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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너한테는 이상한 오해 받기 싫으니까 (86/94)


86화 너한테는 이상한 오해 받기 싫으니까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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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리 사용인들은 매년 이런다니까.”

소리 내어 웃던 에스텔이 제 앞에 있는 손수건을 빙글빙글 돌렸다.

“다들 아직 내 결혼을 포기 못 한 거지 뭐. 사냥제 때마다 꼭 손수건은 쥐여 주는데, 차마 그 간절한 눈빛을 보면 거절을 못 하겠어.”

“여전하네, 네 사용인들은.”

“뭐, 어떻게 보면 우리도 손수건을 주는 대상들이긴 하니까. 결혼 안 한 여귀족들. 딱 우리잖아?”

에스텔이 씩 웃으며 그레이스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넌 손수건 줄 사람이 정해져 있잖아.”

“아니야. 나도 하녀들이 가져가라면서 쥐여 준 거고, 그냥 오늘은 가만히 앉아서…….”

“에이, 뭐 어때? 그냥 줘, 벨리온한테.”

“…….”

“애초에 벨리온이 대공 되고, 너도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안 만나게 된 거잖아. 그런데 이제는 아슈드도 성인이 다 됐고, 벨리온도 후계자 다 키워 놨잖아. 이제 너희도 자기 사랑 챙겨야지.”

“…….”

그레이스가 침묵하자 에스텔이 물었다.

“혹시 벨리온 딸 때문에 그래?”

셀린의 이야기를 듣고서 에스텔도 놀라기는 했다. 무슨 사정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사냥제에서 본 셀린은 벨리온과 똑 닮아 있었다. 정말 부정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아냐, 그런 이유는.”

“…….”

“시기상 딸을 낳은 건 나랑 만나기도 전이고……. 지금의 내가 뭐라고 하겠어. 그럴 사이도 아닌데.”

애써 괜찮다는 듯 그레이스가 웃어 보이자, 에스텔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그래. 아무튼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봐.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벨리온을 데려온다고 했어. 여기 막사 안에서 주면 되니까 사람들 시선도 걱정 말고.”

모든 준비를 해 놨다는 듯 에스텔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스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사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왔어?”

에드윈과 벨리온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 에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벨리온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이 에드윈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뭐야, 벨리온 왜 저래?”

“왜겠어. 아까 루넨 황자가 그렇게 속을 뒤집어 놨는데.”

“아하.”

데미안이 꽃사슴 운운하는 것을 본 이후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벨리온이 곧 에스텔 뒤에 있는 그레이스를 발견하고는 미간에 힘을 풀었다.

“아…….”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때다 싶었는지 에스텔이 에드윈을 끌고 구석으로 갔다. 동시에 손수건을 들고 있던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벨리온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

“물론 네 소식은 늘 황궁으로 날아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

“그렇지.”

이렇게 둘이서 대화하는 것도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벨리온 뒤쪽 구석에 있던 에스텔이 그레이스에게 손수건을 가리키며 얼른 주라고 손짓했다.

“저기. 이거 가져갈래?”

“…….”

“별건 아니고, 하녀들이 가져가라고 그래서……. 사냥하다가 더러운 거 묻으면 닦을 때 써도 돼.”

머뭇거리던 그레이스가 벨리온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벨리온이 손목을 내밀었다.

“묶어 줘.”

“아, 그럴까?”

벨리온의 말에 그레이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레이스가 벨리온의 손목에 손수건을 둘렀다.

“잘하고 와. 물론 너야 항상 잘하긴 하겠지만.”

“…….”

“그런데 네 딸은 너한테 손수건 안 준 거야? 손목에 아무것도 없네.”

“딸 아니야.”

“응?”

단번에 부정하는 벨리온의 말에, 그레이스와 에스텔이 놀란 듯 벨리온을 바라보았다.

“조카야.”

“조카? 조카라고? 벨리온 네 조카라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레이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작게 벌렸다.

“설마 마리엔 언니 딸인 거야?”

“응.”

“그럼 마리엔 언니는? 살아 있었던 거였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데?”

“…….”

그 말에 벨리온이 침묵했고 곧 그레이스는 침묵의 의미를 파악했다.

“그래, 그랬구나. 언니는 없고 저 아이만……. 그런데 나한테 이런 이야기 해도 괜찮은 거야?”

울피림 대공가의 대공녀인 마리엔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만 해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딸까지 있었다. 황궁과 사교계에 알려지면 틀림없이 여파가 클 것이었다.

“너한테는 이상한 오해 받기 싫으니까.”

뒤이어 나오는 벨리온의 답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잠시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던 그레이스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뒤에서 에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에드윈에게 말했다. 앞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상황에 이미 잔뜩 흥분한 채였다.

“방금 들었어? 벨리온 말?”

“응.”

“이야, 진짜.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좋아. 안 그래?”

“그러게.”

