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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아버지의 마음 (87/94)


  • 87화. 아버지의 마음
    2023.08.26.


    에드윅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황제궁으로 방향을 잡았다. 황제를 알현하지 않은 건 고작해야 열병에 앓았던 며칠이 전부인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길이 낯설었다.

    아마 이토록 무거운 마음으로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건 처음이라 그럴 터였다.

    “후우.”

    에드윅은 평소 그답지 않게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열병을 앓기 전까지 그는 끊임없는 고뇌에 잠겨 있었다.

    저 때문에 다친 딸아이의 마음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욱 혼란했던 건 황태자의 일과 관련한 대처 방향이었다.

    칼리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제이드가 영지에 갔다 돌아왔던 날이 시종일관 잊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이드가 마지막으로 물었던 말이 줄곧 그의 머릿속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 사실을 이브에게 전하실 건가요?]

    [고민해 봐야겠지.]

    [이브에게 사실을 전하는 게 옳을지에 대해 말이십니까?]

    제이드는 제게 그렇게 물어 왔다. 알게 된 사실을 이브에게 전할 생각이냐고.

    이브에게 사실을 알리는 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당연히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였다.

    다만 에드윅이 고민되는 건 누굴 먼저 만나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셋 중 누구를 먼저 만나야 할지에 대해 말이다.]

    제이드에게도 그렇게 답했다. 그 셋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털어놓지 않았지만, 되묻지 않은 거로 보아 대략적으로는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에드윅 역시 말을 더하지 않았었다.

    다만 그 후로도 에드윅은 계속 고민했다. 셋 중, 그러니까 이벨리아, 칼리프, 가드로 이 세 사람 중 누굴 먼저 만나는 것이 순서일지에 대해서.

    고민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끝에 답을 내린 것이 오늘 오전이었다.

    에드윅이 선택한 건 가드로였다. 복잡한 상황에 얽힌 모두가 다치지 않길 바랐지만, 가드로만큼은 깊은 상처를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가드로를 먼저 만나겠다고 결정한 건 그것 때문이었다.

    칼리프가 리우리안인 척하고 있는 이 상황은 리우리안의 안위를 어떻게도 장담해 주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 납치당해 갇혀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장담할 수 없는 건 리우리안의 생사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처리한 게 칼리프일지 엘리아 왕국의 누군가일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라고 한들 가드로에겐 전부 상처를 피할 수 없는 길일 터였다. 하지만 이벨리아와 칼리프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이벨리아 역시 자신이 그간 감춰 왔던 일들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어느 쪽을 택하든 그녀에겐 곁을 지켜 줄 사람이 있었다.

    칼리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그가 딸아이의 곁을 지킬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자신과 제이드가 그녀의 곁을 지키면 되었다.

    상처가 아물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지만, 적어도 그녀에겐 상처를 나눌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가드로는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란 원래도 외로운 위치였다. 누군가에게 쉬이 기대지 못한 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꼿꼿하게 버텨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도 쉽게 흔들려 자칫 한 제국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게 황제의 위치였다.

    가드로는 황제가 되기 위해 타고난 사람처럼 그간 너무도 훌륭하게 그 역할을 감당해 왔다. 달리 해석한다면 너무도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홀로 꿋꿋하게 감내하며 견뎠다는 의미였다.

    에드윅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황제궁을 빈틈없이 응시했다. 문득 저곳으로 향하던 임기 초반 시절의 언젠가가 떠올랐다.

    그때는 제국이 지금처럼 안정되기 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넷 공작파와 캐롤라인 후작파가 부딪히며 정권을 잡기 위해 분열하던 시절, 에드윅은 가드로에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폐하, 많이 힘드신지요. 갈수록 안색이 어두워지십니다.]

    [가넷 공작이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하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힘들지 않다면 그건 거짓이겠지.]

    [폐하께서 원하시면 제가 뜻을 굽히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정권을 잡아 권력을 얻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폐하의 고통을 담보 잡아서까지 제 뜻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드윅은 진심을 가득 담아 제 뜻을 전했다. 가넷 공작파에 정권이 넘어가는 순간 제국이 귀족들만을 위한 세상으로 변해 갈 게 불 보듯 뻔했다. 핍박받을 제국민들을 생각하면 입 안이 까끌했지만, 제가 손을 놓는다고 해서 제국민들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제국이 존재해야 권력도 존재하는 것이니 가넷 공작의 이득을 위한 세상은 될지언정 제국민들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꾸려 가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가드로는 아니었다. 제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가넷 공작의 등살에 가드로가 먼저 말라 죽을 것 같았다.

