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80화 (80/222)

# 80

80화

파란 눈과 붉은 눈, 양쪽 눈이 다른 일행이 걷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차량도 퍼져버린 건 물론이고, 중간중간 비가 내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민간인들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가.”

“얼마나?”

“이대로 쉬지 않고 보문산까지 가야 하는 정도?”

“전투가 일어나면 죽는다는 얘기군.”

“응. 그렇지.”

질문과 대답을 한 두 그레이가 뒤로 돌아보았다.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하게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냥 마음에 걸렸다.

‘휴머노이드가 그냥이라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일 앞서서 따라오는 여학생이 자신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거죠?”

“······.”

“기대돼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도 얼른 가요!”

“그래.”

분명 그냥은 아닌 것 같다.

옆에 있는 그레이가 물었다.

“대화가 어떻게 진행될까요?”

“꿍꿍이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재성이랑도 교류가 별로 없어서 몰라.”

“재성이나 혜령 둘 다 믿을 만 하다고 하던데요?”

“그렇다고 함부로 모든 걸 내줄 수는 없지.”

“아마 우리 보고 싸워달라고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떡하죠?”

방금 질문을 한 이는 아직 세상에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은 휴머노이드다. 그렇기에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뭘 어떡해. 거절하면 그뿐이야.”

“상황이···.”

“상황이 뭐? 개나 주라 그래. 휴머노이드가 언제부터···.”

“대장! 저기!”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거칠게 숲을 헤치며 접근하는 소리가.

스륵···

찌익···

숲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몬스터의 대규모 군집···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울창한 나무가 찢어지는 것처럼 기울었다. 단일 개체다.

“숨어! 죽고 싶지 않으면!”

“맞서 싸우는 게···.”

“그만한 화력은 없다고! 머릿수만 많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서···.”

모두가 건물 사이로 스며들기 전에, 자신이 예상한 괴물은 나무와 건물을 넘나들며 이곳까지 당도했다.

쿠웅-

건물 위에 내려앉은 몬스터의 크기는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쿠으웍?”

근육질의 신체.

고릴라와 흡사한 외모와 지나치게 큰 양팔.

콩크다.

“크아아아아!”

쾅! 콰콰콰쾅!

가슴을 두드리는 콩크.

북 치는 소리 대신 공포를 만들어 내는 굉음이 들렸다.

‘멈추면 다 죽을 텐데···.’

콩크가 떠나기까지 모두 꼭꼭 숨어서 기다렸다가 다시 이동하면 보문산까지 도착할 배터리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가진 화력으로는 콩크를 쓰러트릴 수 없다.

‘일단 피하고 생각···.’

흩어지는 와중에 다들 무사히 피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유독 굼떠 혼자서 무리의 끄트머리에 붙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과 인사를 나눈 인간 여학생, 지영이다.

근처에 노인이 보인다.

저 노인을 돕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명체다.

“피해!”

“아저씨! 저, 저···.”

후우웅-!

“크아아!”

콩크가 크게 뛰어 그녀의 곁으로 내려서려 했다.

‘안돼!’

안돼?

왜?

모른다, 하지만 그냥은 아닐 것이다.

철컥-

자신도 모르게 소총을 장전했다.

“고릴라 새끼야, 여기다!”

투두두두두두두-!

에너지 탄이 콩크의 가죽을 두들겼다.

따가운 정도에 지나지 않을 테니, 곧 누가 쏘아냈는지를 찾을 것이다.

“크워어어!”

쿵! 쿵!

콩크의 고개가 돌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

지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처롭고 방황하는 눈빛.

마치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피하라고!”

“아, 아저씨! 하지만···.”

후우웅-!

콩크가 크게 도약했다.

자신은 이제 저 흉악한 팔에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다. 팔이 뽑히면 인공 관절과 나사들이 나뒹굴 것이고, 다른 부위가 뽑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흉할 텐데···.’

죽음이 임박한 순간,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자신은 콩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지영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냥은 아닐 것이다.

“아저씨!”

“살아···.”

