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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 (86/94)


  • 86화.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
    2023.08.25.


    이른 아침, 에드윅은 시종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옷을 갈아입었다. 안색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지난 며칠간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몸이 가벼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 날 며칠 들끓는 열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는데, 잠깐 사이에 열이 떨어진 건 물론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이 났다.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이어진 의아함은 곁을 지키고 있던 제이드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이브가 다녀갔어요. 너무 심하게 앓으셔서 무작정 이브에게 전갈을 보냈는데, 아침에 곧장 왔더라고요. 제법 오래 아버지 곁을 지키다 돌아갔는데 혹여 황후의 미움을 사진 않았을까 이제야 걱정이 되네요.]

    제이드는 무거운 표정을 쉬이 지우지 못했다. 그 탓에 에드윅 역시 이벨리아가 걱정이 됐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이렇게 신기할 정도로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 같았다.

    그간 숨겨 왔던 이벨리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고 에드윅은 줄곧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태자비궁을 나서기 직전 보았던 딸아이의 얼굴이 시종일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이벨리아는 전에 없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갑작스레 알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다 못해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얼굴이 잠깐도 지워지지 않아서 에드윅은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딸아이를 위해 결정한 젊은 시절의 선택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의 짐을 이기지 못해 얻은 열병이었다.

    간단한 연락조차 없던 딸아이가 자신을 보고 갔다는 것은 반가운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병환으로 찾은 것이니 그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을 터였다.

    에드윅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옷시중이 끝난 듯 곁을 지키던 시종들이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제야 거울에 비친 옷매무새를 살피던 에드윅이 집사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황궁으로 갈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강직했다. 늦었지만, 이벨리아를 위해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 * *

    제법 넓은 만찬장 안으로 유스티아가 우아한 걸음을 내디뎠다. 먼저 도착해 있던 가드로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눈길이 변함없이 무심했다. 유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 가드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폐하.”

    “아닙니다. 나도 조금 전에 도착했으니 괘의치 마세요.”

    가드로는 잠깐도 유스티아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온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대답하곤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일 뿐이었다.

    무심하다 못해 냉랭한 태도에 유스티아는 목 끝이 묵직해졌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답답한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황제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평소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한 남편이었지만, 가드로는 함께 식사하는 날만큼은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은 국혼 이후 유스티아를 언제나 희망 고문했다. 유스티아에게 가드로는 드웨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이었다.

    유스티아는 늘 그를 원했고 갈망했다. 시작은 필요에 의해 그를 열망했지만, 그의 무심한 태도가 지속될수록 오기가 생겼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부러 도도하게 굴어 보기도 하고, 사근사근하게 다가가기도 했다. 하지만 가드로는 꿈쩍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자리한 이후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이 음식을 내왔지만, 아랫사람들 시선 앞에서도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유스티아는 테이블 아래로 드레스를 꽉 움켜쥐었다. 그사이 테이블이 가득 차고, 시녀들이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가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식사를 시작했다. 악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유스티아도 진한 호흡 끝에 포크를 손에 쥐었다.

    그때 가드로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만찬장 안을 울렸다.

    “얼마 전 넷트 영애가 출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스티아는 손에 쥐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가드로를 바라보았다. 형식적이나 다름없는 식사 자리에서 가드로가 말을 건네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껏 리우와 관련한 일로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에 유스티아의 눈동자로 긴장감이 어렸다. 그런 그녀를 마주하고도 음식을 꼭꼭 씹던 가드로는 음식물을 목에 넘기고 나서야 그녀를 응시했다.

    “리우리안이 직접 결정한 일이 맞습니까.”

    가드로의 질문이 재차 이어지기 무섭게 유스티아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말은 물론 그의 표정이 그녀의 신경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유스티아는 찡그린 미간을 펴지도 못한 채 되물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꼭 리우의 이름만 빌렸을 뿐, 렐리아를 출옥시킨 게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말 그대롭니다. 넷트 영애의 출옥을 리우리안이 직접 명한 것인지를 묻는 건데, 질문이 어렵습니까?”