    나날이 어두워지는 안색은 물론 야위어 가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래서 에드윅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드로는 그 말을 듣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자네는 절대 뜻을 굽혀선 안 돼.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대의 뜻을 굽혀선 안 되지.]

    [폐하, 하지만…….]

    [내 자리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나. 이 자리는 모든 걸 다 가진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인 듯 보이나, 실상은 지독히도 외롭고 힘든 자리지.]

    말끝에 가드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 앞에 에드윅은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지쳐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강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어진 그의 말은 더욱이나 에드윅의 마음을 웅장하게 울렸다.

    [나는 꿋꿋하게 버티고 견뎌 반드시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것이네. 훗날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내 아들이 뒤를 이어 이곳에 앉았을 때, 내가 겪었던 고통은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이 문제만큼은 확실하게 바로잡아 내 아들이 신경 쓸 일 없도록.]

    […….]

    [그래서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문제들을 바로잡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

    이제 막 두 살이 된 아들을 떠올리는 듯 가드로는 다정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리우리안을 향한 부정이 얼마나 진한지 알 수 있었다.

    가드로는 리우리안을, 하나뿐인 그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아들이 성장해 그의 기대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며 몇 번이고 그를 실망시켜도 깊은 믿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도 올곧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가드로라면 쌍생아가 비록 재앙으로 치부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품어 냈을 터였다.

    “오셨습니까, 후작님.”

    에드윅은 편치 않은 마음으로 황제궁으로 걸음을 들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듯 익숙한 모습의 시종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에드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에 계시는가.”

    “침실에서 후작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에드윅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황제와 막역한 사이이긴 하나, 그럼에도 가드로는 늘 자신을 집무실이 아니면 알현실에서 기다리곤 했다. 친우라고 생각하는 에드윅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황제 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신념 때문이었다.

    가드로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알기에 에드윅은 더욱이나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설마 그사이 폐하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기라도 한 것인가.”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시종장은 쉬이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게 곧 에드윅에겐 대답이 되었다.

    그는 시종장의 말을 기다리지 않은 채 서둘러 침실로 걸음을 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가드로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폐하.”

    “왔나, 후작.”

    환하게 웃는 가드로의 얼굴이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더욱 야위어 있었다. 에드윅은 황망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고집스레 입술을 맞붙였다.

    눈동자 가득 비치는 가드로의 모습이 그의 병환이 더욱 깊어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에드윅은 그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떼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폐하. 전담의는 만나 보셨습니까.”

    “하하. 나만큼 안색이 좋지 않은 후작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몸은 나아진 겐가. 앓아누웠다는 말을 전해 듣곤 줄곧 걱정했다네.”

    “저야 이제 그럴 나이가 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열병이었을 뿐이고, 이젠 아무렇지 않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천하의 캐롤라인 후작이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말하니 내가 더욱이나 괘념치 않을 수가 있나.”

    가드로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곤 야윈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직한 걸음걸이로 창가 옆 테이블로 향했다.

    가드로는 그 앞에 앉고 나서야 다시금 에드윅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대는 더욱 그래선 안 돼. 내가 힘을 잃어 갈수록 그대는 더욱 강건하게 자리를 지켜야지. 안 그런가.”

    말만 두고 본다면 에드윅에겐 선택권조차 주지 않는 고압적인 표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에드윅은 묵묵히 가드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선뜻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압적인 표현이지만, 그 안에 담긴 건 간절한 부탁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겁던 마음이 더욱 묵직해졌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판단으로 여기까지 왔으면서 무슨 말로 운을 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에드윅을 바라보고 있던 가드로가 눈매를 가늘게 늘였다.

    “후작, 혹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표정이 많이 좋지 않은데.”

    물어 오는 가드로의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했다. 그게 에드윅의 목을 더욱 꽉 막히게 했다.

    에드윅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 안에 차오른 어떤 말도 쉬이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에드윅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가드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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