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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의 본분 (5/94)


  • 5화. 그의 본분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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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애는 못 본 사이 더욱 아름다워졌구나.”

    유스티아는 홍차로 목을 축이며 눈매를 휘어 접었다. 그 말에 렐리아가 찻잔에서 입술을 떼기도 전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폐하께서 늘 저를 어여삐 봐 주시니, 아버지께서는 갈수록 제가 어리광만 늘어 간다고 하셨어요.”

    “말하는 것까지 이리도 어여쁜 영애이거늘, 후작께서 영애에게 너무 엄한 아버지인 게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는 유스티아의 목소리가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자애롭고 품격 있는 황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렐리아 넷트는 그런 그녀가 가장 어여쁘게 생각하는 영애였다.

    넷트 후작가의 외동딸이자, 그녀의 모처인 가넷 공작가와 긴밀한 관계에 놓인 집안의 여식.

    그녀가 갖춘 모든 조건이 유스티아의 마음을 사기엔 너무도 충분했다.

    유스티아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리우리안의 짝으로 점찍어 두었다.

    가드로가 어느 날 갑자기 캐롤라인 후작가와의 국혼을 발표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태자비는 이벨리아가 아닌 렐리아가 되었을 터였다.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아무렴 좋았다. 어쨌든 결국 제 아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 건 이벨리아가 아니라 렐리아였다.

    유스티아는 기껍게 눈매를 휘어 접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군더더기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

    정말이지 완벽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리우리안의 표정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근래 들어 이렇게 기쁜 날이 없어.”

    유스티아는 부러 감복한 듯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며 리우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리우의 눈동자에 시종일관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리우리안이 무사하게 돌아온 건 기뻐 마지않을 일이 분명하지만, 1년 만에 보는 제 아들이 어쩐지 조금 낯설었다.

    렐리아를 옆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도 물론 낯설었지만, 가드로에게 대드는 리우리안은 상상 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리우,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거니?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나가 버려서 이 어미 마음이 무척 좋지 않구나.”

    유스티아는 고민 끝에 내도록 참았던 말을 에둘러 꺼내었다. 그러자 멍하게 풀려 있던 눈동자에 일순 초점이 잡히는 게 보였다.

    “……이제야 겨우 황궁에 돌아온 참이지 않습니까. 긴장이 풀려 그런 것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나치게 딱딱한 어투였다. 유스티아가 기억하는 1년 전 리우리안과는 어떻게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유스티아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낯선 제 아들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렐리아가 퍽 해맑게 리우리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하,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신 거지요? 오늘 아침에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영애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으니 심려치 않아도 됩니다.”

    “네? 영애라니……. 늘 ‘렐리.’ 하고 불러 주셨잖아요. 갑자기 영애라고 하시니 너무…… 어색해요, 전하.”

    “아…….”

    순식간에 울상을 한 렐리아의 표정에 리우리안은 짧게 탄식을 흘렸다.

    이곳으로 오기 직전 보았던 이벨리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긴장을 늦춘 것이 문제였다.

    그는 티 나지 않게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뭔가 달라지신 것 같다고 느끼긴 했는데…… 1년 사이에 다른 분이 되신 것 같아요.”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음색이 곧장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리우리안은 티 나지 않게 눈매를 좁혔다. 역겨웠다. 데뷔탕트까지 치른 영애의 입에서 어린애 같은 징징거림이 새어 나오다니.

    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이런, 뻣뻣하고 경직된 전장의 여운이 아직까지 몸에 배어 있는 모양이군. 나의 렐리를 서운하게 하다니.”

    리우리안은 인이 박인 듯 본능처럼 움직이는 혀를 그대로 두었다. 어느덧 그의 입가엔 능구렁이 같은 미소가 휘감긴 채였다.

    “전하. 이제야 진짜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게 실감이 나요. 정말 너무 기뻐요.”

    렐리아는 진심이라곤 담기지 않은 사탕발림 같은 말에 금세 화색을 띠며 감격했다. 둘의 모습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유스티아의 낯빛 또한 그제야 평소의 색을 되찾았다.

    “나 역시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황후궁 정원에 꽃이 예쁘게 피었는데, 혹 오는 길에 보지 못했니?”

