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46화 (46/222)

# 46

46화

증강현실, 혹은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의 성지 디스토피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키보드 칠 손만 있으면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맹장으로 변모하는 이곳.

지금 이곳에, 제갈량의 삼분지계만큼 중차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제목: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돈까스, 짱깨, 흿자, 초밥 생각 중 골라주셈

- 그 돈이면 국밥을 먹지

- 편하게 먹을 거면 핏자

- 느끼한 거는 안 땡겨서···

- 초밥도 점심으론 ㄱㅊ지

- 아 근데 초밥집 여기 가성비 별로라···

- 어디 사냐? 네 무덤 부지부터 골라보자

[제목: 서울 경한대 최대 아웃풋!]

등불 개국공신 경제학과 3학년 최용훈! 멋지다 너란 자식!

- 등불이 최대 아웃풋이면 대체···

- 그래도 1기면 ㅅㅌㅊ네 ㅋㅋㅋ 랭커임?

- 어제 죽음

- 조문왔습니다······ 생전에 고인께서는···

- 갑자기 분위기 장례식장 실화냐 ㅋㅋ

[제목: 어제 등불 쪽 방송 보는데 의외의 고수 발견함]

응 너 아니야 ㅋㅋㅋ 설렜니?

- 시무룩···

- (대충 난 줄 알고 달려왔다는 내용)

- 죄다 낚였누 ㅋㅋ

- 낚지 마라 ㅡㅡ

[제목: 어제 남친이랑 헤어짐]

올빼미 방송 보면서 감동먹고 질질 짜다 싸웠어요.

평소에 종말 할 때부터 쌓인 게 좀 있었나 봐요···.

뭐 어차피 제가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라 만난 거긴 한데······

아, 진짜 이런 성격 고치고 싶다.

- 그럼 저랑 사귈래요?

- 놉

- 거절 잘 하자너 ㅋㅋㅋㅋ

- 내가··· 고쳐드렸읍니다···

[제목: 어제 올빼미 방송 보는데 민상이 실제로 한 말]

킹갓상: 형, 저 배달해본 게 전부예요

요즘엔 슈마허도 배달부로 쓰냐?

저기 중국집 어디냐?

바로 C세트 시킨다.

- ㅋㅋㅋㅋㅋ 전국 배달부들 일동 긴장

- 오자마자 다 비벼져 있겠네ㅋ

- 배달 저렇게 하면 짜장면도 인수분해돼서 옴

- 인수분해가 맞는 말인가?

- 군침 도누 ㅋㅋ

[제목: 매드무비 만들어 봤습니다.]

잘 보셨으면 댓글이랑 추천 좀··· 구독도···

- 음··· 손재주 좀 있네

- 재료가 좋았지

- 어제는 솔직히 영화 한 편 나왔는데 뭐

- ㅇㅈ 용광로 가동할 때는 전율이 흐르더라ㅋㅋ

- 윗댓 ㅇㅌㅋ

- 이봐요, 미친놈씨

[제목: 어제자 전설의 수르트 전 요약]

올빼미 : 님, 햄최몇?

수르트 : 2개

올빼미 : 아가리 벌려, 빅맥 들어간다!

수르트 : 그마아아안! 배불러!

- 어제 여기서 결판났지 ㅋㅋ

- ㅇㄱㄹㅇ ㅂㅂㅂㄱ ㅋㅋㅋ

- 아가리에 불벅백개ㅋㅋ

[제목: 올빼미가 수르트 전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아주머니에게 필살기를 전수 받았기 때문.

먹여서 죽인다.

- ㅇㅈ 굉장히 위험한 마공이지

- 발상의 전환이 포인트야

- 그거 아니었으면 어제 졌따 맏따 맏따

[제목: 어제 부산 편 엔딩 본 사람들, 운전 조심해라]

너희들은 지금, 마시지 않아도 취했으니깐 말이야!

혹시 지금 조수석에 누가 타고 있지 않니?

- 뭐애오! 누구애오!

- 주모 : 나야, 저기 사거리까지만 좀 태워줘

- 언제 탔누 ㅋㅋㅋ

- 주모 카풀 실화냐 ㅋㅋ

****

나날이 늘어가는 해적 방송의 수.

특히 요즘 등불이 한국 서버에 합류하면서 중계권 파이가 엄청나게 넓어진 느낌이다.

심지어 랭커들도 방송을 접고 플레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이쪽 시장이 호황이 되어버린 상황.

왕이나의 왕좌 복귀전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물론 음탕이라는 신인이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이다.

‘방송 시간도 옮겼으니 이제는 상관없을걸?’

