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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좋지 않은 직감 (60/94)


  • 60화. 좋지 않은 직감
    2023.07.30.


    점심 무렵, 칼리프는 아무 일도 없이 고요하게 침실을 지켰다. 이토록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죽이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처음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회귀하기 전이나 후나 그는 언제나 제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왔으니까.

    한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동경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그리해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도리어 몸을 바쁘게 움직일 때보다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그냥 좀 즐겨. 그런 때도 있어야지.”

    그의 상념 사이로 펠릭스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가만히 허공만 응시하던 칼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는 창틀에 걸터앉은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제겐 잠깐도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데도 속내를 정확히 읽어 낸 걸 보니 또 그놈의 빌어먹을 이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칼리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펠릭스에겐 제 생각을 읽어 내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일 테니.

    “말했잖아. 갈수록 네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있다고. 이럴 때라도 마음 편히 쉬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이런 귀한 순간이 또 언제 올 줄 알고.”

    예상대로 펠릭스는 속으로 뱉은 칼리프의 불평을 금세 읽어 내곤 적당한 조언을 건네었다.

    칼리프는 미간을 찌푸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타인의 속내를 읽는 게 펠릭스에겐 유용한 기술일지 몰라도, 당하는 입장에선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생각이 그렇진 않겠지만, 누구나 하나쯤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칼리프에겐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그와 대화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적어도 자신과의 대화에 집중한 펠릭스가 제 속을 읽지는 않을 테니.

    잠시 펠릭스를 바라보던 칼리프가 곧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아 입술을 움직였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칼리프는 펠릭스 손에 들린 책을 눈짓하며 물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펠릭스가 이내 책을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내가 봉인되어 있던 시간에 대한 자료들?”

    “그건 갑자기 왜.”

    “네가 그렇게 죽상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차라리 이쪽을 살피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 같아서?”

    가볍기 그지없는 펠릭스의 말에 칼리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 죽상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못내 얄미웠다.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한 그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귀한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 사람이 할 소린 아닌 것 같군.”

    “누가 했던 표현을 좀 빌리자면, 난 그간 꽤 한량 생활을 즐겨왔으니까. 네가 쉬는 동안엔 나라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어?”

    칼리프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한마디를 지지 않았다. 게다가 말꼬리를 붙잡을 만한 틈도 없이 옳은 말이었다.

    결국 괜스레 치미는 부아를 탁 놔 버리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곤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날 위해 대단한 일을 하는 줄 알겠어.”

    “대단한 일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칼리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끝까지 얄밉게 구는 게 한 대 쥐어박고 싶어 주먹을 꽉 쥐게 했다가도 너무나 펠릭스답다는 생각에 꽉 쥔 주먹을 허탈하게 풀어 버렸다. 그러고 나니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비어버린 시간이 그의 온몸을 덮쳐 왔다.

    이렇게 시간이 더딜 수가 없었다. 기다림이란 게 원래 이토록 힘든 일이었던가. 정말 불쾌한 기분이었다.

    괜스레 머리를 털어 낸 그가 펠릭스 너머 창밖을 응시했다. 그러던 중 펠릭스가 들고 있는 책등에 시선이 닿은 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트리탄 신전의 기원>

    칼리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트리탄’이라는 단어가 너무 익숙했다.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본능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그 책을 보는 게 이벨리아 때문인가?”

    대단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펠릭스가 놀란 눈으로 칼리프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이벨리아도 트리탄이란 고대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이벨리아가?”

    이벨리아란 이름에 펠릭스가 보고 있던 책도 덮고 칼리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질문을 건넬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

    “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알려 주기 싫어지는군.”

    칼리프는 불편한 심기를 숨길 생각도 없이 눈썹을 날카롭게 추켜올렸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부터 무엇 때문에 이벨리아에게 이렇게 관심을 두는 건지, 그 이유를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이벨리아를 궁금해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과한 관심을 쏟진 않았었다.

    “말 나온 김에 좀 묻지. 이벨리아에게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는 거야? 번번이 내 경고까지 무시하면서 말이야.”

