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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9화 (9/222)

# 9

9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최성진이 방한 슈트를 입은 두 명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조병창이 정리해 준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최성진은 조병창이 밑그림을 잘못 그렸다는 걸 금방 알았다.

부우우우욱···

머릿속의 캔버스를 찢었다. 조병창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니 상황에 대한 설명만 주르륵 늘어놓은 거겠지. 최성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식으로 말했을 거다.

‘해 볼만 한데? 그리고 너 어차피 말려도 할 거잖아?’

최성진이 기어코 폭탄선언을 했다.

“일단, 저 앞에 오우거만 치우면 된다는 겁니까?”

“뭐 그렇기야······ 네?”

바이저 너머로 이 둘의 휘둥그레진 눈이 느껴졌다.

최성진은 이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니까.

언제나처럼 최성진은 그의 행동원리대로 행동했고, 이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채팅창에 올라온 문구들이 시청자들을 공감케 했다.

- ㅁㅊ 자살방법도 야무지네

- 황천도 창의적으로 가자너~

- 이건 좀; 너무 우쭐하는 듯? 진정하세요

- 무리수 던지는 거 에반데

채팅창에는 온통 올빼미의 어리석음을 성토하는 말뿐이었다. 그의 경솔한 언행을 꾸짖었으며, 시청자를 늘리기 위해서 무리수를 던졌다고 여기는 듯했다. 원색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채팅 내용도 있었다.

- 요즘 시청자들이 나데나데 너무 해준 거 아님? 정신 차리자

- 작위적인 거 싫어해서 이 방송 구독했는데 취소하러 가야 할 듯

- 음··· 국물 맛이 변했어. 주인이 바뀌었나?

‘조병창’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대단하네요]

- 엥? 병창님? 머가영?

- 솔직히 그렇잖아요. 그냥 적당히 방송만 켜도 한국섭이라는 이점 때문에 시청자들이 쏟아질 텐데요. 그냥 존버만 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위험을 감수한다는 게 비단 시청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서요

- 그야··· 어라?

- 아마도 올빼미님은 저 NPC를 구하고 싶어 하시나 보네요.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니,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종말 이후는 몬스터에게 체력바 따위는 없으니까요. 죽어라 찌르면 죽기야 죽습니다.

‘문제는’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이쪽은 접근하면 죽는다는 점]

- 실제로 나 캐나다섭에서 접근해본 적 있음

- 헐? ㄹㅇ? 그러고 살아있다고?

- 아니, 그게 내 캐릭 사인이라고

- 아앗··· 난 또···

- 접근해서 죽였읍니다 by, 오우거

- 근데, 실제로 앞에 가면 압박감 장난 아님 걍 포스에 짓눌리는 느낌

- 라고 실제로 몸이 짓눌린 사람이 얘기합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민혁과 대웅. 대웅과 민혁의 마음은 지금 상당히 복잡했다. 연제구 벙커의 상황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 내몰려서 식량 수색까지 하는 지금, 둘은 사실상 핀치에 몰려있었다. 한 발짝 더 내몰리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오늘 기어코 일이 터졌다.

그런데, 아무런 징조 없이 나타난 청년이 자신들을 구했다. 청년은 용감했고 강했으며 예의 발랐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청년에게 여기서 더 바라게 되면 그도 자신들과 같은 수렁에 빠지기만 할 뿐이다. 아무리 인륜이 파멸한 세상이라지만 지켜야 할 도리는 있었다. 대웅과 민혁은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입 밖으로 자신들을 버려두고 떠나라고만 하면 됐다. 하지만, 어째선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상대방이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때,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연제구 벙커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그냥 걸어가면 눈 때문에 더 걸리기는 해도 삼십 분은 안 걸리겠지요.”

그냥 걸어간다면 말이다.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청년이 벙커에 대신 구조 요청을 한다? 벙커에서 구조대를 보내올 리가 없다. 그냥 아까운 방한 슈트를 잃었겠거니 하겠지.

‘살아갈 방법이 없다. 나는 몰라도 민혁이는···.’

“그럼 제가 민혁씨를 업고 걷는다고 치면 한 시간 정도 걸리겠군요. 그럼 됐습니다.”

“예? 되··· 되다니요?”

“기동시간 세 시간. 충분합니다.”

“그만! 그만 하세요! 뭐가 충분하다는 겁니까?”

