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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펠릭스의 결정 (80/94)


80화. 펠릭스의 결정
2023.08.19.


“그래도 한 가지 알아낸 건 있어. 이것도 크게 영양가는 없긴 하지만…….”

펠릭스가 기껏 희망적으로 운을 떼곤 그답지 않게 망설였다. 칼리프는 펠릭스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이벨리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어떤 식으로도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너처럼 신성력과 치유력 같은 능력을 가진 인간이 1만 명에 한 명꼴로 발현되는데, 그중엔 그 능력이 변이되어 새로운 이능을 가진 자들도 존재했던 것 같아. 그게 이벨리아와 같은 경우가 아닐까 예상하는 중이야.”

“그건 어떻게 알아낸 정보지?”

칼리프가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펠릭스가 일순 책 더미에 시선을 두더니, 정오 무렵 보았던 책 한 권을 들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수백 권을 넘게 봤는데, 이 책에만 그런 내용이 적혀 있더군. 기술되어 있는 내용대로 그만큼 흔하지 않은 일이란 의미겠지.”

“흔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그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기 때문에 이 책에만 적혀 있는 걸지도 모르지.”

칼리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펠릭스의 말을 받아쳤다. 펠릭스는 칼리프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펠릭스가 지켜봐 온 칼리프는 감이 무척 발달한 자였다. 그러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그라면 이미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더욱 제 말을 맹목적으로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벨리아의 일이니까.

펠릭스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묵직한 마음의 무게가 자꾸 한숨에 실린 채 밀려 올라왔다.

이렇게까지 부정하는 칼리프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은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제 온몸으로 느낀 전적이 있지 않던가.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길 꺼낸 건,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고…….”

“…….”

“내가 예상하는 가정들이 확실한 사실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야.”

펠릭스는 전에 없이 조심스러운 음색으로 제 뜻을 전했다. 그러자 뜨겁게 들끓기 시작한 적안이 그를 꿰뚫을 기세로 응시했다.

“정확히 뭘 확인한다는 건지 설명해.”

“우선은 일전에 이벨리아에게서 느꼈던 기운이 일시적인 현상일지, 아니면 그저 이벨리아가 그 힘에 대해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그녀가 진짜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칼리프가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펠릭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칼리프와 오롯이 시선을 마주했다.

누군가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는 건 언제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해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벨리아가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지.”

펠릭스는 힘겹게 말을 뱉으면서도 칼리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곤 이번만큼은 칼리프에게 양보할 수 없는 선택이란 걸 확고하게 전달했다.

한참 전부터 불거진 칼리프의 턱이 점점 더 강한 세기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펠릭스는 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으며 그를 올곧이 바라보았다.

* * *

“그게 무슨 소리야?”

이른 아침, 이벨리아는 단장을 마치기 무섭게 놀란 얼굴로 페일린을 바라보았다.

“그게…… 동이 트기 전에 후작저에서 전갈이 도착했어요. 후작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페일린이 발을 가만두지 못하며 어렵사리 전갈의 내용을 전했다. 이벨리아의 안색이 삽시간에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형언할 수 없는 크기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에드윅을 본 것이, 정말 자신이 어린 시절 후작령에 간 적이 없냐고 원망스레 물었던 날이 마지막인 탓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날 부친은 저보다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한 얼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부친의 마음을 도저히 어루만질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제게 난 상처 자리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부친의 절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고 나선 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칼리프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달콤하고 행복해서 부친의 고통과 절망은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그게 이 순간 이벨리아의 마음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들었다.

“페일린.”

“네, 전하.”

“아버지 말이야……. 많이…… 편찮으시대?”

에드윅에 대해 묻는 이벨리아의 얼굴이 온통 죄책감에 젖어 있었다.

“전갈엔 그냥 편찮으시다고만 적혀 있었는데, 동이 트기도 전에 전갈을 보내온 거면 그러시지 않을까요…….”

“하, 어떡하지.”

