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화
송하린은 의식을 끝마친 후, 곧바로 쓰러졌다.
고열을 동반한 힘겨운 사투를 마친 다음에야 깨어난 그녀는 서서히 건강을 찾았다.
빠졌던 손톱과 발톱이 자라났고, 푸석푸석했던 머릿결이 다시 윤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앙상했던 몸도 살을 찌웠으니 이제 원래의 송하린이 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물론, 사람의 겉모습으로만 판단했을 때는 그랬다.
“이봐, 송하린. 날 알아보겠어?”
송하린의 초점 잃은 눈은 강오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접속하던 접속하지 않던 종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강오는 여덟 노승 중 1명에게 물었다.
그는 강오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의외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지존께선 당신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왜 기억을 못 한다는 거지?”
“마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동시에 위험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아무 부작용이 없을 수가 없지요.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정신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썩을…… 그럴 거면 나를 여기에 부르지나 말던가.”
강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곳이 싫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 밖은 어떤 곳이에요?”
“바, 밖을 묻는 것이냐?”
월인 아이가 물었다.
그 신비한 외모도 외모였지만, 아이와 대화하고 있으면 강오도 순수해지는 기분이었다.
“밖은 위험한 곳이야.”
“네? 정말요?”
강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사람들, 특히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지. 남의 것을 약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곳이야.”
“무서워요…… 그런 곳이라면 싫어요.”
“하하…… 하지만 반대인 사람도 있단다.”
“반대인 사람이요?”
“그럼, 힘을 가졌다고 으스대지 않고 남을 위하는 사람도 있어.”
“그게 누군데요?”
“어…… 그…… 갑자기 물으면…….”
“거짓말이죠?”
강오는 말이 궁해졌다.
아이가 바깥세상을 겁내기에 던져 본 말인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마땅한 인물을 찾으려 애를 쓰다 1명을 떠올렸다.
“배, 백괴! 백괴라는 사람이야.”
“백괴요? 그게 누군데요?”
“흑괴…… 아니, 지존께서 밖을 주유하시면서 사귄 벗이시지.”
“왜 그분은 같이 안 왔어요?”
“그건…….”
그때, 아이의 어머니가 나타나 아이를 꾸짖었다.
“얘, 귀찮게 하면 못써.”
“엄마!”
“밥 먹을 시간이란다, 그만하고 들어오렴.”
아이는 방금까지 잘만 떠들다 인사도 하지 않고 엄마 품으로 쏙 들어갔다.
강오는 서운했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자 마주 고개를 숙였다.
좋은 곳이다.
“밥…… 이라…….”
그날로 강오는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송하린이 천마가 된 후,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뿐이었다.
다행히 강오는 그 사람 중 1명이었다.
“밥이다, 송하린.”
“밥?”
송하린이 되물었다.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가 거절하려 했다.
“지존께서는 정해진 것을 드셔야 합니다.”
“왜지?”
“잘못하면 몸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몸에 해롭지 않은 음식만 섭취하셔야…….”
“그래? 송하린은 이미 먹고 있는데?”
“예?”
시녀가 뒤를 돌아봤는데, 송하린이 이미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먹고 있었다.
“지, 지존!”
“먹게 놔둬. 망할 놈의 못 먹을 음식이 어디 있어? 못 먹는 음식이 뭔 줄 알아? 더럽게 맛없는 음식이야, 이 강오가 만드는 음식 중에 그런 건 없어.”
송하린은 체통도 잊고 게걸스럽게 바닥까지 긁어 가며 음식을 탐했다.
그리고 강오에게 물었다.
“더 없어?”
“없어,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르는데 안 먹으면 버려야 하잖아.”
“…….”
“맛있냐, 송하린?”
송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오가 그녀를 쳐다보다가 팔짱을 풀고 한숨 쉬었다.
“그래, 또 해 줄게. 기다리고 있어.”
“고마워. 그…….”
“강오, 강오야.”
“강오…….”