    유스티아는 의심이 걷힌 얼굴로 렐리아와 리우리안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머, 정말요? 어쩐지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화사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였나 봐요!”

    “튤립이 아주 화사하게 피었단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는 풍경이지.”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어서 보고 싶어요. 전하와 같이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줄곧 보였던 무구함과는 달리 렐리아가 의뭉스럽게 리우리안을 흘깃거렸다. 곧 유스티아의 강압적인 시선까지 뒤섞였다.

    리우리안은 순식간에 저를 향한 짙은 시선들에 욕지기가 절로 차올랐지만, 그럴수록 더욱 입매를 당겨 올렸다.

    그것이 지금의 그가 해야 하는 본분이었다.

    “나 역시 렐리와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군.”

    ***

    “후.”

    리우리안은 황태자궁 침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났을 뿐인데,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이 엄청났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곤 손을 들어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묵직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알싸하게 뻗어 나갔다.

    아무래도 누적된 피로의 양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속 편히 쉴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짙은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기척을 찾아볼 수 없는 침실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뭐야. 벌써 지치기라도 한 거야?”

    리우리안은 감았던 눈을 뜨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창문 옆 벽에 유난히 하얀 얼굴을 한 남자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즐거워 보이는군.”

    “물론이지. 네가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 황태자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간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남자의 말에 리우리안의 미간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리우리안은 이를 사리문 채 물었다.

    “그 말은, 네가 이벨리아의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는 건가?”

    억눌린 채 흘러나온 목소리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살기만으로 누군가 죽일 수 있다면 남자의 목은 진작에 댕강 잘려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주눅 든 기색 하나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멀리서 살짝만 봤을 뿐이야. 너의 태자비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 나도 널 도울 수 있다고.”

    남자의 항변에도 리우리안의 기분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의 잇새로 억눌렀던 진심이 가감 없이 새어 나왔다.

    “그냥 그 입을 닥치는 게 좋겠어, 펠릭스.”

    그렇게 말하며 리우리안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며 긴장을 하고 있던 탓인지 묵직한 두통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매일이, 모든 순간이 쉽지 않았다. 잠깐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더 그랬다.

    눈을 지그시 감자 그 위로 기다렸다는 듯 이벨리아의 얼굴이 그려졌다.

    가지 말라 자신을 붙잡던 눈빛. 그걸 알면서 기어이 등을 돌려야 하는 그 심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리우리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곧 킬킬대는 소리가 심기를 거스르며 들려왔다.

    “재밌는 표정이네.”

    “……닥치라는 말이 안 들리던가?”

    리우리안은 감았던 눈을 날카롭게 치뜨곤 매섭게 말했다. 그럼에도 펠릭스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당분간 넌 리우리안 페트로프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게 좋겠어.”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그러니 감히 날 가르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글쎄. 내 말은 당분간은 너의 비를 마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이었는데.”

    이어진 펠릭스의 말에 리우리안이 의자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지금까지의 살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펠릭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펠릭스는 팔짱을 풀곤 머리 옆으로 양손을 들었다. 그가 오해할 만한 꿍꿍이 따윈 없다는 제스처였다.

    “이것 봐. 진정하라고. 이러니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어? 목숨을 걸고 나간 전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네가 너의 비 앞에 서기만 하면 자꾸만 본분을 잊고 흔들리잖아.”

    “그 가벼운 입을 앞으로도 계속 자유롭게 놀리고 싶다면 그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미안하지만, 난 겨우 너 따위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펠릭스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에 리우리안은 더욱 이를 사리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이었다.

    저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외양을 한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자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못내 분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힘으론 그에게 작은 흠집 하나도 낼 수 없다는 걸 지난 경험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생각 같은 건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듯 펠릭스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며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의 입가엔 여전히 흥미에 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으으, 그동안 너한테 훈수만 두는 거 지긋지긋해지던 참이었는데. 앞으로 재밌어지겠는걸?”

    “경고하는데,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설마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앞으로도 계속 반복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펠릭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리우리안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을 바르르 떨면서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펠릭스는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네 본분에 충실하라고.”

    “…….”

    “리우리안, 페트로프.”

    어딘지 짓궂기도, 의미심장하기도 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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