그런데, 콩크가 떨어져 내리기 전에 엄청난 에너지가 밀어닥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부터 날아온 듯한 그 에너지는 귀를 틀어막아도 뚫고 들어올 정도로 큰 소리를 냈고, 허공에 지나간 흔적을 남겼다.

콰아아앙!

콩크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하늘로 뛰어오를 때와 모습이 달랐다.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시체가 자신의 주변에 철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방금의 에너지가 아니었다면, 몇 초가 지나기 전에 자신은 찢겼을 것이다.

“아, 아저씨··· 방금···.”

“뭐지···?”

에너지가 날아온 방향을 보는데, 누군가 걸어왔다.

‘남자? 병기는 저게 다인가? 그럴 리가···.’

못해도 전차는 끌고 왔을 줄 알았다.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지만.

어둠을 뚫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상열과 그 일행, 맞습니까?”

“그걸 어떻게··· 혹시···.”

“연락을 보내셨더군요.”

“연락? 아···.”

배터리가 떨어져 갈 때, 차량마저 퍼지자 재성 일행의 채널에 억지로 구원 요청을 했다.

노이즈가 심해 제대로 전해진 지는 확인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런데 방금 그 에너지는···.”

“···가시죠. 여러분이 마지막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분의 배터리가 있습니까?”

“배터리는 따로 챙겨오지 않았는데, 슈트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 가동 시간이 모자란 사람들이 좀 있어서.”

“몇 명이죠?”

“다섯··· 명 정도? 왜 그러십니까?”

최상열은 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검은 코트에 이어셋을 찬 모습.

겉으로 보이는 무장은 등에 멘 장검과 손에 든 반자동 소총이 전부였다. 그가 들고 있는 반자동 소총은 총열이 보기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본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잠시 소총을 쳐다보다 아무 곳에나 휙 던졌다.

“일행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아··· 예.”

자신이 채널에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하자, 잠시 후 사람들과 그레이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 배터리가 부족한 사람들을 남자에게 데려갔다.

파지직···

남자는 신비로웠다.

아니, 신비롭다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부족했다. 그가 배터리를 어루만지고 지영에게 건네주었다.

지영이 소리쳤다.

“배터리가 차올랐어요!”

기뻐하는 그녀가 자신에게 미소지었다.

자신도 신기해서 남자를 쳐다봤다.

분명 인간이라고 했는데···.

“성함이?”

“올빼밉니다.”

“올빼미··· 재성이 합류했다는 그 사람들 무리군요.”

“네. 이제 떠나죠. 소음 때문에 안티들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영이 옆으로 다가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사람 사회의 미적 기준으로는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다. 평범한 인상.

“대단하신 분 같아요! 대전에 저런 분이 있었나요?”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어쨌든 다행이에요! 다들 무사히 보문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싱긋 웃는 지영.

이제는 확실해졌다.

자신은 저 미소가 좋았다.

햇살이 비추는 기분.

“다행이네.”

역시 휴머노이드에게 그냥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

‘오늘이곳에서’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 뭔 헛소리야. 반장! 불 켜고 책 펴!

- 아~ 선생님! 제바아아알!

- 조용히 해!

- ㅆ 듣기만 해도 개 빡친다 ㅋㅋㅋ 반장 눈치 없이 불 켜는 모습까지 상상했어ㅓ

‘나님적응함’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올빼미 바라보는 시선을 1인칭으로 매일 느끼니 이제 저 시선에 적응함 훗]

-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렴

- (대충 경멸, 멸시, 극혐하는 시선들)

- 그만해 얘들아··· 잘못했엉···

‘오늘도멋지셨습니다’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콩크?인지 뭐시긴지 뭐 가소롭죠 ㅋㅋ]

- 하루 사이에 출장을 얼마나 다닌 건지;

- 피크 때 에어컨 기사님인 줄 ㅋㅋ

- 그레이들 이제 얼추 모였나요?

- 올 만한 애들은 다 모였다고 하던데 ㅋ

- 회담 잘 됐으면 좋겠다!

- 짝! 사겼으면 좋겠다. 짝! 이거 맏찌?

- 그건 맏찌~~

- 아니야!