강오는 최근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어쩌면, 그녀의 대답이 많은 것을 결정지으리라 생각하며.
“송하린, 백괴라는 사람을 알아?”
“……백괴?”
“그래, 백괴 말이야. 네가 죽고 못 사는 형님.”
송하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힘겨워 보이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게…… 누구?”
“……염병.”
흑괴는 백괴를 잊었다.
***
중천의 회의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 이야기의 결말은 흐지부지하게 끝을 맺었다.
조청이 탁자를 내리쳤다.
쾅!
“조청, 자중하시오.”
“빌어먹을, 언제까지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셈이오?”
“말장난이라니, 노인네가 입이 험하군.”
“뭐? 노인네? 오호…… 그럼 네놈이 나를 상대하겠다, 이 말이냐?”
“크흠, 크흐흠…… 회의 중이오. 진정하고 앉으시오.”
“무슨 얘기만 꺼내면 되지도 않는 궤변으로 반박을 하니 진정을 할 수가 있어야지!”
실제로 그랬다.
조청이든 악전이든 다른 누군가이든.
월인들을 받아들이자고 뜻을 이야기하면, 가만히 앉아 있던 사람 중 1명이 궤변을 늘어놓아 시간을 끌었다.
덕분에 이 한 가지 화제로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이제 시간이 없소!”
“시간? 왜 시간이 없다고 하는 거요?”
“그야, 다들 할 일이 있을 거고…….”
“맹에서 집맹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군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 혈교가 오고 있지 않소?”
“혈교라…… 너무 낡은 화제군.”
“혈교가 두렵지 않소?”
“그럴 리가. 다만, 현실감이 없어서 문제요. 애초에 월인들이 주장하는 것도 자신들은 혈교와는 다르다는 것인데…… 막상 혈교가 말썽을 일으킨 것도 백 년은 족히 넘었잖소.”
조청은 지금 떠드는 저 간잽이 놈의 수염을 뽑아 실뜨기하고 싶었다.
분노를 억누르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예 혈교까지 맹으로 받아들이자고 할 것 같군.”
“뭐,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소?”
“뭐야?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어허…… 농이요. 험악하게 왜 그러시오?”
“제길…… 말장난이나 할 거라면 오늘은 이만 끝내지.”
회의를 진행하던 승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제자리걸음이다.
이럴 바에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혈교에 관한 화제부터 해결하도록 하죠.”
“혈교? 그런데 다들 왜 혈교에 대해 떠들어 대는 거지?”
“남부 변방의 어디 문파 하나가 당했다나 봐. 그 흉수로 혈교가 지목되는 거고.”
“거참…… 이러다 이 세상 온갖 죄는 혈교가 다 뒤집어쓰겠구먼.”
“말을 가려서 하라고, 친구. 당장 혈교에 앓았던 문파들도 이곳에 많으니까.”
“아 참, 그랬지.”
해당 주제로 토의한 지 시간이 꽤 지난 후, 결론이 나왔다.
월인들의 처우 문제와는 달리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그럼, 남부에서 발생하는 피해에 관련해서는 이곳에 모인 문파들이 힘을 합쳐 조사하기로 하고…… 만일 혈교가 발호한다면…….”
“그때는 맹이 단결하여 그들을 처단할 것이다. 그걸 위한 맹이니까.”
“그렇지.”
회의장을 나가며 누군가 이야기했다.
“아 참, 그 동부 상인회인지 뭔지…… 대삼림에 독자적인 무역로를 뚫었다던데…….”
“이제 맹에서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
***
“배나무다! 배나무가 왔다!”
무지개 사원의 모습은 특이하고 특별했다.
보통 스칸다에서 건물을 채색할 때 쓰이는 색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성진이 본 것만 해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무지개 사원은 흔히 건축물에서 쓰이지 않는 강렬한 색도 사용했고, 그런 색감이 모여 다양한 풍경을 연출했다.
