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그으으으응···
덜컹-!
“쉬었다 간다!”
“오케이!”
“쉬는 김에 장애물 좀 치우자고? 괜찮지?”
“역시··· 이번에도 쉬는 게 아니었네.”
“그럼 걸어가리?”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용서 못 해!”
- 승철이 또 신났네 ㅋㅋㅋ
- 승철 tv 삐슝 빠슝
- 승철: 나들이다 나들이 헤헤헤
문명의 종착지.
종말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존재를 차량이 아닌 몬스터로 한정했다. 하지만, 지금 수십 대의 차량은 도로를 달려왔다.
무너진 건물 잔해 때문에 멈추어 섰지만, 그 규모만 해도 대단했다.
“이 근처가 우리가 깨울 대구의 첫 번째 등불이 있는 곳이라고···.”
“하암··· 언니 안 잤어요?”
“잠은 무슨··· 또 잤니?”
“미인은 잠꾸러기잖아요.”
최별과 김예은의 대화에 저만치 서 있던 직박구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더 분발해서 깨어있어야지. 미인들에게 실례잖아.”
“아, 뭐래. 재수 없는 건 진짜 알아줘야 해.”
“상황이 어떤 줄이나 알고 잠을 자는 거야? 하여튼 긴장이 없어, 긴장이.”
“긴장? 그건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분발해서 긴장해야지. 방금 네가 말했잖아.”
“아 진짜! 언니 저 직박구린지 쇠똥구린지 너무 짜증 나요! 나 좋아하나?”
붉은 별의 막내였던 김예은이 최별에게 칭얼댔지만, 안타깝게도 최별은 거기에 관심이 요만큼도 없었다.
“조금만 더···.”
“응? 언니? 듣고 있어요?”
“아, ···뭐라고 했어?”
“···아니에요.”
익숙한 얼굴의 수뇌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었다.
“민상 공자. 나,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날씨요? 어두침침한데···.”
“그, 그렇지요? 본녀도 날씨가 흐릿해서 울적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부산의 가속 능력 각성자인 이민상과 등불의 송하린이 떠들고 있었다.
- 송하린은 게임 클리어따윈 관심없다!
- 팬심으로 대동단결!
- 대구 가면 김정우 바짓가랑이 잡고 사인해달라 오열 예정
이민상이 이렇게 일찍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의 일이 순탄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거주민들은 역 쉘터로 전부 이주를 완료했고, 플랜트의 생산량도 다시 늘었기 때문에 생활도 문제없었다.
쉘터를 꾸려나갈 병력을 남겨두고 등불 전원과 대구를 지원할 병력은 차량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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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하나, 둘]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깨어난 첫 번째 등불입니다. 당신이 깨어난 후 부산의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눈에 파묻혔던 길가엔 꽃이 피어납니다. 칼바람은 꽃내음 섞인 기분 좋은 산들바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은 만족할 때가 아닙니다. 종말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구의 등불을 해방하십시오.」
* 이 임무는 메인 시나리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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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질구지가 커다란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이쯤부터 대구였던가?”
“맵에는 그렇게 표시되는 것 같은데, 행정 구역상으로는 딱 떨어지진 않더라고요.”
조병창이 사람들을 둘러 보고 얘기했다.
“대구 사람들과 접촉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연구 단지까지는 한참 가야 해요.”
“마중도 안 나와주고··· 너무해!”
“그쪽도 정신없는 건 매한가지라서요. 이곳에 등불이 있으니 식량이랑 보급 물자도 적재되어 있을 겁니다. 물자 챙겨서 떠났다가, 깨어날 때쯤 다시 오면 될 겁니다.”
이제는 등불의 행동 방식과 조병창의 지휘에 익숙해진 수뇌부들. 조병창이 딱히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불만은 거의 없었다.
한쪽 편에서 송하린이 이민상에게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민상 공자, 내 부탁이 있소만···.”
“예?”
“요번에 대구에 도착하면 따로 인원을 꾸려서 올빼미 님에게 간다는 것 알고 있습니까?”
“듣긴 했어요. 그런데요?”
“그··· 규모가 엄청 작은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대충은··· 몇 명 안된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송하린이 다른 수뇌부들이 못 들었다고 여기고 계속 말했다.
“그 선출 방식이 타인의 추천이 필수적인지라··· 안타깝게도 본녀의 불찰로 인하여 맹우들과의 관계가 그리 돈독하지 않소이다. 이는 부덕의 소치요. 죽을까요?”
