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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밤 (27/94)


  • 27화.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밤
    2023.06.27.


    [……기억하고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잔떨림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바로 그 이야기를 언급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칼리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파티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여운에 제가 뱉은 말의 책임을 잠시 잊고 말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기다리겠단 대답을 돌려주기에 적어도 그 ‘다음’이 오늘은 아닐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녀를 위해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쉽거나 괜찮다는 의미가 될 순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칼리프는 오늘 진정 행복했다. 지나친 감정 소비 없이 그녀를 마주할 수 있어서, 그녀와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어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 상처 주지 않아도 되어서.

    리우리안의 인생을 수도 없이 대신 살며 어쩌면 오늘이 가장 행복했던 날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도리어 칼리프는 두려웠다. 조금만 더 그녀와 지금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언젠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을 때, 지난한 반복 속에 지쳐 그만두고 싶어질 때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을 이벨리아가 알 리 만무했다.

    [그 말에 제가 전하께서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는데, 그것도 기억하세요?]

    [그래, 기억해.]

    칼리프는 이벨리아를 오롯이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 순간이 목전까지 다가온 것만 같았다. 그러니 자신을 어여쁘게 바라보는 이 얼굴이라도 머릿속에, 가슴속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를 통해 듣게 된 말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전하, 송구한 말씀이지만 제게 다시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대답할 기회?]

    칼리프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요동쳤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제가 전하의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질 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전하의 이야기는 그때 제게 해 주세요.]

    […….]

    [그때까진 전하와 딱 오늘처럼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칼리프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저를 보고 웃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가슴이 떨렸다. 그러면서도 처음과 의미가 다른 다음을 기약하는 그녀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복잡한 감정은 쉬이 해갈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고 황태자궁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그는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에 심장이 아릿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칼리프의 대답을 기다리던 펠릭스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칼리프가 참았던 숨을 툭 뱉고는 아무것도 아닌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냐, 아무것도.”

    짧게 대답하며 옆을 지나치는 칼리프에게서 냉기가 폴폴 풍겼다.

    펠릭스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유심히 살폈지만, 더 묻진 않았다. 원래라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를 몇 번이고 성가시게 했겠지만, 오늘은 그 역시 너무 지치는 하루였다.

    뒷덜미를 주무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데 느닷없이 칼리프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 책들은 다 뭐지?”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차 싶은 펠릭스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뒤돌며 칼리프를 보았다.

    “심심해서 책 좀 봤어.”

    “이 많은 책을 다?”

    “많은 건가? 생각보다 금방 읽히던데. 쌓여 있어서 더 많아 보이는 걸 거야.”

    펠릭스가 별거 아니란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바로 허 하는 칼리프의 탄식이 뒤따랐다.

    “네 이능에는 이런 잡다한 능력까지 포함된 모양이군.”

    이죽거리는 게 분명한 말이었지만, 펠릭스는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다.

    오늘은 그 역시 홀로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밤이었다.

    ***

    이른 아침, 침실에 들어선 페일린은 습관처럼 창가로 향하다 말고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 전하!”

    페일린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곤 서둘러 이벨리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걸음이 멈춰 선 건 침대 반대편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앞이었다.

    “설마 또 못 주무신 거예요?”

    극에 달한 걱정이 요란하게도 이벨리아를 향했다. 그 탓에 놀란 이벨리아가 하던 일도 멈추고 페일린을 보았다.

    “응? 아니야, 페일린. 오랜만에 아주 달게 잤어. 그래서 일찍 눈이 떠졌고.”

    “정말요? 정말 주무신 거 맞아요?”

    페일린은 이벨리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걱정 끼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제게 거짓말을 한 전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페일린은 눈을 가늘게 뜨곤 이벨리아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분명 눈가가 거뭇할 것이다. 피로의 증거로 눈살이 잔떨림으로 요동칠 것이고, 푸석해진 피부도 분명 한눈에…….

    “……어?”

    탐정이라도 된 듯이 이벨리아를 낱낱이 관찰하던 페일린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전하, 정말 주무신 거예요? 달게 주무신 게 맞아요?”

    페일린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눈가가 거뭇하지도, 눈살이 떨리지도, 피부가 푸석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초점이 또렷한 눈동자와 생기 어린 얼굴이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응, 정말이야. 달게 푹 잤어.”

    이벨리아는 거짓이 아니라는 걸 쐐기 박듯 환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페일린이 감격에 젖은 얼굴로 그녀의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 탓에 놀란 이벨리아가 덩달아 페일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페일린! 갑자기 왜 그래? 응?”

    “……푹 주무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전하께서 웃으며 달게 잤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페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이벨리아는 순간 말을 잃은 채 페일린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페일린,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너무 고마운 사람이고.”

    고작 달게 잤다는 한마디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페일린에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네가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하. 제가 없었다고 해도 발체로페 제국의 황태자비는 전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자리예요. 그러니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시고 언젠가 꼭 제국의 빛나는 황후가 되어 주세요.”

    페일린은 여전히 글썽거리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게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결연해 보이던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통곡을 할 것만 같았다.

    이벨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페일린 역시 이벨리아를 따라 웃으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오늘은 아침인데도 바람이 차갑지 않았어요. 따뜻한 계절이 성큼 찾아왔나 봐요. 그러니 오늘은 아침 식사 후에 산책을 하시는 건 어떠세요?”

    페일린은 잠시 잊고 있었던 본래의 역할에 충실하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른 아침인데도 따뜻한 바람이 훅 끼쳐 들었다.

    “산책?”

    “네. 태자비궁 정원에 꽃들이 만개했더라고요. 가볍게 한 바퀴 돌고 나시면 분명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페일린은 주인의 침실을 경쾌하게 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생기가 넘치는지 그녀의 반응만으로도 만개한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그럴…….”

    이벨리아는 홀린 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그러나 말을 끝까지 뱉기 전, 페일린이 침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하고 있던 일이 떠올라 급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페일린.”

    “네? 왜요?”

    침대를 정리하던 페일린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이벨리아는 싱긋 웃으며 조금 전까지 지키고 있던 테이블 앞으로 향했다.

    하얀 종이를 펼쳐 든 그녀는 정갈한 글씨를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종이 위의 잉크가 마른 걸 확인한 후에야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러곤 황가를 의미하는 인장을 꾹 찍어 마무리했다.

    “페일린,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

    “네! 뭐든 말씀하세요, 전하!”

    페일린은 하던 일도 멈추고 이벨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곧 마주하게 된 건 편지 봉투였다.

    “이걸 놀튼 백작가로 보내 줄래? 태자비궁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의 편지야. 그러니 가능하다면 영애의 대답이나 답장을 받아 왔으면 좋겠어. 물론 영애가 어느 쪽이든 답을 준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이벨리아의 설명에 페일린은 커다란 눈을 그저 껌벅이기만 했다. 태자비궁으로 초대하는 내용의 편지……? 그건 곧 초대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놀튼 백작가의 영애를 태자비궁으로 초대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건……!

    요지를 파악한 페일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드디어 제 주인에게도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우가 생긴 모양이었다.

    페일린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놀튼 백작 영애가 초대에 응해 준다면 태자비궁을 찾아 주는 첫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전하! 아침 식사만 준비하고 서둘러 다녀올게요!”

    페일린은 씩씩하게 대답하며 이전보다 더욱 서둘러 움직였다. 놀튼 백작가로 향하기 전 주인의 식사 준비와 혹시 모를 손님 방문에 대비해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벌써부터 너무 설렜다. 태자비궁에 첫 손님이 방문하다니!

    잔뜩 들뜬 페일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잠잠히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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