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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리도 불손한 것을 보니 (6/94)


  • 6화. 이리도 불손한 것을 보니
    2023.06.06.



     
    다음 날, 정오.

    이벨리아는 무척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서운 바람에 잎이 전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로만 가득하던 정원이 어느덧 생기로 넘쳐흘렀다.

    느리게 걸음을 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정원을 가득 메운 향기가 그녀의 폐부 가득 들어찼다.

    “벌써 꽃이 피었네요. 전하를 닮아 꽃이 너무 아름다워요!”

    한 걸음 뒤에서 걷던 페일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덕분에 이벨리아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정말 예쁘다.”

    그렇게 말하는 이벨리아의 목소리에 언뜻 웃음기가 배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잠깐도 웃지 못했다.

    황궁에 들어온 후 그녀는 언제나 복잡한 감정 속을 거닐어야 했다. 제 편이라곤 페일린뿐인 황궁 생활은 무엇 하나도 쉬운 게 없던 탓이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최근처럼 혼란했던 적은 없었다.

    오늘까지 더해야 고작 사흘.

    그 사흘 동안 이벨리아는 리우리안과 국혼 후 지냈던 1년을 다시 한번 겪은 것만 같았다. 여유로운 척 정원을 거닐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황량하기만 했다.

    “그런데 전하. 혹시 춥지는 않으세요? 햇볕이 많이 따사로워지긴 했는데, 아직 바람이 조금 찬 것 같아요.”

    “그런가?”

    “감기라도 걸리실까 염려되는데, 이만 들어가시는 건 어떠세요?”

    걱정 어린 페일린의 제안에 이벨리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말처럼 바람이 좀 차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가자니 며칠 전 침실에서 보았던 리우리안의 잔상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힐 것 같았다.

    이벨리아는 제법 고집스럽게 한 발짝 걸음을 떼었다.

    “아니야. 조금 더 걷고 싶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퍽 부드러웠다. 그것과 어울리지 않게 빨라진 걸음은 무척 완강한 태도를 대변하고 있었다.

    페일린이 걱정으로 물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소리 없이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곧 다른 해답을 찾은 듯 손뼉을 쳤다.

    “그럼 제가 가볍게 걸치실 수 있는 거라도 얼른 챙겨 올게요!”

    “아니야, 페일린!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벨리아는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급히 뒤로 돌았다. 페일린을 잡기 위해 팔까지 쭉 뻗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태자비궁을 향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이벨리아는 뻗었던 팔을 느리게 거두며 입술을 딱 맞붙였다.

    괜히 그녀를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도 리우리안의 잔상이 머무르고 있을 침실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곧 경직된 걸음을 다시 떼었다.

    멀어지고 싶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향할 수 있는 곳은 고작해야 황궁 안이었고, 그나마도 마음 편히 서성일 수 있는 건 태자비궁의 정원, 바로 이 자리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 사이로 불현듯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이벨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영애 시절부터 태자비가 된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호위를 맡아 온 레이튼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가 페일린만큼이나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힘껏 붙잡고 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레이튼,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이벨리아가 나직이 속삭였다. 페일린에게조차 내보인 적 없던 속내였다. 레이튼은 그녀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후회가 돼…….”

    “…….”

    “내 선택이 잘못된 걸까. 그런 거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말끝을 흐리는 음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물기 가득했다. 언제나 싱그럽던 그녀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톤이었다.

    레이튼은 말없이 눈을 끔벅였다. 선뜻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전하께서 하신 선택은 언제나 현명하고 옳았습니다.”

    “그랬나…….”

    이벨리아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대답은 했지만, 위로마저 그를 닮아 형식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말로나마 고마움을 전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그녀에겐 간단한 감사조차 건넬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벨리아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사흘 동안 있었던 일들이 차례로 하나씩 떠올랐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필름의 끝엔 렐리아와 팔짱을 낀 채 멀어지던 리우리안의 뒷모습이 있었다.

    본능처럼 한숨이 밀려왔다. 동시에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이 선택이 잘못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을 때도 잘못한 선택은 아닐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런데 레이튼…….”