“···하실 말씀이?”
“추천 좀 해주십시오. 민상 공자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직박구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송하린! 뒤에서 조작하지 마라.”
“조, 조작이라니? 본녀는 아직 아무것도···.”
“밀수가 다 말해줬다.”
“제기랄··· 밀수 놈들···. 제 할 일이나 신경 쓰시지.”
- ㅋㅋㅋㅋ 우리는 낮에는 새고 밤에는 쥐렸다
- 숨기려고? 어림도 없지! ㅋㅋ 바로 고자질!
- 정보) 밀수들이 할 일 중에선 고자질이 제일 수준 높은 행위이다
- 우리 입으로 말할 건 아니지 않냐···
볼멘소리로 투덜대던 송하린이 움찔했다.
직박구리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왔다.
“왜 그래? 삐졌냐?”
“삐졌소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오고 있소.”
“뭐?”
“대비.”
송하린의 초감각이 적의 기척을 먼 거리에서부터 잡아냈다.
스릉-
기이잉-
철컥-
송하린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조병창이 뒤편으로 소리쳤다.
“대비해요! 차량 고정하고 사격은 지시 전까진 대기만!”
등불의 전투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수뇌부 몇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적은 근접전으로 쓰러트리고, 그게 아니라면 화력의 집중으로 쓰러트린다.
쿵!
쿠웅!
땅이 울렸다.
파괴된 빌딩 숲으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와아아아아아!”
부산이 그랬듯이 대구의 상황도 다를 게 없었다.
종말 거부 장치가 작동했더라도 모든 몬스터들이 사라지진 않는다.
요르문간드가 있었을 당시에는 숨어서 지냈을 몬스터들이 대로를 활보하며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하는 듯했다.
김예은과 직박구리가 수군거렸다.
“포레스트 자이언트··· 같아 보이는데···.”
“숲이 아니니까 앞머리에 시티나 빌딩이 붙어야 하지 않을까?”
“더럽게 크네요, 앞에 슈퍼도 붙여야겠어요.”
“그럼 슈퍼 시티 자이언트로?”
- 이름 개 촌스럽네 ㅋㅋㅋㅋ 직박구리가 생각해낼 법한 이름이다
- 드럽게 크다; 요르문간드 있을 때 어디에 숨어 산 거지?
- 등잔 밑이 어두우니 등잔 밑 아니겠음?
- 그럼 그 등잔은 슈퍼 시티 등잔임?
조병창이 한숨을 쉬고 지시를 내렸다.
대형 몬스터니 오히려 결정하기 쉬웠다.
“사격 금지! 근접전으로!”
차량 뒤에서 사격을 준비하던 단원들이 다행이라는 듯 총을 내렸다. 조병창은 몬스터가 가까이 접근해서 차량에 피해를 주는 것을 경계했다.
“실력들 좀 보여주세요.”
“뭐야··· 병창아, 요즘 권력 맛을 보더니 말하는 게 이상해졌다?”
“···조용히 해. 권력의 철퇴에 맞고 싶어?”
- 권력의 맛~ 넘모 달콤해ㅋㅋ
- 타락했구나···
조병창이 머리를 긁적이자 차일국이 웃었다.
대형 몬스터에게는 통상적인 공격이 먹혀드는 경우가 많지 않다. 가죽은 두껍고, 회복력이 공격력을 상회 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므로.
주변에 청량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수뇌부 몇이 자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듯 뒤로 빠졌다.
송하린, 최별이 나섰다.
송하린의 머리가 뒤로 너울너울 젖혀지며 기운을 뿜어냈다. 푸른 빛이었다.
핑-!
펄스를 주입한 앵커가 자이언트의 어깨에 박혔다.
핑-!
붉은빛을 뿜어내는 최별의 앵커도.
그리고
핑-!
뇌전을 머금은 누군가의 앵커까지.
“크와아아아악!”
앵커를 타고 접근하는 세 명의 등불에게 자이언트가 격노했다.
앵커의 모양은 가죽을 뚫고 들어가면 고리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쉽사리 떼어내기 어렵다. 억지로 떼어낼 경우, 크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콰직-!
자이언트는 빌딩의 외벽을 뜯어내 다가오는 세 명에게 던졌다.
후우우웅-!
흉악한 파공음이 들렸다.
콰아앙!
콰앙-!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낸 송하린과 최별은 자이언트의 다리를 노렸다.
송하린이 자이언트의 압박에도 웃음 지으며 발목과 오금을 베어냈다.
