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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불편한 자리 (61/94)


61화. 불편한 자리
2023.07.31.


이벨리아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겨우 진정시켜 놓은 심장이 다시금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들었다는 시녀의 말이 줄곧 이상한 황후의 태도보다도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한 채 눈동자만 어지러이 움직였다. 그 탓에 끈덕지게 달라붙은 황후의 시선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밀어닥친 혼돈을 어쩌지 못하던 찰나, 들려오지 않길 바라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두 분께서 같이 계셨군요.”

“태자비와 차 한잔하고 싶어서 막 부른 참이었단다. 그런데 리우, 말도 없이 갑자기 여기까진 무슨 일이니?”

이유를 묻는 유스티아의 목소리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런데도 이벨리아는 불길 위를 거니는 것처럼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에게 닿은 그의 시선 앞에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

“……근처 지나는 길에 어머니가 생각나서 잠시 들렀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이벨리아는 선명히 알 것 같았다.

유스티아를 향해 대답하면서도 그는 줄곧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불현듯 이곳에 온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듯.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의문이 일었지만,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은 햄스터의 형체에 이벨리아는 금세 납득했다.

펠릭스가 멀리 있는 상황까지 보고 듣는 능력까지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했다. 햄스터로 변신까지 하는 사람인데, 무엇인들 불가능할까.

하지만 이 순간 이벨리아는 그런 펠릭스가 너무도 야속하기만 했다.

“내 생각이 나서 들렀다니, 이보다 더 기쁜 말이 있을까. 어서 앉으렴, 리우.”

유스티아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별거 아닌 말뿐인데, 이벨리아의 어깨가 별스럽게도 움찔거렸다.

유스티아의 목소리를 타고 나온 ‘리우’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난,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아니라…….]

[…….]

[……칼리프 드윗이니까.]

억지로 지워 냈던 그의 목소리가 일순 선명하게 상기되었다.

칼리프 드윗.

그의 이름은 칼리프 드윗이었다. 리우리안 페트로프가 아니라.

그 사실이 뼛속 깊이 인식된 순간, 이벨리아는 다른 의미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테롯, 우리 리우 몫의 찻잔을 준비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 폐하.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유스티아가 곁에 서 있던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그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시녀장이 걸음을 물리며 어디론가 향했다.

그러고 나자 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종들을 제외하면 오롯이 세 사람만 자리에 남게 되었다.

순식간에 불편한 기류가 온실 가득 내려앉았다. 단 한 사람, 유스티아만이 초연한 모습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태자비가 렐리아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지요?”

이벨리아는 갑자기 저를 향한 유스티아의 말에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원래도 렐리아와 관련한 이야기는 불편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그랬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대답할 말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자꾸만 온 신경이 옆자리로 쏠린 탓이었다.

그녀는 애꿎은 아랫입술만 억세게 물었다. 그러곤 하얗게 발한 머리를 굴리기 위해 노력했다.

“가벼운 상처일 뿐이에요. 바로 처치를 받은 덕분에 지금은 많이 나았고요.”

“그렇다고 해도 상처를 입었다니, 내 마음이 다 좋지 않네요.”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하지만 상처는 잘 아물어 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이벨리아는 말끝에 억지로 입매를 당겨 올렸다. 갑자기 등장한 리우리안…… 아니, 칼리프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는 하나, 황후는 경계해야 하는 상대였다. 그러니 평소보다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적막은 금세 또 찾아왔다. 그사이 황후의 심부름으로 자리를 비웠던 시녀장이 칼리프의 앞으로 찻잔 세트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익숙한 손길로 차를 따라 주었다.

그제야 유스티아가 퍽 의미심장한 어조로 운을 떼었다.

“오늘 태자비에게 만남을 청한 건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예요.”

“부탁……이요?”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유스티아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토록 시원하게 본심을 드러내다니 전혀 그녀답지 않은 행보였다.