성진이 은신처의 관계자만 다가갈 수 있는 장소 앞에 섰다.

똑똑···

“들어오게.”

끼이익···

성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출한 공간에 손성일이 앉아있었다.

그가 앉은 위치는 침상 앞이었다.

“아직 안 깨어났습니까?”

“깨어나기 싫은 거겠지. 이렇게 아비가 떡하니 지켜보고 있으니까.”

“···일어날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손성일이 보고 있는 침상의 주인을 성진도 바라봤다.

일전의 손동원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다.

코가 조금 더 컸고 눈은 더 작았으며, 피부는 거칠었다. 그만큼 전의 손동원이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내 아들···.”

손성일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가 성진을 보고 말했다.

“이제 가세나. 할 일을 해야지. 부르러 온 거지?”

“알겠습니다. 가시죠.”

“작별 인사 좀 하고 가지.”

손성일이 손동원의 이마를 쓸었다.

그 동작 하나에 애정이 담겼음을 성진도 느꼈다.

“다녀오마.”

어쩐지 손동원이 대답한 기분이었다.

손성일과 성진이 자리를 떴다.

****

은신처는 모든 그레이와 사람들이 머물러도 될 정도의 공간이었다.

은신처라 하기에 규모가 작고 숨어들 수 있는 공간을 연상했던 시청자들은 그 연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 영감님 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신 겁니까···

- 햄버거 쿠폰 하나만 쏴주십시오. 경고입니다.

- 햄버거는 왜?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이면 충분한데

회의장은 아니었지만, 방의 집기를 전부 빼고 커다란 원탁을 집어넣은 다음 의자를 되는대로 갖다 놓자 그럭저럭 회의장같이 생긴 공간이 만들어졌다.

성진과 손성일이 회의장에 들어섰다.

아직 시간이 일러, 많은 인원이 모여 있지는 않았다.

그레이 중, 머리의 반이 뜯겨 나가 얼기설기 뭔가를 감아놓은 남자가 말을 툭 내뱉었다.

“나보다 늦게 올 정도니, 별로 열의가 없어 보이네.”

- 나 저 포지션 알아

- 먼데

- 모험가 협회 1층 3번 테이블에서 시비 거는 포지션

- 개디테일햌ㅋㅋㅋㅋ

- 맥주 한잔 걸치고 옆에 여자 모험가 둘 정도 있음

- 스칸다에서 많이 봤지 ㅋㅋ 옆에 모험가 사제랑 법사임

성진이 자신에게 한 얘기인가 싶어 대꾸하려는데 손성일이 먼저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불편했습니까?”

“······불편한 건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자신에게 사과하자 상대도 더는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옆에 앉아서 듣고 있던 재성이 말을 꺼낸 그레이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아직 약속한 시간 30분 전인데? 너 쓸데없이 부지런하다?”

“···남 이사.”

“좋은 태도로 임하자고, 좋은 태도로. 우리도 도움받긴 했잖아. 너네도 오다가 올빼미한테 구조됐다면서?”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아, 올빼미 님!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 ㅋㅋㅋ 캐릭터 뭐여

- 흉악한 느낌이었는데 느낌만 그랬누;

재잘재잘 떠들려던 그레이를 재성이 자제시키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탁자를 둘러싼 의자에 주인들이 앉았다.

정수열이 얘기를 시작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해보라고, 들어는 볼 테니까.”

“너희도 올빼미한테 구조···.”

“재성아. ···일어난다?”

“알았어. 장난이야. 이제 장난 끝!”

- 재성이 억지로 분위기 풀려고 저러는 듯

- 약간 터미네이터의 걔 느낌나는데 그···

- 스카이넷?

- 아니 ㅅㅂ

정수열이 첫 질문부터 중요한 문제를 끄집어냈다.

“전투형 휴머노이드 수천여 기··· 맞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 음, 아니지. 가두고 있는 거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깨어나자마자 블랙이 될지 모르는 존재들인데.”

“전투형은 노동형 휴머노이드나 교육용, 생활용 휴머노이드 두 세기는 너끈하게 상대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병기를 다루는 지식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으니···.”