쿵! 쿵!

서민혁이 누워서 건물의 바닥을 쿵쿵 쳤다. 마치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것뿐이라는 듯이. 그가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성진을 다그쳤다.

“오우거라고요! 종말 이전에도 군대랑 헌터들도 혼자서는 쩔쩔매던 몬스터에요! 왜! 대체 왜 그냥 가신다고 하지 않는 겁니까!? 누구 놀려요?”

“민혁아··· 그만···. 도와주시겠다고 한 얘기겠지.”

“김대웅! 너도 마찬가지야, 이 새끼야! 너가 그렇게 흔들리면 우리 연우 너한테 뭘 믿고 맡기겠냐!?”

“새끼야! 그럼 어떡해! 방법 있어? 다 죽어가는 새끼가 자존심은 살아가지고!”

서민혁은 자신이 화를 낼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저 청년에게 잘못이 있을 리가 만무하고 어떻게든 자신을 구하려는 대웅이에게도 잘못은 없었다. 민혁은 그냥 화가 났을 뿐이다. 이렇게 슬프게 죽어가는 게 당연하게 변해버린 세상과 지옥 같은 연제구 벙커에.

“대웅아···. 나 말이야, 종말 전에는 자그마한 일식집을 했었다.”

“알아, 새끼야! 밤마다 그 얘기 수십 번은 들었다!”

“애 엄마 췌장암으로 떠나고 우리 연우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했어. ···적자나 겨우 면하는 가게였지만 나 입을 거 안 입고 내 쓸 거 안 쓰면서 악착같이 돈 모았다. 우리 연우 대학 보내려고.”

“······병신.”

“다 헛것 됐네. 이제 나는 옆에 있어 주지도 못하는 못난 아빠야. ···그러니까 부탁한다, 네가 우리 연우 지켜줘. 그럼 좋을 것 같아.”

“개소리하지 마! 죽지 말라고!”

서민혁이 바닥을 쿵쿵 치던 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돌연 끅끅 웃기 시작했다.

“어휴! 청승이다, 청승이야. 그래도 종말 이후로 유언 남기고 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나름 호상이지.”

- 아··· 괜히 봤다.

- 저 우는 중이에요 ㅠㅠ

- 드라마다, 드라마야;; 한국 드라마 진짜 너무한데

- 와···

‘각본 누가 짰습니까’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불-편하네요. 시청자 게시판 터지는 꼴 보고 싶어요?]

- 당장 살려내라! 우리 조연들!

- 안될 거 알면서도 구해주고 싶어유ㅠ

그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최성진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시간이 얼마 없음에도 한가로이 얘기나 듣고 있었던 건 몸을 회복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다. 아까 무리해서 거미줄을 운용한 것과 100kg이 넘는 서민혁을 들쳐메고 달린 게 부담으로 찾아왔었기 때문에.

다행히 아이스 트롤의 약한 재생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다시 쌩쌩해진 걸 보면.

최성진이 입을 열었다.

“서민혁씨,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하나 물을 테니 대답해주세요.”

최성진의 말에 서민혁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얘기에 서민혁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당신은 살고 싶으십니까?”

“······.”

공기가 무거워져 심해 속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원초적인 물음이었지만 서민혁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내뱉어야 하거늘. 힘겹게 말을 골라냈다.

“···살고 싶으면 살려 주시나요?”

“대답하세요.”

“···살고 싶어요. 죽도록 살고 싶습니다. 나··· 나쁜 짓 안 하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우리 연우 나 죽으면 얼마나 울지 모릅니다··· 나 살아야 해요··· 그러니까···.”

기어코 서민혁은 청년에게 말하게 된다.

“살려주세요··· 흑··· 부탁합니다.”

최성진 그 자신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기 어려운 성격이었고.

복수심. 지금 최성진을 종말에 끌어들인 최성진의 일면이었지만 그게 그를 이루는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다소간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서민혁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이게 뭐지?’

채팅창이 폭주했다.

‘부탁합니다’님이 5,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형님들 좀 살려주세요.]

‘눈물이 안 멈추네요’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요, 제발 구해주세요.]

‘조병창’님이 10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응원합니다.]

‘쪼롱이’님이 1291명을 호스팅 했습니다!

‘혼자왔니’님이 871명을 호스팅 했습니다!

