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감춰진 진실
(67/94)
67화. 감춰진 진실
(67/94)
67화. 감춰진 진실
2023.08.06.
이른 아침, 이벨리아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단장을 마친 뒤 응접실로 향했다. 어제저녁 부친이 보내온 전갈 때문이었다.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 말씀드린 저녁에는 찾아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신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내일 오전에 찾아뵙도록 하지요.>
예정에 없던 펠릭스와의 만남 후 머리가 터질 듯 복잡해진 차였다. 한편으론 달가운 내용에 이벨리아는 내일 뵙자고 답신을 보내 달라 페일린에게 명했었다.
예정에 없이 생긴 시간에 이벨리아는 펠릭스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가 했던 모든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고 다녔지만, 그중 가장 신경 쓰인 것은 부친과 관련해 한 이야기였다.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 네가 어릴 적, 정말로 캐롤라인 후작령에 간 적이 없는지.]
[그건…… 왜요?]
[칼리프와 너의 시작이 거기서부터니까.]
펠릭스에게 후작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일전에도 그는 어릴 적 이야기를 물으며 그녀가 마치 요양차 영지에 갔던 적이 있다는 듯 말했었다.
그땐 금방 말을 돌리기에 실수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보면 그런 게 아니었던 거다.
“후작령…….”
이벨리아는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장소나 다름없는 그곳을 나직이 중얼거려 보았다.
여전히 후작령에 갔던 기억은 눈곱만큼도 나지 않았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게 전부였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푸르른 들판으로 가득하던 영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녀의 심신을 안정되게 해 주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들판과 우거진 숲속을 누비고 있었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제외하곤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인 것처럼 너무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래서 이벨리아는 막연히 꿈이라 그런 모양이라고만 여겼다. 그 꿈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이 떨렸고, 울적했다가도 상쾌해졌다.
그녀에게 후작령은 그저 그 정도의 의미였다. 기분 좋은 꿈에 등장하는 장소. 그런데 거기가 칼리프와의 시작이라니.
펠릭스가 제게 거짓을 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통 믿을 수가 없었다.
“전하.”
깊숙하게 잠긴 상념 사이로 일순 페일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벨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후작님께서는 이미 도착해 와 계세요.”
“아버지께서 벌써?”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응. 페일린, 따뜻한 차 좀 준비해 줄래?”
“후작님께서 말씀하셔서 이미 준비해 뒀어요.”
이벨리아는 이어진 페일린의 말까지 듣고 나서야 억지로나마 미소를 감아올릴 수 있었다.
곧 페일린의 손길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이벨리아는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전하.”
응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먼저 와 있던 에드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입술 끝에 힘을 주었지만, 페일린 앞에서와는 달리 호선을 그릴 수가 없었다.
눈동자 가득 부친의 얼굴이 채워지기 무섭게 귓전에서 울리기 시작한 펠릭스의 말 때문이었다.
“……앉으세요, 아버지.”
이벨리아는 조금 늦은 대답을 전하며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앞엔 페일린이 말한 대로 준비된 찻잔이 놓여 있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손길로 찻잔을 쥐었다. 입가에 기울여 한입 머금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어제 부친을 기다리는 동안엔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어릴 적 에드윅과 짧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여기는…….]
[네 방이다, 이브. 이제 좀 괜찮은 거니?]
단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부친이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일까. 그녀가 금방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 잠에선 깬 자신을 다급히 품에 안았었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행동에 이벨리아는 그저 눈만 끔벅였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하곤 서둘러 물었다.
[아버지, 여긴 설마 수도에 있는 후작저 제 방인 건가요?]
[……물론이지, 이브. 그럼 네 방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다는 말이니.]
[분명 저는 영지에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일순 부친이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들려 하는데, 그녀의 정수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덮였다.
[우리 딸이 꿈을 꾼 모양이구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열흘을 앓고 일어난 어린아이의 정신은 온전치 못한 상태였고, 세상에서 제일 믿는 부친의 말은 곧 아이에게 사실이 되어 주었다.
이벨리아는 영지와 관련해 떠오르는 건 전부 꿈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아니었다. 반평생을 넘게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어떻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을까.
다만 이제 와 그날의 부친이 어딘가 이상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깊게 잠긴 고민 속으로 별안간 부친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벨리아가 에드윅을 보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혹 어디가 아프신 건 아닌지요.”
“아니에요.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이벨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손끝이 자꾸만 떨렸다. 제게 이토록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친은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서야 이벨리아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만 믿고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남자를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꾸만 불길하게 밀려오는 이 기분이 현실이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펠릭스의 말이 귓전을 울리고, 애달프게 자신을 바라보던 칼리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리프는 절대 널 두고 혼자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 끔찍한 반복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회귀자가 된 건 되돌릴 수 없었을지 몰라도, 반복되는 생에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벨리아 널 위해 희생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려. 그리고 이번엔 네가 칼리프를 위한 선택을 해.]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펠릭스가 했던 말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는 절대 날 혼자 두고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했어. 날 위해 희생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날 위해 생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했어. 그 모든 걸 날 위해서, 그는 기꺼이 했어.’
이벨리아는 혼잣말을 속으로 읊으며 테이블 아래 손을 더욱 꽉 말아쥐었다.
아직 그가 리우리안이 아니라는 것도, 그가 회귀자라는 말도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자신을 위해 계속해서 위험할지도 모를 일들을 감수하고 감행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도망치면 안 되는 거였다. 펠릭스의 말처럼 이번만큼은 자신이 그를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아버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이벨리아는 독하게 마음을 다지며 에드윅을 오롯이 응시했다. 차로 목을 축이던 에드윅이 서둘러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제가…… 어렸을 적에 말이에요.”
“전하께서, 어렸을 적이요?”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에 에드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벨리아는 부친의 변화를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열흘 정도 열병을 앓고 겨우 일어났을 때…… 잠기운을 다 털어 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분명 영지에 있었다고요.”
이벨리아는 가까스로 말을 뱉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마디 뱉을 때마다 바싹 마른 목이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를 바라보는 에드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싹 마른 목이 그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이 순간을 피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젠 많이 흐려져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의 저한텐 영지에 있었던 시간이 너무 행복했었거든요. 지금까지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만큼.”
“…….”
“그래서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수도에 있는 제 방이라던 아버지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꿈을 꾼 모양이라고 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
“그래도 결국은 믿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아버지는, 제가 많이 존경하고…… 또 많이 사랑하는 분이니까.”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서요. 저 혼자 생각하는 거론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버지께 다시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벨리아는 눈꺼풀을 빠르게 끔뻑였다. 눈가로 자꾸만 열감이 몰렸다. 이제 정말 한마디면 되는데, 힘겹게 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부친의 모습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는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이 순간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그 생각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이벨리아는 마지막 남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버지, 부디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
“정말 제가 영지에 갔던 적이 없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