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출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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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출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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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출생의 비밀
2023.08.05.
에드윅은 저녁이 깊어가도록 서재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후 무렵 전해 받은 전갈 때문이었다.
제이드가 보내온 것이었다. 깊은 밤엔 후작저에 도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 제이드 특유의 필체로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벨리아와의 약속을 지킬 수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재차 자신을 찾은 이유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분명 황궁에 도는 황태자와 관련한 이야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에드윅은 이벨리아와의 약속을 더더욱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칼리프에 대해 확신이 서야 이벨리아와의 대화 방향도 정해질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분명 딸아이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늦지 않게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겠노라고.
그러니 힘들어하는 이벨리아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결단을 지어야 했다.
마침 제이드에게 전갈도 도착했으니, 이제 정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목전까지 다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드윅은 목 끝에 걸린 숨을 내쉬며 집사장이 준비해 준 찻잔에 손을 뻗었다. 이미 한참 전에 내어 온 것이라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갈증을 해소해 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따금 찾아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찻잔을 세 번째 기울였을 때였다. 묵직한 노크 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
에드윅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기다리던 제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그래, 제이드. 왔구나.”
에드윅은 제이드의 앞으로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러곤 아들의 손을 조심스레 부여잡곤 소파가 있는 곳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제이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었다.
수도에서 영지까지는 숙달된 기사들조차 이틀은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걸 엿새 만에 해낸 것이다.
그 먼 여정을 중책을 떠안은 채 다녀와야 했으니, 어지간히 부담되고 고되었을 터였다.
에드윅은 말로 수고를 치하하는 대신 아들의 손을 몇 번이고 꽉 잡아 주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말을 타고 달리면서 계속 바람을 맞아 그런 모양이에요. 전혀 아무렇지 않으니 염려 마세요.”
제이드는 에드윅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무척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그걸 내색할 순 없었다. 제 걱정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부친이 지고 있을 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을 터였다.
제이드는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럼에도 에드윅은 쉬이 표정을 펴지 못했지만, 분위기를 푼다고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에드윅에게 전해야 할 중요한 말이 남아 있었다.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드윗 자작이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 그자가 뭐라고 하더냐.”
에드윅이 긴장된 낯으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이드는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자작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자작은 제이드를 마주하기 무섭게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그럴수록 제이드는 특유의 해맑은 아이 같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캐롤라인 후작가의 소후작 제이드 캐롤라인입니다.]
[캐롤라인, 후작가 말입니까?]
드윗 자작은 제이드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겁에 질린 얼굴을 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경계를 세웠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더니 제이드가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할 말이 없다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처음엔 자작이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으로 들어간 자작이 나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작은 집 밖으론 한 걸음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기약도 없이 길어지자, 제이드도 더는 자작을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줄곧 자작의 허름한 집 앞을 지키던 그는 근처 풀숲에 몸을 감췄다. 그러자 잠시 후 자작이 출입문 옆에 난 창문을 통해 문밖의 동태를 살피더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작이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후로 또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제이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함께 영지로 간 기사들과 함께 자작을 포위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낯빛이 퍼렇게 질린 자작이 가래 끓는 걸걸한 목소리로 제이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대체 제게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냥 간단하게 궁금한 게 있어서 온 거라고 분명 말씀드렸는데, 자작께서 나를 이리도 피하시는 걸 보니 이미 내가 할 질문에 대해 이미 눈치를 채신 모양입니다?]
제이드는 온통 수상쩍은 자작의 행동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자작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눈동자를 가만두지 못했다. 제이드의 추측에 힘을 실어 주는 행동이었다.
제이드는 이미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사안이 아닌 만큼 자작의 입을 통해 확실히 들어야 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자작의 앞으로 묵직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러자 자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이드와 주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이, 이게 뭡니까.]
