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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45화 (45/222)

# 45

45화

성진이 수르트와 지독한 싸움을 이어나간 같은 시각,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에 부산의 살아남은 인간들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 시청 쪽 클리어!

- 삼거리 쪽도 클리어!

음성채널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보.

하지만, 조병창은 기뻐하지 않았다.

‘너무 많이 죽었어···.’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전쟁에서만 승리하면 된다는 마음이 지휘관의 첫 번째 조건이지만, 조병창은 아쉬워했다.

‘랭커들은 그나마 타격이 덜하지만··· 일반 유저들이···.’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쓸려나갔다.

극심한 손해가 따를 것이지만, 한 마리도 흘려보낼 수 없었다. 이 싸움은 모든 걸 다 잃어도, 올빼미가 승리하면 희망이 있는 싸움이다.

정신없는 일전이 지나가고 있었다.

몬스터의 시체는 이제 작은 둔덕이 되어있었다.

상황은 부산 쉘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조금만 더 해보자!”

“우, 우으으···.”

“으아아아아아아!”

투두두두!

투두두두두두두!

부산 쉘터의 거주민들이 구성한 저지선도 치열하긴 마찬가지였다. 천만다행으로 강력한 몬스터들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거주민들이 죽자사자 싸웠다는 점 때문에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죽기는 죽었다.

그런 세상이고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 형··· 동휘 이 새끼 죽었습니다···.

- 씨발! 씨바아아아알!

- 숨을··· 숨을 안 쉬어요···.

각성자들끼리 미리 연결해둔 음성채널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가 전해졌다.

전투 중에 몇 번이고 전달받은 사안이다.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

버티고는 있지만, 기약이 없다.

무엇을 믿고 버텨야 할까?

준석은 희망이라는 실체 없는 허상을 떠올려 본다.

철컥-

기계적인 배터리 교체.

고개가 자연스럽게 뒤로 젖혀진다.

어쩌면 가장 고되고 가장 두려우며 가장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사내다.

불의 거인과 맞서고 있는 올빼미.

민상이가 도움이 됐을까?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아까부터 폭발음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전투에만 집중하기 위해 노력해보았지만 쉽지 않다.

저곳은 어떻게···

콰아아아아앙!

‘뭐, 뭐지?’

이번엔 폭발음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불의 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서건 그 활활 타오르는 재앙은 눈에 띄었건만.

“무슨 일이야, 대체···.”

그 폭발음이 기점이었다.

세포가 하나하나 곤두서는 기묘한 감각.

이 감각을 준석만 느낀 게 아니다.

- 형! 뭔가 이상해요!

- 몬, 몬스터들이 좀···

준석도 전선에 서 있다.

그렇기에 직접 보고 판단할 수가 있다.

“크, 크에에엑!”

“키아아아!”

몬스터들이 난동을 부렸다.

물론, 아까부터 부려온 난동이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마치,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린다던가 갑자기 도주하는 등 획일화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그저 밀고 들어오는 게 목적이었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목표를 잃은 것처럼. 준석의 뇌리에 한 사내가 떠올랐다.

‘설마···.’

이상은 등불 쪽에서도 감지되었다.

- 뭔가 수상해요!

- 병창아! 시청 쪽 몬스터들이 도주한다! 중앙로로도 꽤 흘러갔어!

- 삼거리 쪽 몬스터들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살아남은 사람들은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승리가 코앞이라는 생각에 소리 지르거나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상처 입더라도 승리는 승리였으니까.

이상 현상을 감지한 랭커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남서쪽 방향.

한 사내가 있는 곳.

어쩐지 지금은 그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됐다.

‘올빼미···.’

****

까맣게 탄 거인.

거인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분명, 굳건히 서 있었고 거체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또, 어깨 위에는 불의 펄스가 넘실거렸다.

물론 굳이 이전과 달라진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는 목이 없었다.

그리고, 불의 펄스는 이제 거인이 발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파괴와는 거리가 멀게 된, 어쩌면 신성해 보이는 그 불꽃을 성진이 휘감고 있었다.

성진은 불꽃 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 표정은 불의 뜨거움을 모르고, 따스함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을만한 표정이었다.

수르트의 몸에서 붉은 입자들이 솟구쳐 올랐다.