‘혼자왔니’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제 방송 끄고 본방으로 보겠습니다. 응원합니다.]

- 갓빼미;

- 후원 안 멈추는 거 보소; 수금 미쵸따;

- 수금 아님;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 진짜 대사 누가 써주는 거 아니야? 영화 보는 줄;

- 팩트) 이미 블록버스터는 기본으로 깔려있는 영화다

‘난 긴말 안 해’님이 1,00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구해. 아니, 구해줘. 부탁이야.]

- ?

- ;;?

- 1골드 실화?

- 와아아··· 방송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시청자 3만 명 넘음ㅋㅋ 실화?

- 나 홀로 레이드라니; 실패해도 레전드 클립 오지게 나올 듯;

- 올해 미로 신인상 올빼미 예상한다

- 신인상 어쩔? 울옵빠 당연히 대상이거든요!! ㅡㅡ

- 랭커 지금 방송하던 사람들 시청자 빠져서 어리둥절행ㅋㅋㅋ

- 내가 보는 랭커는 빡종하고 자기도 직관한다더라. 얘 월드컵 때도 꿋꿋이 방송한 앤뎈ㅋㅋㅋ 불쌍하자너~

최성진은 방송 일체에 신경을 껐다. 그리고 민혁과 같이 울고 있는 그의 친구 대웅에게 이야기했다.

“대웅씨, 움직일 수 있죠?”

“예? 예. 그야···.”

“그럼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

“으아아아아!”

“크와아아아아아아!”

쿵! 쿵!

거대한 몸집에도 날렵하게 뛰어오는 프로스트 오우거. 푸른 피부에 아수라를 연상케 하는 외모는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 김대웅은 최성진의 부탁으로 오우거를 유인하고 있었다. 슈트에 내장된 설상 기동 기능이 없었다면 따라잡혀도 진즉 따라잡혔다. 이 기능마저도 연료를 더럽게 처먹어 찔끔찔끔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김대웅은 100미터 거리 뒤에 오우거를 두고서도 태연하게 생각했다. 왜 일이 이렇게 풀려가는지. 자신은 대체 그 청년의 뭘 믿고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는지. 한데, 그냥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추락할 곳도 없고 그의 깊은 곳에 자리한 감이 분명 청년을 믿으라고 지시했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 새끼! 여기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오우거에게 쫓겨보겠는가.

한참을 달아나 시간을 벌었고, 이제 그 끝이 보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후, 거짓말처럼 설상 기동 기능이 똑 꺼졌다.

‘위, 위험하다!’

오우거가 짓쳐들 찰나, 다행히 코너를 돌아 오우거의 시야가 제한된 건물로 들어섰다. 이것으로 김대웅은 청년이 부탁한 일을 끝마쳤다. 나머지는 청년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제발···! 제발!’

이 순간 그가 자신과 서민혁을 구원해 줄 사람이길 기도했다. 그리고 청년이 있는 위치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 저게 대체···.’

***

쿵! 쿵!

“크와아아아아!”

“왔네.”

- 이랏샤이 마세~! 혼자 오셨스므니카?

- 신병 받아라!

- 와 진짜; 이 정도면 킹능성 있는 거 아니냐?

- 응 아니야. 헛된 희망이야

- 냉정해ㅠㅠ 매정한 넘

최성진은 애초부터 사거리의 코너마다 우뚝 선 고층 건물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전투에서 환경을 이용하는 건 전투의 기본이었으니까.

‘이제 조건은 갖춰졌다.’

사거리의 고층 건물마다 이어진 거미줄들. 그 수를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거미가 만든 거미집을 떠올리게 했다. 최성진은 그가 짧은 시간 총력을 다해 만들어낸 거미줄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방적 기관이 과열돼서 전투에서는 거미줄을 몇 차례 뽑지도 못할 것 같다.

‘상관없어.’

최성진은 그 전에 이 전투를 끝낼 생각이다.

“시간 없다. 빨리 시작하자고.”

연제구의 포식자 프로스트 오우거가 최성진을 올려다보며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

‘어서 와’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거미집은 처음이지?]

- 다들 팝콘 들고 자리에 앉으세요

- 이미 먹는 중 우걱우걱

- 치킨 언제 와! 배달 아저씨도 이거 보느라 늦게 오나?

- 솔로 레이듴ㅋㅋㅋ 장난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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