페일린의 대답에 이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페일린의 말이 맞았다. 어지간히 아픈 정도로 제게 전갈을 보내왔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부친이 편찮으시다는 내용의 전갈이라면 오라버니인 제이드의 명으로 도착한 것일 터였다. 그런 거라면 더욱이 부친의 상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이벨리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그 정도로 편찮으신 거라면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라버니가 제게 부친의 상태를 알린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버지께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전하, 하지만!”

당장이라도 침실 밖으로 나갈 것처럼 이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페일린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내 눈이 마주친 순간, 페일린은 주인을 만류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이벨리아는 페일린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황실의 일원이 되어 윗사람의 허락도 없이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게 암묵적으로 금기된 일이라 그런 것일 터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런 결정을 쉬이 내리지도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랐다.

“페일린, 네 말처럼 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지가 편찮으시단 사실을 알려온 건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는 뜻일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태자비궁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어. 응?”

이벨리아는 애원하다시피 호소했다. 페일린이 막아선다고 해도 부친에게 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페일린이 이런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래야 한결 쉽게 후작저로 향할 수 있을 테니.

“하……. 우선은 여기 계세요, 전하. 마차를 준비시킬게요.”

페일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침실 밖으로 향했다. 이벨리아는 그제야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풀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지 시야가 핑 돌며 현기증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정이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놀란 이벨리아가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창문 쪽에서 도도도도 달려오고 있는 햄스터가 보였다.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발견한 순간 이벨리아는 한숨부터 차올랐다.

“하, 또 말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네게 볼일이 있어서 온 길이지. 그나저나 표정이 왜 그런 건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어느새 테이블 위까지 올라온 펠릭스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햄스터의 것이긴 했지만, 퍽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벨리아에겐 그런 걱정조차도 반갑지가 않았다.

안 그래도 혼란한 머릿속이 펠릭스의 등장으로 더욱 번잡스러워진 기분이었다.

“나중에요. 나중에 얘기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요. 마차가 도착하는 대로 나갈 거라 오늘은 펠릭스에게 내어 줄 시간이 없어요.”

이벨리아는 펠릭스를 향해 손을 아무렇게나 내저었다. 그러곤 눈을 꼭 감은 채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두통까지 일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부친을 향한 걱정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벨리아는 속으로 제발 위중한 건 아니길 몇 번이고 빌었다. 그러던 찰나, 펠릭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픈 사람이 설마 가족인 건가?

줄곧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이벨리아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팽창된 동공이 곧장 펠릭스를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아프단 말을 소리 내어 뱉은 적이 없는데, 속을 읽은 것처럼 정확히 짚어 내는 펠릭스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그러나 정작 펠릭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알아. 그 정도는 나한테 어려운 일 아니야. 네 표정이 이렇게까지 어두운 걸 보니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아직은 몰라요. 그냥 그럴 것 같다고…… 짐작만 할 뿐이지.”

-흐음. 그럼 날 데려가 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야.

“하, 펠릭스. 오늘은 정말 펠릭스랑 의미 없는 말씨름이나 할 정신도, 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요, 제발.”

너무 어처구니없는 펠릭스의 제안에 이벨리아가 진저리를 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하는 펠릭스에게 약간 실망감까지 들 것 같았다. 하지만 펠릭스는 몸서리치는 반응에도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이어진 그의 말은 전에 없이 진지하기까지 했다.

-누가 말씨름이나 하재? 후회하지 말고 내가 가겠다고 자처할 때 못 이기는 척 데리고 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일전에 네가 갑자기 혼절해서 끙끙 앓았을 때, 그때 내가 고쳐 줬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순간 이벨리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끙끙 앓는 자신에게 그의 기운을 나눠 줬다고 했다. 덕분에 자신이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라고.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러기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 사실이라 그냥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이벨리아는 혼란한 눈으로 펠릭스를 보았다. 그때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채근했다.

-빨리 결정해. 네 시녀가 지금 급히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으니까.

이벨리아의 시선이 절로 침실 문으로 향했다. 얌전히 닫혀 있었지만, 펠릭스의 말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고 페일린이 나타날 것 같았다.

침실 문과 펠릭스를 번갈아 보던 이벨리아가 결국 짧은 숨을 내쉬곤 펠릭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위로 올라오란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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