-알록달록해서 무지개 사원이었구나;
-직관적인 거 보소. ㅋㅋㅋ
-킹쁘긴 하네;
일단 외부에서 봤을 때는 그랬다.
무지개 사원의 웅장한 규모와 마찬가지로, 그 정문의 크기도 비범했다.
-우와아; 이렇게 큰 문은 문단속은 되나?
-문이 무거워서 단속은 될 듯. ㅋㅋㅋ
-안에서 안 열어 주면 진짜 못 들어가겠네;
개다래나무의 수도사가 성진보다 빨리 문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의 문지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 후 성진을 재촉했다.
“빨리! 빨리 와, 느림보야!”
목소리에 악의는 없었고, 느림보는 애칭으로 느껴졌다.
성진은 송하린처럼 선과 악을 색으로 볼 순 없었지만, 문지기를 포함하여 저 개다래나무 수도사까지 선한 존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문지기 둘은 수인이었다.
소의 머리를 한 수인이 겨누었던 창을 위쪽으로 한 채 문을 열었다.
“들어가라, 이방인.”
“배나무라니까!”
“너는 조용히 하고.”
“피!”
유서 깊은 오래된 사찰에 들어온 것 같았다.
새 지저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줄기 소리, 무예를 겨루는 수련생들의 기합 소리.
앞서 걷던 개다래나무 수도사가 성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와! 여기는 무지개 사원이야!”
“네.”
“원래 말이 없어? 이방인은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나?”
“이방인을 처음 보십니까?”
“응! 내 선배들은 오래전에 이방인을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 태어나서 몰라! 여기엔 이방인은커녕 인간도 없거든!”
“그렇군요.”
“너 재미없어!”
“종종 듣는 말입니다.”
-후욱후욱! 우리 백괴, 흑괴 오면 말 많아지거든요!
-억울해서 하린이 끌고 와야겠는데?
-송하린 근데 커뮤에 글 안 싸냐?
-ㅇㅇ 스칸다 오고 나서 잠잠해짐. 애초에 등불이랑도 연락 끊고 마이웨이 중이잖아. ㄷㄷ
-최별은?
-내가 니 생생정보통이냐? 직접 찾아. ㅡㅡ
-까비 ㅋ 다 들을 수 있었는데.
성진이 개다래나무 수도사에게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이름? 이름이 필요해?”
“부르려면 그게 편할 것 같아서요.”
“음…… 호랑이라고 불러!”
누가 봐도 호랑이는 아니었다.
조금 후하게 평가하면 살찐 고양이였다.
“고양이 아니십니까?”
“쉿! 다들 모르는 눈치란 말이야. 나는 호랑이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아마 동료들이 그를 놀리는 듯했다.
호랑이가 말했다.
“여기에 서 있어! 내가 금방 다 불러 모을게!”
“불러 모은다고요?”
“응! 배나무의 후인이 왔으니 다들 기쁘게 맞아 줄 거야!”
팟!
호랑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곳저곳에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자리엔 거북이 수인이 서 있었다.
-으악, 깜짝이야!
-워킹 터틀이다!
-여기 다 수인들만 사는 건가?
“흘흘흘…… 손님이 오셨구려.”
거북이는 나이가 매우 많아 보였다.
얼굴이 쭈글쭈글하게 보였고, 수염이 가슴팍까지 자라 있었다.
“노사님이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흐으으음…… 좋은 향기야. 사람에게서 이런 향기를 맡아 본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하는구먼.”
“예?”
“예전에 배나무 수도사가 꼭 비슷한 향기를 풍겼지. 나는 그의 향기를 기억한다네.”
「노사님…….」
레이서가 추억에 젖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말없이 한참을 자리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났다 느껴질 때쯤, 학 1마리가 날아왔다.
고고하게 날아온 그 학도 수인이었다.
학은 날아와서 곧장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들 있었군요. 갑시다.”
“어디를…….”
“흘흘흘…… 우리 호랑이가 바삐 움직이더니, 다 불러 모았나 보구려.”
