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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두꺼운 벽 (26/94)


  • 26화. 두꺼운 벽
    2023.06.26.


    파티가 끝나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이벨리아는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밤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떠오른 둥그런 달이 칠흑 같은 어둠 속 한가운데를 우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 멍하니 달구경을 하던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습관이 되었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에 한두 번 바라보았던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젠 달을 구경하는 것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함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달을 보고 있을 때면 가슴이 기분 좋게 뛴다는 사실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어둡게 가라앉은 적막 사이로 불현듯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내린 이벨리아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에요. 그냥, 긴장이 조금 풀렸나 봐요.”

    가로로 내젓는 고갯짓이 제법 씩씩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그걸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걱정은 끼치고 싶지 않다는 건 그녀만의 신조였다.

    이제 겨우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남편보다는 제국의 황태자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고 연회장 안을 돌며 여러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벽이 느껴지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아마도, 렐리아와 마주하고 난 후부터.

    [오늘 하루뿐입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를 빌려드리는 것 말입니다.]

    무례했던 그녀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제게 상처 주기 위해 한 말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그토록 무례한 말을 당당하게 하던 렐리아의 자신감이 한편으론 납득이 되기도 한 탓이다.

    그녀의 오만한 자신감의 원천은 황후와 황태자였다.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쥔 두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그녀를 어여삐만 여기니, 렐리아에게 자신은 제 발아래의 시녀 정도로 보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기가 막혔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렐리아처럼 황후와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이유를 찾자면 결국 제 집안과 유연하지 못한 제 성격을 탓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방법은 렐리아의 무례한 언행을 보고도 못 본 척 속으로 삭이는 일뿐이었다.

    불합리한 일이었다.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무례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뿐이라니.

    어쩌면 멍하니 달을 구경하는 게 즐거운 이유가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저 밤하늘의 둥그런 달만큼은 자신을 무시하지도 기만하지도 않았으니까.

    도리어 저를 향해 기꺼이 환한 빛을 비춰 주었다. 공평한 대우를 받는 기분이 드는 순간은 달을 보고 있을 때가 유일했다.

    이벨리아는 습관처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예쁘게 차오른 달을 두 눈 가득 꼭꼭 담았다.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념 역시 단번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밤하늘 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네?”

    “전장에서 돌아온 날 밤에 그대를 찾아갔을 때도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서.”

    “아…….”

    이벨리아는 조용히 눈을 끔벅였다. 그가 전장에서 돌아왔던 날 밤, 자신이 그러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가물가물한 걸 보면 그의 등장이 어지간히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달을 보고 있었어요.”

    “달?”

    “네.”

    이벨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우리안에게 제 취미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기분이 퍽 이상했다. 그런데도 말을 멈추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달이 선명하게 보일 때면, 꼭 달이 하늘을 지키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요.”

    “…….”

    “총총히 박힌 별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달을 보고 있으면…….”

    전하가 떠올라요.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아우라가 꼭 전하를 닮았거든요.

    차마 용기가 없어 전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킨 채 쓸쓸하게 웃었다.

    “왜 말을 하다 말지?”

    뒷말을 기다리던 리우리안이 자못 부드럽게 채근해 왔다. 그래도 진짜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달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요.”

    이전과 비교하면 그와의 거리가 확연히 좁아진 게 맞았지만, 여전히 둘 사이엔 두꺼운 벽이 존재했다. 너무 오랜 시간 견고히 쌓아 올린 벽이라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둘만이 쌓아 올린 벽이 아닌 탓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엔 황후가 있었고 렐리아가 있었으며 황제가 있었다. 또 가넷 공작가와 캐롤라인 후작가가 있었다.

    오늘 하루만 빌려준 것뿐이라던 렐리아의 무례한 언행은 그와 그녀 사이의 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달라진 그의 태도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게 불현듯 그녀의 마음을 너무 쓸쓸하게 만들었다.

    이벨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내려 옆에 있는 리우리안을 돌아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눈부신 미모가 자신이 아닌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자리에 그가 있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도 둥그런 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잠깐이나마 편안하길 바라는 것처럼 그는 묵묵히 따르며 옆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가 계속해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는데도, 왜 저 멀리에 있는 존재처럼 희미하기만 한 것일까.

    그와의 관계는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는데,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습관처럼 다시 고개를 위로 들었다. 금세 눈동자 가득 달빛이 빼곡하게 차올랐다. 하지만 기대만큼 마음이 편안해지진 않았다.

    언제나 도피처로 삼았던 밤하늘인데, 그 가운데로 둥그런 달이 아닌 리우리안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 아래로 어느덧 태자비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입술이 무력하게 바르르 흔들렸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

    깊은 밤.

    펠릭스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엄청난 집중력이라고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한참을 글자만 훑어 내리던 눈동자에 불현듯 초점이 흔들렸다. 초인적인 집중력 뒤에 찾아오는 묵직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결국 책을 내려놓은 펠릭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곤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아아.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을 수가 있나.”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테이블 위아래로 쌓인 책들이 여러 개의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원하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이 악의 기운을 품은 채 봉인되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땅의 신으로 존재하며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봉인되었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선 아무리 그라고 해도 속속들이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이 찾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벨리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의아한 탓이었다.

    신성력은 선택받은 자만이 태어날 때부터 보유하는 능력이었다. 칼리프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쓰러진 그녀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천적으로 능력이 생겼다고밖엔 생각할 수가 없는데…….”

    나직이 중얼거린 펠릭스가 결국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종일 굳건하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로 칼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오늘은 표정이 어둡지 않네?”

    펠릭스가 퍽 발랄하게 그를 반겼다.

    “네 눈엔 어깨에 내려앉은 피곤함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칼리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도 펠릭스의 미소는 걷힐 줄을 몰랐다.

    하루 종일 적막 속에서 책만 보았더니, 퉁명스러운 칼리프의 반응마저 반갑기 그지없었다.

    “괜히 앓는 소리 하긴. 지금 네 표정이 어떤 줄 알아? 여기 눈이랑 입술이 이렇게 돼 있다고.”

    펠릭스가 칼리프의 표정을 따라 하는 척 눈꼬리를 휘어 접은 채 입꼬리를 한껏 위로 당겨 올렸다. 손가락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표정이어서 그런지 꼴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칼리프도 결국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얼굴에서 손을 뗀 펠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너의 비와 함께한 파티가 썩 나쁘지 않았나 보지?”

    “그래, 나쁘지 않았지.”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기분이라도 들던가?”

    “데이트라고 하기엔 그녀에겐 불편한 자리였을 거야.”

    “그래? 그런데도 나쁘지 않았단 말이야?”

    펠릭스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칼리프가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불현듯 떠오른 건 태자비궁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의 이벨리아의 얼굴이었다.

    [전하. 아까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에 제게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나요?]

    줄곧 침울해 보이던 이벨리아가 태자비궁 앞에 서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 그녀와 나눴던 대화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 내용 중 어떤 말을 기억하느냐 묻는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전하께서 갑자기 이렇게 바뀌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다고 한 것이요.]

    순간 칼리프의 눈동자가 소란하게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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