각이 몸을 스쳤다.
휘이잉.
한계까지 가벼워진 몸은 그 감각이 거짓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구나.’
이것 또한 흐름이다.
바람이 올라왔다.
성진은 그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팟!
휘오오오오오.
바람을 휘감고 떠오른 성진은 절벽보다 훨씬 높게 날아올랐다.
토끼가 절벽에서 솟구친 성진과 노을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담담히 눈을 감고 포권했다.
“벚나무의 수도사, 가벼움의 호흡 전승을 마칩니다.”
***
홍예 중 다섯이 전승을 마쳤다.
성진은 다음 날이 되어 다음 수련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무지개 사원에 속한 다른 수련생들을 제외한 대사부들과 홍예들이 모두 나와 구경했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강한데…….”
“우린 약했나?”
“어…… 그러네.”
원숭이와 쥐가 떠들었다.
사슴이 눈을 부라리자 금세 조용해졌다.
-출발 드림~~틤! 다크호스로 떠오른 초모 선수, 과연 돌파할 수 있을까요?
-아, 어려운 문제군요.
개와 돼지는 단단함과 무거움이다.
거북이가 말했다.
“정오까지는 개와 수련할 것이고, 자정까지는 돼지와 수련할 것이다.”
“휴식은 알아서 하라는 얘기군요.”
“흘흘흘…… 눈치가 빠르구나. 이번에도 말해 주랴?”
“괜찮습니다.”
개가 성진을 마주 보고 말했다.
“홍예를 넘어서려면 우리를 이겨야 할 것이다.”
“이겨?”
“우리는 결코 네 밑이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뭐?”
크르르…….
“깔보지 마라, 수련은 간단하다. 나를 공격해라. 호흡만을 사용하여야 하며, 내가 인정하면 통과다.”
간단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하다니.
괴롭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성진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변하자 개가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어차피 돼지가 갚아 줄 것이니.”
“돼지?”
“정오가 지나면 역할이 바뀐다. 너는 돼지의 공격을 견뎌 내야 해.”
그렇다면 납득이 갔다.
“시작할게.”
“그래.”
성진이 가볍게 시작했다.
쾅!
“큭…….”
“왜 그러지?”
주먹이 아렸다.
잘 연마된 돌을 후려친 것 같다.
개의 견고한 방어를 뚫을 수가 없었다.
“다시.”
“얼마든지.”
콰앙!
“으윽…….”
쾅-!
“…….”
“모를 것이다. 네가 왜 뚫지 못하는지를.”
정오까지 개의 몸을 한참 두들기던 성진은, 그의 몸에 상처 하나 남길 수 없었다.
개는 성진을 비웃었다.
“생각보다 시시하군.”
-아오 킹받아! 초모 님! 잘 좀 때려 보세요!
-초모 : 너를?
-아; ㅈㅅ 훈수 자제 하겠습니다.
성진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생각했다.
‘왜 뚫지 못하는 거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맹렬하게 생각했지만, 잘 모르겠다.
식사를 마친 성진이 준비운동을 마치고 돼지 앞에 섰다.
돼지가 콧김을 뿜으며 그를 맞이했다.
“왔군. 설명은 들었지?”
“예.”
“자세를 잡아라.”
성진은 자세를 잡고 삼초 후, 그대로 기절했다.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하나의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아앙!
날아가면서도 생각했다.
‘어떻게?’
기절한 그에게 홍예들이 달려왔다.
“초모!”
“괜찮아?”
성진은 1시간이 지나서 깨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돼지에게 달려갔다.
“다시.”
“음.”
콰아아아아아아앙!
“다시.”
콰아아아아아앙!
공격에 담긴 힘의 차이는 소소하게나마 있었지만, 성진은 매번 기절했다.
이 힘이라면 개의 방어도 뚫어 낼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 또 하루.
여전히 개는 미동이 없었다.
그래도 돼지 쪽은 나아졌다.
이제 기절은 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아무리 ‘모르면 맞아야지’라지만……. ㅠㅠ
-걍 분풀이하는 거 아니야?
-복수 마렵다;;
-잘 때 이불 치워서 감기 걸리게 하자.
돼지의 공격에 성진이 디딘 땅이 파였고, 성진은 쭉 밀려났다.
“흥.”
하루, 또 하루.
콰앙!
성진의 공격을 받은 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진은 만족할 수 없었다.
‘왜지?’
자신의 공격이 좀 더 매서워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다.
그게 더 답답했다.
이번엔 돼지의 차례.
콰아아아앙!
미끄러지긴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다시.”
“이이익!”
파아아아앙!
‘어?’
돼지와 성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은 다른 소리가 났다.
어쩐지 덜 아픈 것 같기도 했고.
돼지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
“예.”
“죽지 마라.”
돼지의 주먹이 성진의 얼굴에 꽂혔다.
콰아아아앙!
“푸학…….”
입술이 터진 성진이 신성력으로 치유한 후 말했다.
“다시.”
“빌어먹을.”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하루, 또 하루.
이쯤 맞으니 성진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혔으니까.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힘만으로 막는 게 아니었고 힘만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실마리가 있다면, 대지다.