사라락···

살랑거리며 움직이던 입자들은 점차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변모했다.

화아아···

와류가 된 그 흐름은 성진의 몸을 에워싸더니 성진의 불꽃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성진은 눈을 감고 그 힘을 받아들였다.

화르륵-!

성진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타오르던 불길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사라진 흔적으로 보아 불길이 성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휘오오···

[완벽한 사냥을 하기에 몸이 부적합함을 느낍니다.]

[더 훌륭한 사냥을 위해 몸이 적응합니다.]

[섭취한 수르트의 유전자를 사용합니다.]

성진의 눈이 떠지고, 그 눈에는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동공에 어떤 기류 같은 게 이따금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펄스 : 블레이즈를 깨우칩니다.]

새로 얻은 힘은 나중에 확인할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힘만으로도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펄스는 이전과 비교해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성진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목이 잘린 기괴한 거인.

거인의 잘린 단면에서 붉은 물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성진은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엄청난 힘.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강대한 힘을 마주하면, 그것에 압도되거나 욕심을 낸다.

하지만, 성진은 이 힘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 힘은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힘이다.

그 힘을 담은 그릇은 수르트의 핵이었다.

성진은 그 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손에 쥐었다.

그러자, 따끔하더니 수르트의 핵이 손바닥의 장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지?’

힘을 가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지, 보관하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번거롭게 쥐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성진으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성진은 거인의 몸에서 내려와 어딘가로 향했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튕겨 날아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바이크.

건조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본 성진은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움찔···

기척이 느껴진다.

이곳인가 보다.

성진은 천천히 걸어갔다. 어딘가의 벽에 쓰레기처럼 처박혀있는 슈트가 보였다.

민상이었다.

민상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성진이 그에게 다가가 슈트를 뒤집어 바이저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형······.”

“···민상아.”

살짝 금이 가 불안했지만, 기능상으론 문제없어 보였다. 혹시나 문제가 있다면 민상의 몸 상태일 것이다.

힘겹더라도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는 민상.

“형··· 저 잘한 거 맞죠?”

“···그래.”

“······저 멋있었던 거 맞죠?”

“그래.”

“다행이다···.”

민상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서웠어요···. 이제 아무도 없는데, 이제 지킬 것도 잃을 것도 없는데··· 그래도 무서웠어요······. 한심하죠?”

“···아니.”

“진작에 이렇게 용기 내볼걸··· 그랬으면 제 주변에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았을 텐데······.”

“······.”

“조금··· 피곤해요. 저··· 잘래요···.”

민상의 눈이 감겼다.

성진이 민상의 어깨를 감싸 쥐고 무감정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생체활동.”

삑-

- 사용자 생체활동 정상입니다.

죽은 듯이 잠잠하던 민상이 조그맣게 얘기했다.

“아이 씨······ 눈치 없게.”

피식-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야야, 아파요!”

“넌 더 아파도 돼.”

“지금 부산의 영웅한테 무슨 소리를?”

다행히 민상은 한두 군데 다친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운신에 무리가 없었다. 성진은 민상을 일으켜 쉘터를 향해 걸었다.

천천히, 하지만 올곧게.

쉘터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몬스터들은 성진에게 압도당했는지, 덤벼들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성진이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쉘터의 저지선에 도착했다.

“민상아! 이 개새끼야!”

“아저···.”

“형! 형이라고!”

“준석이 형···.”

“그래, 새끼야! 정말 살아서 왔네!”

“그럼 제가 죽을 것 같았어요?”

“응, 9할 정도는.”

“하··· 용서해 줄게요.”

“응? 용서? 왜?”

“저는 형 무조건 죽을 줄 알았거든요.”

“이 새끼가?”

민상이 늘어놓는 소리에 준석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말은 티격태격이었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준석이 말했다.

“그런데··· 네가 왔다는 건···.”

슥- 하고 성진을 돌아보는 준석.

성진에게 그 무엇도 묻지 않았지만, 대답을 구하는 것이다.

끄덕···

성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

준석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다.

“혼자서 그 거인을··· 처치했다고?”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

주변의 거주민들이 소란을 피웠다.

준석이 저도 모르게 크게 말한 걸 들은 것 같았다.

거주민 중 누군가가 외쳤다.