“겉모습처럼 아주 사나운 녀석이니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엥? 진짜 호랑이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ㅋㅋ
-뭐여 여기 사람…… 아니 동물들은 호랑이를 본 적이 없나?
-레이서 ㅋㅋ 언넝 답변 안 하냐?
「나 때 개다래나무 수도사는 진짜 호랑이였음. 저 친구보다 덩치가 몇 배는 컸음. 글고 말 걸지 마셈 지금 방귀 뀌려다 똥 쌀 뻔함. 장실점.」
-ㅇㅎ 그냥 관성으로 호랑이라고 부르는 건가?
-방구 : 똑똑똑, 방귀입니다.
-항문 : 뻥치지 마세요.
-방구 : 헤헷, 물똥입니다.
-항문 : 꾸짖을 갈! 돌아가라! 너는 내 허락 없이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둘이 잘 노네. ㅋㅋ
성진은 거북이와 학을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명승지(名勝地)에 온 것처럼 주변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 나무들은 뭔가요?”
“아, 저 나무들 말입니까? 홍예(虹蜺)의 나무지요.”
“홍예?”
“무지개 수도사들의 나무입니다. 아, 도착했군요. 일단 들어가시죠.”
나무에서 무지개를 떠올리기 어려웠던 이유는 나무가 여덟 그루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성진이 교당 안으로 들어서자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앉은 일곱의 수도사와 사슴 수인 1명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흘흘흘…… 홍예들이 얼마 만에 다 모이는 건지…….”
거북이에게 무지개 수도사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대사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10년 만에 내려왔구나, 호랑이는 용케 너를 찾았고.”
“돼지는 냄새가 특이해! 금방 찾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수인이었다.
원숭이, 쥐, 돼지, 양, 토끼, 개, 아무튼 호랑이인 고양이까지.
특이한 점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진이 왜 그런 가면을 쓰고 있는지 의아해할 때, 거북이가 말했다.
“그래, 이 자리에 너희를 불러 모은 건 다름이 아니다.”
“배나무의 후인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후인이라…… 아니, 아니다.”
“예? 그럼 거짓입니까?”
“그는 후인이 아니야.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것을 알았다.”
“어째서지요? 어떻게?”
거북이가 뒷짐을 지고 답했다.
“향기. 그에게서 향기가 난다. 하지만, 그건 배나무의 향이 아니야.”
“……설마.”
“그래, 흘흘흘…… 새로운 나무를 심을 때가 왔구나.”
“말도 안 돼!”
“그런…….”
채팅창에서 레이서에게 무슨 상황인지 묻는 채팅이 쏟아졌지만, 그는 답변하지 않았다.
거북이가 성진을 보았다.
성진도 거북이를 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것들은 낯설었다.
‘올곧은 선. 혹은 올곧은 악.’
악이 당당하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혹은 선이 무정하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는 기막힌 균형 위에 서 있었다.
“연(緣)자여…… 예언의 순간이 찾아왔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의 방문을 예언한 분이 계시다.”
스칸다에는 규격을 벗어난 존재들이 있다.
성진이 느끼기에 대공 네시온이 그러했다.
그가 주장했던 불멸이 결코 허황한 말은 아니라고 느꼈을 정도니까.
자신의 방문을 예언한 존재가 있다는 얘기에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흘흘흘…… 급할 필요가 없다. 결국엔 네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할 뻔했다.
거북이는 균형의 눈을 하고 성진에게 말했다.
“그 진실이 너에게 있어 상이든 벌이든 간에…….”
-이 어니부기 할배가 자꾸 뭔 헛소리여.
-거북왕 : 이렇게 하면 있어 보이겠지?
거북이가 고개를 돌려 사슴을 바라보았다.
사슴이 고개를 끄덕이고 성진에게 말했다.
“이방인이여, 우선 간단한 시험을 할 것입니다.”
“시험 말씀입니까? 제 용무는…….”
“압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을 방문했는지도요.”
“그럼 왜…….”