“그만, 물건 팔러 왔어? 우리도 아는 내용을 왜 얘기하고 앉아있어?”

그레이들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성진에게 마지막으로 구출된 최상열이라는 그레이가 그들을 중재했다.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으니, 적당히들 하자고. 얘기를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되잖아.”

“뭐? 너 언제부터 앞잡이 행세하기 시작했냐?”

“뭣도 없으면서 무게만 잡으니까 그렇지. 전투형 휴머노이드 긁어모을 때 넌 인원도 투입 안 했잖아. 왜 네가 생색이야?”

“···이게 진짜!”

철컥-

벌떡 일어나서 최상열에게 권총을 겨누려던 그레이가 멈칫했다. 권총은 성진에게 이미 빼앗겨 있었다. 어떻게 빼앗긴 건지 보지도 못했다.

“뭔···.”

“앉아.”

“이 새끼가···.”

“앉아.”

“······시발.”

성진은 상대가 별 말없이 앉자 권총을 돌려주었다. 언제든 허튼수작을 부리면 다음은 없다는 눈빛을 보내며.

상대도 그 의미를 아는지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다.

- 참교육 ON

- 개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다

- 시끄러운 고양이 올빼미한테 부뚜막으로 맞는다

- 뭔가 이상한데 ㅋㅋ

손성일이 말했다.

“자리에 모여준 여러분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손성일입니다.”

“알아, 대전에서 당신 모르는 휴머노이드가 없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뭐? 그걸 정하자고 모인 자리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나?”

“수열, 이분들에게 말해주게.”

“예, 어르신.”

정수열이 홀로그램 장치를 조작해 탁자의 한가운데에 뭔가를 띄웠다. 그것을 유심히 보던 그레이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이 숫자는 또 뭐야?”

“우리에게 남은 시간입니다.”

“···남은 시간이라니?”

그레이들이 불길함을 느꼈는지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정수열이 상대가 의문을 가질만한 화제를 꾸준히 던졌기 때문이다.

“펜리르의 목표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제 곧 대전의 휴머노이드를 이제 뜻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그렇게 되기까지 남은 시간이고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안티의 연산 장치를 분석해 네트워크가 어디까지 감염됐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

“3일. 그 안에 펜리르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네트워크에 접속한 경험이 있는 휴머노이드는 모두 안티가 됩니다.”

3일이라는 말에 회장이 술렁였다.

막연히 펜리르를 피해 다니면 될 줄 알았던 그레이들이 크게 동요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안티가 된다고? 뭐 잘못 안 거 아니야?”

“펜리른지 뭔지 그 자식이 뭐하러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확실합니다. 펜리르가 휴머노이드 전부를 통제하게 됐을 때, 대전은 완전히 끝날 겁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건 지키는 싸움이 아닙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요. 함께 맞서 싸워야 합니다.”

“푸흡··· 푸하하하하!”

한쪽 구석에서 경박한 웃음을 터트리는 그레이가 있었다. 여인의 모습이었다.

“재밌는 소리네. 최근 들어 들은 얘기 중에 제일 웃겼어. 배꼽 빠질 뻔했네. 아, 농담이야. 배꼽도 인공일 테니까. 빠지면 문제가 있는 거겠지.”

- ?? 뭐야?

- 쟤 혼자 왜 저래? 근데 예쁘다

- 혼자 분위기 깨는 것 좀 봐 ㅡㅡ 불편하네; 근데 예쁘다

여성형 휴머노이드는 정수열에게 말했다.

“다 좋은데 말이야··· 나는 당신들이 마음에 안 들어. 너무 뻔뻔하잖아?”

“무엇이 말입니까?”

“휴머노이드를 학대하고 우습게 여길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함께 싸워야 합니다!’ 푸하하··· 너무 코미디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입 닥쳐.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그레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당한 수모를 너희가 알아? 가족은 무슨··· 내 얼굴에 소변을 갈겨대던 게 가족이야? 없던 일로 하고 잘해 보자? 누구 좋으라고?”

“······.”

“역겨운 인간들···. 우리는 너희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를 줄 알았지?”