원래 왕이나는 늦은 오후나 저녁 시간대에 방송했었다. 근데 음탕과 한 번 맞붙고 나서 꾸준히 시청자 수가 요동쳤다. 음탕도 그것에 재미를 붙였는지 아예 방송시간대를 저녁으로 고정해버렸다.

‘상도덕도 모르는··· 어우, 열 받아.’

해적들끼리는 해적 나름의 규율이 있는 법이다.

음탕은 선을 넘었다.

왕이나는 규율을 어긴 음탕을 벌··· 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일단 방송 시간을 낮으로 옮겼다.

‘절대 내가 피하는 게 아니야! 치킨게임이라 그런 거지!’

애초에 파이 나눠 먹기 싸움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들어오는 건 서로 죽자는 거다.

왕이나는 지금 두려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그냥, 선배가 후배가 뭘 모르니 알아서 움직여 준 것뿐이다. 음탕은 후에 이 사실을 알면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후우, 전투력 최대치. 오늘 방송은 잘 되겠네.’

마침 어제가 종말 이후가 오픈한 이후로 가장 화제 되었던 날이다. 원래 재밌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영화에 대해 누구와라도 대화하고 싶어 안달인 법이다.

‘그럼 내 방송에서 하면 되지!’

마침, 자신이 낮을 노렸기 때문에 경쟁자는 제거되었다. 어제 있었던 일 이후로 가장 먼저 시작되는 규모있는 해적 방송. 왕이나는 이제 전장에 나섰다.

“안녕! 나 없어서 심심했지?”

- ㅔ

- ㅖ 뭐···

- 임하~

- 누나 보고 싶었어요 -3-

‘누가 설명 좀’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이나 옷 왤케 자극적이야? 최근에 안 이랬잖아?]

- 이나 요즘 빚 있냐?

- 최근에 음탕이랑 부딪혔다가 딜교 손해 봄 ㅋㅋ

- 왕이나: 아 이게 이만큼 달아? 버그네!

- 그러게 평소에 우리를 소중히 했어야지!

왕이나는 시간을 끌다간 망아지 같은 녀석들이 계속 음탕을 언급하며 약 올릴 것이라는 걸 뻔히 알았기 때문에 바로 진행했다.

“자! 랭커 초대석, 오늘의 게스트는··· 바로 강시환님!”

- 뭐야! 등불 멤버가 왔다고?

- 이나 방송이 확실히 크긴 큰가 봐, 등불 소속 랭커가 출연도 하고 ㅋ

- 출연료 세게 불렀나?

“직박구리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 예···. 직박구리님,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강시환이 냉혈한 같은 표정을 지으며 캠을 바라보고 인사했다. 강시환의 실제 모습은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반갑다, 직박구리다.”

- 오싸아아악-!

- 쟤, 쟤 트렁크 뒤져 봐! 분명 뭔가 나올 거야!

- 촤라락- (체인이 등장하며)

- 빙판길엔 역시 스노우 체인이죠!

강시환은 평소에도 방송했던 인물이었지만 왕이나의 방송 시청자들과는 타겟층이 달랐다. 왕이나의 방송이 라이트 유저로 구성되어 있다면 강시환의 방송은 종말 이후에 미친 사람들인 헤비 유저가 주류였으니까.

왕이나는 앉아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강시환을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최근 근황과 더불어, 원래 크루와의 사이는 어떻게 된 건지 등. 분위기를 풀고자 했던 질문들에 죄다 단답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어쨌든 강시환도 왕이나의 방송에 적응한 것 같았다.

“저어, 슬슬 본격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어제 일이죠? 부산의 용광로 가동을 주제로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용광로?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어, 저······ 그···.”

“······?”

“어제 등불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들었는데, 상황이 어떤가요?”

- 헐; 이나야 그 얘기 꺼내면 안 돼!

- 트렁크! 트렁크를 조심해!

- 안에 살펴보면 문 여는 막대 있어!

강시환, 직박구리가 왕이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현재 등불을 이끄는 사람은 조병창입니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감수할만한 희생이었다고 합니다만, 일반 유저 100명에 랭커도 두 명이 이번 전투로 죽었습니다. 큰 피해라면 큰 피해입니다.”

“등불 내부에서 여러 목소리가 나올 것 같은데 어떤가요?”

“확실히 어제 임무가 무모했다는 말도 있고, 등불만 생각했을 때는 말이 안 되는 전선을 전개한 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조병창님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네?”

왕이나는 직박구리의 말에 당황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 질문인데 고민도 없이 대답할 줄이야. 애초에 등불의 피해가 제법 컸던 것은 사실이고 그로 인해 내부에서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라니?