쩌저적···
베인 부분에 서리가 끼었다.
콰아앙-!
반대로 최별이 베어낸 상처는 폭발했고.
“크와아아아아악!”
쿵-!
자이언트가 하체의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한 줄기 뇌전이 자이언트의 목 언저리까지 파고들었다.
파지지지직-!
서걱-!
뇌전은 거인의 목에 짐승에게 뜯어먹힌 듯한 상처를 남겼다. 자이언트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무력 ㅎㄷㄷ
- 등불도 이제 거의 따라잡았다고!(15%···)
- 게섯거라 올빼미! 나 폭풍 등불이 간다!
- 플라즈마 펄스ㅋㅋㅋ 암만 봐도 ㅆ사기인데;
- 고것은 고유 능력이랑 시너지가 찰떡궁합이기 때문이구욘!
- 그니까 ㅋㅋ 가속부터가 쩔었는데
철컥-!
이민상이 짧은 직도를 허리춤에 메었다.
뇌전에 잔뜩 일어났던 그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부산을 넘어 대구에 도착한 등불.
수뇌부 중 몇이 시나리오를 완료하면서 펄스를 각성했다.
“민상 공자, 내 펄스랑 바꿀 생각은 없습니까?”
“바꿀 수 있는 거예요?”
“박치기를 세게 하면 바뀐다고···.”
“민상 씨, 잊어 주세요! 송하린 양! 이상한 소리 그만 해요!”
- 요걸 펄스를 훔쳐가려고 하네 ㅋㅋ 도둑놈 심보 ㅋ
- 이바둠감자탕 신발 도둑이 긴장합니다
이민상은 스스로 펄스를 각성했다.
송하린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민상도 대구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하루빨리 올빼미를 만날 생각뿐이다.
****
성진과 그레이들이 보문산까지 가는 길은 북동쪽 벙커로 가는 길보다 오히려 수월했다.
‘안티가 도주 경로를 파악하고 있었나?’
북쪽으로 빠져나오느라 고생을 한 데 반해,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나서부턴 안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인······.”
타아앙-!
나타나더라도 습격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단일 개체였기 때문에 손쉽게 정리하고 지나쳤다.
재성과 혜령이 성진에게 다가와 말했다.
“숨어 있는 그레이들에게 회신이 왔어.”
“뭐라고 왔는데?”
“자신들이 있는 곳에도 습격의 조짐이 보인다는군요. 너무 늦기 전에 보문산으로 향하기로 했어요.”
“그래. 생각보다 일찍 모이겠어.”
재성이 성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영향력이 조금 있거든. 연락이 닿는 그레이들이랑 사람들은 죄다 올 거야.”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락이 끊긴 은신처들도 있다고 했는데, 다른 은신처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재성의 무리가 머무르던 은신처와 동시에 습격을 받은 듯했다.
“다 온 거 맞지?”
“좌표상으로는 여기였어.”
차량의 시동을 끄자, 밤공기를 울리던 엔진 소음이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일행에게 갑자기 빛이 쏘아졌다.
“올빼미 님! 무사하셨군요!”
깜깜한 밤이었지만, 성진의 눈은 상대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
“정수열 박사님? 직접 나오신 겁니까?”
“하하··· 다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 유리는 어딨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유리야! ···근데 눈이?”
정유리의 눈은 아까보다는 덜 했지만, 여전히 조금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도 알아챌 정도라면 차량에 들어가 있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
“나도 원인을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십니까?”
“···일단 들어가자. 다들 이쪽으로.”
정수열을 따라가자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마치 방공호의 입구를 보고 있는 듯했다.
삐-
끼이이이익···
철문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사람과 그레이들은 차량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
성진과 일행이 긴 탁자에 둘러앉았다.
재성과 혜령도 함께였다.
어딘지 초췌해 보이는 손성일도 합석했고, 정수열이 대화를 이끌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쪽 분들이···.”
“재성, 아직 서로 믿는 것도 아닌데 존대할 생각은 없어. 괜찮아? 그쪽의 영감님도?”
보통은 반대였지만, 정수열은 유한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은 손성일이 불쾌해할까 우려했는데 그도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성진이 정수열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게···.”
대강 전해 들은 상황으로도 사태가 위중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특히 손동원이 새카맣게 타버려 죽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재성이 턱을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인간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바치는 휴머노이드라··· 흔치 않은 일이긴 하네. 특히 지금 같은 시대에는.”
“······들이야.”