“그건 아주 사소한 문제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도움을 원하는 곳은 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사슴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리는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조땠다!!!!
-레이서, 너만 믿으라며!
-레이서 : ㅋㅋ 나 왕년에 잘나갔음. 나만 믿으셈. ㅋㅋ 어림도 없지! 그게 누구라고요?
성진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렇게 말한다는 건…….’
상대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 불러 모아놓고 거절할 리가 없다.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간단한 시험입니다.”
“제 무엇을 시험하려는 겁니까?”
사슴의 눈이 싸늘해졌다.
“당신은 호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맞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당신이 그런 수준으로 스칸다를 활보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모욕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
-아수라가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이봐아아아아 레이서! 저게 무슨 소리야.
시청자들은 레이서가 반박해 주길 원했다.
저 사슴이 하는 말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혹은 저 사슴이 초모의 진가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레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외통수네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엥?
-뭐야?
-스승님 ㅡㅡ 수강료 토해 내시죠.
-정보) 무료 강의였다.
사슴이 한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홍예 중, 단 1명이라도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일 겁니다.”
“만일 진다면요?”
“그건…… 그때 결정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이 시험엔 규칙이 있습니다.”
“무슨…….”
“당신이 많은 힘을 가졌다는 걸 압니다. 느껴져요. 강대한 신성력, 고난을 이겨 내는 심상, 그리고 호흡까지. 하지만, 이것을 아십니까?”
사슴은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당이 그의 목소리로 울렸다.
“당신은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무엇하나 극에 달하지 못했음을.”
“…….”
“당신은 이 시험에서 호흡만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상대도 그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솔직히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호흡은 레이서의 조언을 받았다지만, 결국 성진 혼자 수련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막히는 부분도 존재했고,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파고들 것이고.
‘하지만…….’
상대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기, 혹은 승부라고 하지 않고 시험이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한 측정, 그 이상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사슴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를 상대하시겠습니까?”
“누가 제일 강합니까?”
“강함은 상대적입니다. 다만, 호랑이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고양이 가면을 쓴 호랑이가 손을 들며 외쳤다.
앙증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야, 나! 나로 해!”
“왜죠?”
“그가 가장 상냥하니까요.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호랑이로 하겠습니다.”
성진이 호랑이를 지목하자 호랑이가 기꺼운 기색으로 일어났다.
나머지는 자리에서 벗어나 거북이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흘흘흘…… 호랑이는 친절하지요.”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겁니다.”
성진이 사슴을 돌아보았다.
“교당이 부서지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당신이 호흡만을 사용한다면 교당을 부술 수 없을 겁니다. 이 교당은 보기에는 평범해도 선대의 나무로 지어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진이 자세를 잡자, 사슴이 말했다.
“호랑이, 가면을 벗으세요.”
-ㅋㅋㅋ 안에서 귀여운 고양이 등장!
-떼껄룩~ 냥냥 펀치~
호랑이가 가면을 벗자, 살벌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와 맹수의 눈은 그의 인상을 아예 뒤바꾸었다.
우득, 우드득.
호랑이가 재빨리 상의를 벗어 던졌다.
아이의 몸은 어느새 자라나 거대한 근육질 남성의 몸이 되었다.
“와라, 이방인.”
“…….”
-잠만, 왜 라이트급이 헤비급이 된 거죠?
-호랑이(약자 코스프레, 3대 500침, 힘숨찐, 동물철권)
-초모 : 저는 이 미친 치킨 게임을 거부하겠습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다!
후우웁…….
호흡을 들이마시고 상대의 빈틈을 찾았다.
상대의 호흡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호흡.
‘유연하다.’
강성한 호흡을 구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대의 호흡은 물처럼 유연했다.
‘그렇다면…….’
먼저 수를 쓰려고 했다.
첫수는 빠름.
“빠른 건 벌새, 빠른 건 노을, 빠른 건…… 나.”
팟!
성진의 주먹과 발차기가 호랑이의 몸을 두들겼다.