“어째서 등불에 그런 사람들만 모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어제 전선을 넓게 펼쳐 몬스터들을 한 마리도 흘려보내지 않은 건 그 이유 때문이고요.”

- 강시환 구독 눌렀습니다

- 머야, 강시환 없는데? 윗댓 구라쳤냐

- 직박구리로 찾아야 함

- 아이디 너무 깨···

뭐,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왕이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음··· 등불 얘기는 그럼 좀 있다 마저 하고 지금은 올빼미에 관한 얘기를 해볼게요.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올빼미의 수르트 공략, 예상하셨나요?”

“애초에 시나리오에서 결론이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올빼미가 시나리오를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저는 이번에도 그가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왕이나는 지금 이 남자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가 어떻든 저떻든 간에 결국에는 등불의 지원 없이 혼자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다니? 그 점을 꼬집었다.

“하지만, 아무리 솔로 레이드에 능한 올빼미라고 해도 상대는 수르트였잖아요? 혼자서 사냥하기엔 불가능하다고 예상하신 분이 많으셨는데···.”

- 맏찌 솔직히 혼자서 잡는 거 다 불가능이라고 했자나 ㅋㅋ

- 나는 믿었다고!

- 응 니가 믿는 거 아무 소용 없어

- 올빼미가 아무리 솔로레이드 무형문화재래도 이건 에바였긴 했어

직박구리가 왕이나의 말을 정정했다.

“혼자서가 아닙니다.”

“예? 분명 혼자서···.”

“올빼미는 솔로 레이드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투만큼은 그 혼자서 만들어낸 결과는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모든 이들이 올빼미가 수르트를 상대할만한 환경을 만드는 데 필사적이었으니까요.”

“······.”

“예를 들자면, 올빼미를 따르던 이민상. 그리고 이민상의 주변 인물인 쉘터의 각성자들. 또 그것을 넘어 쉘터의 거주민들까지. 물론 저희 등불도 함께였습니다만 어쨌든 수많은 군중이 그를 도왔단 겁니다.”

왕이나는 잠시 벙 쪄서 할 말을 생각해 내지 못 했다. 다행히 직박구리가 할 말이 더 있었는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부산은 세계 최초로 종말 거부 프로토콜이 시행되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보지 못한 상황이라 저희도 아직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어쩌면 이건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시작이요?”

“예, 분명 이런 종말 거부 프로토콜이 한국의 전 국토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지금은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산은 이 프로토콜의 첫 번째 시작지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 등불에서도 한국 서버가 종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아마도 이 프로토콜을 전부 작동시켜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 주, 죽여줘···

- 수르트: 나는 32대 천왕 중 최약체다!

- 무한 컨텐츠 실화냨ㅋㅋ

“물론, 부산이 특이한 경우라 이렇게 도시로 나뉘어 있지 않고 큰 구획으로 나뉘어 있을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만, 아직은 알 수 없죠.”

“험난한 길이 예상되네요.”

“예. 그렇습니다.”

왕이나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오늘 질문은 나름 마음먹고 준비한 터라 양과 질적인 면에서 풍부했다.

“다음 질문은 올빼미의 전투 방법에 관해서 얘기하도록 해볼게요. 자, 영상!”

왕이나의 영상에서는 올빼미가 수르트와 싸우기 시작한 부분과 끝부분까지 빠른 속도로 편집되어 상영됐다.

감상을 마친 왕이나와 직박구리.

왕이나는 직박구리가 영상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박구리는 보는 내내 입을 벌리고 감탄했으니까.

- 국내 최초, 게스트와 진행자 모두 예습 안 해오는 방송!

- 이나는 보긴 한 듯. 근데 뒷부분은 움찔하는 거 보니까 앞부분만 봤나 본데

- 정-확!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전투 부분에 관해선 제가 뭐라 평하기가 민망합니다. 등불의 합류로 한국 서버가 랭커들의 각축장이 될 것이라 기대하신 분들도 있었겠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흥미로운 얘기일까?

왕이나는 직박구리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제가 만나본 바로는, 등불에 합류한 랭커들은 올빼미에게 투쟁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 그러면요?”

“오히려 존경심, 경외감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합류한 랭커들 중에 올빼미를 앞지를 만한 사람도 딱히 없고, 각축전이 일어난다면 올빼미는 논외로 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언터쳐블!

- 이미 직박구리가 이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글러 먹었어!

- 송하린이면 비벼볼 만하지 않을까?