“뭐?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영감님.”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손성일이 재성을 똑바로 보고 대답했다.
“휴머노이드가 아니야. 내 아들이라고.”
“흠··· 알았어. 사과하지. 그래서, 복구할 수는 있어?”
정수열이 끄덕였다.
“다행히 연산 장치는 온전했습니다. 현재 은신처에 있는 휴머노이드에 동원이의 연산 장치를 옮겼긴 합니다만··· 깨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뭐, 백업이 가끔 실패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설계할 때 잘 좀 하지 그랬어, 정수열 박사.”
“···저를 아십니까?”
“유명하지. 블랙들은 당신을 보면 좋아 죽을걸? 이런 세상에 자신들을 태어나게 했으니까.”
“······.”
“난 딱히 당신 싫어하진 않지만.”
- 좋아 죽는댄다 ㅋㅋㅋ
- 윾쾌하시넹ㅋㅋ
손성일이 재성에게 물었다.
“내 아들이 깨어날 방법을 혹시 알고 있나?”
“몰라, 근데 짐작은 가.”
“짐작이라니?”
“사람들이 흔히 환생할 때 다시 태어날 건지, 이대로 사후세계에 머무를 건지 선택하는 망상을 하잖아? 연산 장치도 똑같아. 고민하는 거야, 다시 세상에서 휴머노이드로 살아갈지,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지를.”
“그게 정말인가?”
“추정만 하는 거야, 근데 당신 아들이라며? 믿는 게 좋겠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손성일이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는 어쩐지 확신이 없어 보였다.
“못난 아비가 밉겠지. 그래서 깨어나지 않는 거고.”
“이렇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니 손동원인지 누군지도 감격해서 일어나겠네.”
“말이라도 고맙군. 재성··· 이라고 했지?”
“그래. 참고로 그레이들 중에서는 우리처럼 인간에게 호의적인 휴머노이드는 많지 않아. 지켜보지만, 경계하는 느낌?”
“참고하지. 조언 감사하네.”
“어쩐지 영감님이랑은 말이 통하는 기분이네.”
몇 가지 화제가 더 돌았지만, 다른 그레이들이 전부 도착하기 전에는 깊게 얘기할 수 없었다. 핥는 듯이 지나간 화제, 정유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나는 갑자기 눈이 파랗게 빛납니다. 이것의 원인을 아십니까?”
“유리야··· 아빠도 정확히는 몰라..”
정수열이 정유리의 파란 눈을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휴머노이드를 설계할 때, 눈으로 신호를 보내게 했다. 사람의 마음은 눈빛으로 표현되는 것에서 착안한 건데, 단지 그것뿐이었어.”
“무슨 말입니까? 나는 이해하려 하는데 어렵습니다.”
“눈이 빛나게 한 것은 맞지만, 거기까지라는 거야. 지금처럼 붉게 빛나거나 푸르게 빛나게 하는 건 무엇 때문에 작동하는지 아빠는 알지 못해. 붉은 신호가 안티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외에는 아빠도 몰라.”
재성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얘기했다.
“나는 짐작이 가.”
“뭐요?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휴머노이드를 화이트, 그레이, 블랙으로 분류해. 들었지? 블랙은 눈이 빨갛고 나머지는 파랗거나 양쪽 눈의 색이 다르지.”
“예. 들었습니다.”
“그레이들은 한 차례 오염된 경험이 있어. 네트워크에 파고 들은 이상한 존재 때문인데···.”
“펜리르입니다. 정확하게는 펜리르가 글레이프니르를 이용한 것이겠지만.”
정수열의 말에 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오염된 존재들은 부정적인 기억에 고통받아. 일시적으로 그 파장이 증폭되다가 강제로 감정을 깨우치지. 안티들이 분노한 이유가 그거야.”
“그럼 그레이들은···.”
“감염된 후에, 분노를 터트리면 끝이야. 인간을 살해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지. 아니, 아닌가? 예외를 한 명 보긴 했어. 그 휴머노이드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레이들은 감염된 이후에 다른 감정을 깨닫고 중심을 유지한 존재들이야.”
“그 감정은 뭐죠?”
“몰라, 당신들이 맹신하는 희노애락이나 오욕칠정의 어딘가 아닐까?”
- 휴머노이드들 다 박사 학위 있으신가요?
- 안티는 그럼 대학원생이네 ㅋㅋ 논문 쓰다 분노한
- 지나가던 대학원생 때리지 마라 화낸다
- 대학원생이 이 시간에 지나가고 있다고?