“그, 그럼 우리 이제 산 겁니까?”

그 외침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거주민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우리가 해낸 거야···?”

준석이 사실을 바로잡고자 외치려 했다.

“모두 다 이···.”

턱-

성진이 준석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준석은 어째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성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가가 주목받는 것은 지금 아무 의미 없다. 모두가 노력했고, 그렇기에 모두가 살아남은 것이다.

준석이 찰나에 그 의도를 간파했다.

‘이 청년이 우리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려던 준석은, 다른 말을 꺼내게 된다.

“모두 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이 맞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살았어! ···살았다고!”

“허윽··· 죽는··· 죽는 줄 알았어···.”

모두가 맞서 싸웠으니, 각자의 삶은 각자가 지켜낸 것이다. 그것으로 된 일이다.

****

성진은 준석에게 거주민들을 잠시간 쉘터로 불러들이지 말라고 얘기했다.

“···강민교 때문인가?”

“······네.”

“···알았어.”

강민교가 사람들을 통제해 쉘터에 돌아가는 걸 미뤘다. 쉴드 복구를 비롯하여 여러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가장 위험한 문제는 강민교가 아직 쉘터에 버젓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성진은 홀로 쉘터에 들어섰다.

병기창의 문이 열려있다.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슈트의 부속물들과 병기들. 그만큼 다급하게 뛰쳐나간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성진은 떨어져 뒹굴고 있는 바이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매만지며 잠시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냥 그랬다.

옷을 갈아입었다.

알게 모르게 피를 흘렸던 건지, 쓰라린 부분도 있었다. 아마 피딱지가 지기도 전에 수르트의 펄스가 지져버렸을 거다. 그러니 눈치채지 못했겠지.

달라붙는 검은 목티를 챙겨입고, 다시 비슷한 코트를 찾아 입었다. 이 순간까지도 강민교가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그는 기다리는 것이다.

성진과 강민교, 그 둘의 악연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인 용광로에서.

성진은 연구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산 쉘터 정중앙에 세워진 용광로는 쉘터의 어느 곳에서건 그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연구소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다.

불길하고 흉흉한 냄새가 난다.

강민교의 냄새가 밴 건지, 강민교에게 이곳의 냄새가 밴 건지.

강민교의 피 묻은 발자국이 역방향으로 나 있었다. 지금 성진은 그걸 되돌아가고 있었다.

연구소에 진입하자, 부서지고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있어.’

강민교의 불쾌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주민들이 몬스터를 막기 위해 나설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혹시, 자신이 벌인 짓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모르겠다.

연구소에서 용광로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덜컹···

어떤 재질로 이루어진 건지, 엄청나게 두꺼웠으며 투명했다. 그냥 강화 유리와는 궤를 달리했다.

‘···온다!’

강민교는 역시, 이곳에 있었다.

부웅-!

스릉-

서걱-!

강민교에게 돋아난 새로운 팔을 잘라냈다.

“크윽··· 어떻게 돌아온 겁니까?”

“······강민교.”

“이제야 제게 협력할 마음을 품은 겁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릎 꿇고 빌어봤자 쉴드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저도···.”

“수르트는 쓰러졌다, 강민교.”

용광로를 앞에 두고, 대화가 뚝 끊어졌다.

강민교의 눈이 초점을 상실했다.

“···짓말.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용광로를 작동시키겠다. 비켜.”

“웃기지 마!”

강민교가 순간 사라졌다가 성진의 근처에서 나타났다.

“죽으라고! 죽어! ···컥!”

성진의 뒤편에서 나타난 강민교는, 성진의 손아귀에 목을 내줬다.

목을 붙잡힌 채로 버둥거리는 강민교.

“컥······ 크억···.”

강민교가 고통스러운지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리고, 몸에 펄스를 둘러 성진에게 대항했다.

“실수한 겁니다! 내게··· 거리를 내줬으니 당신은···.”

화르륵···

강민교의 불꽃의 펄스는 성진의 몸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저 흐름일 뿐이었다. 성진의 그 어떤 것도 태우지 못했고 유유자적 떠돌았다.

강민교는 목이 붙잡힌 채로 성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눈.

성진에게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당신··· 정말로···.”

“비켜.”

성진은 강민교를 내던졌다.