- 비비긴 개코 ㅋㅋ 송하린 3대 워너비가 코알라 무협지 올빼미임

- 뭔가 후보군이 ㅈ같은데 ㅋㅋㅋ

“그, 그렇군요. 그럼 전투 영상 분석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게 나아 보입니다. 제가 분석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분진 탄을 던지는 부분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떡 먹는 용만이’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내 떡 누가 먹었누?]

- 아재요 ㅡㅡ 척추 서요?

- 시청자들 다 졌잘싸 칠 준비하는데 혼자 킬각 보는 모습 지렸따리

- 어제 그 부분 보는데 아파트에서 환호성 들리더라

- 우리 아파트도 월트컵 때도 조용히 보는데 어제는 갑자기 우와아아 소리 나던데ㅋㅋ

- 생각보다 캡슐 말고 VR로 보는 사람 많쿠나

- 캡슐 비싸잖아. 그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 ㅅㅂ 국밥빌런 새끼들아 국밥 좀 그만 처먹어

왕이나는 다음에도 직박구리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시청자 반응을 끌어내는 부분도 훌륭했고 말도 막힘없이 해냈기 때문에. 그래도 그녀는 프로다. 감히 질문을 넘어가는 행동은 있어선 안 된다.

“그래도, 시청자분들을 위해서 몇 가지 짚어주시면 안 될까요? 랭커들이 보는 시야로 올빼미의 능력을 정확히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어서요.”

“그럼, 제가 감히 기준점이 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전투의 초반부터 후반까지 전부 하이라이트였지만, 올빼미만 할 수 있다고 보이는 부분은 제일 먼저 여기였습니다.”

수르트가 불을 처음으로 뿜어낸 상황이다.

“이건 이미 공격으로 전환한 상태였고, 올빼미도 공격 동작을 취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굉장히 침착하게 몸을 뺐어요. 상대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로 동작을 거두어들이고 바로 몸을 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피지컬과 둘째로 만약의 상황을 예비하는 그의 전투 스타일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이었다면···.”

“제가 알고 있는 랭커들은 대부분 저기서 불타 죽었을 게 그려지네요.”

- 일단 수르트랑 저 상황까지도 못 가지 ㅋㅋ

- 그러니까 가정이래잖아 ㅋㅋ

“다음 부분은요?”

“다리로 끌어들이고 수르트를 봉쇄한 후에 일격을 가하려는 이 부분, 딱 정형화된 올빼미식 전투법입니다.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한 번에 목줄을 움켜쥐는 스타일. 랭커들도 대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이 부분을 따라하려고 하기는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다 함께 잡는 게 상책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여기까지 잘 들었습···.”

“그리고 이 부분! 여기가 핵심인데, 바이크가 날아가면서 공중에 떠오른 상황인데도 올빼미님은 수르트를 찾았어요. 덕분에 수르트에게 접근하는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죠. 일단 몸부터 피하고 생각하거나, 한 차례 지상에 내려섰으면 이번 공략은 무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나는 약간 당황했다.

갑자기 올빼미 얘기에 말이 많아지는 직박구리.

무섭게 생겨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말이 많아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여기 이 부분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 쟤 끌어내!

- 아까도 말한 부분이었으면 말하지 마!

- 정보)랭커들은 올빼미 팬덤이나 마찬가지다

- 정보)저 남자의 닉네임은 직박구리다

- 94년 제가 LA에 있을 때부터······

- 그래도 내용은 알차네 ㅋㅋ 확실히 급이 달라. 랭커들이 저렇게 빠는 거 보면

- 분석 방송 하는 랭커 치고 담담하게 말하는 랭커 못 봄. 특히 올빼미 분석 방송은 얼굴에 흥분 가득

왕이나는 직박구리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서 빨리 이야기를 마치게 했다. 자신이 봐도 올빼미의 전투는 대단했지만, 방송이 너무 길어질 우려가 있었다.

“아, 그리고 중요한 질문이 두 가지 남아 있네요. 일단 첫 번째! 등불 이후로 한국인 유저 분들이 합류할 수 있을까요?”

“합류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건 등불이 등불을 깨우는 형태로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데자뷰 측에서 캐릭터 신규 생성을 계속 막고 있나요?”

“예, 아무래도 원래부터 정해진 거였나 봅니다.”

- 시무룩···

- 근데 어차피 한국인 접속 다 가능하면 이미 쉘터 식량 거덜남ㅋㅋ

- ㄹㅇ 그럼 외국 IP도 다 들어와서 초토화되긴 할 듯

- 슈트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 한국!