- 교수님 연구실 가는 중이다
- (눈물)
정수열이 정유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화이트는 유리처럼 푸른 눈인가요? 어떤 존재죠?”
“달라, 화이트는 그냥 오염 자체가 되지 않은 거야. 한 번도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않은 거지. 판매용이 아닌 휴머노이드를 일컬었었어. 맞아?”
정유리와 손동원의 두 눈은 파랗다.
둘은 일반적인 휴머노이드가 아니다.
“···맞습니다.”
“그래, 당신이 직접 설계했던가 하겠지. 아무튼, 그레이들의 감정은 분노 위에 다른 감정을 덮어씌운 것이지만 화이트는 애초부터 인간을 미워하지 않아. 그런 차이겠지?”
“푸른 빛을 내는 건 그 때문이군요. 분노가 없으니···. 백지에 그려나가는 그림이나 마찬가지겠어요.”
“일단은 그렇게 추정하는 거야. 대답이 됐나?”
자신을 바라보는 재성에게 정유리가 대답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 ㅋㅋㅋㅋㅋ 교수님! 필기는 했는데 그래서 뭐라고요?
- 밀수들도 연애 박사지만 아직 모쏠입니다
- 그거슨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지요
- 예시를 단박에 이해한 저는 한강으로 가겠습니다
****
정유리와 양준호, 그리고 성진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레이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정유리가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 머뭇거리고 있었다.
성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리야.”
“올빼미, 무섭습니다. 확실합니다. 나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뭐가 무서운데?”
“주인혁은 나를 미워할 겁니다. 그것이 너무 무섭습니다.”
“···들어가자. 직접 확인하면 돼.”
“사람들은 무서울 때 어떻게 합니까?”
성진은 정유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무서워하지만,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다. 정유리도 정유리만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끼이익···
예를 들면, 병실의 문을 여는 것 같은.
정유리가 성진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문은 이미 열렸다.
“오, 올빼미.”
“인혁아, 우리 왔다.”
“애송아!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이 놀려 먹기 좋구나!”
- ㅋㅋ 병문안 절대 안 왔으면 하는 친구들
- 동원이가 없으니까 허전하네
- 준호가 일부러 더 오바해서 말하는 듯 ㄷㄷ 배려심 보소
주인혁은 별 반응이 없었다.
가는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주인혁··· 많이 안 좋습니까?”
정유리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주인혁의 침상에 다가갔다. 일행은 살짝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주인혁이 정유리를 쳐다보았다.
“응, 안 좋아.”
성진과 일행은 주인혁의 팔을 수술한 의사와 엔지니어에게 주인혁의 몸 상태를 전해 들었다.
독기에 감염된 부분을 도려내고 대부분을 기계장치로 대체했다는 얘기.
도려낸 부분이 워낙 많고, 뼈까지 스며들어 뼈도 일부분 기계로 교체했기에 의수나 마찬가지였다.
주인혁은 사람의 팔을 잃었다.
정유리가 움찔거렸다.
“내가 밉습니까?”
“어, 밉다.”
“나는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미우면 내게 욕설을 해도 됩니다. 아니면 원하는 게 있습니까?”
“욕설은 기운 빠지니 됐다. 미운 건 미운 거고, 용서했으니까.”
“···용서?”
주인혁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끼리는 미안한 거 없는 거야. 뭘 죄 지은 사람처럼···.”
“미안합니다. 나는 미안합니다.”
“예전이랑 다를 것 없어. 움직이는 것도 이렇게··· 으··· 아파.”
주인혁이 고통에 움직이던 손을 움찔했다.
정유리가 화들짝 놀라 그 손을 잡았다.
그 모습에 주인혁이 웃었다.
“야. 이제 이해된다, 무슨 말인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유리와 손바닥을 맞댄 채로 주인혁이 대답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구형이라 조작감이 불만족스럽네.”
“주인혁···.”
주인혁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손을 맞댄 정유리가 성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전보다 더 파랗게 빛이 났다.
“올빼미, 사람은 이럴 때 웃습니까?”
“글쎄···.”
“아니면 우는 겁니까?”
“사람마다 달라.”
정유리가 주인혁에게 물었다.
“주인혁, 무엇을 원합니까?”
“우는지 웃는지?”
“그렇습니다. 주인혁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굳이 고르라면 웃는 쪽이 낫겠네.”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 웃겠습니다.”
정유리가 미소지었다.
미소는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