    대답하는 가드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다운 어조의 대답이 분명한데, 유스티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익숙한 냉대가 더욱이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듯이 들렸다. 유스티아는 억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물론이에요. 무슨 이유에서든 리우가 직접 하옥을 명한 일인데, 제가 나서서 출옥시킬 수는 없지 않나요?”

    “황후께서 그리 생각하고 계신다니 의외로군요.”

    가드로가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의심하는 거로 모자라 그녀를 무시하는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밴 태도였다.

    윗니에 짓눌려 있던 유스티아의 입술이 수치심에 바르르 흔들렸다. 물잔을 들어 목을 축이던 가드로가 스치듯 지나간 시선에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가드로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물을 충분히 삼키며 갈증을 해결했다. 그러고 나서야 유스티아를 흘긋거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요. 황후의 뜻이 무엇이든 넷트 영애가 하옥된 일은 드웨인 공작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황후의 생각이 그러했다고 하니 의외라는 의미였습니다.”

    말끝에 가드로는 다시 손을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반면 유스티아는 더욱 경직된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더욱이 드웨인의 이야기까지 꺼낸 저의는 자신을 비꼬기 위함이 분명했다.

    멸시받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멸시라면 드웨인의 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스티아가 설움을 덜어 내지 못하곤 매섭게 일갈했다.

    “전하의 말씀처럼 아버님껜 영애의 하옥이 달갑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아버님 등쌀에 아들 체면을 우습게 만들 정도로 우매한 어미는 아니니 그런 걱정은 마시지요.”

    제국의 황제를 향한 태도라기엔 무척 불손했다. 그게 그의 심기를 건들기라도 한 건지, 가드로는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후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시니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지요.”

    가드로가 자못 의미심장한 투로 말을 꺼내었다. 일순 유스티아는 밀려드는 긴장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향한 가드로의 눈길이 매서웠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유스티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가드로가 테이블 쪽으로 당겼던 상체를 의자에 완전히 기대곤 입가를 닦았다.

    “리우리안이 최근 태자비를 자주 찾는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달라진 태도의 이유는 묻지 않았으나, 별안간 그렇게 하는 까닭이 분명 있겠지요.”

    “…….”

    “황후의 말씀처럼 우매하지 않은 어미답게 리우리안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속내가 담긴 가드로의 말이 놀라울 정도로 직선적이었다. 가드로는 누구에게도 쉬이 속을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감격해야 마땅한 상황임이 분명하건만, 유스티아는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드러낸 속내까지도 그녀를 완벽히 적대시하고 있었다.

    “드웨인 공작께선 이미 황후를 손에 쥐지 않았습니까.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까지 손에 쥐려는 것은 욕심이 과하신 게지요.”

    가드로는 다시금 드웨인을 언급하며 아낌없이 비꼬았다. 그 말에 그녀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분명 드웨인과 한데 엮어 비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으로 유스티아는 더러운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지만, 애써 참으며 줄곧 지우지 못했던 질문을 건넸다.

    “리우에게 무사히 황위를 넘겨주실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질문이 이상하군요. 내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라곤 리우리안이 유일한데 황위를 넘겨주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가드로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사선으로 추켜올렸다. 그 반응에 유스티아는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황위를 두고 줄다리기하는 태도를 취한 건 가드로였다. 그런데 이제 와 제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아들이라고? 유스티아는 기가 막혔다.

    “그간 이어진 폐하의 행보를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아들을 무척이나 아끼는 아비라고 생각할 것 같네요.”

    억누르지 못한 비아냥이 그녀의 잇새로 표독스럽게 새어 나왔다. 말을 뱉고서야 문득 말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써 주워 담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황후답지 못한 언행을 책잡는다면 꾹 참고 흘려들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가드로의 말은 유스티아의 예상 밖이었다.

    “아끼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

    “최근 들어 무척 기특할 따름이지요. 지금껏 지켜봐 왔던 리우리안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가드로의 입가에 본 적 없는 옅은 미소가 물들기 시작했다.

    순간 놀란 유스티아가 팽창된 동공으로 그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리우리안의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는 가드로라니.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리우리안에게 무사히 황위를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다니 다행인 일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가드로의 표정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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