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성진은 월광지대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향했다.
이미 월광지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람의 흔적들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가장 먼저 넘어야 했던 지형은 설산이었다.
휘이이.
그는 파고드는 추위는 아랑곳없이 얼굴에 서리가 잔뜩 내려앉은 모습으로 계속 걸었다.
일행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반나절도 못 가서 휴식을 취하자고 했을 텐데 성진이 홀로 있는 지금은 강행군이라 할 만큼 휴식을 줄였다.
‘어흑흑 그립읍니다.’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하린좌…… 라면 송이 들리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전낭이 없어지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모르는 적과 싸워야 하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식비로 엥겔지수가 치솟으면 당신인 줄 알겠습니다.
-최악이잖아 머야.
-악의 축이었구나.
‘아씜씨마다씜씨매’ 님이 3,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벌써 울 하리니 보고 시포요. -3- 뽀뽀 쪽!]
-으웩~ 이걸 송하린이 봤으면 바로 총 쐈을 텐데.
-하린이 내꼬얌. >_<
-너 같은 사람들은 국가에서 관리해야 하는데.
-왜염?
-모아 놓고 배틀 로얄 시켜야 해.
-엌ㅋㅋㅋㅋㅋㅋㅋㅋ ㅆㅇㅈ.
-목에 폭탄 목걸이 채워지면 저렇게 안일한 발언은 못 하겠지. ㅋㅋㅋ
‘내가 초모 좋아하긴 하는데’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송하린 없어지자마자 바로 귀신같이 한마디도 안 함. ㅋㅋㅋ 소통 킹!]
-초모 : 초심으로 돌아갔습니다. ㅋㅋ
-어우 흥겨워! 역시 여행은 조용히 가야지~
-이 남자…… 여행 참 맛깔나다.
송하린과 헤어진 후, 성진의 길 안내를 맡은 건 레이서였다.
그는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성진이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었다.
「어…… 그러니까…… 좀 쉬었다 가시죠?」
“괜찮습니다.”
「지금 거의 하루 내내 걷기만 하셨는데요?」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그래요…… 시간 좀 주세요…….」
성진이 레이서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휴식을 취할 만한 공간을 찾았다.
눈보라가 들이치지 않는 동굴이었는데 제법 지낼 만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성진은 들어서자마자 꺼림칙해졌다.
‘인위적으로 정돈되어 있어.’
동굴의 주인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동굴 입구에서 짐승의 울음이 들렸다.
크워어?
소리를 낸 상대는 흰색 털로 뒤덮인 거인.
입가에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묻어 있고 한 손에는 축 늘어진 흰 곰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이 동굴은 설인(雪人)이 사는 동굴이었다.
설인은 눈을 번들거리며 새로운 비축 식량이 제 발로 걸어온 데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성진은 쓸데없이 귀찮아지기 전에 손을 휘저었다.
우우웅.
살랑이는 바람이 일어 설인의 몸에 적중했다.
설인은 몸을 훌쩍 날려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으직.
끄어어어어…….
쿵!
설인의 몸이 모로 기울어 동굴 벽면에 기대어 넘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자는 것처럼 몸을 축 늘어트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크어어어어…….
푸우우우우…….
설인이 곤히 잠이 들었다.
-ㅎㄷㄷ 허니 펀치 맞자마자 잠드네. ㅋㅋ
-세종시 꿀 주먹이 그렇게 달더냐?
-쟤가 동굴 주인인데 ㅋㅋㅋ 인간이 미안해. ㅠㅠ
성진이 관심을 가진 것은 설인이 쥐고 있는 곰이었다.
마침 끼니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곰의 팔을 크게 잘라 불가에 던져 넣었다.
-이젠 도둑질도 자연스럽다.
-송하린 : (흐뭇)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이만 하산하도록!
-초모 얼굴 보니 이게 왜 잘못된 건지 모르는 표정. ㅋㅋ
타닥.
고기가 불에 익으면서 좋은 냄새를 풍겼다.
불에 그슬린 털은 손으로 훑으면 자연스럽게 떨어질 것이다.
성진은 고기가 익는 동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제, 가부좌를 틀고 심상으로 들어가는 건 그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분심공을 통해 만들어진 또 다른 성진이 재가 된 땅을 뒤집고 있었다.
여전히 벼락이 치고, 불이 꺼지지 않은 땅도 남아 있다.
하지만, 전과 비교했을 때 괄목할 만한 성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언제쯤 자신의 심상에 평화가 찾아올까.
성진은 그때가 되면 이 고된 삶에도 빛이 드리울 거라 기대했다.