쾅-!

볼썽사납게 나가떨어진 강민교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는 발악했다.

“그래서 뭐! 당신이 구원자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구원자는 나야! 나라고!”

강민교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성진은 그를 무시하고 용광로에 가까이 가려 했다.

“내가··· 내가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저 나약한 버러지들에게 삶을 주기 위해 내가 노력한 걸 아느냔 말이야! 당신이··· 아니, 당신은···.”

“······.”

“···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

모르겠다.

강민교가 성진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하지만 교활한 움직임은 없었고 그저 감정에 휩싸여, 되는대로 달려든 것에 불과했다.

성진은 아직 납검하지 않은 장검으로 강민교를 베었다.

서걱-!

강민교의 몸이 횡으로 갈라져서 날아갔다.

철퍽-!

“아파······ 아파···.”

“강민교. 지난 일을 후회하나?”

강민교는 반 토막 난 몸으로도 징그럽게 웃었다.

“아니, 전혀.”

“···그럼 됐다.”

“이게 끝이 아니야···. 부산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당신의 그 구원자 행세가 어디까지 갈 것 같아? 금방 포기하고 싶어질걸?”

모르겠다.

“나약하고! 휩쓸리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인간은!”

“······.”

“분명··· 분명 그렇다고···.”

강민교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삶의 목적을 잃었기 때문인지, 힘이 다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탁해진 눈을 보자니 죽은 것 같다.

목표가 있을 때는 머리가 잘려도 살아남은 자였는데···

성진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용광로에 완전히 다가서자, 성진의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구우으으으으응-

용광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웃기게도, 용광로의 작동법은 간단했고 작동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용광로의 질문에 몇 가지 답을 하면 되었다.

성진의 손바닥이 따끔하더니, 그 안에서 불꽃을 닮은 수르트의 핵이 튀어나왔다. 수르트의 핵은 서서히 떠올라 용광로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웅···

- 동력확보 확인. 용광로를 작동하시겠습니까?

“그래.”

- 작동 의사 확인. 종말 거부 프로토콜 준비 중···

- 준비 완료. 프로토콜을 시동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시동어를 말씀해주십시오.

성진은 용광로에 자그마한 글씨로 적혀있는 시동어를 확인했다. 시동어를 확인한 성진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용광로에게 시동어를 말했다.

“나는 종말을 거부한다.”

- 시동어 확인되었습니다. 안전구역까지 물러나 주십시오.

성진이 밖으로 나가기 전, 강민교의 시체를 한번 눈에 담았다.

안전구역으로 물러나는 성진.

물러나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용광로가 점화되었다.

기긱-

콰아아아아아아아아-

- 종말 거부 프로토콜 ‘봄’ 시동

성진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쉘터 내외부에 안내방송이 퍼졌다.

- 반경 3km 내의 이상기온 확인. 기온 정상화 실시

- 지열 발전 가동

- 쉴드 이상 확인, 쉴드 복구 중

- 기온 정상화 영역 지속적 확장 예정

···

저지선에서 성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안내방송 같은데···.”

- 에너지 절감을 위해 반경 내 방한 슈트의 작동을 중단합니다.

삑-

“뭐, 뭐야!”

“내 슈트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바이저의 안면부가 자동으로 젖혀졌다.

치익-

“허, ···헉!”

“주, 죽는다!”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질겁하며 숨을 참던 사람 중, 누군가 결국 숨을 들이켰다.

흐읍···

폐부를 가득 채운 공기는 신선했으며, 달콤했다.

처음 숨을 내쉰 사람은 갑자기, 그냥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흑···.”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울었다. 거주민 모두가.

성진이 쉘터의 정문으로 나왔다.

민상이 지친 미소로 성진을 맞이했다.

“형!”

성진이 민상을 바라보았다.

종말이 찾아온 세상.

그 무엇도 믿지 않았던 교주도, 인간의 가능성을 져버린 과학자도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정답과 오답, 그리고 해답 사이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성진은 아직도 모르겠다.

강민교의 시체는 용광로의 불길에 타올랐다. 그 모습이 부정한 것들을 태워 새 출발을 알리는 정화의 불꽃 같았다.

숨결마저 얼어붙던 종말의 도시.

지금 부산엔,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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