하지만, 시원치 않았다.
스륵.
스륵.
성진의 공격은 어떤 성공적인 느낌도 없이 흘러내렸다.
마치 물을 때리는 감각이었다.
-부부싸움 펀치;
-초모 힘내! 맞서 싸워!
상대가 유연하다면 전략을 바꿔야 했다.
빠른 건 통하지 않았다.
‘무거움.’
무거운 기운을 담은 주먹이 호랑이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속도가 늦춰진 것도 아니었다.
빠름에 무거움을 더했으니까.
사슴이 감탄했다.
“호오…….”
“흘흘흘…….”
하지만, 공격은 실패했다.
빠르고 무거운 공격이 상대의 손짓에 가라앉았다.
후우웅.
부자유스러움.
깊은 물에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공격도 실패.
빠르게 수를 전환했다.
느림, 가벼움, 단단함.
전부 소용이 없었다.
호랑이는 단 몇 번의 손짓과 발짓으로 성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패인은 간단했다.
‘호랑이의 호흡에 부딪히면 내 호흡이 부서져.’
상대의 호흡에 말려들었다.
자신이 밀린다는 얘기다.
시청자들이 초모의 고전에 경악할 때, 성진은 최대한 발악했다.
허초를 사용해 공격을 시도해 보았고 이제껏 상상으로만 해 왔던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거북이가 말했다.
“천재라 할 만하구려. 하지만…….”
“예,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때, 성진이 다짜고짜 호랑이의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어림도…….”
성진이 어설픈 발차기로 상단을 공격해 오자, 호랑이가 고개를 숙였다.
이다음은 맹렬한 주먹이다.
여태 계속 그랬다.
역시나.
후웅!
“그만…….”
하지만, 이것 역시 허초였다.
허초.
허초.
허초.
수십 번의 수를 주고받아도 공격이 끝이 나지 않았다.
호랑이는 슬슬 호흡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설마?’
성진이 노린 것은 상대의 호흡을 지구력으로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이어, 준비가 끝난 역천의 호흡을 사용했다.
“……커헉!”
호랑이의 코와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불길은 치솟지 않았다.
이윽고, 성진의 권이 호랑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최후의 노림수다.
팍!
“하아…… 하아…….”
호랑이가 그 주먹을 막았다.
성진이 모든 수를 동원했음에도 방어만 하던 그를 뚫지 못했다.
물론, 성진이 가진 힘 중 호흡만 사용한 것이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시험이었으니까.
성진의 입에서 명쾌한 답이 나왔다.
“제가 졌습니다.”
“하아…… 하아…….”
지쳐 보이는 호랑이를 보다가 거북이에게 눈을 돌렸다.
옆 자리의 학과 사슴은 호들갑을 떨었다.
“여, 역천의 호흡!”
“저걸 가르침 없이 깨우쳤다고?”
“레이서가…….”
“배나무도 역천의 경지까지는 미치지 못했어!”
눈을 감고 있던 거북이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균형의 눈으로 성진을 한 차례 눈에 담은 거북이가 말했다.
“연자여, 그대의 가치를 증명했구나.”
“제 패배입니다.”
“아니, 이것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들. 승패는 하찮은 가치이다.”
“…….”
“예언의 순간이 도래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갈 때가 언젠가 올 것이라 했으니…… 또한 그것은 낯선 세계에서 온 이방인과 함께일 것이다.”
“무슨…….”
“줄곧 널 기다려 왔다. 하지만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이대로 산을 내려가 다른 삶을 살아도 된다.”
서로의 인연을 여기서 끝내자는 얘기다.
하지만, 성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홍예의 호흡은 성진이 미치지 못한 곳이다.
혼자서 그 경지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선택은…….”
“새로운 나무를 심어라, 나무는 곧 너일 것이다. 그리하겠느냐?”
“……나무를 심겠습니다.”
성진은 동부의 신비 세력 무지개 사원에 발을 들였다.
새로운 시나리오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