- 응, 근데 앞마당만

- ㅠㅠ

“그럼··· 마지막 질문이네요. 이 부분은 묶어서 질문할게요. 등불의 향후 일정과 올빼미와의 만남! 이건 어떻게 진행될 예정이신가요?”

“그 부분은 제가 여기서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자면 등불의 최우선 목표는 다음 등불을 깨우는 것이고, 그다음은 이번에 새로 떠오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겁니다.”

“올빼미와의 만남은요?”

직박구리가 말했다.

“그건 등불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올빼미님 쪽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

성진의 캡슐 상부가 열려있었다.

최고급이면서도 신아름에게는 재활장치로 여겨지는 물건. 이건 성진이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창이자 그곳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다.

‘신기해.’

이 캡슐 하나로 자신은 종말의 세계에 떨어진다.

치열하고, 힘겨운 세계에.

누군가는 장난감으로 치부하지만, 성진은 이 기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장난처럼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실제로 데자뷰와 한 계약부터가 장난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오늘은 신아름이 찾아오는 날이다.

부산 쉘터를 수복하고 용광로를 가동했다.

뭔가를 이루어낸 기분이다.

남들은 한낱 게임이라 치부할지 몰라도, 성진에게는 유일하게 마음대로 움직이고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니까.

신아름이 성진이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라면, 종말 이후는 성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다.

그렇기에 어제의 긴박하던 상황이 꿈만 같다.

신아름이 올 시간이 다 되어간다.

또각···

그녀다.

그녀의 소리다.

끼익···

“오빠! 오늘은 얼굴이 밝네!”

빈말이라도 좋았다.

그 빈말을 구실 삼아 신아름이 웃고 있었으니까.

스으윽···

의자를 당겨와 신아름이 앉았다.

언제나처럼 성진의 한 손에 그녀의 양손을 포갰다.

마치 그녀와 성진의 관계 같았다.

성진은 한 손만큼 내주었지만, 그녀는 양손만큼 내었으니까.

“우리 오빠, 어디 얼마나 힘차졌는지 볼까?”

그 말에 최대한 열심히 꼼지락거려 본다.

“아하하, 간지러워.”

성진은 무뚝뚝했지만, 그녀가 웃는 것만큼은 좋았다.

그녀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아버지를 대신할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어와 자신의 손을 잡는 모습을 상상한다.

포개지는 손.

그때의 손은 신아름의 한 손에 자신의 양손을 포갠다.

검은 턱시도를 입고, 수염을 말끔하게 정리한 자신.

그런 미래를 꿈꾼다.

다시, 상념에서 깬다.

오늘은 상상으로 끝나는 자리가 아니다.

상상 따위는 언제나 할 수 있다.

지금은 그녀와의 시간을 만끽할 때다.

“오빠, 요번에 혜진이 결혼한다더라.”

‘혜진이?’

“그 왜, 오빠한테 5년 전인가 술자리에서 소개해 준 애 중에 통통한 애··· 귀염상 있잖아.”

기억났다.

귀엽지도 않았고 통통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오래 떠올려야 했다.

“어제 청첩장 받았거든. 오빠도 꼭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말은 참···.”

그녀의 손을 잡고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빠가 소통만 안 될 뿐이지, 내 얘기 다 듣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던데? 신기하다, 그치?”

의학적인 개념의 치료가 아닐 것이다. 게임을 클리어할수록 몸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니. 아니, 어제는 돌아온 감각에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자신인데도.

“그러니까··· 오빠 꼭 나을 거야. 이제 손가락도 잘 움직이는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하하, 이것 봐. 진짜 신기해.”

신아름이 성진의 손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꿈만 같은 일인데, 오빠 이렇게 좋은 모습 보는 거··· 맨날 오빠한테 말하면서도 내 얘기 듣고 있는 건가 궁금했거든···.”

‘다 듣고 있었어.’

“근데, 듣고 있다는 걸 아니까 더 욕심내게 되더라. 꾹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신아름이 성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온기가 전해진다.

신아름의 이마는 따스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나 물 좀 떠올게. 잠시만 있어···.”

끼이익···

문을 열고 나가려는 신아름.

“·········줘.”

철컥-

문이 닫혔다.

문을 열었던 사람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성진은 안간힘을 쓰면서 단어를 만들어냈다. 어젯밤 몸의 돌아온 부분은, 목 위쪽이었다.

성진은 굳은 혀를 녹여 최대한, 최대한 짜냈다.

그의 음성이 공기를 울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기··· 다······ 려······ 줘···.”

신아름이 벽에 기댄 그대로 허물어졌다.

성진은 그녀가 면사포를 쓴 모습을 보리라 다짐했다. 그의 감각이 돌아오는 게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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