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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음습한 기운 (79/94)


  • 79화. 음습한 기운
    2023.08.18.


    펠릭스는 종일 칼리프를 기다렸다. 이벨리아를 만나기 위해 황태자궁을 나선 그는 밤이 깊도록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태자비궁으로 향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의 시간을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나타나 칼리프에게 돌아가자 성화를 부린다면 이벨리아도 의아해할 게 분명했다.

    태자비궁으로 가는 건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아 꾹 참고는 있는데,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느껴졌다.

    그는 고집스레 눈을 질끈 감고 팔짱을 꼈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고 칼리프가 들어왔다.

    펠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응시했다. 입술을 휘감은 잔잔한 미소가 그의 컨디션이 무척 좋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칼리프는 테이블 앞에 앉은 펠릭스는 보지 못한 것처럼 소매를 걷어붙이곤 목을 좌우로 까닥였다. 기분 좋은 피로감을 만끽하는 듯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펠릭스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뒤틀렸다.

    “여태 이벨리아랑 같이 있다 오는 길인가?”

    “그래.”

    “아주 좋아 보이는군.”

    심상치 않은 어조에 칼리프가 고개를 홱 돌려 펠릭스를 보았다. 동시에 펠릭스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칼리프에게 화풀이하듯 행동할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종일 초조했던 마음이 이런 식으로 터져 나왔다.

    “후.”

    펠릭스는 짙은 숨을 푹 내쉬며 차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곤 다시금 칼리프를 보았다.

    “잠깐 앉지. 할 말이 있어.”

    뒤틀린 감정이 한결 덜어진 음색이었다.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한 칼리프가 지체 없이 펠릭스 건너편에 앉았다.

    “얘기해.”

    칼리프는 좋았던 기분의 여운조차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그에 펠릭스의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분명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그러기 무섭게 이 사실을 칼리프에게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를 마주하고 나니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칼리프가 그를 채근이라도 하려는 찰나, 펠릭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전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해? 내가 왜 봉인이 되었던 건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일순 칼리프의 눈썹이 사선으로 추켜 올라갔다. 펠릭스의 말이 너무 뜬금없었다. 동시에 앞으로 다룰 화제가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거란 확신이 밀려왔다.

    “그래, 기억해.”

    “……잠깐이지만, 오늘 그 기운을 다시 느꼈어.”

    “뭐?”

    칼리프의 미간이 걷잡을 수 없이 구겨졌다. 불친절한 펠릭스의 말이 이해가 갈 듯 말 듯 헷갈렸다.

    “그 기운을 다시 느꼈다니, 어떤 기운을 말하는 거지?”

    “봉인되기 직전 내가 품었던 그 기운 말이야.”

    “에두르지 말고 정확하게 얘기해.”

    칼리프가 한껏 예민해진 눈으로 펠릭스를 응시하며 차갑게 뇌까렸다. 하지만 펠릭스는 혼란한 표정만 지을 뿐 선뜻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를 알게 된 이래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게 칼리프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냉랭하게 얼어붙은 칼리프가 기억 속을 분주히 뒤졌다. 언젠가 펠릭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의도치 않게 펠릭스를 봉인에서 풀어 주고 동행하게 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내가 거느리던 왕국은 더없이 평화로운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악의 기운이 왕국 전체에 내려앉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악의 기운?]

    [그래. 그들은 인간이 느끼는 시기나 질투 같은 추악한 감정에 기생하며 살았어. 그들에게 틈을 내어 준 인간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걸 잡아먹혔고 결국 그들에게 목숨까지 내어 줬지. 그런 식으로 그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자 왕국은 점점 파괴되기 시작했어.]

    [하,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추악한 감정에 기생하며 사는 존재라고? 그딴 헛소리는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군.]

    [당연히 그랬겠지. 지금껏 그들을 품고 있던 건 나였으니까.]

    [그건 또 무슨…….]

    [그들을 억지로 잠재우기 위해 봉인을 택한 거야. 세력이 커질 대로 커진 그들을 소멸시킬 방법이 없어서. 그리고 내가 그들을 품은 채 봉인을 택했기에 그 후손인 네가 그들의 존재를 헛소리쯤으로 치부할 수 있는 거고.]

    언제나 장난질이나 칠 줄 알던 펠릭스가 처음으로 진지하다 못해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한 이야기였다.

    그 기억을 떠올린 칼리프가 서둘러 물었다.