    칼리프는 치미는 불쾌함을 억누르지 못한 채 물었다. 그제야 반응이 너무 과했단 걸 눈치챈 건지 펠릭스가 몸을 뒤로 당겨 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익숙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능글거리는 표정을 지어냈다. 어떤 욕지기로도 표현할 수 없이 꼴 보기 싫었다.

    그렇다고 해도 펠릭스를 탓할 건 없었다. 그 꼴을 자조한 건 결국 자신이었으니.

    “그냥 최근 친하게 지내는 영애와 트리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말이었어.”

    칼리프가 성의 없이 말했다. 어쩐지 그의 말투가 꼭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뉘앙스였다.

    기대와는 달리 싱거운 내용에 펠릭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칼리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물론 죽상이긴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단 훨씬 사람다운 꼴이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칼리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칼리프는 습관처럼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곤 초연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모든 건 이벨리아의 결정에 달려 있으니까…….”

    “…….”

    “내가 더 우울해하고 덜 우울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결정이 아니지 않은가.”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이 온통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칼리프의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처럼 발끈하라고 한 말에 이토록 정직한 대답을 돌려주다니. 조금 더 자극적인 단어를 선택해야 했나.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그를 골리기 위한 말을 고르던 찰나, 별안간 달갑지 않은 소리가 그의 청각을 자극했다.

    펠릭스는 미간을 좁힌 채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한 건 펠릭스뿐만이 아니었다.

    칼리프는 갑자기 심각해진 펠릭스를 보며 물었다.

    “뭐야. 왜 그래, 갑자기?”

    “잠깐만.”

    펠릭스가 단호하게 저지했다. 그러곤 눈까지 질끈 감은 채 들려오는 소리에 좀 더 집중했다.

    칼리프는 침묵한 채 그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직감이 밀려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펠릭스가 전혀 반갑지 않은 말을 전해 왔다.

    “아무래도 황후가 이벨리아를 황후궁 온실로 부른 것 같아.”

    ***

    “왔군요, 태자비. 갑자기 불러서 경황이 없었을 텐데 자리해 줘서 아주 고마워요.”

    유스티아는 막 유리온실로 들어선 이벨리아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어느 때보다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그녀의 방문을 환대했다.

    “아니에요, 폐하.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우선은 앉아요. 지난번에 함께 마셨던 차와 같은 거로 준비해 봤는데, 그 차가 태자비 입맛에 맞았을지 모르겠네요.”

    유스티아의 대접은 극진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악의나 사소하게 비꼬는 뉘앙스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못내 당혹스러워 이벨리아는 표정을 풀지 못했지만, 우선 황후가 권한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두 사람이 착석하자 곁에 선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 차를 준비해 주었다.

    이벨리아는 또다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위로 눈 밑이 거뭇한 제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급하게 가린다고 가렸지만, 갑작스레 통보하다시피 전달받은 황후와의 약속까진 너무 촉박했다.

    이런 상태를 황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늦더라도 단장에 더 공을 들일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제 눈에도 보이는 걸 황후가 몰라볼 리 없었다. 예상대로 가늘어진 황후의 시선이 제 얼굴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며칠 사이 태자비의 안색이 몰라보게 나빠졌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유스티아가 걱정이 선연한 얼굴로 이벨리아를 보았다. 다른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오롯한 걱정과 염려였다. 황후가 그녀에게 보일 만한 감정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황후의 태도에 이벨리아는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잠을 잘 이루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어요.”

    이벨리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대충 정리하여 둘러댔다. 그 정도면 형식적인 이야기는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후의 이상한 태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런, 아직까지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혹 건강이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닌가요?”

    “…….”

    “어디 불편한 데가 있다면 편히 이야기해 봐요. 내가 황궁의에게 좋은 약을 달여 올리라 직접 명을 내리겠습니다.”

    이어진 말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가 자신을 위해 황궁의에게 명을 내리겠다니.

    이벨리아는 혼란한 눈으로 유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유스티아는 여전히 만면 가득 물든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닐 텐데. 이벨리아는 황후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통 파악되지 않았다.

    그때 온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폐하, 말씀 중에 송구스럽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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