“렐리아 영애와 있었던 일에 대해선 대충 전해 들었어요. 태자비의 마음이 많이 상할 법하더군요.”

“아…….”

이벨리아는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무슨 꿍꿍이 때문에 이러는 걸까 싶었는데, 결국 렐리아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황후의 말을 더 듣지 않아도 이 자리를 만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황후가 하고 싶은 말은 렐리아가 출옥될 수 있도록 도와 달란 내용일 터였다. 리우리안이라고 믿고 있을 남자에겐 아무리 말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제게 화살을 돌린 것이 분명했다.

“영애의 신분으로 태자비 몸에 상처를 내다니 당치도 않을 일이지요.”

“…….”

“물론 처음엔 그 문제로 리우가 투옥을 명했다기에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더군요.”

“…….”

“태자비는 장차 내 뒤를 이어 황후가 될 귀한 몸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이번 일은 렐리아 영애가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한 게지요.”

유스티아가 퍽 자애로운 눈동자로 이벨리아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목적을 알기 전이었다면 그녀를 혼란하게 만들기 충분한 눈빛이었지만, 지금의 이벨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하의 유스티아가 제게 부탁을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공들여 서론을 펼친다는 게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달갑진 않았다.

이벨리아는 가능한 한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옆자리의 남자 때문이었다.

남자는 황후의 입에서 나오는 렐리아의 이야기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손등이 따갑게 느껴지는 거로 보아 테이블 아래 숨긴 채 힘껏 말아 쥐고 있는 제 손을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불편했다. 그사이 유스티아가 멈췄던 말문을 다시 떼며 이벨리아의 주의를 흔들어 놓았다.

“렐리아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네요.”

유스티아가 일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벨리아는 애써 칼리프의 시선을 외면하며 습관처럼 입 안에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 건지요, 폐하.”

“혹 태자비도 최근 황궁 안을 떠들썩하게 하는 소문에 대해 알고 있나요?”

순간 이벨리아가 딱딱하게 경직된 채 유스티아를 향해 눈동자를 들었다. 황궁 안을 떠들썩하게 한 소문이라면 자신과 칼리프를 둘러싼 이야기를 의미하는 거였다. 정확히는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황후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이토록 걱정 어린 얼굴로 언급하다니, 기가 막혔다.

이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치밀어 오르는 탄식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팔을 뻗어 찻잔을 쥐었다. 황후가 내어 준 차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그거라도 마시며 탄식을 삼켜야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으로 찻잔을 입가에 대었을 때였다. 유스티아의 이야기가 다시금 이어졌다.

“아랫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귀를 기울여 나쁠 건 없겠지요. 그래서 시녀장을 통해 떠도는 소문에 대해 알아보니 저들끼리 수군거리길 우리 리우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들 하더군요.”

“…….”

“마치 리우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는 듯이 떠들어 대는데 내가 그냥 흘려들을 수가 있어야지…….”

쨍그랑.

일순 온실 안으로 유리가 깨지며 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벨리아는 삽시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손끝을 달달 떨었다. 심장이 폭주하듯 뛰었다. 심호흡이라도 하며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리우리안이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고 시종들이 떠들어 대더라는 유스티아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그녀는 아무 뜻 없이 한 말임이 분명했다. 말의 뉘앙스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도 한번 놀란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제게 박힌 두 사람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이벨리아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제 실수로 깨진 찻잔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라도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그만…….”

횡설수설하는 말소리만큼이나 유리 조각을 집는 손길 역시 불안정했다. 조심성 없이 마구잡이로 집어 대는데 손가락을 베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아앗……!”

일순 찌릿한 통증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유리 조각을 놓치고 말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벨리아가 고통이 느껴지는 자리를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자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에서 날카롭게 베인 상처와 함께 피가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태자비, 괜찮아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긴 유스티아도 마찬가지인지, 이벨리아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이벨리아는 참았던 숨을 툭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야 황후에게 대답을 돌려주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네, 괜찮…….”

“전혀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그녀가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벨리아는 속절없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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