    “네가 봉인되기 직전 품었던 기운이라면…… 설마 네가 거느리던 왕국을 멸망까지 몰고 갔다던 그 악신을 말하는 건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묻어난 칼리프의 목소리에 필릭스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뭐라 말을 잇지는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프의 추측이 정확하다는 듯이.

    “허.”

    칼리프는 순간 밀려오는 허탈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펠릭스가 말했던 악신이라면 그조차 소멸시키지 못했던 강력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의 기운을 느낀 것이 왜 하필 이벨리아와 막 행복해지기 시작한 이 시점인 건지, 칼리프는 밀려드는 짜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기운을 언제 느낀 거지?”

    “……정오가 조금 지나서.”

    “그때라면 네가 예민하게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때가 아닌가? 확실하게 느낀 거 맞아? 네가 예민해서 착각한 건 아니고?”

    칼리프가 몰아붙이듯 말을 뱉었다. 내내 넋을 놓고 있던 펠릭스가 단박에 눈을 치켜뜨곤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는 기운이지. 수백 년을 살면서 그토록 음습한 기운을 느낀 건 트리탄 왕국에 놈들이 기생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유일했으니까.”

    너무도 확고한 단언이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차마 뭐라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침실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누구 하나 말 꺼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적막 속에서 펠릭스가 한참 만에 망설이며 입술을 떼었다.

    “……네게 말하지 않은 게 또 있어.”

    “하, 여기서 더 들어야 될 말이 있다니 놀랍군.”

    칼리프가 빈정거리며 말했지만, 그의 적안은 정확히 펠릭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어서 말해 보라는 듯한 눈빛에 펠릭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벨리아가 예사롭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뭐?”

    칼리프의 미간이 악신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벨리아가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정확하게는 나도 몰라.”

    “그런데 뭘 근거로 그녀가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거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해. 그 능력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해서 그렇지.”

    칼리프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일순 그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회귀하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뒤따르던 괴로운 감정도 선명히 상기되었다.

    펠릭스는 자신이 무한히 회귀하는 것조차 대단한 능력이라고 칭했었다. 물론 그게 비아냥거리거나 장난을 치기 위해 한 말이란 건 알았지만, 칼리프의 입장에선 이벨리아가 가졌다는 그 능력이 저와 같은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일은 아닐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설명해 봐. 어떤 식의 능력인 건지.”

    칼리프가 조급하게 물었다. 그를 흘깃 바라본 펠릭스가 더욱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의 속내를 읽어 낸 것이 분명했다.

    “그것 역시 정확한 건 아직 몰라.”

    “그럼 도대체 뭘 가지고!”

    “다만.”

    격렬하게 밀려드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칼리프가 역정을 내듯 소리쳤다. 그런 그의 말을 펠릭스가 단호히 잘라 냈다.

    “다만, 일전에 그녀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내 힘을 흡수한 적이 있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서 흡수한 힘의 족히 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힘으로 다시 되돌려 줬지.”

    “뭐? 그게 말이 되나?”

    “나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 현상을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 본 게 없어.”

    펠릭스는 말끝에 칼리프를 한번 보곤 테이블 위와 그 아래 너저분하게 쌓인 책들을 느리게 훑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칼리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몇 날 며칠 책만 들여다보고 있던 이유가 그래서인가?”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싫다는 데도 계속 이벨리아를 만나러 갔던 것도 그래서였어.”

    “하.”

    “처음엔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확인해보고 싶어서 찾아가기 시작했던 거고, 그 후론 책에선 도저히 그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벨리아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갔었지.”

    “그래서, 힌트는 얻었나?”

    칼리프가 간절한 눈으로 펠릭스를 보았다. 펠릭스의 입에서 이벨리아의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그가 언짢아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칼리프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의 바람을 처참히 무너트렸다.

    “아니, 아무것도.”

    단호한 그의 대답에 칼리프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악신이 등장했다는 말 뒤에 어째서 이벨리아의 이야기를 꺼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한 머리는 어느덧 답을 찾아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펠릭스가 악신이 등장한 일과 이벨리아가 가지고 있다는 능력을 별개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칼리프는 악신의 존재에 대해선 펠릭스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기에 그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상대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왕국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이라면 절대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벨리아를 언급하다니, 칼리프는 도통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초조함이 절정으로 다다랐을 때였다. 일순 펠릭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칼리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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