비록 지금은 어려울지 몰라도.
심상의 변화는 단순히 마음만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사라져 매끄러워지고 단순히 힘과 속도, 그리고 기교에만 의존하던 과거와는 달리 그 정교함과 섬세함도 크게 늘었다.
심상은 정말로 신기한 능력이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할 수 있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성진이 심상에서 빠져나왔다.
고기가 적당히 기름이 빠진 채로 익어 있었다.
-누가 그랬는데, 곰은 오른발이 더 맛있대.
-왱?
-벌집을 그걸로 다 퍼먹어서 꿀 향이 배어 있다던데.
-여기 벌집이 어딨어.
-아.
-밀수들도 오른손이 맛있겠네. ㅋㅋ
-밀수들은 그 손으로 똥도 닦아서…….
-아.
***
「다음은 30M 앞 우회전입니다!」
-레비게이션 제대로 작동하는 거 맞지?
-50년 동안 업데이트를 안 해서 확신을 못 해. ㅋㅋㅋ
-아니, 업데이트를 왜 안 했대?
-회사가 도산했어.
-글쿤…….
성진이 무지개 사원을 찾아 나선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무지막지한 행군 속도로 시간을 단축했지만, 그런데도 행로는 끝이 없었다.
신기한 푸른 꽃이 넓게 펼쳐진 꽃밭을 지났다.
밤이 되면 가지가 오그라드는 숲을 지났고, 용암을 뿜어내는 산을 통과했다.
-설이 이 시끼는 아직도 교미 중이냐?
-뿌잉뿌잉~ 교미교미~ 찡긋~
-설 : 한창 좋은 데 말 걸지 마라.
-이거이거 아주 절륜하신 분이셨군. ㅋㅋ
-어쩐지 데칸 산에 그리핀이 너무 빨리 늘어나긴 했더라 ㅋㅋ
-설이 잘생겼으니 인기 많겠지? 이제 우리는 그리핀까지 부러워해야 하는 거야?
‘개오바야’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냐? 너무 먼데; 레이서 무지개 사원 못 찾으면 집에 찾아갈 줄 알아라.]
-님이 뭔데요?
-가스 검침원.
-가스 새는지 확인해 주러 가는 거였누. ㅋㅋ
-인덕션 쓴다고 합니다. 글 내려 주세요.
성진은 마침내 도착했다.
사람을 본 지가 오래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지만, 자연경관을 보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지금 와 있는 곳은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산이었다.
스칸다에 온 후, 여러 산을 거쳐 왔지만 이렇게 활기찬 느낌이 드는 산은 처음이었다.
산이 뿜는 기운이 밝다는 느낌을 받았다.
-와…… 여름휴가 여기로 오고 싶다.
-이곳은 님이 오는 걸 반기지 않는데요?
-애초에 여기 한국인 오면 바로 계곡 점령하고 백숙부터 판다. ㅋㅋ
-차림표 : 한방 백숙(2인) 100,000원
-한국일 때나 참았지 스칸다면 어림도 없지! ㅋㅋ 바로 밥상 리버스!
산 전체의 색이 알록달록했다.
신이 위에서 다양한 색의 물감을 흩뿌리면 이런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음…… 물줄기 따라서 올라가 보세요. 아마 안내인이 나올 거예요.」
“안내인?”
「무지개 사원은 음…… 뭐랄까, 진짜 신기한 곳이긴 해요.」
-이봐, 무지개 사원 강하냐?
-ㅈㄴ 강함.
-넌 거기서 몇 위 정도 하냐? 3짱?
-사천 왕 중 최약체도 못 됨.
-개쩌리였누, 냄새나니까 조용히 가자.
-와 근데 레이서가 그렇게 밀렸다고?
-개뻥임. 사실 좀 잘 나갔음.
-역ㅋ시ㅋ 배나무 수도사!
-레이서가 울면 배즙 나오나요?
-갈아 마신 배 나온답니다.
-니들 아까부터 계속 뭔 얘기하는 거냐?
성진이 산을 한참 올랐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신비한 연기가 시야를 제한했다.
산을 오르던 중, 특이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성진이 멈추자 레이서도 설명했다.
「그래! 이 나무! 기억났어! 여기까지 오면 거의 다 온 건데? 잠만 기다려 보죠. 안 오면 꽹과리라도 쳐야 할 듯;」
스윽.
성진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이 들렸다.
하지만, 이 기척은 일부러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상대가 자신이 접근하니 미리 대비하라는 경고 같았다.
사악.
사아악.