[자작의 대답과 맞바꿀 보상 내지는 뇌물? 아마 앞으로 몇 년간은 밥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될 겁니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재치 있는 언변이었다. 그 덕분인지 자작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여긴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장소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자작 집에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이 돈을 받고 묻는 말에 대답할지 말지 서둘러 결정하는 게 좋을 거란 재촉이었다.
자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을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자작은 금세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이드는 주머니를 다시 제 품에 넣었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 행동은 자작 집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으로 알아듣고 실례 좀 하겠습니다.]
자작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제이드를 말리지는 않았다. 출입문이 닫히고 자작과 단둘이 남은 제이드는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망설임 없이 꺼내었다.
[자작이 아이 한 명을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곳에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에요.]
[……소후작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잠시 데리고 있던 아이일 뿐입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아이를 어디서 데려왔느냐는 겁니다.]
[그건…….]
뭐든 다 대답해 줄 것 같단 자작은 순식간에 기세를 누그러뜨리곤 대답을 망설였다. 그에 제이드는 품 안에 넣었던 주머니를 다시 꺼내었다. 그러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자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내었다.
자작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에드윅에게 선뜻 전달하는 게 망설여질 정도였다.
“제이드.”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건지, 에드윅이 나직하게 제이드를 채근해 왔다. 제이드의 잇새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 예상대로예요.”
“그 말은…….”
에드윅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벌써부터 좋지 않은 예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자작이 말하길 평소 알고 지내던 남작 부인을 통해 복면을 뒤집어쓴 자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아이 하나를 맡아 키워 주면 집과 돈을 주겠다고 말이에요.”
“…….”
“당시 자작은 빚 때문에 집도 없이 노숙하면서 지냈던 터라 그 제안이 제법 솔깃했던 모양이에요. 먹고살 만해지니 끊었던 유흥에 다시 손을 대게 됐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아이가 가출을 하고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에드윅은 침음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년간 남작 부인도, 당시 집과 돈을 주었던 사내도 아이에 대해 한 번도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사라지고 없으니 그제야 두려워졌던 거죠. 아이가 없어진 걸 알면 집도 빼앗기고 그간 지원받았던 돈도 토해 내라고 할까 봐요.”
“…….”
“그래서 아이의 정체를 남작 부인에게 은근하게 떠봤던 것 같은데,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됐대요. 그 아이가 가넷 공작이 없애려고 했던 아이였단 사실을.”
에드윅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제이드가 복면을 뒤집어쓴 자란 표현을 사용했을 때부터 이미 강한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가넷 공작의 이름까지 적나라하게 나와 주니 이젠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황궁 안에 있는 황태자는 리우리안이 아니었다. 칼리프 드윗, 그는 태어나기 무섭게 어미의 품에 한 번 안겨 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할 뻔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운의 황실 핏줄이었다.
에드윅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추측이 확실해지면 결정이 조금 쉬워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복잡했고 어려웠다.
칼리프는 분명 제국의 황태자 리우리안인 척하며 말했었다. 이벨리아를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오롯한 황태자비로, 장차 제국의 완벽한 황후로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이다.
그 아이가 이벨리아에게 품었을 마음이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짐작이 갔다. 그 옛날 어린 시절에도 이벨리아를 향한 칼리프의 시선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이벨리아에게 위험한 감정을 품고 있단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에드윅이 혼란스러운 건, 칼리프가 제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 리우리안인 척하고 있느냐는 거였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 사실을 이브에게 전하실 건가요?”
에드윅 못지않게 수심에 잠긴 제이드가 어렵사리 말을 건네었다.
에드윅은 선뜻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가까스로 말문을 뗀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는 시름을 지우지 못한 채 대답했다.
“고민해 봐야겠지.”
“이브에게 사실을 전하는 게 옳을지에 대해 말이십니까?”
곧바로 되묻는 제이드를 향해 에드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 끝에 나직이 그의 의중을 드러냈다.
“셋 중 누구를 먼저 만나야 할지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