- 뜨끔

- 어, 어떻게 알았지!

- (양심에 찔리는 중)

- (박력에 반했다)

말을 꺼낸 그레이가 문가로 다가섰다.

“마음 같아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참을게.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끼···

문을 열려던 그레이가 멈칫했다.

“야··· 너 뭐야?”

“앉아. 듣고 가.”

성진이 문고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레이가 문고리를 으스러트릴 정도로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진짜··· 여기 있는 그레이랑 나랑 같다고 생각해? 나 전투형이야. 사람도 여럿 죽여봤어. 너도 죽여줄까? 그래도 돼?”

문 앞에 선 그레이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그레이들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먼저 손을 뻗었다.

“시발!”

부웅-!

짧은 호흡으로 가져간 정권.

하지만, 성진의 얼굴을 박살 내려던 그녀의 계획은 실패했다. 성진이 그녀가 뻗은 팔을 가볍게 흘리고 이어지는 발차기도 한 손으로 툭 밀쳤다.

훙!

후웅-!

섬뜩한 주먹질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성진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고 그녀는 점차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탁!

아예 죽일 생각으로 차올린 발차기를 어린애 놀아주듯이 손등으로 받아내는 성진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너··· 대체··· 인간 아니야?”

“인간이다.”

“뭐 이런···.”

지켜보던 재성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만하고 앉지? 지루하다.”

“너흰 뭐 알아?”

성진을 가리키며 턱짓하는 그녀에게 그레이들이 끄덕였다.

“알지.”

“너만 모를 거다. 아니, 모르는 애들도 있긴 하겠네.”

“여기까지 온 것도 저 사람 없었으면 불가능했어. 다 죽었을 거니까.”

“쟤는 맨날 전투형··· 전투형··· 질리지도 않나. 휴머노이드가 휴머노이드지 뭔···.”

“이 개···.”

성진이 그녀에게 말했다.

“앉아. 듣고 가.”

처음과 똑같은 말이었지만, 느껴지는 압박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얘기나 들어보지.”

- (이럼 안 때리겠지?)

- 정보) 올빼미가 박살 낸 첫 안티는 여성형이었다.

- 공평하게 폭력을 행사하시지

- 수준 높은 설득(물리)

- 앉아 요정 ㅋㅋ

“거 봐, 앉을 거면서. 뭐하러 힘을 빼. 여기 성질 나쁜 놈이 한 둘이냐? 왜 가만히 듣고 있었겠어?”

“···닥쳐라.”

“늬예늬예. 덱체레··· 주깅다···.”

“야! 너···.”

- 재성이 놀리는 거 봐 ㅋㅋㅋ

- 윾쾌한 형이라니까 저 형 ㅋㅋㅋ

정수열이 그녀가 다시 잠잠해진 것을 보고 말했다.

“이곳 은신처에는 우리가 사용할 병기가 적재되어 있습니다. 슈트는 물론이고 총기와 차량, 탄약도 충분하고요.”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거지?”

손성일이 답했다.

“국가의 일이니 함부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어. 그냥 물어본 거야. 그래서 계획은?”

“3일 내로 병기로 무장한 병력과 함께 펜리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광역시청까지 밀고 가는 겁니다.”

“무대뽀네. 싸움은 기세라 이거야?”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네트워크는 장악당했고, 도와줄 곳도, 시간도 없습니다.”

“제기랄···. 상황이 심각하긴 한가 보네. 결행은? 언제야?”

“준비를 마치면 내일이라도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손성일이 그레이들을 둘러보고 재성에게 물었다.

“재성, 그 전투형 휴머노이드들은···.”

“아, 그것들?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다행이지?”

정수열이 자조하듯 웃는 재성에게 질문했다.

“그들은 네트워크에 감염됐을 겁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하··· 올빼미도 알고 있기는 한데, 좀 말이 안 되는 계획이라··· 되면 기적이고 실패하는 게 당연한 계획이야. 들어볼래?”

정수열이 끄덕였다.

“듣고 웃지마, 솔직히 이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내가 친절하게 자살 방법을 일러준다고 생각하고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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