나무들이 출렁였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상대에게 시청자들이 기겁했다.
-저게 뭐시여!
-모야! 왤케 커!
크르르…….
나타난 상대는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신장은 성진의 어깨 정도 올 것 같았고 대봉을 한 손에 쥐고 늑대의 등에 서 있었다.
여기까진 평범했지만, 늑대가 일반적인 늑대가 아니었다.
흰 털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무척 거대했다.
마치, 단단한 바위를 보는 듯했다.
상대가 성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방인, 무슨 일이냐? 이곳은 어떻게 온 거지?”
「개다래나무 수도사구나. 내가 아는 애랑은 다르네, 후인인가 본데요? 음…… 그냥 제 후인이라고 하세요. 그게 빠르겠네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에게 답했다.
“레이서의 후인입니다. 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네이서?”
“레이서.”
“네있어?”
“모르십니까?”
“그런 이름은 모르는데?”
상대가 레이서를 모르는 듯했다.
시청자들이 그를 놀렸다.
-풉ㅋ 풉ㅋ 뭐? 사실 잘 나갔다고?
-당장 나가!
-코딱지만 파도 추앙받을 것처럼 하더니 ㅉㅉ 역시 자뻑종자였네.
-ㅅㄱ링 초모 맘들 극대노해서 가정방문 예정.
-이때다! 하고 레이서 깔려고 모여드네. ㅋㅋ
-얘들아, 애는 착해. 괴롭히지 마.
성진은 설마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다른 식으로 접근했다.
“혹시 배나무 수도사를 아십니까?”
“히…… 힉!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배나무 수도사라고 했습니다.”
“배나무다! 배나무야아!”
늑대도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지 같이 놀라서 펄쩍펄쩍 뛰었다.
헥…… 헥헥…….
-댕댕이였누. ㅋㅋㅋ
-커-엽. ㅋㅋ
-근데 레이서 뭐 사고치고 나옴? 배나무라고 했다가 가서 배나무로 회초리 맞는 거 아닌가?
상대가 성진에게 말했다.
“따라와, 데려가 줄게!”
늑대는 성진이 따라오도록 폴짝폴짝 뛰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개다래나무 수도사가 말했다.
“무지개 사원으로!”
개다래나무 수도사는 늑대에 올라타서 사원을 향해 계속 소리쳤다.
마치 자신이 먼저 알았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아이처럼.
“배나무다! 배나무가 왔다!”
성진이 고개를 몇 개 넘자, 웅장한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규모였다.
***
천종에서 송하린이 마주한 건 오로지 칼 한 자루였다.
그녀가 찾던 사부는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그녀는 울적해졌다.
이미 사부가 죽었다는 걸 알았기에 다시 한번 눈물을 쏟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슬프지 않을 리가 없다.
“아이고오…… 장수할 것처럼 하더니 이렇게 일찍 가면 어떡해!”
농담을 받아쳐 주었을 것이다.
분명,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러게나 말이다.
귀에 익숙하고 포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또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뭘 좀 먹어야겠는데…… 기운이 달려서 그런가?”
-또 처먹냐?
“응?”
흐릿한 형체의 진호가 칼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송하린이 소리 질렀다.
“으아아악! 귀신이다!”
-그래, 사부님 왔다. 반갑지?
“죽어! 죽어어!”
-…….
퍼뜩 정신을 차린 송하린이 물었다.
“정말 영감이야?”
-그럴 리가 없지.
“영감이 남긴 심상이구나…….”
-……하린아, 나를 보러 와 주었구나.
송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운이 없어 울지도 못 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진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영감.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그래도 멀쩡히 돌아와서 이렇게 말은 전하지 않느냐? 이 어찌 불행하다 할까?
“헛소리는…… 50년만 더 버티지.”
-이것아! 내 나이가 이미 칠순이 넘었었다. 만물의 순환을 50번이나 더 지켜보고도 살아 있으면 내가 마왕이게?
“히히…… 그랬지. 우리 영감, 쭈글쭈글했었지.”
-하린아, 천종에 올랐다는 것은 단지 나와 작별하기 위해서냐?
“뭐…… 겸사겸사.”
-혹시…… 결심을 한 것이냐?
무언가의 결심.
송하린은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했다.
누군가를 책임지지도 못했고.
그래서 진호가 월인들의 삶을 책임지고 고개를 숙이고 칼을 휘두를 때, 그에게서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느꼈다.
“모르겠어.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인걸?”
-하린아,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네게 그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먼저다.
송하린의 머릿속에 월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진호가 평생을 바쳐 구원하려 했던 사람들.