‘발을 딛는 동작.’
대지를 딛고, 밀어내는 것이다.
방어와 공격 모두.
돌고 돌아 다시 돼지의 시간이다.
파아아앙!
파아아아아앙!
성진은 밀려나지 않았다.
파아아아앙!
파아아아앙!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돼지의 눈이 붉게 변하고 콧김이 잔뜩 뿜어 나왔다.
집중한 성진의 귀에 소리가 파고들었다.
“피해!”
“야차(夜叉)를 사용하다니! 멍청한 녀석!”
“너는 이르다 하지 않았느냐!”
성진은 그 음성들을 지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지와의 호흡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지요, 그것은 자신이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팡!
“……말도 안 돼.”
“완벽하게 막았어?”
“초모! 괜찮아?”
실컷 얻어맞아 찐빵이 되었던 얼굴.
치료하는 것도 잊은 채로 수련에 몰두했었다.
성진은 그 부르튼 얼굴로 답했다.
“다시.”
돼지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도 한계다.
“흑…… 흐윽…….”
거북이가 소리쳤다.
“승복해라!”
돼지가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느티나무의 수도사, 무거움의 호흡의 전승을 마칩니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개도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은행나무의 수도사, 단단함의 호흡의 전승을 마칩니다.”
무거움을 깨우쳤다면, 단단함도 깨우쳤을 것이다.
둘은 다르되 같은 호흡이다.
돼지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이서 님. 죄송합니다…….”
-레이서 사랑받았구나. ㅠㅠ
-나도 저런 스칸다 생을 살았으려나.
-흐잉 ㅠㅠ 다들 보고프다.
***
거북이가 성진을 찾아왔다.
“초모, 갈 곳이 있다.”
“어디를 말입니까?”
거북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의 방문을 예언한 분에게.”
“정말입니까?”
“들은 분.”
“…….”
-말장난 ㄹㅇ ㅋㅋ
-거북이 등딱지로 젬베 마렵네.
“잔말 말고 따라오는 게 어떠냐? 너도 궁금하지 않으냐?”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홍예들은 따르지 않았고 오로지 거북이만 함께했다.
거북이는 사원을 오르는 내내 아무 말이 없다가 심처에 다가갈 때쯤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뵙게 될 분은 위대한 종족이시다.”
“위대한 종족?”
“그분은 사원을 일으키시고 만물의 균형을 수호하시는 분이다.”
성진이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거북이가 이 사원의 우두머리인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진짜 수장은 따로 있는 듯했다.
끼이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사원의 규모도 무지막지했지만, 지금 연 문은 정말 신들이 여닫는 문처럼 거대했다.
문을 넘어가자, 이번엔 다리가 보였다.
구름으로 둘러싸여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리 위로 관문처럼 장식이 되어 있었다.
둘은 천천히 걸었다.
돌로 된 다리를 한참 걷던 거북이와 성진.
갑자기 거북이가 멈춰 섰다.
“여기다.”
구름에 둘러싸인 다리는 둘의 시야를 제한했다.
당연히 뭔가 보일 리가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오셨다.”
후우우우우웅.
구름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마치, 지금 마주할 상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후우우우.
“이건…….”
“영감님!”
무지개 색 뱀이었다.
무지개 색 뱀은 일전에 마주했던 요르문간드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 거대했다.
뱀은 날개도 없는데 공중에 떠 있었다.
츄르르…….
혀를 날름거리는 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꼬맹이구나.”
“흘흘흘…… 영감님 앞에서는 누구라도 꼬맹이 취급을 받을 겁니다.”
뱀에 앉은 사람은 남자였다.
두 가닥의 수염이 인중 옆으로 각각 길게 늘어져 있었다.
용(龍).
사람의 몸을 했지만, 용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 올려라, 무지개 사원의 조사(祖師)님이시다.”
“용…….”
“용인이시지.”
용인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자가 그 예언의 사내인가?”
“미천한 저야 모르지요. 다만 홍예의 시험을 모두 통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맞겠군. 새겨라, 연자여.”
“무엇을 말입니까?”
“세 자루의 검이 필요하다.”
“그것뿐입니까?”
“한 자루는 이미 찾았다.”
“네?”
성진의 수중에 검은 없었다.
이에 의문을 품자 용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이게 다 무슨…… 그보다 제 존재를 예언하신 분은 언제 오신 겁니까?”
“50년 전에.”
-씨이이; 오바야.
-50년 전이면 스칸다 운영할 당시잖아.
“……그게 누굽니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는 말했다.”
“무엇을요?”
-50년이 지나 스칸다는 전례 없는 종말의 위기에 놓일 것이다. 세 자루의 검이 필요하다. 검이 모이고, 세계의 뜻이 모인다면 해낼 수 있다.
“무엇을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용을 쓰러트릴 수 있다.
시청자들이 용인이 한 말을 해석하려 했다.
거북이가 끼어들었다.
“이제, 너는 이분에게 가르침을 구할 것이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호흡의 시초. 네가 익힌 호흡은 모두 조사님께서 창안하신 것이다.”
용인이 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에게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호흡을 전수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