    아무래도 난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

    이벨리아는 뒷말은 속에 묻은 채, 허공에서 흔들거리던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언제나 제게 무심한 남편이었고, 정부나 다름없는 여자만 바라보던 남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부풀 대로 부풀어 버린 마음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인내하는 것뿐이라 최선을 다해 견뎠고 악착같이 버텼다.

    결혼 후 6개월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 후 6개월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변함없는 리우리안의 태도 덕이었다.

    그는 어떤 일 앞에서도 이벨리아를 살피는 법이 없었고, 모든 순간 렐리아만 바라보며 그녀만 우선시했다.

    수차례 상처받은 마음엔 나날이 흉터가 늘어 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슴에 상처 하나쯤 더 생긴 게 뭐가 대수일까.

    그렇게라도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다 하여 리우리안의 마음을 얻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사랑으로 자신을 아껴 준 부친과 집안에 해는 끼치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캐롤라인 후작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것만이 감히 황태자비가 되겠노라 했던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단단히 굳혔던 그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황태자비라는 직위가 너무 무겁고, 자꾸만 황궁이 두려워졌다.

    “더 다칠 마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리우리안을 마주하는 일이 버거웠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이전의 리우리안과는 묘하게 달랐다.

    [그러니 나의 비인 그대 역시 언제나 고귀한 사람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고귀한 사람이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리우리안에게 이벨리아 캐롤라인은 아무 데서나 무성하게 자라는 불필요한 잡초 같은 존재였다.

    이따금 보내는 눈길은 당장에라도 황태자비 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는 흠을 찾기 위함이었고, 간혹 한번 건네는 말들은 제 발로 나가떨어지길 바라는 모욕적인 언사뿐이었다.

    그는 세상 유일하게 그의 아내인 자신에게만 잔인했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보며 고귀하단 말 같은 건 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그날의 그는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레이튼, 나는…….”

    “…….”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벨리아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던 순간의 그의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청백하던 붉은 눈동자. 그게 시시때때로 떠올라 그녀의 마음을 가차 없이 뒤흔들었다.

    그래 봐야 결국 상처받는 건 저뿐이란 걸 알면서도, 이벨리아는 자꾸만 흔들렸다.

    “지금까지 그랬듯 전하께선 그저 선택만을 하시면 됩니다. 그게 어떤 선택이든, 제가 최선을 다해 전하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레이튼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이벨리아를 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켜 내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벨리아에겐 닿지 못할 진심이었다.

    그 사실이 퍽 씁쓸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그저 그녀의 뒤를 묵묵히 지키는 것뿐. 그게 전부였다.

    한참이나 느려진 걸음이 조금 더 정원을 배회했다. 멀리서나마 태자비궁의 입구가 보일 무렵이었다.

    이벨리아의 걸음에 맞춰 걷던 레이튼이 느닷없이 날렵하게 몸을 돌려 측면을 바라보았다. 별안간 느껴진 인기척을 기민하게 감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발견한 순간, 레이튼은 몸에 힘을 풀고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튼은 깍듯이 예우를 지켰다. 레이튼의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상황을 인지한 이벨리아가 급히 몸을 돌렸다.

    “……전하.”

    떨리는 입술 사이로 리우리안을 향한 호칭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레이튼에게서 시선을 뗀 리우리안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태자비궁까진 어찌 걸음 하셨습니까.”

    이벨리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형식적인 질문을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를 향한 목소리는 물론 손끝이 자꾸만 떨렸다.

    그의 방문이 당혹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태자비궁엔 오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대를 보러 가던 길이었어. 그런데 시녀도 없이 호위기사만 태자비를 보필하다니, 태자비궁의 기강이 형편없이 풀어진 모양이군.”

    이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짧지 않은 그의 말 중 자신을 보러 왔다는 그의 말만이 심장에 세차게 박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발하고 시간이 멈춘 듯 감각이 둔해졌다.

    하지만 그런 이벨리아와 달리 리우리안은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으로 그녀가 아닌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호위는 그대를 지키고 있었으니 제외해야 하나?”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의 끝엔 레이튼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의 호위만큼은 주인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한 모양이야. 나를 향한 눈빛이…….”

    “…….”

    “이리도 불손한 것을 보니.”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불편한 속내를 씹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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