-과거에 우리는 너무 큰 잘못을 했다. 나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했다. 50년이 지났다고?
“응.”
-월인들은 세상으로 나갔느냐?
“아니.”
-슬프다…… 슬퍼.
“영감, 내가 영감을 도울 수 있을까?”
-하린아……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알아.”
월인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위에 서야 한다.
월인은 평등하다.
그들의 위에 서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뒤를 이어라. 천종에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르게 하는 이유를 아느냐?
“고통을 주려고?”
-순수해지기 위해서다. 모두 하나의 의식을 위해서. 칼에 매달린 환(丸)이 보이느냐?
“응.”
-마령환이다. 진정 네가 각오했다면 그 마령환을 삼켜라.
“각오는 했는데, 실패하면 어떻게 돼?”
-죽지.
“말도 참 쉽게 하네.”
-하지만 나는 믿는다. 하린아, 네게서 내가 보았던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텁.
송하린은 지체 없이 마령환을 삼켰다.
몸의 변화가 시작됐다.
우드득, 우득.
거짓말처럼 활력이 솟고, 힘이 넘쳐났다.
하지만, 과했다.
“끄으으…… 아파…….”
-하린아.
“아프다고오오오오!”
-칼을 쥐어라. 죽기 싫다면.
송하린이 칼을 뽑았다.
그러자, 고통이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으아아아아아!”
-절벽에 너를 새겨라. 마가 아니면 흠집도 내지 못할 것이다.
절벽에는 이미 진호가 새긴 글자가 있었다.
일(一).
필체도 그를 닮아 올곧았다.
***
송하린은 고통을 덜어 내기 위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핏줄이 불거져 나오다 못해 터져 나갔다.
이에 힘겨워진 그녀는 현천잠의와 화린을 벗어던졌다.
“으아아아!”
-마(魔)는 무엇이냐?
“몰라!”
-생각해라. 생각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모른다고!”
-심연을 들여다본 인간만이 심연을 이해할 수 있다. 해내야 한다, 송하린. 내 제자야.
송하린의 눈에 다시 독기가 깃들었다.
정신을 다잡고 심상으로 빠져들었다.
휘이잉.
여전히 빙산이다.
정상에는 유년의 송하린이 얼음에 갇혀 있다.
두껍고, 무거워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아파요, 영감.”
-스칸다에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칼이 필요해.
“검?”
-네가 얻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칼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벌써 격통에 실신까지 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는 물었다.
-마를 외면하면 선(善)도 이해할 수 없다. 양극단에 서야 비로소 그 반대편도 이해하는 법.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네가 쥐고 있는 칼은, 마를 이해한 자만이 쥘 수 있다.
지직.
송하린의 어깨에 새겨진 검은 문신이 이리저리 출렁였다.
그때마다 고통에 몸서리쳤다.
“끄아아악!”
-하린아, 나는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내 가능성?”
-마를 깨닫는 순간, 가치는 뒤틀리고 저울은 무너진다.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도 모르게 되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내 선조들은 모두 그렇게 실패했다. 나조차 벗어난 듯 보였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진호의 말은 이어졌다.
-너는 다르다.
송하린은 선과 악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아니, 이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후회만 남을 뿐이야.”
그녀의 능력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무섭다.
하지만, 진호의 생각은 달랐다.
-후회가 어때서 그러느냐?
“하지만…….”
-장담컨대, 네가 마를 통제하더라도 기준이 없다면 괴물이 될 것이다. 마를 이해하는 순간 인간의 진리는 무의미해져.
“싫어. 싫다고.”
-떼쓰는 건 여전하구나.
“아프다고, 그만할래.”
-죽을 것이다.
“죽지, 뭐…….”
송하린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인간에 대한 불신.
위선자들과 그녀가 성장하며 받았던 배신감들.
모든 게 원인이었다.
그녀가 억지로 밝은 사람이 된 것,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 것.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원하게 된 것.
-클클…… 하린아.
“왜.”
-그렇다면 할아비랑 얘기나 나누자꾸나.
“그래, 그러자.”
손녀를 아끼는 할아버지처럼 송하린을 가둔 얼음을 경계로 두 노소(老少)는 대화를 시작했다.
-여전히 사람들이 무섭고 싫다고 하는구나.
“무섭고 싫은 걸 어떡해.”
그들의 푸른빛은 그녀를 위축되게 했다.
그들이 두려웠다.
-상처가 많은 내 제자, 너를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옆에 있어 줘, 영감.”
-언제쯤에서나 스승님이란 소리를 들을는지…….