나란히 선 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에스텔이 기분 좋은 듯 바라봤다. 에드윈도 가볍게 대꾸하다가 에스텔의 손에 들려 있는 손수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거 네 손수건이지?”

“응. 또 사용인들이 가져가라고 성화길래. 아, 혹시 너 또 옷에 뭐 흘렸어? 줄까?”

“…….”

“하여간에, 애도 아니고 넌 뭘 그렇게 매년 흘리고 다녀? 작년에는 포도주인가 흘리지 않았었나?”

에스텔이 자연스레 에드윈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뭐, 내 입장에서는 사용인들한테 할 말이 있어서 좋긴 한데 넌 너무 잘 흘리긴 해. 아, 이번에 내가 개발하고 있는 거 나중에 하나 가져갈래? 요새 얼룩이 잘 안 지는 천을 만들고 있거든.”

“그래, 그것참 고맙네.”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에드윈은 에스텔의 손수건을 품에 조심스레 넣었다.

* * *

손수건 행사가 슬슬 끝나고, 사냥감을 잡기 위해 하나둘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델리나도 말을 정비하고 슬슬 갈 채비를 했다.

“아가씨. 몇 번 말씀드렸지만 이곳 숲은 황궁의 영토라서 그림자들 호위가 안 되는 곳이니까요. 가급적 혼자 다니지는 마세요. 너무 깊게 가시지도 마시고요. 너무 사냥감이 크다 싶으시면 검보다는 멀리서 총을 쓰세요. 그게 더 안전할 테니까요.”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할 수가 있나요. 아가씨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전하께 제가 죽……, 제가 죽을 듯이 마음이 찢어지는데요.”

펠릭이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때 젠이 불쑥 다가왔다.

“델리나.”

“응?”

“내가 델리나 원하는 애들로 데려올게.”

“……데려온다고? 사냥하는 게 아니라?”

“응, 응.”

사냥해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데려온다는 말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숲속에 오니 기분 좋은 듯 젠의 얼굴이 밝았다. 델리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셀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여는 안 하는 건가?’

다섯 명 전부 사냥에 참가하니, 셀린도 참가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말한 것처럼 막사에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델리나. 빨리 와 봐. 빨리.”

“아, 응.”

그사이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한 젠이 앞에서 재촉하자 델리나도 말에 올라 숲속으로 들어섰다. 빽빽한 나무들과 수풀 사이에서도, 젠은 망설임 없이 달렸다.

‘산에 익숙해서 그런가. 길을 잘 찾네.’

처음 보는 숲인데도 젠은 거칠 것이 없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젠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건 어때?”

“응?”

젠의 손가락을 시선으로 따라간 곳에는 멧돼지가 한 마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크기에, 말에서 조심스레 내린 델리나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공격 안 해.”

그렇게 말한 젠이 말에서 내려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낯선 이의 등장에 공격 태세를 취하던 멧돼지가 꽥꽥거리기 시작했지만, 젠은 개의치 않고서 그대로 멧돼지의 앞까지 다가갔다.

“자, 얌전히 있을 거지?”

“…….”

“응?”

그때 젠이 멧돼지를 덥석 잡았다. 멧돼지가 당황하며 버둥댔지만 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멧돼지의 기세가 점차 누그러들었다.

“됐다. 이제 안 물어.”

이제는 젠을 보며 벌벌 떨고 있는 멧돼지였다.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하지 않고서 멧돼지를 완벽하게 제압한 젠이 델리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얘로 할래? 사냥감?”

“…….”

“아니면 다른 애가 좋아? 곰? 사자?”

“그, 뭐든 좋으니까…… 일단 멧돼지는 풀어 줘.”

“응, 그럴게.”

보고 있자니 멧돼지가 불쌍했다. 델리나의 말에 젠은 순순히 멧돼지를 놓아주었다.

“젠.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자유롭게 사냥하고 와. 나도 주변 지리 좀 익히고 사냥해 볼 테니까.”

“응, 알겠어. 내가 멋진 걸로 가져올게.”

기대하라는 듯 말한 젠이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숲에 와서 신나 하는 젠의 뒷모습에을 델리나는 잠시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석이가 왜 젠 앞에서 유독 얌전한지 알겠네.’

젠과 함께 있으면 사냥은커녕 왠지 불쌍해서 동물 풀어 주기만 하고서 끝날 듯싶었다.

혼자가 된 델리나는 조용히 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했다. 작은 동물들은 몰라도 커다란 동물들을 상대로 쓰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델리나는 그동안 연습했던 것을 떠올리며 총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쯤에 있다고 했더라?’

델리나는 품에 있던 지도를 꺼내 들었다. 숲에 들어오기 전에 어느 가문이 어디쯤에서 사냥을 하는지 미리 펠릭에게 들어 두었던 델리나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그런데 그때 델리나의 건너편에 있던 수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델리나가 빠르게 수풀 방향으로 총을 겨눴다. 그러자 수풀이 다시 흔들리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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