“하하…… 평생 못 들을 거야. 나는 이제 곧 죽는다며.”
진호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의 식어 가는 눈이 그 눈빛을 마주했다.
-하린아, 마왕을 쓰러트려도 세계는 여전히 무너지고 있다.
“왜…… 대체 왜…… 나한테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일어서!
“싫어!”
-일어나라, 하린아! 마에 잡아먹혀서는 안 돼!
그녀의 세상이 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던 공간에 빛이 사라져갔다.
빙산의 아래부터 서서히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봉우리가 사라지고, 능선이 사라졌다.
그녀의 스승인 진호도 사라졌다.
“이대로…… 끝낼래.”
푸른빛이 무서웠다.
그때, 그녀가 눈을 감으려 하는 순간.
불현듯 어떤 빛이 떠올랐다.
붉다 못해 눈이 타버릴 것 같은 색.
찬란한 붉은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형님…….”
그녀는 붉은빛을 신뢰했다.
하지만 붉은빛들은 푸른빛에 밀려 자멸했다.
그래서 슬펐다.
그런데 올빼미, 이 사람은 다르다.
세상을 홀로 밝히려는 듯 붉은빛은 주위의 푸른빛을 잡아먹었다.
그가 먼저 행동함으로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절대적인 신뢰.
어둠에 잡아먹힌 송하린은 그 붉은빛을 잡으려 손을 휘저었다.
어둠이 마침내 얼굴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제발…… 형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진흙탕에 빠진 듯 손이 미끄러졌다.
“제발…… 제발……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요…….”
손이 미끄러져 붉은빛과 멀어졌다.
“아…….”
끝이다.
송하린이 멀어지는 붉은빛에 슬퍼했다.
하지만, 붉은빛은 되돌아왔다.
콱!
되돌아와 그녀의 미끄러운 손을 움켜쥐었다.
“형님…….”
그녀를 둘러싼 어둠이 물러갔다.
밝은 빛이 사라진 그녀의 세계에 달이 떴다.
달빛은 포근하게 그녀의 빙산을 감쌌다.
쩌적.
그녀를 막아서는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만난 거구나, 붉은빛을.
“응.”
진호가 감탄했다.
-평생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진호가 빙긋 웃었다.
그녀도 마주 웃었다.
파자작!
얼음이 완전히 깨져나가자,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송하린은 나이가 들어 숙녀가 되었다.
심상에서 튕겨 나가자 절벽이 보였다.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듯한 주변 소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눈은 절벽만을 바라보았다.
-새겨라, 너의 이름을.
“모르겠는데?”
-무엇이 보이느냐?
“땅이, 구름이, 봉우리가.”
-그럼 너는 무엇이 되겠느냐?
그녀가 이해했다는 듯이 팔을 휘둘렀다.
낯선 칼은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그 움직임에 크게 호응했다.
쩌정!
절벽에 진호와 같은 일이 새겨졌다.
“스승님, 도와줘.”
-이제야 스승이라고 부르는구나.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교주들은 전부 절벽에 일 획을 새기기 급급했고 제대로 성공한 것은 진호 1명뿐이었다.
하지만 송하린의 손은 일 획에서 멈추지 않았다.
쩌정!
쩌정!
“사, 삼획!”
어느새 노승이 올라와 있었는지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벽에는 스승의 획을 빌려 쓴 천(天)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린아.
“예.”
-네가 하늘이다.
“……네.”
-네가 천마(天魔)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세상을 사랑해라, 그리하면 세상도 너를 사랑할 것이다. 선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라.
“가는 거야?”
-간다, 사랑한다. 내 제자.
“잘 가, 영감.”
-썩을 년.
진호의 심상이 사라졌다.
송하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은 고목처럼 말라 있었고, 칼을 든 팔은 앙상했다.
머리는 미친 사람처럼 길게 자라 있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딸랑.
딸랑.
천종의 다른 길로 올라와 있는 월인들이 그녀를 향해 절을 했다.
“천마강림(天魔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천마강림…… 만마앙복!”
노승이 다가와 그녀에게 곤룡포와 닮은 검은 색에 황금 수실로 장식을 한 상의를 걸쳐 주었다.
송하린이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에 천마도(天魔刀)라 음각된 칼.
탄타르빌의 별의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칼.
흔히 마검이라 불리던 칼이다.
그녀의 문신은 변했다.
검은 구름들은 날개 뼈로 동그랗게 뭉쳐 검은 원이 되었다.
그 모습이 달처럼 보였다.
흑괴(黑怪)는 현월신교(弦月神敎)의 천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